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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페어
하타 타케히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작가와 독자 간의 두뇌 싸움”이라고 정의(定意)할 수 있는 추리소설에는 몇 가지 정형화된 공식(公式)이 있다고 한다. 등장인물 모두가 범인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중 전혀 의외의 인물이 범인이어야 하며, 범인의 정체와 범행 수법이 “탐정” 역할을 하는 사건 해결의 주체에 의해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는, 즉 “완전범죄(完全犯罪)”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작가는 독자들이 추리할 수 있도록 충분한 단서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도 빠질 수 없는 공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종종 이런 룰을 깨는 “파격적인” 시도가 있어 왔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으로 범인의 정체를 전혀 눈치챌 수 없도록 만든 “어떤” 장치 - 스포일러 일 수 있어 생략한다 - 때문에 “공정성”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최근에는 작가가 아예 작심하고 등장인물의 말투, 이름, 성별, 연령 뿐만 아니라 사건의 교차 배치나 시간 순서를 바꿔 독자들을 오인시키는 “서술 트릭”이라는 장르까지 출현했으니 추리소설에서 "공정성“ 논쟁은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그런 논쟁이 되어 버린 것 같다. “하타 타케히코”의 <언페어; 예고된 살인 불공정한 게임이 시작된다(원제 推理小說/북스토리/2011년 8월)>는 이런 틀에 박힌 추리소설의 공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예 제목을 “추리소설(원제)”이라고 붙이고는 “불공정한 것은 누구인가?”라고 독자들에게 대놓고 묻는다.
비가 내리는 6월 14일(월) 신주쿠 구, 통금 시간에 늦어 집 인근의 “도야마 공원”을 가로 질러 귀가하던 여고생 “다츠이 마도카”가 산책로에 놓여 있는 장애물을 미쳐 보지 못해 넘어지고 만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등 뒤의 수풀 속에서 괴한이 “이것이, 리얼리티, 그리고 독창성”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칼을 들고 마도카에게 다가온다. 겁에 질려 뒷걸음질 하던 마도카는 조금 전 걸려 넘어졌던 장애물이 바로 처참하게 살해된 중난 남자의 시체임을 알고 공포로 그만 작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처지에 처한다. 이 글 말미에 “T.H.『추리소설』상권, 제1장의 1에서 발췌.”라는 문구가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어느 추리소설에서 발췌한 글인 듯 한데, 추리 소설 속 살인사건이 도야마 공원에서 “실제로” 일어난다. 피해자의 신원은 “회사원, 스즈키 히로무, 42세”와 소설 속 여고생이었던 “도립고등학교 3학년생 다츠이 마도카 양, 17세”로 밝혀지고 시신 곁에서 “불공정한 것은, 누구인가?”라는 의문의 책갈피가 발견된다. 경시청 수사 1과 검거율 넘버원인 “쓸데없이” 미인 여형사 “유키히라 나츠미”와 신참 형사 “안도 가즈유키”가 수사에 나서지만 목격자 하나 없고 서로 연관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두 시신 때문에 수사는 답보 상태에 빠진다. 그런데 며칠 후 “이와사키 출판사”의 “문학 신인상” 수상 파티에서 한 참석자가 독이 든 샴페인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죽는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는 경찰서와 각 출판사에 지금까지 일어난 살인 사건을 그대로 담고 있는, 즉 앞서 언급한 "T.H."라는 이니셜이 써 있는 추리소설 원고가 배달된다. 소설에는 다음 살인 사건을 예고하면서 살인을 막으려면 원고를 3 천만 엔이라는 고액에 낙찰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이러한 범인의 요구가 묵살이 되고 원고에 예고한 대로 이번에는 W대학 문학부 학생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범인에게서 다시한번 추리 소설 원고와 함께 자신의 원고를 1억엔에 낙찰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7살 소녀를 죽이겠다는 살인 예고장이 날라온다. 유키하라 형사는 과연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이 연쇄 살인을 막아낼 수 있을까? 결말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여기서 줄인다.
