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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9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기리노 나쓰오”의 유명 시리즈라는 하드보일드 여탐정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본편이 아닌 외전(外傳) <물의 잠 재의 꿈>부터 만났다. 미로의 의붓아버지인 “무라노 젠조”, 일명 “무라젠”의 젊은 시절을 그린 이 작품은 명탐정의 과장된 추리 솜씨나 억지스러운 반전이 아닌 탐문 수사를 통해 하나하나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이 상당히 생동감 있고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어 기존 일본 추리소설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재미와 몰입감을 느낄 수 있었던 꽤나 인상적인 작품이었는데, 외전이 이 정도 재미를 보여준다면 본편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당연히 들었다. 다행히 미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 첫 번째 작품은 <얼굴에 흩날리는 비(비채/2010년 8월)> - 인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원제 天使に見捨てられた夜 / 비채 / 2011년 5월)>을 외전에 이어 바로 읽을 수 있게 되서 그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다 읽고 나니 무라노 미로 시리즈가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도쿄 신주쿠 2초메(丁目)에서 사립 탐정으로 활약하고 있는 “무라노 미로”에게 ‘성인비디오 인권을 생각하는 모임’의 활동가 “와타나베 후사에”가 의뢰를 해온다. 바로 "울트라 레이프 이제 나도 자기 부정”이라는 제목의 성인비디오(Adult Video; AV)에서 다수의 남자들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을 찍은 “잇시키 리나”라는 여배우를 만나 인권 침해 사실을 조사하고 싶으니 찾아달라는 의뢰이다. “못 찾는다 거절해” 라는 말이 머릿 속에서 소용돌이치지만 아버지(무라노 젠조)의 오랜 동료인 “다와다” 변호사의 소개인지라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계약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미로의 예상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AV 제작사에 조사를 나갔다가 강간당할 뻔한 위험천만한 일이 일어나고, “죽고 싶냐”라는 전화와 함께 자신의 집 앞에 죽은 동물의 사체가 놓여져 있는 협박을 당하자 신변에 위험을 느낀 미로는 급기야 따로 살고 있던 아버지 “무라노 젠조”에게 도움을 청하고, 옆 집에 살고 있는 게이 청년 “도모”의 협조를 받아 조사를 계속 진행하지만 리나의 소재는 갈수록 오리무중이고 계약했던 2주의 기간도 훌쩍 넘어가 버린다. 새로운 후원자가 나서면서 계약은 연장되는데 리나를 만나러 간 와타나베가 갑작스레 죽으면서 사건은 일대 전환을 맞이한다. 새로운 후원자와 다시 계약하게 된 미로는 리나가 가지고 있던 “빗방울 화석”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를 벌이면서 드디어 리나를 찾는 실마리를 발견하고 마침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리나를 찾아가는데, 거기서 전혀 의외의 진상과 마주치게 된다.
보통 여자 탐정하면 미스코리아 뺨치는 매혹적인 외모에 남자 서 너 명은 손쉽게 때려 눕히고 여성 특유의 세심함과 날카로움으로 트릭의 허점과 사건의 진상을 단숨에 간파해내는 그런 모습 - 예를 들자면 홍콩영화 “예스마담”이나 “007” 시리즈의 “본드걸” - 을 연상하기 쉬운데 이 책의 주인공 “무라노 미로”는 거친 남자들에게 협박을 당하고 사건 조사에서도 여러 난관에 부딪히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런 여인이다. 또한 냉소적이긴 하지만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아버지 “무라젠”과는 달리 감정 기복도 심한데, 자신을 강간하려는 상황을 연출했던 제작사 사장과 위험한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이웃집 게이 청년 “도모”에게 이성적인 사랑이 싹트지만 그럴 수 없기에 상처받기도 하며,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낸다는 것에 심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결국 병원에서 만나게 된 리나에게 자신도 돈에 쪼들리면서도 사례금으로 받은 100만 엔이나 되는 거금을 선뜻 주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뭔가 큰일이 터질 것 같은 예감 때문에 조마조마하기까지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점이 작위(作爲)적이지 않은 생생한 “사실감”을 느끼게 한다. 