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9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기리노 나쓰오”의 유명 시리즈라는 하드보일드 여탐정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본편이 아닌 외전(外傳) <물의 잠 재의 꿈>부터 만났다. 미로의 의붓아버지인 “무라노 젠조”, 일명 “무라젠”의 젊은 시절을 그린 이 작품은 명탐정의 과장된 추리 솜씨나 억지스러운 반전이 아닌 탐문 수사를 통해 하나하나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이 상당히 생동감 있고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어 기존 일본 추리소설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재미와 몰입감을 느낄 수 있었던 꽤나 인상적인 작품이었는데, 외전이 이 정도 재미를 보여준다면 본편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당연히 들었다. 다행히 미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 첫 번째 작품은 <얼굴에 흩날리는 비(비채/2010년 8월)> - 인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원제 天使に見捨てられた夜 / 비채 / 2011년 5월)>을 외전에 이어 바로 읽을 수 있게 되서 그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다 읽고 나니 무라노 미로 시리즈가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도쿄 신주쿠 2초메(丁目)에서 사립 탐정으로 활약하고 있는 “무라노 미로”에게 ‘성인비디오 인권을 생각하는 모임’의 활동가 “와타나베 후사에”가 의뢰를 해온다. 바로 "울트라 레이프 이제 나도 자기 부정”이라는 제목의 성인비디오(Adult Video; AV)에서 다수의 남자들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을 찍은 “잇시키 리나”라는 여배우를 만나 인권 침해 사실을 조사하고 싶으니 찾아달라는 의뢰이다. “못 찾는다 거절해” 라는 말이 머릿 속에서 소용돌이치지만 아버지(무라노 젠조)의 오랜 동료인 “다와다” 변호사의 소개인지라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계약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미로의 예상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AV 제작사에 조사를 나갔다가 강간당할 뻔한 위험천만한 일이 일어나고, “죽고 싶냐”라는 전화와 함께 자신의 집 앞에 죽은 동물의 사체가 놓여져 있는 협박을 당하자 신변에 위험을 느낀 미로는 급기야 따로 살고 있던 아버지 “무라노 젠조”에게 도움을 청하고, 옆 집에 살고 있는 게이 청년 “도모”의 협조를 받아 조사를 계속 진행하지만 리나의 소재는 갈수록 오리무중이고 계약했던 2주의 기간도 훌쩍 넘어가 버린다. 새로운 후원자가 나서면서 계약은 연장되는데 리나를 만나러 간 와타나베가 갑작스레 죽으면서 사건은 일대 전환을 맞이한다. 새로운 후원자와 다시 계약하게 된 미로는 리나가 가지고 있던 “빗방울 화석”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를 벌이면서 드디어 리나를 찾는 실마리를 발견하고 마침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리나를 찾아가는데, 거기서 전혀 의외의 진상과 마주치게 된다.

보통 여자 탐정하면 미스코리아 뺨치는 매혹적인 외모에 남자 서 너 명은 손쉽게 때려 눕히고 여성 특유의 세심함과 날카로움으로 트릭의 허점과 사건의 진상을 단숨에 간파해내는 그런 모습 - 예를 들자면 홍콩영화 “예스마담”이나 “007” 시리즈의 “본드걸” - 을 연상하기 쉬운데 이 책의 주인공 “무라노 미로”는 거친 남자들에게 협박을 당하고 사건 조사에서도 여러 난관에 부딪히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런 여인이다. 또한 냉소적이긴 하지만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아버지 “무라젠”과는 달리 감정 기복도 심한데, 자신을 강간하려는 상황을 연출했던 제작사 사장과 위험한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이웃집 게이 청년 “도모”에게 이성적인 사랑이 싹트지만 그럴 수 없기에 상처받기도 하며,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낸다는 것에 심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결국 병원에서 만나게 된 리나에게 자신도 돈에 쪼들리면서도 사례금으로 받은 100만 엔이나 되는 거금을 선뜻 주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뭔가 큰일이 터질 것 같은 예감 때문에 조마조마하기까지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점이 작위(作爲)적이지 않은 생생한 “사실감”을 느끼게 한다. 이 책도 별다른 트릭이나 반전이 등장하지 않아 전작처럼 심심하다고 느낄 독자들도 있겠지만, 1인칭 시점의 미로가 탐문 수사를 통해 사건의 단서들을 하나 하나 끌어 모아 결국 사건의 얼개를 완성해내는 과정이 마치 미로와 동행하면서 함께 지켜보고 조사하는 것과 같은 감정이입마저 느낄 수 있어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드는 강력한 재미와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 책에서 주인공 “미로” 외에도 매력적인 등장인물이 여럿 등장하는 데 역시 미로의 아버지 “무라노 젠조”를 먼저 꼽을 수 있겠다. “무라노 미로” 시리즈에 조연(助演)으로 등장한다고 하니 언제쯤 나오나 싶어 기대하고 있었는데 미로의 요청을 받아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는 무라젠의 무뚝뚝하고 냉소적인 모습을 다시 만나니 반가움마저 들었다. 미로의 곁에서 사건의 마무리를 함께 하면 좋았을 것을 몇몇 조사에 참여하고 몇 가지 조언을 남기고는 다시 돌아가 버리는데 역시나 이 책은 “미로 시리즈”이지 “무라젠 시리즈”가 아니었음을 확인케 하는, 그래서 별도의 “무라젠 시리즈”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해지는 그런 아쉬움이 느껴졌다. 두 번째 인물은 바로 미로의 옆 집에 살고 있는 게이 청년 “도모”를 꼽을 수 있겠다. 미로와는 남녀간의 “이성애(異性愛)”가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숭고한 사랑이라는 “이웃애”를 나누는 이 청년, 외로워하는 미로를 보듬어 줄 만도 한데 자신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내는, 미로 입장에서는 조금은 야속한 그런 남자라고 할 수 도 있겠다. 그래도 비록 육체적인 사랑은 아니어도 정신적으로는 그녀를 감싸 앉는, 성별을 떠나 동료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모두 미로를 지켜주고 보호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그만큼 미로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위태위태하고 조마조마했기 때문이었을까? 다른 미로 시리즈에 도모가 등장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미로와 도모, 콤비로 활약해도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을 그런 관계다. 물론 그의 성적 소수성은 개인적으로는 내키지는 않지만 말이다. 

