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모어 이모탈 시리즈 1
앨리슨 노엘 지음, 김경순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여성 취향의 “할리퀸 로맨스(Harlequeen Romance)”와 별반 다를 바 없다고만 여겼던 “판타지 로맨스” 소설을 근래 들어 몇 권 읽으면서, 부담 없이 가볍게 읽을꺼리로는 “괜찮은” 장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아직은 말랑 말랑하고 낯간지러운 소설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지만 말이다. 판타지 로맨스 붐이 일면서 참 많은 시리즈물이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몇 몇 권을 단권으로만 읽다가 이번에 제대로 5권에 이르는 시리즈물(아직 완결되지 않았다)을 본격적으로 읽게 되었다. 미국에서 출간한지 2주 만에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진입해, 32주간 베스트셀러로 판매되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드라마 판권 계약이 체결되어 조만간 드라마로도 선보인다는 “앨리슨 노엘”의 <이모탈(Immortal) 시리즈>가 바로 그 시리즈이다. 검은 바탕에 붉은 튤립 2송이가 그려진 표지가 인상적인 1권 <에버 모어(원제 Ever More/북폴리오/2009년 12월)>을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에 펼쳐 들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부모님과 여동생 “라일리”를 한순간에 잃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십대 소녀 “에버 모어”는 더 이상 평범한 소녀가 아닌 “특별한” 소녀가 되어 버린다. ‘죽기 직전의 경험’, 즉 ‘사후 경험’을 겪은 에버는 모든 생물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채의 소용돌이인 “오라”를 맨 눈으로 볼 수 있게 되고, 누군가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인생사가 한 눈에 보이며 심지어 죽은 여동생 “라일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초능력” 소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고 후 고모와 살게 되면서 새로운 학교로 전학온 에버는 그런 자신을 감추기 위해 자랑이었던 긴 금발 머리를 뒤로 묶어 후드 티 안에 감춰 버리고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는 아이팟 이어폰을 귀에 꼽고 다닌다. 이렇다 보니 아이들에게 “괴물”취급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절친인 “헤이븐”과 게이 소년 “마일스”와는 가깝게 지낸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에 눈에 번쩍 뛸 만큼 잘 생긴 미남 “데이먼 오귀스트”가 전학오게 된다. 패션 잡지에서나 볼 법한 모델 빰 치는 외모에 번쩍이는 검은 색 BMW를 몰고 다니는 데이먼은 여학생들의 우상으로 떠오르지만 왠지 에버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괴물”인 자신의 처지 때문에 데이먼을 애써 멀리하는 에버는 그에게서는 “오라”를 느끼지 못하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조금씩 끌리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지만 에버의 시선은 갈수록 데이먼에게 향하게 된다. 그런데 데이먼이란 친구,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구석이 많다. 오라가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마음도 읽히지 않고, 툭하면 빨간 튤립을 만들어 선물하지 않나, 그림은 왠만한 고전 화가 못지않게 쓱쓱 잘 그리고, 가끔씩 과거에 유명 인물들을 직접 만난 것 같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다. 왠지 판타지 소설에서나 볼 법한 “드라큘라”나 “악마”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데이먼이 의심스럽지만 이미 그의 존재가 가슴에 낙인처럼 찍혀버린 에버는 그의 매력을 거부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런 에버에게 데이먼처럼 의문 투성이의 존재이자 친구 헤이븐을 이상하게 변화시키는 아름다운 여인 “드리나”와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여동생 “라일리”의 존재를 알고 있는 영매(靈媒) “에바”가 나타난다. 과연 에버에게 초능력이 생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데이먼과 그리나의 정체는? 에버와 데이먼의 사랑은 어떻게 진행될까? 이처럼 거듭되는 의문은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하나씩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난다.  

