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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회장의 그림창고
이은 지음 / 고즈넉 / 2011년 11월
평점 :
고(古) 미술품들을 감정(鑑定)하는 TV 모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충무공(忠武公) 친필(親筆)인줄 알고 고이 모셔온 글씨가 위조품으로 밝혀지는 웃지못할 사례도 있었지만 지난 2011년 7월에는 18세기에 그려졌다고 알려진 그림 한 점이 방송 시작한지 16년 이래 역대 최고가인 15억원을 기록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 방송을 보면서 우리 집에는 왜 저런 그림이나 글씨 한 점 없을까, 조상님들은 저런 그림 하나 남겨주셨으면 자손들이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며 괜히 엄한 조상탓(?)을 하기도 하고 혹시 하는 마음에 옛날 서적이나 그림이 없을까 오래된 살림살이를 뒤져보기도 하지만 매번 헛수고이다. 이처럼 미술품들은 예술로써의 가치뿐만 아니라 훌륭한 재테크 수단이자 재벌들의 편법 증여(贈與)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던데, 몇 해 전 모 대기업 비자금 사건과 연루되어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은, 그냥 보면 미국 만화 한 컷에 지나지 않을 것 같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거래 가격이 80 억원을 호가하고 지금은 몇 배가 더 가격이 올랐을 수 도 있다고 하니, 그리고 미술시장 특성상 출처나 소유자가 노출되지 않아 정확한 매입자와 매입가격을 파악하기 어렵고, 고가의 외국 작품의 경우에는 가격 산정조차 쉽지 않다고 하니 그림 몇 점만 잘 거래한다면 천문학적인 금액을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상속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비자금의 온상이자 편법 증여의 수단으로 잘 알려진 “미술 시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미술과 사진을 공부하고 미술학 박사라는 자신의 경력을 십분 살려 “미술관”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을 집필해오고 있는 작가 “이은”의 소설 <박회장의 그림 창고(고즈넉/2011년 11월)>는 작가 스스로가 허구의 풍자(諷刺) 소설이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 모 대기업 비자금 사건이 바로 연상되는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엄마 병원비 때문에 사채업자 “양아치”에게 천만원을 빌렸지만 이자가 붙고 또 붙어 결국 삼천 백만원이 되어 버린 “소미”는 미용실로 찾아온 양아치에 일주일내로 모두 갚으라는 협박과 함께 온갖 수모를 당하고야 만다.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동거남이자 백수 청년 “진구”와 다리가 불편하고 지능 또한 떨어지는 그녀의 남동생 “기호”는 그런 소미를 돕기 위해 거리로 나서 자동차 자해 공갈단으로 푼돈이라도 뜯어내려고 하지만 영 소득이 없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외제차를 발견하고 기호가 그 차에 뛰어든다. 그런데 차를 몰던 고급 옷의 여인이 반항을 하자 엉겁결에 지갑이 든 백과 차에 실려 있는 그림을 훔쳐 달아난다. 그런데 이들 상대를 골라도 단단히 잘 못 골랐다. 그 여인은 굴지의 재벌 “세계 그룹”에서 운영하는 미술관 관장이었고 그들이 훔쳐간 돈과 그림은 세계 그룹의 “박노수” 회장 지시로 집권당 총수에게 몰래 상납하기로 한 뇌물들이었던 것이다. 특히 진구가 길거리에서 샀다며 미용실에 걸어놓으라고 내민 그림은 시가로 백억 원대에 이르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과 박회장이 여당 총재에게 보내는 은밀한 편지 때문에 일대 난리가 난다. 박회장은 자신이 거느리는 깡패들인 “은갈치파”에게 그림과 편지를 회수해오라고 지시를 내리고, 소미의 집은 그림을 찾기 위해 난입한 깡패들 때문에 일대 난장판이 된다. 설마 설마 했지만 급한 마음에 양아치에게 돈을 갚아버린 소미는 진구가 저지른 짓이 “보통”일이 아님을 직감하고 집에서 도망 나와 모텔로 숨어들고 고향에 내려간 진구와 기호를 불러 들여 사정을 전해 듣고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졌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소미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바로 박회장을 협박해서 5억원의 돈을 받아내고 그림을 넘기겠다는 것이다. 소미는 약속한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인 종로 경찰서 앞에 나서는데, 갑작스레 돈을 갚아 버린 소미를 수상히 여긴 양아치 일행이 나타나 소미에게서 그림을 뺏어든다. 그런데 이 때 승합차 한 대가 다가오더니 덩치가 산만한 사내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와 소미와 양아치 일행을 에워싸는데 또 다른 승합차가 다가와 역시나 잘 차려 입은 사내들이 쏟아져 나와 덩치들과 백주대낮에 경찰서 앞에서 일대 활극을 벌인다. 덩치들은 바로 박회장이 고용한 “은갈치파” 였지만 그들과 활극을 벌인 사내들은 미술품을 전문으로 모으는 수수께끼의 조직인 “피카소파” 였던 것이다. 가까스로 도망친 소미는 이 사태가 영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마음을 좀 더 당차게 먹고 본격적으로 박회장을 골탕 먹이기로 작심하고 계획을 꾸민다. 계란에 바위치기 밖에 되지 않을 무모한 소미의 계획은 과연 무사히 성공할 것인가. 그리고 몇 해 전 방송 기자에게 폭로되었지만 정·관·언(政官言) 인맥을 총동원으로 가까스로 무마시킨 박회장의 “그림 창고”는 과연 그 실체를 드러낼까? 페이지가 거듭될수록 전대미문의 모험이자 사기극이 점입가경에 치닫게 된다.
