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환상 도서관
조란 지브코비치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에서는 10분만 지나면 빨리 가자고 성화를 부리지만, 도서관에서만큼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염없이 머물게 된다.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이 소곤소곤 들려주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거부하기 힘든 치명적인 유혹으로까지 느껴지는, 그래서 도서관은 어른이 된 지금도 신비로움과 즐거움이 가득한 그런 장소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책이 주는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나는 그런 도서관이 실재한다면 어떨까?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서 등장하는 여느 고대 유적보다도, 최첨단 시설을 갖춘 현대의 여느 놀이 공원보다도 더한 재미와 스릴, 그리고 신비로운 그런 모험이 될 것이다.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는 데 탁월한 기량을 보여 라틴 문학계의 거장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인터넷을 검색해봤더니 환상적 사실주의에 기반한 단편들로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전혀 생소한 작가다 - 를 잇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는 “조란 지브코비치”의 <환상도서관(원제 THE LIBRARY / 북폴리오 / 2011년 6월)>은 바로 기묘하고 신비로운 “도서관”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책에는 6개의 신비로운 도서관이 등장한다. 작가는 세상의 모든 책이 다 전자 문서화 되어 있는, 심지어 미래에 집필하게 될 책들과 작가의 사망 예상 연도까지 예언하는 도서관(<가상 도서관>)을 첫번째로 선보인다. 그리고 두 번 째로 우편함을 열면 하드커버의 책이 꽂혀 있는, 그런데 그 책을 꺼내고 나면 다시 꽂혀 있는, 무한 반복되는 책들로 결국 집을 가득 채운 이야기(<집안 도서관>)를 소개하고, 이어 관람시간이 끝나버린 도서관, 그 곳에 천 억 여 명이 넘는 과거와 현재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비치되어 있는 또 다른 도서관이 있다는 이야기(<야간도서관>)를 들려준다. 무한의 시간동안 책 읽는 형벌을 받게 된다는, 또한 책 안 읽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형벌보다도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벌이 될 도서관(<지옥 도서관>), 페이지를 펼칠 때 마다 새로운 책이 나오는, 복사(複寫)도 할 수 없는 기이한 책(<초소형 도서관>), 고급스러운 책 들 사이에 꽂혀 있는 페이퍼 북이 영 눈에 가시처럼 걸려 버리지만 어느새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 물에 빠뜨리고, 불에 태워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나타나는 그 책을 결국 먹어서 없애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위대한 도서관>)를 차례대로 들려준다.
여섯 편 모두 기이하면서도 신비로운 도서관 - 물론 장소로서의 도서관이 아닌 “책”을 의미하고 있는 작품들도 있지만 - 을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환상성(幻想性)”이라는 판타지 소설의 전형적인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도서관들은 현실에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가상의 시간과 공간에서나 있을 법한 그런 곳(또는 책)이다. 그 도서관을 만나는 등장인물들의 반응과 행동도 다 제각각인데, 인터넷 가상 도서관에서 자신의 작품을 발견한 작가는 좀 더 사이트를 둘러 봐도 될 것을 사이트 운영자에게 메일을 보내 저작권에 위배된다고 항의나 해대고, 한 남자는 어떤 내용의 책인지, 도대체 우편함에서 왜 책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자신의 집을 책으로 가득 채운다. 지금까지 모든 인류의 기록이 보관되어 있는 신비의 도서관에 방문한 남자는 그저 자신의 기록만 확인하고는 문이 닫혀 나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만 걱정해서 서둘러 나와 버리고, 책을 열 때마다 새로운 책이 나오는 “만능책”을 발견하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한 남자와 그렇게 없애려고 해도 다시 나타나는 책을 결국 먹어치우는 남자 또한 “보물”을 손에 쥐고도 그 가치를 몰랐던 앞선 사람들처럼 똑똑함과는 영 거리가 먼, 심지어 미련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작가는 신기루처럼 금세 사라져 버리는 “환상성”을 통해서 바로 사람들의 욕망이 그만큼 허망하고 부질없음을 조롱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단편 중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지옥도서관>이었는데, 책 읽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무한의 시간 동안 책을 읽는 형벌을 내린다는 설정이 참 기발하고 재미있었다. 책이라면 벌레보다도 싫다는, 교과서를 빼고 평생 읽은 책이 한 권도 없다고 자랑(?)하는 사촌 동생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것 같다. 그럼 조금이라도 겁나서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을까? 전혀 가능성은 안보이지만^^
관람시간이 끝나 불 꺼진 도서관, 지레 포기하지 말고 문을 가만히 밀어보라. 잠겨 있지 않고 열려 있다면 열람실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라. 까마득한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인류의 삶이 기록된 비밀의 도서관을 만날 지도 모르니까. 만나게 된다면 갇힐까 두려워 허겁지겁 나와 버린 이 책의 어느 남자처럼 제발 서둘러 나오지 말고, 사서가 문은 절대로 안 잠근다니 갇힐 염려는 붙들어 매고, 차근차근 읽어 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 책에 담겨 있는 비밀들을 나에게 들려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