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광대 - 김명곤 자전
김명곤 지음 / 유리창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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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廣大): 가면극, 인형극, 줄타기, 땅재주, 판소리 따위를 하던 직업적 예능인을 통틀어 이르던 말. 한자를 빌려 ‘廣大’로 적기도 한다.(네이버 국어 사전)

 

 

재주(才操)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 “광대”는 순우리말(어원이 <훈몽자회(예산 문고본)(1527)>이라고 한다)로 한자(漢字)로 적을 때는 “廣大”로 적는다고 한다. “넓고 큼”의 의미인 “광대”에는 어떤 뜻이 숨겨져 있을까? 국립극장장,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했던, 그러나 이런 국가 기관장 타이틀보다는 영화 <바보선언(1984)의 절름발이 청년 “동철”, 영화 <서편제(1993)>의 소리꾼 “유봉”, 그리고 고(故) 노무현 대통령 노제(路祭) 연출자로서 더 인상적이었던 배우 “김명곤”씨의 자전(自傳) <꿈꾸는 광대(유리창/2011년 12월)>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어느 언론사와 한 “저자와의 대화”에서 광대의 의미를

 

 

“저는 광대라는 뜻을 넓을 광자 큰 대자, 뜻 그대로 넓고 큰 예술적 영혼으로 이 사회의 많은 분들의 고통을 껴안고 그분들의 영혼을 위로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해석을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예술의 길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요."(오마이뉴스, 2012.1.18.기사)

 

 

라고 설명한다. 아마도 세상사 모든 애환과 시름을 끌어안아 특유의 웃음과 해학으로 승화시키는 그네들의 삶과 연기가 마치 미추(美醜)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을 끌어안는 광활한 대지와 같다는 의미라는 말일 것이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광대”의 길이었다고 말하는, 그리고 아직도 그 길을 꿈꾸고 있다는 그의 자전에는 어떤 인생사가 담겨 있을까?

 

 

그는 머리말 <꿈을 꾸는 사수>에서 자신이 꿔 왔던 수많은 꿈을 “불후의 명작”에 대한 꿈이라고 압축해서 말하며, 오늘도 자신은 ‘한심한 꿈’을 꾸는 몽상가라고 지칭한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잡지사 기자로, 독일어 교사로, 연극배우로, 영화배우로, 소리꾼으로, 연출가로, 작가로, 기획자로, 제작자로, 극장 경영자로, 장관으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며 쉴새 없이 화살을 쏘았지만 때로는 과녁에 맞은 화살도 있지만 수많은 화살이 빗나갔다고 독백하며, 그 모든 화살은 여전히 자신의 가슴에 있으며, 과녁을 맞힌 화살보다 맞히지 못한 화살이 자신의 가슴을 아프게 찌른다고 독백한다. 이 책은 그렇게 자신의 꿈을 위해 수없이 쏘았던, 영광보다는 아픔과 상처가 더 많았던 자신의 지난날을 고백한 글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숨을 고르고 활을 내려놓을 나이가 되었건만, 아직도 서투른 솜씨로 열심히 활을 쏘는 “꿈을 쏘는 사수”라고 말한다. 그의 꿈은 지나간 과거형이 아니라 아직도 현재 진행중인,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미래형”이라는 말일 게다. 어쩌면 이 책은 자전(自傳)의 형식을 빌어 쓴, 그를 배우로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 모습을 잊지 않고 지켜나가겠다는 미래에 대한 약속(約束) 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그의 출세작인 <서편제> 캐스팅 일화를 들려준다. 연극 관계 일로 분주했던 1992년 7월 말, 임권택 감독에게서 의논할 일이 있으니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온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 하며 약속 장소에 나간 김명곤에게 감독은 이청준 선생의 <소리의 빛>이라는 단편 소설을 영화로 만들까 하는데, 김명곤에게 각색과 주연을 맡아달라고 청해온다. 당대 최고의 감독인 임 감독과 작품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출연을 수락한 그는 대학시정부터 20년 넘게 판소리를 짝사랑해오고 배워온 자신의 경험을 십분 살려 영화 제작과 촬영에 적극 임하게 된다. 영화는 알려진 바대로 한국 영화사상 초유의 “100만 관객 돌파”라는 대흥행을 거두고 그에게는 <서편제>의 소리꾼 “유봉”이라는 타이틀로 각종 영화상을 수상했고 그후로도 오랫동안 자신의 이름 뒤에는 “서편제”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게 된다. 그런 수식어가 부담이 되었는지 언제쯤 <서편제>의 족쇄에서 벗어날까라고 자문하면서 그 족쇄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었고, 자신의 인생을 더욱 행복하게 조여줄 족쇄가 아닐까라며 복에 겨워 잠깐 투정을 부린 것이라고 자답한다. <서편제>는 자신의 기나긴 판소리 사랑의 결실을 맺게 해준, 자신이 꾼 많은 꿈을 하나씩 이루어갈 토대가 되어준, 그리고 앞으로 <서편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작품을 하라는 ‘꿈 너머 꿈’을 제시해준 소중하고 귀중하며 보물 같은 작품이라는 말이다.