또한 인상적인 장면을 꼽아보자면 우선 AV 제작사에서 미로가 강간당할 뻔한 장면이 떠오른다. 급박한 상황 임에도 카메라를 향해 자신의 상황을 당차게 알리는, 미로가 그저 연약한 여자가 아닌 “강단(剛斷)”있는 여자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그렇게 자신을 위험한 상황 - 물론 실제로 그러려는 것은 아니고 미로를 겁주려고 연출한 상황이지만 - 에 빠뜨리는 제작사 사장과 여러 차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그 사람을 다시 마주친다면 가슴이 철렁하고 끔찍한 느낌만 들 텐 데 그와 그렇게 쉽게 사랑을 나눌 수 있다니, 요새 “나쁜 남자” 신드롬이 유행하고 있다고 하니 미로가 그에게서 위험하지만 끌릴 수 밖에 없는 “매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라 여기려 해도,  또는 리나를 찾기 위한 결정적인 실마리를 쥐고 있는 사람, 즉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 이해가 되지 않은 그런 장면이었다. 역시 남자인 내가 모르는, 여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무언가가 있었을까? 두 번째 장면은 죽은 “와타나베”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장면이었다. 리나가 자신을 찾는다는 미로에게 한 일종의 “장난전화”인 셈인데 공포에 떨었던 미로처럼 나도 절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외에도 리나을 만나기 위해 간 병원 복도에서 만난 마지막 "반전"도 인상적인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소개는 생략하기로 한다^^ 

두서없이 책 내용을 소개하다 보니 역시 장황한 감상이 되고 말았다. 이런 저런 얘기 다 빼고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 책 참 “재미있다”. 현실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초능력” 탐정이 등장하고, 수학 공식처럼 틀에 박힌 스토리와 억지스러운 반전에 식상한 분들이라면 오히려 “무라노 미로” 식의 현실적인 모습과 활약에 신선함을 느낄 것이다. “무라노 미로” 시리즈는 앞서 얘기한 <얼굴에 흩날리는 비>와 시리즈의 완결편이라는 <다크>, 이 책, 이렇게 3권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는데 그녀의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출간되어 주길 기대해보며, 작가가 “무라젠” 시리즈도 집필해 주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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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도서관
조란 지브코비치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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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에서는 10분만 지나면 빨리 가자고 성화를 부리지만, 도서관에서만큼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염없이 머물게 된다.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이 소곤소곤 들려주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거부하기 힘든 치명적인 유혹으로까지 느껴지는, 그래서 도서관은 어른이 된 지금도 신비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한 그런 장소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책이 주는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나는 그런 도서관이 실재한다면 어떨까?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서 등장하는 여느 고대 유적보다도, 최첨단 시설을 갖춘 현대의 여느 놀이 공원보다도 더한 재미와 스릴, 그리고 신비로운 그런 모험이 될 것이다.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는 데 탁월한 기량을 보여 라틴 문학계의 거장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인터넷을 검색해봤더니 환상적 사실주의에 기반한 단편들로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전혀 생소한 작가다 - 를 잇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는 “조란 지브코비치”의 <환상도서관(원제 THE LIBRARY / 북폴리오 / 2011년 6월)>은 바로 기묘하고 신비로운 “도서관”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책에는 6개의 신비로운 도서관이 등장한다. 작가는 세상의 모든 책이 다 전자 문서화 되어 있는, 심지어 미래에 집필하게 될 책들과 작가의 사망 예상 연도까지 예언하는 도서관(<가상 도서관>)을 첫번째로 선보인다. 그리고 두 번 째로 우편함을 열면 하드커버의 책이 꽂혀 있는, 그런데 그 책을 꺼내고 나면 다시 꽂혀 있는, 무한 반복되는 책들로 결국 집을 가득 채운 이야기(<집안 도서관>)를 소개하고, 이어 관람시간이 끝나버린 도서관, 그 곳에 천 억 여 명이 넘는 과거와 현재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비치되어 있는 또 다른 도서관이 있다는 이야기(<야간도서관>)를 들려준다. 무한의 시간동안 책 읽는 형벌을 받게 된다는, 또한 책 안 읽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형벌보다도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벌이 될 도서관(<지옥 도서관>), 페이지를 펼칠 때 마다 새로운 책이 나오는, 복사(複寫)도 할 수 없는 기이한 책(<초소형 도서관>), 고급스러운 책 들 사이에 꽂혀 있는 페이퍼 북이 영 눈에 가시처럼 걸려 버리지만 어느새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 물에 빠뜨리고, 불에 태워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나타나는 그 책을 결국 먹어서 없애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위대한 도서관>)를 차례대로 들려준다.  

