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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밖 선생님 365 -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는 세상의 모든 것
정철 지음 / 리더스북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단어에 새롭고 기발한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하는 책은 이전에 이외수님의 <감성사전(동숭동/2006년 8월)>을 통해서 한번 접해본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연극, 영화, 소설 따위에서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라는 사전적 뜻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主人公)”을 “작중 인물 중에서 가장 목숨이 끈질긴 존재”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어떤 단어는 키득키득 웃음이 나고, 어떤 단어는 작가의 감성을 오롯이 느껴지기도 하며, 어떤 단어는 삶에 대한 성찰(省察)까지도 해보게 하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해석에 매료되어 몇 몇 단어들은 연습장 한 귀퉁이에 적어 놓고 외웠었고, 나도 그걸 흉내 내서 몇 몇 단어들은 내 식으로 바꿔 해석해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 생각날 때 마다 펼쳐 읽던 책이었는데, 이사를 하면서 분실해서 참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단어들에 대한 참신하고 색다른 해석을 담은 또 다른 멋진 책을 만났다. 카피라이터로 유명한 “정철” - 지난 2010년 지방선거 때 서울 시장 후보로 나선 한명숙 후보의 메인 슬러건이었던 “사람 특별시”가 바로 이 작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 의 <학교밖 선생님(리더스북/2011년 4월)>이 바로 그 책이다. 다른 책들과 비교하면 참 오랜 시간에 걸쳐 읽은 이 책, 이번만큼은 <감성사전>처럼 잃어버리지 말고 오랫동안 간직하며 자주자주 꺼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런 책이었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책 속에 길이 있다”로 시작한다. 모든 여백과 행간이 길이며 작가의 생각 곁에 자신의 생각을 적으며 걸어가다 보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그 책은 작가의 생각 한권, 자신의 생각 한권 두 권의 책이 된다고 말한다. 이 책은 다른 책보다 길이 넓어 더 많은 발자국을 찍을 수 있다는 작가의 말, 아무래도 이 책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본문 첫 장부터 그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책은 <학교밖 선생님>이라는 제목처럼 학교 수업처럼 총 “6교시(校時)”로 나누어 총 365개의 단어를 싣고 있다. 각 교시에는 “부제(副題)” 붙는데 예를 들어 “1교시. 삶의 이론과 실제 - 보통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법”, “6교시. 마음 교육학 - 인생에도 과속방지턱이 필요하다”처럼 말이다. 물론 작가는 이런 부제에 맞게 단어들을 고르고 해석을 했겠지만 굳이 부제에 얽매이지 않고 단어들을 읽는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맨 처음으로 소개하는 단어인 “나이”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해석한다.
나이 001: 인생 뒤집어 보기
나이가 몇이세요?
우리는 이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해왔다.
스물이라고, 서른이라고, 벌써 마흔이라고.
같은 질문을 조금만 뒤집어보자.
남은 나이가 몇이세요?
과연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 멈칫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부담”이 되어 밝히기 꺼려지는 그런 나이가 되었는데 그런 부담이 아마도 그동안 살아온 “시간”에 대한 부담 - 엄밀히는 그런 시간동안 제대로 성취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여기는, 인생에 대한 부끄러움일 것이다 -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한 번도 남은 나이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생각에 스무살까지는 이제 몇 년 남았구나 헤아려 보곤 했는데 - 어른이 돼서야 “빨리 어른이 되길”이 얼마나 무서운 주문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 지금은 남은 날보다 지나온 날들을 더 떠올리게 되었다. 과연 나에게 남은 나이는 몇이나 될까? 30년? 40년? 작가의 말대로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할 수 없는 그런 질문이다. 지나온 “나이”를 부끄러워하고 남은 “나이”를 쉽게 답하지 못하는 지금의 나에 대한 생각에 다음 페이지를 열지 못하고 한참을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책은 이처럼 쉽게 넘어가지 못하고 한번씩 생각이 머무르는 많은 단어들을 담고 있다. 서평을 쓰기 위해 연습장에 메모를 해가면서 읽어 갔는데, 반도 읽기 전에 벌써 여러 페이지의 연습장에 빼곡히 기록하게 되는지라, 그리고 책읽기가 너무 더뎌져 그만 메모를 포기하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소개하고 싶은 단어가 너무 많아 몇 개를 골라내기가 참 어려워 그냥 무작위로 몇 단어만 소개해본다.
노인 005: 새벽잠이 없는 이유
노인이 새벽잠이 없는 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시작하는 기분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 화장실 거울에 붙여 놓을 것
기침 040: 관계의 소중함
기침소리라는 말을 듣고 아무런 흔들림이 없는 사람도
아버지의 기침소리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흔들린다.
세상 모든 말은 나와 관계를 맺는 순간 전혀 다른 뜻이 된다.
칼 060: 중요한 건 방향
의사의 손에 들려있으면 긴장.
강도의 손에 들려있으면 공포.
주부의 손에 들려있으면 기대.
중요한 건 성능이 아니라 칼끝이 향하는 방향.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가느냐.
“작가의 생각” 한권은 분명 다 읽었지만 이 책을 “완전히” 읽었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여백과 행간에 적어나가야 할 “나의 생각”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 책 읽는 시간 자체도 다른 책보다 훨씬 오래 걸린, 다 읽고 나서도 쉽게 책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속 페이지를 펼쳐 들게 하는 그런 책이다. 그리고 “내 자신의 생각” 한 권을 완성하기까지는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래서 이 책, 앞으로도 계속 읽어야 하는 그런 책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