이 책에도 다른 판타지 로맨스 소설처럼 신비로운 존재가 등장하는데, 다만 드라큐라나 늑대인간, 타락천사처럼 신화(神話) 속 주인공들이 아니라 다소 정체가 모호한 불사자 - 不死者. 시리즈 제목인 “Immortal"의 뜻이 “죽지않는, 불멸의”이라는 뜻이다 - 가 등장한다. 남자 주인공 데이먼은 600 여 년을 살아온 “불멸”의 인간으로 나오는데 책에서는 연금술사인 데이먼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간단하게 설명할 뿐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고 있지 않으면, 또 다른 불멸의 존재 그리나는 어떻게 해서 그런 존재가 되었는지, 또한 환생을 거듭하며 데이먼과 사랑에 빠졌다는 에버 또한 어떻게 환생을 하고, 그런 초능력을 얻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설명 또한 아직은 없다. 아마 시리즈 첫 권이라 등장인물 설정과 전체 스토리 도입 위주이고 그리나 외에는 아직은 본격적인 갈등관계 - 대적자(大敵者) - 가 등장하지 않는데, 2권 “블루문” 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부족한 설명들을 채워나갈 것으로 보여지니 조금 더 시리즈를 계속 읽어봐야 전체 윤곽이 잡힐 것 같다. 이야기로만 보면 눈이 번쩍 띄일 정도로 멋진 외모와 신비로운 존재, 그와 사랑에 빠지는 여주인공이라는 판타지 로맨스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이런 스토리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식상할 수 도 있겠지만, 자신 때문에 가족을 잃었다는 죄책감과 “괴물”이 되어 버린 자신의 모습에 갈수록 위축되는 에버의 심리를 상당히 치밀하고 섬세하고 그려내고 있고, 아직 그 실체를 완전히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영원토록 계속되는 데이먼과 에버의 사랑을 아름답고 처연하게 그려내고 있어 결코 녹록치 않은 이야기가 계속 될 것이라는 기대를 낳게 한다. 특히 부모님이 계신 저 세상으로 하루 빨리 돌아가야 하지만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언니 에버가 안쓰러워 언니 곁에 머무르려는 라일리와 그런 동생을 이제는 나 줘야 하지만 자신의 곁에 있는 하나 밖에 없는 가족이라 선뜻 보내지 못하는 에버의 안타까움과 슬픔이 오롯이 느껴지게 한다. 즉 전형을 따르면서도 섬세하고 아름다운 필치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작가의 세련된 글 솜씨가 돋보이는 그런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직은 미스터리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 시리즈의 1권이라 평가하기에는 너무 성급하겠지만 5권 “나이트 스타”까지 계속 읽어볼 만한 부담없고 재미있는 판타지 로맨스 시리즈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역시 남자인지라 “너무나도 멋있고 신비로운 남자” 데이먼에게는 그다지 감흥이 없지만 - 감흥이 있으면 더 이상하겠지만^^ - 앞으로 밝혀질 그의 정체와 영원한 연인 에버를 지키기 위한 그의 사투(死鬪)가 어떻게 펼쳐질지 권 수를 거듭할 수 록 더욱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1권을 읽고 나서 엉뚱한 생각이 든다. 멋지고 신비로운 남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지적이며 아름다운, 거기에 육감적이기 까지 한 여신(女神)급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판타지 로맨스는 없을까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남자 독자들도 판타지 로맨스 소설에 절로 열광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 “19금”이 되지 않게 수위는 잘 조절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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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서유리 옮김 / 뿔(웅진)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역시 여름은 스릴과 긴장감이 넘치는 장르 소설의 계절인가? 비(雨)로 시작해서 비로 끝나버린 올해 여름, 더위가 작년만 못해 더위라면 쥐약인 나로서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더위를 잊게 할 만한 멋진 “추리”, “스릴러”, “공포” 등 장르 소설들을 많이 만나서 그런지 이런 책들을 무기 삼아 더위와 한번 “맞장(?)” 떠 봤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아직 한낮에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덥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가을 선선한 바람을 느껴볼 수 있는 요즈음, 올 여름 장르소설 출간 붐의 대미(大尾)를 장식할 스릴러 소설 한권을 만났다. 독일 심리 스릴러 소설계의 신동으로 평가받는다는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사라진 소녀들(원제 Blinder Instinkt / 뿔(웅진문학에디션)/2011년 8월)>이 바로 그 책이다.

어느 여름날 오후, 빨간 머리에 흰색 여름 원피스를 입은 한 소녀가 다리를 하늘로 뻗어 무중력 상태를 만끽하며 그네를 타고 있었다. 어지러워지자 그네가 저절로 멈출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던 소녀는 누군가가 주변에 있음을 직감으로 알아챈다. 앞을 보지 못하지만 그의 존재를 느낄 수 가 있었던 것이다. 마을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외딴 곳에 위치해서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는 집, 부모님은 주무시고 오빠는 외출 중이라 혼자서 그네 놀이를 하던 소녀는 집을 향해 뛰려 하지만 앞 못 보는 지라 집까지 가는 너무 멀고 울퉁불퉁한 길을 넘어지지 않고 뛰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공포감에 휩싸인다. 소녀는 소리 지르려 했지만 커다란 손이 얼굴을 덮쳐 입과 콧구멍까지 틀어막고, 강한 팔이 뒤에서 소녀의 가슴팍을 껴안은 채 뒤로 끌고 간다. 소녀는 발버둥을 쳐 보지만 오히려 그네 나무판자에 이마를 맞아 피를 흘리고, 낯선 존재는 발버둥치는 소녀 위에 올라타 뒷머리를 낙엽이 쌓인 땅에 얼굴을 눌러 버린다. 그렇게 시각 장애인 소녀 “지나”는 실종되고 만다. 