여섯 편 모두 기이하면서도 신비로운 도서관 - 물론 장소로서의 도서관이 아닌 “책”을 의미하고 있는 작품들도 있지만 - 을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환상성(幻想性)”이라는 판타지 소설의 전형적인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도서관들은 현실에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가상의 시간과 공간에서나 있을 법한 그런 곳(또는 책)이다. 그 도서관을 만나는 등장인물들의 반응과 행동도 다 제각각인데, 인터넷 가상 도서관에서 자신의 작품을 발견한 작가는 좀 더 사이트를 둘러 봐도 될 것을 사이트 운영자에게 메일을 보내 저작권에 위배된다고 항의나 해대고, 한 남자는 어떤 내용의 책인지, 도대체 우편함에서 왜 책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자신의 집을 책으로 가득 채운다. 지금까지 모든 인류의 기록이 보관되어 있는 신비의 도서관에 방문한 남자는 그저 자신의 기록만 확인하고는 문이 닫혀 나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만 걱정해서 서둘러 나와 버리고, 책을 열 때마다 새로운 책이 나오는 “만능책”을 발견하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한 남자와 그렇게 없애려고 해도 다시 나타나는 책을 결국 먹어치우는 남자 또한 “보물”을 손에 쥐고도 그 가치를 몰랐던 앞선 사람들처럼 똑똑함과는 영 거리가 먼, 심지어 미련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작가는 신기루처럼 금세 사라져 버리는 “환상성”을 통해서 바로 사람들의 욕망이 그만큼 허망하고 부질없음을 조롱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단편 중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지옥도서관>이었는데, 책 읽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무한의 시간 동안 책을 읽는 형벌을 내린다는 설정이 참 기발하고 재미있었다. 책이라면 벌레보다도 싫다는, 교과서를 빼고 평생 읽은 책이 한 권도 없다고 자랑(?)하는 사촌 동생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것 같다. 그럼 조금이라도 겁나서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을까? 전혀 가능성은 안보이지만^^ 

