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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 上 - 신화적 상상력으로 재현한 천 년의 드라마
스티븐 세일러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월
평점 :
로마(Roma).
기원전 8세기 경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서 지중해를 내해(內海)로 삼았던 서구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이자 그리스와 더불어 오늘날 서구(西歐)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국가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서양의 고대사가 곧 로마의 역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서구 역사상 흥망성쇠를 거듭한 수많은 국가 중 가장 중요한 국가인 “로마”의 역사는 학창시절 “세계사(世界史)” 수업에서, 각종 역사 교양 서적들이나 소설, 영화들을 통해서 많이 접해봤는데 기원(起源)부터 멸망(滅亡) - 중세까지 동로마제국,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지만 로마의 멸망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A.D. 476년으로 보는 것이 정설(定說)이라고 한다 - 에 이르기까지 통사(通史)적으로는 제대로 접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동양권에서는 가장 유명한 “로마사(史)”라 할 수 있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도전해본 적이 있는데, 로마 제국 주의를 지나치게 옹호한 나머지 변방의 국가와 문명들은 생략 또는 왜곡하는 편협한 역사적 시각과 함께 작가의 주관적 해석이 너무 장황하고 과도하게 서술되어 있어 읽다가 그만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언제든 “로마”를 제대로 공부해보자 하는 욕심은 늘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동안 꿈꿔왔던 역사 공부의 대상까지는 아니지만 로마의 기원부터 불세출의 영웅 “카이사르”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주요 사건들을 신화와 접목시켜 색다르게 해석해 낸 “재미있는” 로마 이야기를 만났다. 이미 로마 역사와 추리 소설을 접목시킨 이색적인 로마이야기 <로마 서브 로사(Roma Sub Rosa)> 시리즈를 선보인 바가 있는“스티븐 세일러(Steven Saylor)”의 <로마; 신화적 상상력으로 재현한 천년의 드라마 상,하(원제 Roma/청림출판/2011년 12월)>이 바로 그 책이다.
책은 보통 로마사 책들이 그 시발점으로 삼는 건국 영웅 “로물루스”와 “레무스” 이야기가 아닌 엉뚱하게도 후기 청동기 시대인 B.C. 1000 년 무렵, 로마의 일곱 언덕에 아직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그저 쉼터로 이용했던 소금 장수들과 쇠붙이 장수들 이야기(Ⅰ. 소금길의 유숙지) 부터 시작한다. 소금장사 일행을 이끌고 있는 “라르트”와 그녀의 딸 “라라” 일행은 장삿길에서 종종 쉼터로 머무르는 강(江) 안에 있는 섬에서 금속 가공 기술자인 “타르케티오스” 일행을 만나게 되고, 두 일행은 갓 잡은 사슴 고기를 나눠 먹고 각자의 야영지에서 잠을 청하게 된다. 잠을 청하던 라르트는 야영지에 피워 놓은 모닥불에서 새처럼 날개달린 남근(男根) 형상의 불의 정령(精靈) “파스키누스”의 계시를 받고 자신의 딸 라라를 이방인인 타르케티오스와 동침하게 한다. 타르케티오스는 라라에게 새로운 생명의 씨앗과 함께 태양빛처럼 순순한 노란색의 가공하지 않은 금속 덩어리를 실로 꿰어 만든 호신부(護身符)를 남겨주고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를 질투한 소금 장사 일행의 “포”가 타르케티오스 일행을 죽여 버리면서 라라와 타르케티오스의 인연은 하룻밤으로 끝나버리게 되고, 호신부는 “파스키누스” 형상으로 만들어져 그녀의 자손들에게 대대로 전수된다. B.C. 850년 경 드디어 테베레 강의 일곱 언덕에 소수의 사람들이 정착해 살아갈 무렵 “헤라클레스와 카쿠스 전설”로 잘 알려진 사건이 발생 - 고대 신화가 늘 그렇듯이 인간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이 신화로 채색되고 종교로 승화된다 - 하고, 정착민들은 카쿠스라는 괴물 인간을 물리친 “헤라클레스”를 기려 최초로 제단을 만들고 제의(祭儀)를 모셨는데, 그 제의를 주관했던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이라 할 수 있는 “포티티우스” 가문 - 라라의 파스키누스 호신부를 계승한 가문이기도 하다 - 과 “피나리우스” 가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처럼 헤라클레스 신화에서 출발한 두 가문은 B.C. 757 년경 돼지치기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도시를 건설하고 왕을 자처했던 로마 건국시기, B.C. 510 년경 로마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섰던 시기, B.C. 450년경 로마 최고(最古)의 성문법(成文法)이라는 “12표법”이 공표되던 시기를 거쳐 흥망을 거듭하고, 포티티우스 가문에 전해 내려오던 “파스키누스” 호신부도 이때에 이르러 가문의 피를 이은 사내애였지만 정식 호적에 올리지 못하고 노예가 되어 버린 “펜나투스”에게로 전해지고 만다. 우여 곡절 끝에 호신부는 다른 가문에 입양된 자손들에게 전해지고 몰락하게 된 포티티우스 가문은 고래(古來)부터 모셔온 헤라클레스 제사를 국가에 넘겨 버리게 되고, 호신부 계승자는 자신의 출신이 드러날까 두려워 포티티우스 가문의 남자들을 독살(毒殺)하기에 이르고, 이런 참사는 헤라클레스 제의를 포기해서 신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고 알려지게 된다. 