그로부터 10년 후, 장애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보호 시설인 “헬레넨슈티프트”에서 살고 있던 10세의 시각 장애인 소녀 “사라”가 자신의 방에서 깜쪽같이 사라지는 실종 사고가 발생한다. 수사를 맡은 여형사 “프란치스카 고플로프”는 원장에게 최근 몇 년간 시설을 드나든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부탁하고, 과거 유사 사건이 있는지 검색하던 중 10년 전 지금과 똑같은, 즉 10세의 시각 장애에 빨간 머리 소녀 “지나”가 실종된 사건이 있었음을 알아내고 그녀의 오빠이자 유럽 복싱 헤비급 챔피언인 “막스 웅게마흐”를 찾아간다. 아직도 동생의 실종이 친구들과 축구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는 막스는 프란치스카에게 그 당시 일을 털어 놓게 되고, 프란치스카는 괴로워하는 막스에게서 묘한 연정을 느끼게 된다. 원장의 리스트 중 몇 년 전 소아 성폭행 전과가 있었던 용의자를 발견하게 된 프란치스카는 택시 운전사를 하고 있는 그의 알리바이를 다그치지만 별다른 용의점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데, 동생의 실종을 다시 조사하러 나선 막스는 그 용의자의 집을 찾아가 무참히 폭행하는 사고를 저지른다. 그 사고는 프란치스카에 의해 가까스로 수습이 되고, 동생이 실종되던 정황을 계속 나누던 둘은 그 당시 지나의 간청에 못이겨 집 주변 강가에서 지나가 옷을 벗고 물놀이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그것을 지켜본 주변 낚시꾼들 중에서 범인이 있지 않을까 하는 방향으로 수사를 전개한다. 프란치스카는 사라가 사라진 시설에 있던 수족관을 관리하던 남자의 가게로 향하고, 막스는 동생 실종 후 뛰쳐나온 옛 집을 찾아가 아버지께 당시 그 강가에서 자주 낚시하던 사람들에 대해 묻는다. 과연 10년 전, 그리고 10년 후 현재 시점에 발생한 두 시각 장애인 소녀 납치 사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그리고 범인은 잡힐 수 있을까?

일정 주기로 발생하는 사이코 패스에 의한 납치나 혹은 연쇄살인, 이 책에서는 시각 장애인 소녀라는 특이한 대상을 하고 있긴 하지만 추리소설이나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낯설지 않은 소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흔한” 소재를 작가는 긴장감과 스릴 넘치는 이야기로 재구성해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작가는 이 책의 모티브를 어느 날 차를 타고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보게 된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과 그 뒤를 따라 걷는 일곱 살 정도의 여자아이의 모습에서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지 남자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길 안내를 받던 여자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남자아이가 얼마나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지, 그리고 만약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생각이 든 작가는 아이들과의 축구 시합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동생을 방치한 채 자리를 비웠다가 동생이 납치되자 10년 동안을 자책하며 살아온 “막스” 남매를 창조하고 거기에 살을 붙여 10년 후 동일범에 의한 같은 유형의 실종 사건이 일어났다면 과연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이야기를 구성해낸 것이다. 프롤로그에서부터 막스의 동생 “지나”의 실종 장면을 보여줘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지만 사실 중반까지는 다소 지루한 면이 없지 않다. 