관람시간이 끝나 불 꺼진 도서관, 지레 포기하지 말고 문을 가만히 밀어보라. 잠겨 있지 않고 열려 있다면 열람실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라. 까마득한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인류의 삶이 기록된 비밀의 도서관을 만날 지도 모르니까. 만나게 된다면 갇힐까 두려워 허겁지겁 나와 버린 이 책의 어느 남자처럼 제발 서둘러 나오지 말고, 사서가 문은 절대로 안 잠근다니 갇힐 염려는 붙들어 매고, 차근차근 읽어 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 책에 담겨 있는 비밀들을 나에게 들려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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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이, 블랙버드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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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가장 촉망받는 차세대 작가로 일컬어진다는 “이사카 고타로”, 읽은 작품을 꼽아 보니 <사신 치바>, <종말의 바보>, <골든 슬럼버> 이렇게 세 권이었다. 세 작품 모두 장르가 다른데, <사신 치바>가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면 <종말의 바보>는 “지구 종말”을 3년 앞둔 사람들의 이야기로 SF와 휴머니즘이 결합한 소설이라고 볼 수 있고, 일본 총리 암살 사건에 휘말린 한 남자의 탈주기를 다룬 <골든 슬럼버>는 액션 스릴러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소설들에 대한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가볍되 무거운’이라고 한단다. 영화와 소설에 바탕을 둔, 요즘 세대들에게 ‘먹히는’ 유머와 군더더기 없는 단문을 선호하는 스타일이나 미스터리적 구성을 선호하는 면은 분명 가볍지만 주제는 의외로 묵직한 중량감을 자랑하고 있어 이렇게 정의한다고 하는데, 앞서 읽은 3권 모두 뛰어난 가독성과 몰입감, 재미 뿐만 아니라 잔잔한 감동까지 느꼈었던 지라 참 적절한 평가라고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어떤 것을 읽어도 평균 이상의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읽은 그의 신작 <바이바이 블랙버드(원제 バイバイ,ブラックバ-ド /랜덤하우스코리아/2011년 6월)>도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평범한 청년 “호시노 가즈히코”, 연애에 있어서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런 청년이다. 양다리도 아니고 무려 다섯 명의 여성과 동시에 연애하고 있으니 말이다. 모든 여성들에게는 “공공의 적”이겠지만 남성들에게는 하염없이 부러움을 받을 이 청년, 빚에 쪼들려 사채를 썼다가 그만 갚지 못해 2주 후에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야 할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이 청년, “사채 회사”에 그동안 사귀었던 다섯 명의 애인들에게 이별을 고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고, 흥미를 느낀 회사는 흔쾌히 허락한다. 단 도주의 염려가 있으니 한 사람을 동행하라는 조건을 단다. 바로 180 cm의 키에 180 kg나 나가는 “마유미”라는 여성을 말이다. 이렇게 해서 기묘한 이별 통보식이 시작된다. 마유미와 결혼하기로 해서 이별을 통보하러 왔다는 그에게 다섯 명의 애인들은 첫마디가 그들과 처음 만나게 된 사건들 또한 거짓말이었냐고 물어온다. 처음 만나러 갔을 때 이야기 만큼은 진실이라고 강변하는 그의 말을 좀처럼 믿지 않는 그녀들이지만 대체적으로 이별 통보를 쿨(Cool) - 마지막으로 찾아간 유명 여배우 애인은 이별을 거부하지만 - 하게 받아들인다. 그냥 이별만 통보하고 끝냈으면 좋았을 것을 이 친구, 오지랖 꽤나 넓다 - 그래서 여러 여인들을 애인으로 두고 있는 것이겠지만 -. 이별 조건으로 먹기 시작한 “점보 라면”- 세숫 대야만큼 커다란 그릇에 가득 담겨진, 다 먹으면 공짜, 못 먹으면 비싼 돈을 치러야 하는 라면. 종종 음식 프로그램에 나오는 바로 그런 라면이다 - , 온 몸이 라면으로 가득찬 것 같다면서도 옆 좌석에서 애인과 영화 보러 가는 조건으로 먹고 있는 남자의 라면을 거들지 않나, 애 딸린 이혼녀에게는 선물하고 싶었는데 못 했다는 명품 백을 선물하고,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와 인사하고 싶다는 그녀의 아들을 위해 명함을 제작해서 선물하기도 하고, 로프를 타고 남의 집에 침입(?)하려는 애인을 위해 그 집에 가서 대기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녀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도움까지 주면서 모든 이별 통보를 마친 호시노, 드디어 “그 버스”에 오른다. 그런데 괴물같기만 하던 마유미도 그에게 반한 걸까?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빼앗은 마유미, 시동이 잘 걸리지 않자 “열번만”이라고 말하며 시동을 계속 건다. 

미워할 래야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바람둥이” 호시노 가즈히코, 비록 애인은 다섯 명이나 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캐릭터 설정이 참 독특하면서도 재미있다. 이런 류의 인물을 다른 소설에서도 만난 적이 있는데, 바로 “김용(金鏞)”의 무협 소설 <천룡팔부(天龍八部)>에 등장하는 천하의 바람둥이 “대리국왕”이다. 중국 전역에 애인을 두고 연애 여행을 다니는 이 남자도 자신을 비난하는 여인에게 “당신을 만났을 때는 다른 여인들을 떠올린 적이 한번도 없었고 당신만을 진실로 사랑했다”라고 변명하는데, 그저 성적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각 애인들을 만날 때만큼은 몸과 마음을 바쳐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그런 말이다. 역시 같은 말을 하는 호시노, 바람둥이 말 하나도 믿을 것 못된다고 하지만 그런 그의 진정성을 아는 여성들은 이별을 받아들이고, 이별을 했으면서도 그녀들에게 뭔가 도움을 주려고 동분서주하는 호시노의 모습이 재미 뿐만 아니라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며, 마음 한 켠으로는 나도 저런 연애해보고 싶다는 부러움(?)까지 들게 한다. “연예인처럼 아주 멋진 건 아니라서 모두가 환호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어쩐지 끌리는, 천진난만하며 모든 행동에 계산이 없는” 그런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 그대로인, 여느 소설에서 만나기 힘든 흔하지 않은 매력을 가진 성공적인 캐릭터라고 평가하고 싶다. 다만 작가는 “불합리한 이별이지만, 억지로 웃고 바이바이, 라고 말해버리는, 그러한 이야기가 쓰고 싶었다.”고 말하는 데 억지스러움보다는 기발함과 재미만 느꼈으니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 이런 이해 부족이라면 기분 좋게 웃어 넘길 수 있는 유쾌하고 즐거운 것이 될 것 같다.