사실상 로마의 가장 오래된 가문인 포티티우스 가문이 멸문(滅門)하게 된 것이다. 호신부는 이런 혼란과 참사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카르타고의 대전쟁인 “포에니 전쟁(B.C.216~183)”과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B.C.146~121)", “독재자 술라(B.C. 81~74)"의 시대를 거쳐 로마 공화정을 종식시키고 절대 왕정의 시대를 열었던 “카이사르” 시대에 이르러 카이사르 유언장에서 3인의 상속자로 알려진 “루키우스 피나리우스”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천년의 세월 동안 전해 오면서 그 형상이 닳아 없어져 버린 호신부처럼 로마 최초의 신령(神靈)이었던 “파스키누스”와 두 가문의 영욕의 세월도 어느덧 희미해져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간 로마의 역사를 다룬 책들이 왕에서 공화정으로, 다시 카이사르 이후의 왕정의 복귀라는 지배 계급 중심으로 기술했다면 이 책은 제목처럼 신화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파스키누스” 호신부의 소유자들의 시각과 관점에서 로마 천년의 역사를 재조명한다는 것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겠다. 11편 각각의 이야기로 구성된 역사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책에서 건국의 시초 쌍둥이 형제와 “세익스피어”의 비극(悲劇)에도 등장하는 고대 로마의 전설의 장군이자 배신자로 낙인 찍혀 추방되었다가 이방인들을 이끌고 로마에 복수하려 했던 “코리올라누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을 물리친 포에니 전쟁의 영웅 “스키피오”, 4 천 여 명에 이르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철권통치를 했지만 영웅으로 칭송받았던 독재관 “술라”, 그리고 말이 필요 없는 “카이사르”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주요 인물들이 빠짐없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때로는 권력의 핵심으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노예로 등 서로 다른 계급과 신분에서 그들을 만났던 호신부의 계승자들의 시점으로 그들을 그려낸 것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이렇게 영웅들의 고뇌와 번민, 성공과 실패를 다룬 영웅 중심의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벗어나 역사서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그 당시 여러 계급들의 이야기들을 작가 특유의 상상력으로 재구현해내서 마치 그 당시를 살았던 인물들이 자신들이 겪었던 그네들의 삶을, 어쩌면 역사 속 숨은 비화(秘話)들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어쩌면 주연(主演)들이 아닌 조연(助演)들의 이야기라서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 흐름과는 다르게 전개되고, 때로는 단편마다 이야기가 분절(分節)된다는 느낌이 들 수 도 있는데, 주연들 이야기는 역사서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획일화된 전개가 될 수 밖에 없지만 조연들의 이야기는그런 흐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작가가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 재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차피 이 책이 전문 역사 서적이 아닌 소설인 이상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다만 결말에서 파스키누스 호신부가 그저 기념물로써 대대손손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흐름을 바꾸는 신성(神聖)의 징표로 그려졌다면 조금더 극적인 재미를 맛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살짝 들었다.
로마사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의 일천한 지식만 가지고 있다 보니 이 책의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허구(虛構)이고 사실(史實)인지를 구별해 낼 수 는 없었지만, 마치 로마 역사를 드라마화한 TV 시리즈를 첫 편부터 마지막 편까지 단숨에 다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참 재미있는 책이었다. 시오노 나나미 식의 장대한 분량의 로마사를 읽을 엄두가 나지 않거나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한 역사 교양서 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주관이 너무 짙어 아쉬운 분들, 로마사에 처음 입문하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안성맞춤인 그런 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이 책이 꽤나 재미있다 보니 작가의 대표작이자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로마 서브 로사(Roma Sub Rosa)>이 절로 궁금해져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색다르다”, “재미있다”라는 호평들이 제법 많다. 기회가 된다면 역사 미스터리로 로마를 여행해보는 것도 꽤나 즐거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