이 책도 별다른 트릭이나 반전이 등장하지 않아 전작처럼 심심하다고 느낄 독자들도 있겠지만, 1인칭 시점의 미로가 탐문 수사를 통해 사건의 단서들을 하나 하나 끌어 모아 결국 사건의 얼개를 완성해내는 과정이 마치 미로와 동행하면서 함께 지켜보고 조사하는 것과 같은 감정이입마저 느낄 수 있어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드는 강력한 재미와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 책에서 주인공 “미로” 외에도 매력적인 등장인물이 여럿 등장하는 데 역시 미로의 아버지 “무라노 젠조”를 먼저 꼽을 수 있겠다. “무라노 미로” 시리즈에 조연(助演)으로 등장한다고 하니 언제쯤 나오나 싶어 기대하고 있었는데 미로의 요청을 받아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는 무라젠의 무뚝뚝하고 냉소적인 모습을 다시 만나니 반가움마저 들었다. 미로의 곁에서 사건의 마무리를 함께 하면 좋았을 것을 몇몇 조사에 참여하고 몇 가지 조언을 남기고는 다시 돌아가 버리는데 역시나 이 책은 “미로 시리즈”이지 “무라젠 시리즈”가 아니었음을 확인케 하는, 그래서 별도의 “무라젠 시리즈”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해지는 그런 아쉬움이 느껴졌다. 두 번째 인물은 바로 미로의 옆 집에 살고 있는 게이 청년 “도모”를 꼽을 수 있겠다. 미로와는 남녀간의 “이성애(異性愛)”가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숭고한 사랑이라는 “이웃애”를 나누는 이 청년, 외로워하는 미로를 보듬어 줄 만도 한데 자신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내는, 미로 입장에서는 조금은 야속한 그런 남자라고 할 수 도 있겠다. 그래도 비록 육체적인 사랑은 아니어도 정신적으로는 그녀를 감싸 앉는, 성별을 떠나 동료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모두 미로를 지켜주고 보호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그만큼 미로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위태위태하고 조마조마했기 때문이었을까? 다른 미로 시리즈에 도모가 등장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미로와 도모, 콤비로 활약해도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을 그런 관계다. 물론 그의 성적 소수성은 개인적으로는 내키지는 않지만 말이다.
또한 인상적인 장면을 꼽아보자면 우선 AV 제작사에서 미로가 강간당할 뻔한 장면이 떠오른다. 급박한 상황 임에도 카메라를 향해 자신의 상황을 당차게 알리는, 미로가 그저 연약한 여자가 아닌 “강단(剛斷)”있는 여자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그렇게 자신을 위험한 상황 - 물론 실제로 그러려는 것은 아니고 미로를 겁주려고 연출한 상황이지만 - 에 빠뜨리는 제작사 사장과 여러 차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그 사람을 다시 마주친다면 가슴이 철렁하고 끔찍한 느낌만 들 텐 데 그와 그렇게 쉽게 사랑을 나눌 수 있다니, 요새 “나쁜 남자” 신드롬이 유행하고 있다고 하니 미로가 그에게서 위험하지만 끌릴 수 밖에 없는 “매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라 여기려 해도, 또는 리나를 찾기 위한 결정적인 실마리를 쥐고 있는 사람, 즉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영 이해가 되지 않은 그런 장면이었다. 역시 남자인 내가 모르는, 여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무언가가 있었을까? 두 번째 장면은 죽은 “와타나베”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장면이었다. 리나가 자신을 찾는다는 미로에게 한 일종의 “장난전화”인 셈인데 공포에 떨었던 미로처럼 나도 절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외에도 리나을 만나기 위해 간 병원 복도에서 만난 마지막 "반전"도 인상적인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소개는 생략하기로 한다^^
두서없이 책 내용을 소개하다 보니 역시 장황한 감상이 되고 말았다. 이런 저런 얘기 다 빼고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 책 참 “재미있다”. 현실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초능력” 탐정이 등장하고, 수학 공식처럼 틀에 박힌 스토리와 억지스러운 반전에 식상한 분들이라면 오히려 “무라노 미로” 식의 현실적인 모습과 활약에 신선함을 느낄 것이다. “무라노 미로” 시리즈는 앞서 얘기한 <얼굴에 흩날리는 비>와 시리즈의 완결편이라는 <다크>, 이 책, 이렇게 3권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는데 그녀의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출간되어 주길 기대해보며, 작가가 “무라젠” 시리즈도 집필해 주길 진심으로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