다 읽고 나서도 계속 궁금함으로 남아 있는 건 바로 마지막에 호시노가 타게 되는 “그 버스” 이다. 작가는 호시노와 마유미와의 대화를 통해 몇 번 언급은 하지만 “그 버스”를 타면 어디로 가는지, 그 “어디”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겪는지 - 장기 밀매 또는 강제 노동 등 여러 가지가 생각나지만 -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는다. 그래서 인터넷 서점에 올라와 있는 작가 인터뷰 글도 찾아 봤지만 “그 버스”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가 없다. 일본에서 발간되었다는 ‘바이바이, 블랙버드 참고서’ 격의 책이라는<‘바이바이, 블랙버드’를 즐기는 법>에는 “그 버스”의 정체를 언급하고 있을까? 이 책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열혈 팬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다자이의 작품을 읽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켜왔지만 결국 속편격인 <바이바이, 블랙버드>를 쓰게 만들었다는 다자이 오사무의 미완성작 <굿바이> 전문을 수록하고 있다니 이 책 또한 국내에 출간되기를 바래본다. 

읽는 내내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은 “재미있다”라는 생각을 “확신”으로 바꿔 준, 그리고 그런 확신이 앞으로도 계속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게 한 작품이었다. 이미 여러 작품들이 출간되어 있고, 이제 40대에 접어든 작가이니 앞으로도 많은 작품들을 선보일 것 같은데 그런 확신을 결코 져버리지 않는 멋진 작품들이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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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초간
데이비드 폴레이 지음, 신예경 옮김 / 알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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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갈수록 인간관계에 있어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성격이 남들과 싸우는 걸 싫어해서 다툼이 일어날라 치면 자리를 먼저 피하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것도 있어 맞닥뜨려야 할 상황도 종종 발생한다. 대부분은 참고 넘어가지만 정말 어떤 때는 말도 안되는 억지 주장과 사람을 비꼬는 인신공격에 울컥해서 대판 싸우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고 나서는 아무리 화가 나도 내가 좀 참을 걸 하며 후회를 하곤 한다. “참을 인(忍)자 석자면 살인(殺人)도 면한다”고 하지만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아닌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게 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다툼을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 어떤 묘수(妙手)는 없을까? 인기 칼럼니스트이자 연설가, 세미나지도자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데이비드 폴레이(David J. Pollay)”는 그의 저서 <3초간:눈 깜짝할 사이에 분노와 짜증을 잠재우는 감정조절의 원리(원제 The Law of the Garbage Truck /알키/2011년 5월)>에서 딱 “3초”만 참아낼 수 있다면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내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제안한다. 

작가는 <들어가는 글>에서 남이 나에게 쏟아내는 무심하고, 짜증나고, 분노 섞인 말들을 씨익 웃어넘기며 깔끔하게 무시해버리는 방법을 말해주고 싶다고 말하며 이 책은 우리들이 언젠가 만날지도 모를 온갖 어려운 상황에 대비한 맞춤 답안을 제시하는 “백과사전”은 아니지만 평생 동안 활용할 수 있는 인생지침인 "3초 법칙"을 알려줄 것이며, 이 지침을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유일한 지침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일러주는 하나의 나침반으로 인식하고 활용한다면 대단히 유용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다음장을 펼쳐보니 먼저 <마음 근육 테스트>가 나온다. <1. 당신은 타인의 분노, 화, 짜증에 얼마나 휘둘리는가?>, <2. 당신은 타인에게 분노, 화, 짜증을 얼마나 쏟아내는가?> 두 가지로 나누어 각 문항에 대한 답의 정도에 따라 점수를 매겨 합산하는 형식인데 이 테스트를 해보니 나는 “타인의 감정 공격을 그런대로 잘 막아내고”는 있지만 “타인의 감정에 신경 쓰는 사람”이라고 결과가 나온다. 둘 다 정상치보다는 한 단계 높은 수위다. 3초 법칙을 배워 타인과 소통을 잘하기 위한 기본 토대를 마련하고, 감정을 표현해야 할 때와 참아야 할 때를 구분하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는 충고를 읽고서는 바로 본문에 들어갔다. 