특히 이런 류의 추리 소설이나 스릴러 소설들 특유의 설정, 즉 몇 몇 단서로 사건의 용의자를 제시하지만 결국 그는 범인이 아님이 밝혀지고 곧이어 새로운 용의자가 등장하여 수사의 이목이 그리로 집중되는 설정을 답습하는 장면에서는 여느 소설과 차이가 없는 그런 설정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런데 그냥 지나쳐버릴 만도 한 막스의 증언에서 뭔가 이질적인 감을 느낀 프란치스카가 또 다른 용의자로 여겨지는 남자의 가게에 방문했다가 그만 함정에 빠져 독거미들의 습격을 받아 생사의 기로에 서는 위험에 처하고, 막스 또한 의절(義絶)하다시피 한 아버지에게서 동생이 실종되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범인의 은신처로 향하는 장면부터는 긴박하게 이야기가 전개되어 결말에 이르기까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하게 만들어 버리고, 결말 부문에서의 반전 - 작가는 이 반전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 또한 여느 스릴러 소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특히 시각이 아닌 촉각, 청각 등 다른 오감에 의해 위험을 감지하고 두려워하는 소녀의 심리와 지하 폐쇄된 공간에 갇혀 독거미 떼들의 공격을 받는 치명적인 위기에 처하는 프란치스카의 심리를 머릿 속에 그 장면이 절로 연상될 정도 - 번역가 말 대로 다 읽고 나서도 다리에 뭔가 스물 스물 기어오르는 느낌이 들게 한다 - 로 세밀하고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이 올 여름 출간된 추리, 스릴러 소설들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는 없겠지만 긴장감과 재미가 탁월한 멋진 스릴러 소설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독일식 이름과 지명에 낯설게 느낄 수 도 있겠지만 익숙한 영미 스릴러 소설과는 다른 색다른 스릴과 재미를 맛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늦더위를 이 책으로 이겨내 보는 것도 괜찮은 여름 무더위와의 작별 의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 첫머리에서 던진 질문, “여름은 스릴과 긴장감이 넘치는 장르 소설의 계절인가?” 에 “장르 소설이 제격이다”라며 “자문자답(自問自答)”하면서 그런 “여름”이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음을 고마워하고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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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비틀 Mariabeetle - 킬러들의 광시곡
이사카 고타로 지음, 이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 SF, 판타지 등 장르 소설을 즐겨하다 보니 참 많은 일본 작품들과 작가들을 만나게 된다. 한 권만 읽어봐도 다시는 선택하지 않게 되는, 일회성에 그치는 그런 작가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어떤 작가는 한 권 읽으면 다른 작품들도 저절로 손이 가게 되는, 작가 이름만으로도 선뜻 책을 선택하게 하는 그런 “재미”를 보장하는 작가들도 있는데, 일본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작가 중에 하나로 꼽힌다는 “이사카 코타로(伊坂 幸太郞)”가 바로 나에게는 그런 작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보니 출간된 그의 작품이 20여 권 - 만화는 제외 - 에 이를 정도로 꽤나 많은 작품이 출간되어 있고, 책 당 수십 개씩 달려 있는 리뷰를 읽어봐도 호평(好評)이 다수인 것을 보면 이사카 고타로에 대한 이런 평가는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작품 중 읽은 작품을 꼽아 보니 그의 작품 중 읽은 작품을 꼽아 보니 <사신 치바>, <종말의 바보>, <골든 슬럼버>, <바이바이 블랙버드> 이렇게 네 권 -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전체 출간작의 1/5도 채 되지 않는다 - 을 읽었다. 네 권 모두 뛰어난 가독성과 몰입감, 재미, 잔잔한 감동까지 느꼈었던 터라 그의 신작인 <마리아비틀 Mariabeetle; 킬러들의 광시곡(원제 マリアビ-トル / 21세기북스/2011년 6월)도 전혀 망설임 없이 선뜻 선택하게 되었다.