이야기를 요약한다면 사채 때문에 절절 매는 애인과 누이를 위해 기껏 자동차 자해 공갈단으로 나섰건만 하필이면 대재벌가의 차인데다가 거기에 그들이 훔친 것이 집권당 총수에게 보내는 뇌물성 그림과 돈이었다는 재수 옴 붙어 버린 남녀의 이야기라 할 수 있겠는데 그런 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버렸다면 일종의 정치 소설이라 할 수 있겠고 오히려 더 현실적이었겠지만 엉뚱하게도 그들이 재벌 회장과 깡패들에 맞서 사상 최대의 비리를 밝혀낸다니 일견 황당하고 허무맹랑하기까지 한 그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책 페이지를 거듭할 수 록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활극과 사기극이 너무나 아슬아슬해서 눈길을 잠시라도 뗄 수 없게 만들고, 마지막의 깔끔하고 통쾌한 결말이 절로 가슴을 다 시원하게 해주고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참 재미있고 신나는 그런 책이었다. 몇 해 전 비자금과 편법 증여를 위해 미술품을 거래했다는 것이 드러나 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그 사건”이 절로 떠오르게 되는 이 책에서 재벌 회장과 미술관 관장은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논조로 자신들을 변론한다. 즉 박회장은 그동안 나라 발전을 위해 기여한 공로를 따져 본다면 국민들이 그림으로 비자금을 돈 세탁했다고 욕할 게 아니라 오히려 박수를 보내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미술관 관장은 예술이 순수했던 적이 없었다며 미술품을 가지고 돈 세탁하는 것도 예술 행위의 일부분이고 재벌 기업이 뒤에서 봐주지 않으면 예술도 예술가도 없다고 주장한다. 경제와 예술 발전을 위해 기여한 그들이 무슨 죽을 죄를 지은 거 마냥 비난받고 손가락짓을 당하는 게 못내 억울하다는 이야기이겠지만 전혀 납득도 안가고 마냥 얄밉기만 한 그런 소리이다. 그런 그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을 소미와 일행들에게 멋지게 한 방 먹고 재기불능의 상황에까지 추락해버린다니 그 실현 가능성과 개연성 - 작가는 이 소설 속 내용이 허구(虛構)라고 말하면서도 책 처음 시작에 “이 소설엔 의외로 사실인 게 더 많다”는 문구를 써놓는다 -을 차치하고 나서라도 이 얼마나 통쾌하고 신나는 이야기인가.
작가가 허구이며 풍자소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 굳이 이 책에서 정경(政經) 비리를 연관시킬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고 그저 재미있고 신나는 이야기로 즐기면 좋을 것 같다. 이 작가의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인데 <미술관의 쥐>, <수상한 미술관>, <미술관 점거사건> 등 미술관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로 더 유명하다고 하는데, 이 정도의 재미를 줄 수 있는 작가의 작품이라면 다른 작품도 선뜻 손이 갈만한 그런 작가인 것 같다. 특히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미술관의 쥐>는 일본 고단샤 '아시아 본격 미스터리 선집'에 한국 대표작으로 선정되었고, 국내 대중소설로는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고 하니 더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