작가는 먼저 20년 전 택시를 타고 가던 중 사고가 날 뻔 한 아찔한 경험이 계기가 되어 “3초 법칙”이 탄생했다고 그 유례를 소개한다. 갑작스레 끼어 들었으면서도 먼저 화를 내는 앞 차의 운전자에게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손을 흔들어보였던 택시운전사는 의아해하는 작가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감, 분노, 짜증, 우울함 같은 쓰레기 감정을 가득 담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쏟아버릴 때가 있으니 누군가가 얼토당토않게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리더라도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고 그냥 미소를 지은 채 손을 흔들어주고는 다른 일로 주의를 돌리면 전보다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이 바로 작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3초 법칙”을 만들어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3초 법칙”이란 무엇일까? 마음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몰아내는 3단계로 작가는 첫 번째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두 번째 미소를 지은 다음, 세 번째 다른 일로 주의를 돌리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계가 바로 첫 단계를 잘 이행하느냐 못하느냐 인데 이 1단계를 실행하는 데 약 3초의 시간이 소요되며, 그래서 “3초 법칙”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3초 법칙의 핵심은 '성질부리는 상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는 게 아니라, 즉 분석하지도 심사숙고하지도 토론하지도 곱씹지도 말고 그저 철저히 무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언뜻 들으면 미련하게 꾹 참으라는 말로도, 또는 그냥 “X무시” 하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작가는 사회생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례들을 예로 들면서 3초 법칙 실행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중 두 가지만 예로 들어 보자. 

사사건건 나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팀장을 상사로 모시고 있다면 어떨까? 하루에도 열 두 번도 더 때려치고 싶겠지만 작가는 바로 맞상대하지 말고 먼저 “자존감노트”를 만들어 보라고 말한다. 자신의 장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적고, 또한 감정공격을 하는 상대가 주로 나의 어떤 면을 꼬집는지 생각하여, 그 부분에서의 내 감정을 적어 소지하고 다니면서 나를 지켜주는 주문처럼 외우라는 충고다. 그리고 상사에게 처음 감정 공격을 받았을 때는 첫 3초간 "그의 말이 맞나"를 먼저 생각해서, 자기가 잘못한 게 있다는 생각이 들면 곧바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2단계인 미소 짓기로 넘어가라고 말한다. 이후 상대의 감정 공격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때에는 첫 3초간 앞서 준비했던 자존감 노트의 내용을 떠올려 이겨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구제불능 수준으로 끊임없이 신경을 건드리고 상처를 주는, 그저 무시해 버리기에는 너무 사태가 심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대처할까? 작가는 먼저 그 사람이 언제 조금이라도 부드러워지는 지 관찰해보라고 말한다. 상대의 마음이 풀어진 순간을 잘 포착하여 그때 진지한 대화를 나눠 보는데, 단 그 사람에 대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그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그의 장점이 무엇인지 등 긍정적인 느낌에 대해 말하라는 것이다. 나의 칭찬을 들은 후 상대가 나타내는 반응에 따라 좀 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평소 나에게 나쁘게 대했던 부분에 대해 먼저 인정을 하고 사과를 한다면 이것을 받아들여 그에 대해 바라는 점을 말하고, 상대가 요새 본인이 좀 힘들다며 속마음을 이야기한다면 충분히 이해해 주는 한편 내가 언제나 그의 지지자라는 점을 확실히 해주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다.  여기서 “3초 법칙”의 방법은 3초간 '지금 내가 이 말을 한다고 해서 먹힐까?'를 고민해 본 후 상대가 기분이 좋아 보이면 괜찮은 징조이니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상대 표정이 어둡거나 바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으면 다른 타이밍을 노리기로 마음먹고 2단계 미소 짓기로 넘어 가라는 것이다. 역시 첫 “3초”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외에도 <나쁜 사람은 아닌데 무능하니까 답답하네요>, <너무 무기력한 사람이라 저까지 힘이 빠집니다>, <이 일을 극복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러면 그렇지, 소문은 틀린 적이 없어요>, <제가 너무 불평이 심하다네요> 등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하여 작가가 직접 상담한 실제 사례들을 곁들여 쉽고 재미있게 대처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작가는 “3초” 법칙이라고 명명하고 있지만 우리도 이와 유사한 방법을 익히 알고 있는데, 예를 들어 화가 치밀어 오르면 심호흡을 길게 세 번 하라던가, 소나기는 피하고 보는 법이라고 잠시 그 자리를 피하고 감정 정리가 되고 난 후 차분히 대화해보라는 어른들의 충고, 또는 학창시절 종종 애용(?)했던 선생님 말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내기 신공(神功) - 종종 부작용으로 매를 맞기도 했지만 - 등등이 어쩌면 일맥상통하는 방법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상대방이 심한 비난과 감정 공격을 해오더라도 즉각 반응하지 말고 잠시라도 말미 - 여기서는 3초 - 를 두어 지금 상황을 판단해보고 난 후 이야기가 되는 상대라면 문제해결을 위해 대화에 나서야겠지만 그렇지 않은 막무가내인 상대라면 바로 미소를 보여주고,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라는, 즉 “무시(無視)”해버리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렇게 한다면 싸움은 일어나지 않을 수 도 있겠지만, 가끔은 내 웃음과 화제 바꿈이 상대방을 자극 - “내 말이 웃겨?”라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주먹질을 해댈 수 도 있다 - 해 큰 싸움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설사 싸움이 나지 않더라도 구겨져 버린 내 자존심 - 그걸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이 저 친구 자존심도 없구만 하고 무시하는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 은 어디서 회복해야 할 지 좀 난감할 수 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3초 법칙을 시행하기 전에 미리 고려해야 하는 것들, 즉 “자존감 노트”나 대화의 “타이밍”을 잡는 방법, 내 앞에 떨어진 고통이 지상 최대의 크기로 보이더라도 실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되뇌면서 남들도 나만큼 힘들다고 생각하라든가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편견을 심어줄 수 있는 뉘앙스의 대화는 시작도 하지 마라는 충고들은 비록 뻔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 번 쯤 귀담아 들을 만한 충고로 여겨진다.  