항상 붐비는 도쿄 역 플랫폼에 대기하고 있던 “하야테” - 도쿄 역과 신아오모리 역을 오가는 신칸센 노선 - 열차에 수상쩍은 한 남자가 탑승한다. 그는 전직 킬러였지만 지금은 은퇴하고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기무라”로 자신의 여섯 살 어린 아들 “와타루”를 백화점 옥상에서 밀어버려 중태에 빠뜨린 중학생 소년 “왕자”를 죽이기 위해 열차에 탑승한 것이다. 칠호차에서 그 소년을 발견하지만 전기 충격기에 당해 그만 기절해 양쪽 손목과 발목이 두툼한 천으로 된 띠에 꽁꽁 묶여 버리는, 한마디로 소년의 포로가 되어 버리는 어이없는 상황에 빠진다. 한편 잘나가는 청부업자 콤비 “밀감”과 “레몬”은 납치된 지하세계의 거물 “미네기시 요시오”의 외아들인 “도련님”과 납치범들에게 건넨 몸값이 담겨있는 트렁크를 빼내오라는 청부를 받고 우여곡절 끝에 구출해내 “기무라”가 타고 있는 열차에 오른다. 그런데 역시 어이없게도 객차 사이에 위치한 짐칸에 넣어둔 트렁크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간신히 구해낸 도련님 또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이 열차에 이들 외에 또 다른 청부업자 하나가 타고 있었으니 실력은 출중하지만 하는 일 마다 불운이 따르는 킬러 “나나오”였다. 그가 바로 밀감과 레몬의 트렁크를 빼돌린 것 - 물론 밀감과 레몬의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지만 - 인데, 기껏 빼돌린 트렁크마저 다시 사라지고 말자 나나오는 자신의 불운이 시작했다고 한탄한다. 어디로 도망갈 곳은 커녕 숨을 곳 조차 마땅치 않은 고속 신칸센 열차에 함께 탑승한 이들은 시끌벅적 난장판 같으면서도 위험천만한 기차 여행길을 함께 한다. 

시속 200 km로 질주하는 신칸센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저마다의 사정을 가지고 함께한 누구 하나 평범하지 않은 개성 만점의 캐릭터들이 벌이는 좌충우돌, 위험천만한 기차 여행(?)을 담아낸 이 책은 독특하고 색다른 설정들이 이야기의 긴장감과 재미의 완급을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독자들의 호흡을 뺏을 줄 아는 이사카 코타로 특유의 글 솜씨로 전혀 위화감이나 거부감 없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전작 못지않은 재미와 스릴을 맘껏 선사하고 있다. 킬러들이 등장하고 폭력과 살인 사건이 등장하지만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잔인함은 전혀 느낄 수 없고, 연속되는 어이없고 황당한 사건들도 전혀 과장스럽지 않고 마치 만담(漫談)을 듣는 듯한 유머스러움과 유쾌함마저 느껴진다. 책 중반 밀감과 레몬 콤비가 죽고, 기무라 또한 죽음 직전에 이르는 장면에서는 과연 이 이야기가 어떻게 결말을 맺으려고 이러나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움마저 느껴졌는데, 전혀 의외의 인물 -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정체를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해주시기를^^ - 들이 열차에 올라 상황을 단번에 정리하고 숨은 킬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그저 즉흥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사전에 전체 이야기 얼개를 치밀하고 정교하게 구성하여 복선과 암시를 곳곳에 숨겨두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 독자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지만 - 결말을 이끌어 가는 이사카 고타로의 글솜씨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온다. 다만 천진난만한 얼굴에 악마와 같은 잔인함을 감추고 있는 소년 “왕자”의 존재는 너무 비현실적인 설정 - 하긴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도 찬찬히 살펴보면 현실에서는 전혀 만나 보기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캐릭터 일색이다. 그중 왕자가 그 정도가 더 심하다는 뜻이다 - 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오히려 왕자라는 존재가 픽션을 “리얼리티”로 평가하려는 보수적인 평단에 이 책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100% 완전 허구다라고 강변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처럼 장소적 배경과 캐릭터의 독특함, 치밀한 이야기 전개, 잔인함과는 거리가 먼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건들의 연속 등 600 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이 전혀 부담을 느낄 겨를 없이 빠르게 읽히는 이 책은 “이사카 코타로는 재미있다”라는 나의 믿음을 다시 한번 입증해 준 “재미있는”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그의 소설은 어떤 작품을 골라도 실패하는 법이 없다”라는 어느 일본 독자의 평처럼 앞으로도 멋진 재미를 선사해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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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의 기록 - 동아투위에서 노무현까지
정연주 지음 / 유리창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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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 KBS 전 사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사장에 재임하던 시절이 아니라 임기가 15개월이나 남아 있음에도 현 정권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고 나서 부터이다. 정사장 뿐만 아니라 현 정권과 “코드”가 안 맞다는 이유 - 정확히는 전임 대통령인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임명했다는 이유겠지만 - 로 여러 문화기관 단체장들이 법적으로 보장된 임기조차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기사들을 접하면서 “코드 인사”, “낙하산 인사”는 절대로 없다던 약속을 이렇게 하루 아침에 저버릴 수 있는지 이 정권의 후안무치함에 혀를 내둘렀었다. 그 후로 진보성향 인터넷 매체들에 올라온 정연주 사장의 글들을 읽으면서 이 분의 식견과 성찰의 깊이에 꽤나 매료되어 이 분이 걸어온 길이 어떠했는지 절로 궁금해졌다. 그러던 참에 정연주 사장이 언론인으로서 지난 40 여 년 동안 걸어온 삶을 술회한 책을 한 권 만나게 되었다. 바로 <정연주의 기록; 동아투위에서 노무현까지(유리창/2011년 8월)>이 바로 그 책이다. 

