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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비틀 Mariabeetle - 킬러들의 광시곡
이사카 고타로 지음, 이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 SF, 판타지 등 장르 소설을 즐겨하다 보니 참 많은 일본 작품들과 작가들을 만나게 된다. 한 권만 읽어봐도 다시는 선택하지 않게 되는, 일회성에 그치는 그런 작가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어떤 작가는 한 권 읽으면 다른 작품들도 저절로 손이 가게 되는, 작가 이름만으로도 선뜻 책을 선택하게 하는 그런 “재미”를 보장하는 작가들도 있는데, 일본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작가 중에 하나로 꼽힌다는 “이사카 코타로(伊坂 幸太郞)”가 바로 나에게는 그런 작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보니 출간된 그의 작품이 20여 권 - 만화는 제외 - 에 이를 정도로 꽤나 많은 작품이 출간되어 있고, 책 당 수십 개씩 달려 있는 리뷰를 읽어봐도 호평(好評)이 다수인 것을 보면 이사카 고타로에 대한 이런 평가는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작품 중 읽은 작품을 꼽아 보니 그의 작품 중 읽은 작품을 꼽아 보니 <사신 치바>, <종말의 바보>, <골든 슬럼버>, <바이바이 블랙버드> 이렇게 네 권 -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전체 출간작의 1/5도 채 되지 않는다 - 을 읽었다. 네 권 모두 뛰어난 가독성과 몰입감, 재미, 잔잔한 감동까지 느꼈었던 터라 그의 신작인 <마리아비틀 Mariabeetle; 킬러들의 광시곡(원제 マリアビ-トル / 21세기북스/2011년 6월)도 전혀 망설임 없이 선뜻 선택하게 되었다.
항상 붐비는 도쿄 역 플랫폼에 대기하고 있던 “하야테” - 도쿄 역과 신아오모리 역을 오가는 신칸센 노선 - 열차에 수상쩍은 한 남자가 탑승한다. 그는 전직 킬러였지만 지금은 은퇴하고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기무라”로 자신의 여섯 살 어린 아들 “와타루”를 백화점 옥상에서 밀어버려 중태에 빠뜨린 중학생 소년 “왕자”를 죽이기 위해 열차에 탑승한 것이다. 칠호차에서 그 소년을 발견하지만 전기 충격기에 당해 그만 기절해 양쪽 손목과 발목이 두툼한 천으로 된 띠에 꽁꽁 묶여 버리는, 한마디로 소년의 포로가 되어 버리는 어이없는 상황에 빠진다. 한편 잘나가는 청부업자 콤비 “밀감”과 “레몬”은 납치된 지하세계의 거물 “미네기시 요시오”의 외아들인 “도련님”과 납치범들에게 건넨 몸값이 담겨있는 트렁크를 빼내오라는 청부를 받고 우여곡절 끝에 구출해내 “기무라”가 타고 있는 열차에 오른다. 그런데 역시 어이없게도 객차 사이에 위치한 짐칸에 넣어둔 트렁크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간신히 구해낸 도련님 또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이 열차에 이들 외에 또 다른 청부업자 하나가 타고 있었으니 실력은 출중하지만 하는 일 마다 불운이 따르는 킬러 “나나오”였다. 그가 바로 밀감과 레몬의 트렁크를 빼돌린 것 - 물론 밀감과 레몬의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지만 - 인데, 기껏 빼돌린 트렁크마저 다시 사라지고 말자 나나오는 자신의 불운이 시작했다고 한탄한다. 어디로 도망갈 곳은 커녕 숨을 곳 조차 마땅치 않은 고속 신칸센 열차에 함께 탑승한 이들은 시끌벅적 난장판 같으면서도 위험천만한 기차 여행길을 함께 한다.
시속 200 km로 질주하는 신칸센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저마다의 사정을 가지고 함께한 누구 하나 평범하지 않은 개성 만점의 캐릭터들이 벌이는 좌충우돌, 위험천만한 기차 여행(?)을 담아낸 이 책은 독특하고 색다른 설정들이 이야기의 긴장감과 재미의 완급을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독자들의 호흡을 뺏을 줄 아는 이사카 코타로 특유의 글 솜씨로 전혀 위화감이나 거부감 없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전작 못지않은 재미와 스릴을 맘껏 선사하고 있다. 킬러들이 등장하고 폭력과 살인 사건이 등장하지만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잔인함은 전혀 느낄 수 없고, 연속되는 어이없고 황당한 사건들도 전혀 과장스럽지 않고 마치 만담(漫談)을 듣는 듯한 유머스러움과 유쾌함마저 느껴진다. 책 중반 밀감과 레몬 콤비가 죽고, 기무라 또한 죽음 직전에 이르는 장면에서는 과연 이 이야기가 어떻게 결말을 맺으려고 이러나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움마저 느껴졌는데, 전혀 의외의 인물 -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정체를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해주시기를^^ - 들이 열차에 올라 상황을 단번에 정리하고 숨은 킬러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그저 즉흥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사전에 전체 이야기 얼개를 치밀하고 정교하게 구성하여 복선과 암시를 곳곳에 숨겨두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 독자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지만 - 결말을 이끌어 가는 이사카 고타로의 글솜씨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온다. 다만 천진난만한 얼굴에 악마와 같은 잔인함을 감추고 있는 소년 “왕자”의 존재는 너무 비현실적인 설정 - 하긴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도 찬찬히 살펴보면 현실에서는 전혀 만나 보기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캐릭터 일색이다. 그중 왕자가 그 정도가 더 심하다는 뜻이다 - 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오히려 왕자라는 존재가 픽션을 “리얼리티”로 평가하려는 보수적인 평단에 이 책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100% 완전 허구다라고 강변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처럼 장소적 배경과 캐릭터의 독특함, 치밀한 이야기 전개, 잔인함과는 거리가 먼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건들의 연속 등 600 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이 전혀 부담을 느낄 겨를 없이 빠르게 읽히는 이 책은 “이사카 코타로는 재미있다”라는 나의 믿음을 다시 한번 입증해 준 “재미있는”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그의 소설은 어떤 작품을 골라도 실패하는 법이 없다”라는 어느 일본 독자의 평처럼 앞으로도 멋진 재미를 선사해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