이런 “자기계발류” 서적들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옳은 말들만 씌여 있어 흠잡을 만한 곳이 없는, 말 그대로 “교훈” 적인 책이지만 읽는 사람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공염불(空念佛)”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갈수록 지쳐가고 짜증만 나는 인간관계, 이 책에서 일러주는 것처럼 딱 “3초”만 더 생각해보고 행동하면 어떨까? 여기에 공감할 수 있다면 이 책, "공염불"로 끝나지 않는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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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잠 재의 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0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추리소설을 읽다 보면 참 다양한 “탐정(探偵)”을 만나볼 수 있는데, 그 분류법도 직업별, 전문분야별, 추리 방법별 등으로 보는 관점에 따라 각양각색임을 알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분류가 현장을 뛰어다니지 않고 보고서나 수집된 증거를 면밀히 분석하고 검토하여 단서를 찾아내는 '안락의자형 탐정'과 이와 반대로 탐정이 직접 수사 현장에 뛰어들어 용의자들과 주변인물에 대해 탐문(探問)수사와 증거 수집을 벌이고, 때로는 폭력과 살인까지 불사하는 행동파 탐정, 즉 “하드보일드(Hard-boiled)" 탐정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대표 주자를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큘 포와로”와 “미스 마플”을 들 수 있다면, 후자는 하드보일드 탐정의 기본틀을 제공했다고 알려진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적(靜的)·동적(動的)인 모습에 따라 이런 분류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만은 아니어서 명탐정의 대명사인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의 경우 뛰어난 “관찰력(觀察力)”과 가히 초능력에 가까운 “직관력(直觀力)”, 즉 천재적인 두뇌솜씨를 번뜩이는 “안락의자형”의 전형을 보여주면서도 때로는 프로 선수 못지 않은 권투 솜씨와 검도로 범죄자와 일대 격투를 벌이는 “행동파” 모습을 보여주는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추리소설 매니아를 자처하고 있지만 안락의자형 탐정을 더 선호하는 터라 하드보일드 탐정물은 접해본 경험이 없었는데, 이번에 비로소 일본 하드보일드 소설 대표 작가라 할 수 있는 “기리노 나쓰오”의 <물의 잠 재의 꿈(원제 水の眠り灰の夢/비채/2011년 5월)>을 읽게 되었다. “‘미로 시리즈’를 논외로 일본 하드보일드를 논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작가의 대표적 시리즈물인 “미로 시리즈”의 번외편이라는 이 작품 한 편을 읽고서 하드보일드 소설이 어떻다고 이야기할 수 는 없겠지만 기대했던 것 이상의 재미를 안겨준 멋진 작품이었다. 