작가는 먼저 “책머리에; 젊은 벗들에게 보내는 글 - 우리 시대 언론의 역사와 현실”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아주 조그마한 기여라도 했으며 하는 마음으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동아일보 입사 시절부터 2003년 4월 말, KBS 사장이 된 순간까지를 간단하게 되짚어보고 지난 2002년 말에 출판되었다가 절판된 <서울-워싱턴-평양>을 크게 개정·보완하여 다시 출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을 발간하는 이유가 자신이 언론인으로서 살아온 반세기 가까운 우리 시대의 이야기, 특히 언론과 관련된 우리 역사와 현실을 젊은이들이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 군부독재 시절의 역사, 특히 언론의 이지러진 얼굴을 이야기하면 신기해하는 젊은 후배들에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본문에 들어서면 1970년 동아일보 입사에서 2003년 KBS 사장에 취임하기까지 30여년간 작가가 겪어온 에피소드들을 시간 순으로 자서전처럼 기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바탕으로 정연주 사장의 프로필을 간단하게 요약해본다. 제일 먼저 1970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느꼈던 기자로서의 좌절감과 함께 정권의 억압에 의해 사상 초유의 백지 광고 사태와 국민들의 성원으로 광고를 채웠던, 그리고 강제 해직에 이르기까지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동아투위)”에 가담하여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을 벌였던 시절을 회고한다. 결국 긴급 조치 위반으로 구치소에 수감될 수 밖에 없었던 작가는 구치소 수감 시절 에피소드와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엮으려는 군부를 피해 1년 여를 넘게 도피해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1년여의 고통스러운 도피 생활 끝에 김대중씨 재판이 끝나자 집으로 돌아오게 된 작가는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되고, 그곳에서 87년 6월 항쟁과 국민 성금으로 창간된 한겨레신문 창간의 감격을 맛보게 된다. 1989년 마흔 넷의 나이로 한겨레신문 워싱턴 특파원으로 다시 기자가 된 작가는 80년대 말 임수경으로 대표되는 통일 운동을 머나먼 타국으로 취재하고, 1990년 대 냉전해체의 현장과 북미회담, 그리고 첫 단독 방문 취재에 이르기까지 숨은 사연들을 소개한다. 2000년에 귀국하여 한겨례 논설 주간을 역임하던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하던 2003년 3월말 퇴사하게 되는데, 그즈음 KBS 신임 사장 선임 과정에서 KBS 노조와 시민·사회단체가 추천한 ‘개혁적 KBS 사장 후보’으로 뽑혀 한 표 차이로 KBS 사장에 당선된다. 책에서는 사장으로 선임되는 과정과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만남, 그리고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 직전 봉하마을 에서의 만남을 술회하고 있다.  

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KBS 사장에 연임한 후 현 정권 들어 강제로 해임될 때 까지의 과정을 여러 기사나 뉴스를 통해 간단히 재구성해보면 전임 대통령의 “코드 인사” - 분명 공정한 추천과 투표로 인해 당선되었음에도 억지를 부려 - 라며 감사원, 검찰, 국세청 등이 총동원된 사퇴 압박으로 인해 결국 2008년 8월 11일, 남은 15개월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강제로 해임되고 만다. 그러나 2011년 1월 14일 서울고법 행정2부(김병운 부장판사)는 정연주 전 사장이 제기한 해임 무효 청구소송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해임을 취소하라고 판결한다.