실제 살인 사건을 그대로 담고 있는 책 속 추리소설, 예고 살인이라는 설정이 독특한 재미를 주는 이 책은 극작가이자 연출가,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한 작가의 이력 탓인지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구성이 상당히 색다른데 실제로 11부작 드라마로도 제작이 되었다고 하며, 올 하반기에 영화로도 제작되어 개봉된다고 하니 아무래도 영상화(映像化)를 염두에 두고 썼다는 느낌이 물씬 풍겨난다.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는 명탐정 역할의 “유키히라 나츠미”라고 할 수 있는데, 수사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쓸데없이” 미인이라던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집안 풍경, 알몸(全裸)으로 잠들지 않나 남자 못지 않게 술고래에 터프한 성격이라는 설정 등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캐릭터 설정이라 할 수 있겠다. 책 중반에 유키히라의 숨겨진 과거가 드러나지만 마지막 예고 살인의 대상이 유키히라의 딸일 수 있다는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 외에는 그다지 연관성이 없어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매력적일 수 도 있지만 뜬금없게까지 느껴지는 이런 주인공을 설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앞에서도 언급한 “추리소설의 공식”, 즉 “공정성”에 대한 작가의 조롱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작가는 추리소설의 공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추리소설'처럼 따분한 소설은 없다. 왜냐고? 읽기 전부터 결말이 드러나 있으니까. 사건은 반드시 해결된다. 범인은 반드시 밝혀진다. 게다가 진범은 반드시 초반부터 등장하고,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반드시 맡고 있다. 복선은 항상 그럴듯하게 적혀 있고, 조금이나마 소설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때부터 사건의 진상을 추리할 수 있다. 초반에 등장하는 수상한 인물은 항상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기호거나, 제2, 제3의 피살자로 이미 정해져 있다. 독자는 보수적이라, 작가에게 항상 공정할 것을 요구한다. 공정하게 웃겨라. 공정하게 놀라게 하라. 예컨대 '반 다인의 20법칙'. 예컨대 '로널드 녹스의 10계'. 요구되는 것은 항상 예정 조화적 '대반전'. 그러면서 그것들을 동시에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독자는 말한다. 혹은 독자의 대리인인 편집자는 말한다." - P.89~90
이처럼 틀에 박힌 추리소설의 공식이 “따분하다”고까지 말하는 작가는 그동안의 추리소설 속 명탐정들이 일반인들과는 다른 천재성과 독특한 괴벽을 보여주는 것을 조롱이라도 하듯 추리소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상하기까지 한” 탐정 캐릭터를 선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야기의 전개는 철저하게 추리소설의 공식에 따라 전개한다. 즉 진범을 초반부터 등장시켜 나름 비중을 높게 하고, 몇 몇 힌트를 던져 주면서도 다른 등장인물로 오인하게끔 장치를 설정하면서 범인이 언급했던 "리얼리티”와 “독창성”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이외에도 문하생이라는 허울아래 실제로는 대필(代筆) 작가로 부려 먹는 기성 인기 작가나 문학상 시상식을 출판사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고, 고액의 가격으로 낙찰하라는 요구에 손익 계산부터 따지는 출판사들의 행태 등을 통해서 장르적 한계 뿐만 아니라 출판 현실까지도 싸잡아 비판하기도 한다. 공정성을 비판하면서도 스스로는 공정성을 지키는 반어법적인 묘사가 인상적인 책이지만, 공정성을 스스로 위반하는 몇 장면도 담겨 있다. 즉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범인의 정체 - 내가 추리력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범인을 짐작할 만한 단서들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느껴졌다 - 와 결말 부분에 이르러 유키히라가 범인에게 당신이 범인이냐고 묻자 부인하는 장면등이 그 예인데, 이 대목들도 작가의 계산된 설정 - 실제로 마지막 장면에서 범인이 자기 정체를 부인한 것은 의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 일 수 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이 추리소설의 공식을 조롱하고 비판한다고 “오해”하게 만드는 것도 작가의 의도일 수 도 있고 말이다.
독특하고 색다른 “추리소설”로 읽든 아니면 기존 추리소설에 대한 조롱과 비난이라는 “오해”로 읽든 어떤 식으로 읽어도 참 재미있는 이 책, 우선 “쓸데없이” 미인인 유키히라 역을 누가 맡고 있는지 궁금해서라도 이미 방영했다는 드라마부터 먼저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가을에 상영한다는 영화 또한 놓치지 않고 챙겨봐야겠다. 그래서 드라마, 영화로도 계속 만나게 될 이 책의 여운이 꽤나 오래갈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