올림픽을 한 해 앞두고 있는 1963년 9월 도쿄, <주간 담론>에 근무하고 있는 특종 전문 기자 - 스캔들을 파헤치거나 특종을 잡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고, 때에 따라서는 남의 약점을 잡아 협박까지 하는 악랄한 작자들로 오해를 받아 “특종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무라젠”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는 “무라노 젠조”는 저녁 8시 외근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여러 건의 폭탄 테러를 일으켰던 “소카 지로”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폭발 사건을 목격하고 소카 지로 사건을 심층 취재하기로 결심한다. 소카 지로에 대한 취재를 진행하던 중 가출한 아들인 “다쿠야”을 데려와 달라는 친 형의 부탁을 받은 무라젠은 유명 인사 저택에서 벌어진 파티장에서 조카를 데려 나오다가 조카의 부탁으로 “다키”라는 여학생을 집까지 데려다 주지만 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모습에 다키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다 놓고 자신은 같은 잡지사에 다니는 동료이자 친구인 “고토”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다키는 이미 집을 떠나고 없었고, 무라젠은 그녀에 대한 신경을 끊고 다시 업무에 매진한다. 며칠 후 다키가 시체로 발견되고, 무라젠은 살인 용의자로 경찰에 연행되지만 친구 고토가 자신의 윗선을 통해 경찰에 압력을 가하여 무라젠은 풀려나게 된다. 이 사건 때문에 결국 <주간 담론>에서 물러나게 된 무라젠은 취재 중이었던 “소카 지로 폭탄 테러 사건”을 계속 조사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다키 살인 사건”을 직접 조사하기 시작한다. 무라젠은 주변인들 탐문 수사와 정보원을 통한 정보 수집을 벌이지만 사건의 실체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데, 취재 도중 절친한 친구인 “고토”가 죽게 되면서 비로소 사건은 급진전하게 되고, 야쿠자 조직과 연계된 일명 “인형놀이”라고 불리우는 유명 인사들의 소녀 매춘의 내막과 다키 가족들 사이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되면서 마침내 다키 살인사건의 진범과 실제로는 영구미제(永久未濟)로 남게 되는 “소카 지로”의 정체를 밝혀낸다.
 

앞에서 언급한 작가의 시리즈의 여주인공인 “무라야 미로”의 의붓아버지이자 몇 몇 작품에도 등장했다는 “무라노 젠조”의 젊은 시절과 그가 미로의 의붓아버지가 된 사연을 밝히고 있어 일종의 “미로 시리즈”의 외전(外傳)격인 이 작품은 시리즈를 접해본 독자들에게는 참 반가웠을 작품인데, 아쉽게도 시리즈를 접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런 반가움은 느껴보지 못했다. 그러나 전문 사설 탐정이 아닌 특종 기자로서 끈질긴 탐문 조사를 벌이고 위험을 무릎쓰고 야쿠자가 운영하는 술집을 드나들며, “인형놀이” - 소녀를 수면제를 먹여 의식을 잃게 한 후 매춘을 하게 해서 이렇게 불리운다 - 를 규명하기 위해 위험한 함정 조사까지 벌이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펼쳐지는 무라젠의 활약상은 잡지사에서 물러나 백수 신세가 된 무라젠에 대해 야쿠자 조사원을 제안했던 간부가 평가한, 즉 제법 “패기”가 있고 “행동력”과 “두뇌” 모두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사람이라는 평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만든다.  사실 추리소설의 재미인 절묘한 트릭이나 기막힌 반전 - 마지막 대목에서 소카 지로의 정체를 밝혀내는 장면은 의외성은 느낄 수 있을 뿐 반전이라고 하기에는 좀 약하다 - 은 없어 이야기 전개가 밋밋하다고 느낄 수 도 있지만 명탐정의 과장된 추리 솜씨나 억지스러운 반전이 아니라 탐문 수사를 통해 하나하나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이 상당히 생동감있고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고 그러한 현실성이 주는 재미 또한 상당해서 500 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 부담스럽다는 느낌을 전혀 느낄 수 없도록 강하게 몰입하게 만든다.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여탐정 “무라야 미로”야 작가가 여성이다 보니 캐릭터 설정이나 심리 묘사가 수월했겠지만 냉소적이다가도 열혈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남자 캐릭터 “무라젠”의 모습에서 전혀 여성 작가의 시선이나 경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에도가와 란포 상을 비롯하여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고 평단에 주목을 받았다는 작가 소개글이 결코 허명(虛名)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사건 이후의 무라젠의 활약상을 계속 읽어보고 싶어 이 작품이 일회성으로 끝나는지 아니면 별도 시리즈로 이어지는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가 없어 아쉬웠다.

그동안 많은 일본 작가들의 다양한 추리소설을 읽어왔는데, 기존 작품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즐거움과 재미를 선사하는 “기리노 나쓰오”, 앞으로도 꽤나 자주 만나게 될 그런 작가가 될 성 싶다. 그래서 이 책과 함께 출간된, 이 책에 이어 바로 읽을 예정인 “미로 시리즈”, <천사에게 버림받은 잠>에 대한 기대가 더욱 큰 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선보이는 본격 일본 “하드보일드”의 재미와 매력을 담고 있을 저 책을 다 읽을 때까지는 다른 책은 잠시 멀리해야 할 것 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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