책은 이처럼 언론인 정연주 40년 인생을 그가 겪어온 시대 상황과 함께 하나 하나 담고 있다. 모교(서울대) 시위에 취재하러 갔지만 농성장에 붙어 있는 ‘개와 기자는 접근 금지!’ 라는 팻말에 부끄러움과 함께 분노- 최근 모 방송국 기자도 취재하러 나갔는데 “XX 방송국 접근 금지”라는 피켓을 보고 심하게 부끄러웠다고 토로하는 기사를 읽었었다. 40년이 지났는 데도 언론 현실은 결코 나아진 것이 없나 보다 - 가 치밀면서 기자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한 그는 결국 <동아투위>에 막내로 참가하면서 가시밭길과 같은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같이 언론 자유화 투쟁에 나섰던 선배, 동료들과의 투쟁 과정과 수감 생활 에피소드들도 인상적이지만 자식으로서 그리고 남편과 아버지로서 그가 겪어야 했을 고초들, 즉 어린 아이들에게 외국 유학 갔다고 속이고 도피 생활을 했던 사연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남편의 거처를 대라며 고초를 겪었던 아내, 1년 여의 도피 생활 중에 미국 형 네로 떠나시는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애를 쓰다가 아버지만 동네 목욕탕에서 잠깐 만나 뵙고 어머니는 멀리서 지켜봐야 했던, 그렇게 만나 뵙던 부모님의 모습이 부모님께서 결국 미국에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생애 마지막 모습이었던 애절한 사연들이 참 인상 깊었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KBS와 검찰청만큼은 절대 전화하지 않겠다는 처음 약속을 임기 내내 올곧이 지켰던 대통령을 끝내 지켜 드리지 못하고 보낸 아쉬움을 토로하는 장면에서는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게 한다. 

그가 이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가 겪어온 참담했던 언론 현실이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결코 해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려고 한 것인지 모르겠다.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임기가 남은 문화 단체장들과 유명 연예인들을 싹쓸이 청소하듯 몰아내고, 또한 사상 초유의 인터넷 필화(筆禍) 사건이라 불리우는 “미네르바” 사건과 PD 수첩 광우병 보도 고소 고발 사건 등등 그들이 줄곧 주장해온 “잃어버린 10년”보다 훨씬 그 이전으로 언론 민주화 시계 바늘을 되돌려 놓으려는 현 권력에게는 언제든지 과거처럼 거센 역풍(逆風)을 맞을 수 있다는 경고를, 그리고 지금 젊은 청년들에게도 지금 현실을 잠시 잠깐이라도 애서 눈을 감거나 외면하려고만 한다면 언제든지 그가 지난 40년 동안 겪어왔던 과거와 전혀 다를 것 없는 상황이 그대로 지금 세대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이 책을 통해서 경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해임된 KBS 전 사장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정연주 전 사장에 대해서 언론 자유와 민주화에 앞장섰던 “참 언론인”이라는 “진정성(眞正性)”을 느껴볼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처럼 사장 자리에서 해임되었던, 그보다도 대중성과 인기는 훨씬 뛰어나서 많은 국민들의 성원을 받았던, 그러나 그런 성원을 헌신짝처럼 배신하고 자신을 쫓아냈던 곳에 의탁해 지방선거에 나섰던 또 다른 방송국 전 사장이 계속 떠올랐다. 과연 그는 집권여당의 강력한 지원에도 낙선(落選)한 이유가 바로 “진정성”에 있었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깨달았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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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도쿠 살인 사건 스도쿠 미스터리 1
셸리 프레이돈트 지음, 조영학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1 부터 9 까지 9개의 숫자를 가로, 세로 겹치게 않게 빈칸에 채워 넣는 게임인 “스도쿠(Sudoku)”을 좋아한다. 어린이들에게는 수학적 두뇌 개발을, 나이 드신 어른들께는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퍼즐을 푸는 재미가 쏠쏠해서 휴식 시간이나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자주 하는데, 특히 난이도를 조정하면 4~5분 안에 한 판을 완료할 수 있기 때문에 화장실에서 볼 일 보는 시간 동안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최고(?)의 게임 - 혹자는 너무 열중하면 변비가 생길 수 있다고 금(禁)하라고 충고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화장실에 너무 오래 머무르는 폐단 때문인 것 같다^^ - 이라 핸드폰으로 종종 하곤 한다. 퍼즐의 재미와 두뇌 개발이라는 이중 효과를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이 “스도쿠”를 역시 작가와 독자의 두뇌 게임을 표방하고 있는 “추리소설”과 연계하면 어떤 재미가 있을까? 그래서 “셸리 프레이돈트”의 <스도쿠 살인 사건(원제 THE SUDOKU MURDER/밀리언하우스/2011년 7월)>는 “최고의 지적 게임 스도쿠와 살인의 조합으로 본격 미스터리의 긴장감은 물론 지적 쾌감을 극대화시킨 작품”이라는 홍보 문구만 봐도 스도쿠와 추리소설을 모두 좋아하는 나로서는 절로 구미가 확 당기는 그런 소설이었다.

