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잠 재의 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0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추리소설을 읽다 보면 참 다양한 “탐정(探偵)”을 만나볼 수 있는데, 그 분류법도 직업별, 전문분야별, 추리 방법별 등으로 보는 관점에 따라 각양각색임을 알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분류가 현장을 뛰어다니지 않고 보고서나 수집된 증거를 면밀히 분석하고 검토하여 단서를 찾아내는 '안락의자형 탐정'과 이와 반대로 탐정이 직접 수사 현장에 뛰어들어 용의자들과 주변인물에 대해 탐문(探問)수사와 증거 수집을 벌이고, 때로는 폭력과 살인까지 불사하는 행동파 탐정, 즉 “하드보일드(Hard-boiled)" 탐정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대표 주자를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큘 포와로”와 “미스 마플”을 들 수 있다면, 후자는 하드보일드 탐정의 기본틀을 제공했다고 알려진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적(靜的)·동적(動的)인 모습에 따라 이런 분류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만은 아니어서 명탐정의 대명사인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의 경우 뛰어난 “관찰력(觀察力)”과 가히 초능력에 가까운 “직관력(直觀力)”, 즉 천재적인 두뇌솜씨를 번뜩이는 “안락의자형”의 전형을 보여주면서도 때로는 프로 선수 못지 않은 권투 솜씨와 검도로 범죄자와 일대 격투를 벌이는 “행동파” 모습을 보여주는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추리소설 매니아를 자처하고 있지만 안락의자형 탐정을 더 선호하는 터라 하드보일드 탐정물은 접해본 경험이 없었는데, 이번에 비로소 일본 하드보일드 소설 대표 작가라 할 수 있는 “기리노 나쓰오”의 <물의 잠 재의 꿈(원제 水の眠り灰の夢/비채/2011년 5월)>을 읽게 되었다. “‘미로 시리즈’를 논외로 일본 하드보일드를 논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작가의 대표적 시리즈물인 “미로 시리즈”의 번외편이라는 이 작품 한 편을 읽고서 하드보일드 소설이 어떻다고 이야기할 수 는 없겠지만 기대했던 것 이상의 재미를 안겨준 멋진 작품이었다. 

올림픽을 한 해 앞두고 있는 1963년 9월 도쿄, <주간 담론>에 근무하고 있는 특종 전문 기자 - 스캔들을 파헤치거나 특종을 잡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고, 때에 따라서는 남의 약점을 잡아 협박까지 하는 악랄한 작자들로 오해를 받아 “특종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무라젠”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는 “무라노 젠조”는 저녁 8시 외근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여러 건의 폭탄 테러를 일으켰던 “소카 지로”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폭발 사건을 목격하고 소카 지로 사건을 심층 취재하기로 결심한다. 소카 지로에 대한 취재를 진행하던 중 가출한 아들인 “다쿠야”을 데려와 달라는 친 형의 부탁을 받은 무라젠은 유명 인사 저택에서 벌어진 파티장에서 조카를 데려 나오다가 조카의 부탁으로 “다키”라는 여학생을 집까지 데려다 주지만 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모습에 다키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다 놓고 자신은 같은 잡지사에 다니는 동료이자 친구인 “고토”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다키는 이미 집을 떠나고 없었고, 무라젠은 그녀에 대한 신경을 끊고 다시 업무에 매진한다. 며칠 후 다키가 시체로 발견되고, 무라젠은 살인 용의자로 경찰에 연행되지만 친구 고토가 자신의 윗선을 통해 경찰에 압력을 가하여 무라젠은 풀려나게 된다. 이 사건 때문에 결국 <주간 담론>에서 물러나게 된 무라젠은 취재 중이었던 “소카 지로 폭탄 테러 사건”을 계속 조사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다키 살인 사건”을 직접 조사하기 시작한다. 무라젠은 주변인들 탐문 수사와 정보원을 통한 정보 수집을 벌이지만 사건의 실체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데, 취재 도중 절친한 친구인 “고토”가 죽게 되면서 비로소 사건은 급진전하게 되고, 야쿠자 조직과 연계된 일명 “인형놀이”라고 불리우는 유명 인사들의 소녀 매춘의 내막과 다키 가족들 사이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되면서 마침내 다키 살인사건의 진범과 실제로는 영구미제(永久未濟)로 남게 되는 “소카 지로”의 정체를 밝혀낸다.
 

앞에서 언급한 작가의 시리즈의 여주인공인 “무라야 미로”의 의붓아버지이자 몇 몇 작품에도 등장했다는 “무라노 젠조”의 젊은 시절과 그가 미로의 의붓아버지가 된 사연을 밝히고 있어 일종의 “미로 시리즈”의 외전(外傳)격인 이 작품은 시리즈를 접해본 독자들에게는 참 반가웠을 작품인데, 아쉽게도 시리즈를 접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런 반가움은 느껴보지 못했다. 그러나 전문 사설 탐정이 아닌 특종 기자로서 끈질긴 탐문 조사를 벌이고 위험을 무릎쓰고 야쿠자가 운영하는 술집을 드나들며, “인형놀이” - 소녀를 수면제를 먹여 의식을 잃게 한 후 매춘을 하게 해서 이렇게 불리운다 - 를 규명하기 위해 위험한 함정 조사까지 벌이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펼쳐지는 무라젠의 활약상은 잡지사에서 물러나 백수 신세가 된 무라젠에 대해 야쿠자 조사원을 제안했던 간부가 평가한, 즉 제법 “패기”가 있고 “행동력”과 “두뇌” 모두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사람이라는 평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만든다.  사실 추리소설의 재미인 절묘한 트릭이나 기막힌 반전 - 마지막 대목에서 소카 지로의 정체를 밝혀내는 장면은 의외성은 느낄 수 있을 뿐 반전이라고 하기에는 좀 약하다 - 은 없어 이야기 전개가 밋밋하다고 느낄 수 도 있지만 명탐정의 과장된 추리 솜씨나 억지스러운 반전이 아니라 탐문 수사를 통해 하나하나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이 상당히 생동감있고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고 그러한 현실성이 주는 재미 또한 상당해서 500 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 부담스럽다는 느낌을 전혀 느낄 수 없도록 강하게 몰입하게 만든다.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여탐정 “무라야 미로”야 작가가 여성이다 보니 캐릭터 설정이나 심리 묘사가 수월했겠지만 냉소적이다가도 열혈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남자 캐릭터 “무라젠”의 모습에서 전혀 여성 작가의 시선이나 경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에도가와 란포 상을 비롯하여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고 평단에 주목을 받았다는 작가 소개글이 결코 허명(虛名)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사건 이후의 무라젠의 활약상을 계속 읽어보고 싶어 이 작품이 일회성으로 끝나는지 아니면 별도 시리즈로 이어지는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가 없어 아쉬웠다.

그동안 많은 일본 작가들의 다양한 추리소설을 읽어왔는데, 기존 작품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즐거움과 재미를 선사하는 “기리노 나쓰오”, 앞으로도 꽤나 자주 만나게 될 그런 작가가 될 성 싶다. 그래서 이 책과 함께 출간된, 이 책에 이어 바로 읽을 예정인 “미로 시리즈”, <천사에게 버림받은 잠>에 대한 기대가 더욱 큰 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선보이는 본격 일본 “하드보일드”의 재미와 매력을 담고 있을 저 책을 다 읽을 때까지는 다른 책은 잠시 멀리해야 할 것 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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