정부의 극비 싱크탱크인 이론수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는“케이트 맥도널드”는 고향 마을인 “그랑빌”에서 퍼즐박물관을 운영하는 자신의 스승이자 친구인 “P.T. 에번데일” 교수에게서 도와달라는 편지를 받고 3주간의 긴급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온다. 고모와 에벤데일 교수에게서 그간 사정을 들어 보니 박물관이 위치한 역사 지구에 신규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박물관이 헐릴 지경에 처해졌고, 은행에 매달 상환한 것으로 알고 있던 대출금이 상환된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 자금이 동결되고 박물관 또한 처분될 위기에 처했으며, 또한 교수님 곁에서 잔심부름과 말벗을 하던 소년 “해리”가 며칠 째 안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케이트는 박물관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해보지만 해결하기가 결코 쉽지 않아 막막해 한다. 그러던 어느날 케이트는 교수의 전화를 받고 급히 박물관을 방문하지만 이미 죽어 있는 교수를 발견한다. 케이트는 911에 신고하고 급한 마음에 응급 조치를 해보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고, 설상가상으로 교수의 시체를 제일 먼저 발견했다는 이유로 중대 용의자로 몰려 경찰에 연행된다. 케이트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지만 고모와 마을 주민들의 도움에 힘입어 하룻만에 풀려난 케이트, 그런 그녀를 경찰 서장인 “미쉘”은 영 의심쩍은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실종되었다는 해리가 돌아오고, 케이트와 해리, 그리고 경찰서장 미쉘은 각자의 방식대로 살인 사건을 조사해보지만 변변한 단서조차 없고, 이방인을 경원시하는 폐쇄적인 마을 분위기 탓에 수사는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않고 지지부진하기에 이른다. 케이트는 교수의 시신 곁에서 발견한 교수의 피가 묻은 스도쿠 퍼즐 사진을 입수해서 풀어보기 시작한다. 과연 스도쿠 퍼즐은 이 살인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그리고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

“스도쿠” 퍼즐과 미스터리의 조화라는 기대감이 너무 컸던 것일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는 제목이 <스도쿠 살인사건>이라 스도쿠 퍼즐이 살인사건의 결정적인 비밀을 제공하는 그런 류일 것으로 짐작했는데, 스도쿠 뿐만 아니라 책에 등장하는 각종 퍼즐은 그저 장소적 배경이나 소품에 불과할 뿐 사건 해결에는 그다지 연관이 없고, 사건 자체도 교수 살인 사건 한 건이 등장하지만 정교한 트릭이나 플롯, 극적 긴장감과 스릴을 맛볼 수 없는 밋밋한 수준 - 소개글에는 “이야기 곳곳에 깔린 복선과 암시, 단서 하나하나를 퍼즐처럼 짜맞춰가는 과정이 구조적으로 훌륭”하다고 되어 있는데 내가 과문한 탓인지 그다지 와닿지는 않는다. 차라리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교수의 피가 묻었다는 스도쿠 퍼즐을 처음부터 제시해 독자도 풀어볼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 에 불과해 처음 기대와는 다른 이야기에 다 읽고 나서 실망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스도쿠”와 “미스터리”, 이 두 단어에 너무 기대를 품지 않고 이야기 자체로만 본다면 재미있는 책인데, 이방인을 배척하는 폐쇄적 시골마을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다 보니 이방인인 경찰서장인 “미쉘”을 왕따하고 자신의 마을 출신인 “케이트”를 절대 옹호하는 마을 주민들, 남자는 안정적인 직장이 우선이라며 케이트에게 맞선을 강요하는 소개하는 케이트 고모, 티격태격하면서도 묘한 애정이 싹트는 미쉘과 케이트의 로맨스 등 “코지 미스터리” 특유의 소소하면서도 유쾌함을 한껏 담아내고 있어 부담감 없이 쉽게 읽힌다. 외국에서 이 책이 인기를 얻었던 이유도 스도쿠와 살인 사건의 해결이라는 “지적 유희”가 주는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코지 미스터리 특유의 유쾌함과 재미가 더 크게 어필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도의 지적 스릴러라는 기대감을 충족시키지는 못하지만 소설 자체로는 꽤나 재미있었던 책으로 평가하고 싶다. 작가의 후속작들 또한 스도쿠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데,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더욱 강조했다고 하니, 후속 작품들에서는 좀 더 멋진 지적 스릴러를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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