 

 

그는 1부 <나의 꿈에 날개를 달다>에서 이처럼 <서편제> 이야기와 함께 그가 만난 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들려준다. <서편제>에 함께 했던 배우 “오정해”, 자신의 작품을 마음대로 각색하라며 막걸리를 건네준 “이청준” 작가, 자신에게 영화의 길을 열어준 “이장호” 감독, 그리고 자신이 만난 최고의 관객이었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독설(毒舌)로 인연(因緣)을 맺게 되었지만 자신을 문화부장관으로 임명했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일화와 모든 이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노제(路祭)”를 연출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차례로 소개한다. 2부인 <꿈의 씨앗이 자라다>에서부터 본격적인 자신의 과거 이야기가 시작된다. 2부에서는 음악을 사랑하셨던, 자신에게 예술의 혼을 불어 넣어준 부모님과 그에게 문학의 눈을 뜨게 해준 은사인 박시중 선생님과 함께 자신이 서울대 사대 독어교육과에 입학하게 된 과정을 들려준다. 제3부 <꿈의 회전목마를 타다>에서는 학업은 뒷전으로 미루고 연극에 미쳤던, 그리고 그의 소리꾼으로서의 길을 터준 “박초월 명창”을 만났던 일화와 함께 잡지사 기자로, 학교 선생님을 전전하면서도 연극에 대한 열정만큼은 결코 꺾지 않았던 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제4부 <꿈의 퉁수쟁이가 되다>에서는 병고 끝에 몸을 추스르고 본격적으로 연극판에 나선 그가 민중문화운동의 연극판에서 앞장서서 활약하던 시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지막으로 제5부 <꿈과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에서는 “국립극장장”과 “문화관광부 장관”이라는 공직 생활 시절을 들려주고 이제는 다시 “광대”로 돌아와 자유로움과 창작생활의 희열에 빠진 요즘 생활을 이야기하며 앞으로도 계속 꿈을 꾸는 “광대”로 살아가겠다고 마무리한다.

 

 

올해 나이 61세(1952년 생), 이제 막 환갑을 맞은, 어떻게 보면 아직 자서전이 어울리지 않은 나이인 그가 자서전을 냈다니, 처음에는 요즈음 하루에도 몇 차례씩 열린다는 현역 국회의원들이나 지망생들의 “출판기념회”의 일환으로 나온, 즉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내놓은 정치 선전물과 같은 그런 책은 아닐까 하고 삐딱하게 쳐다봤다. 그런데 그의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의 예술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진정성(眞正性)”을 느끼게 되었고 처음의 오해와 편견이 어느새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림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광대 인생은 그가 말한 대로 과녁을 맞춘 화살보다 빗나간 화살이 더 많은 어쩌면 아직 “성공”하지 않은 그런 삶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 나이에도 그는 “광대”의 꿈을 위해 서투른 활시위를 계속 당기겠다고 다짐한다. 자신의 명예와 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넓고 큰”이라는 광대의 본 의미를 위해, 이 세상 애환과 시름에 고통받는 많은 분들의 영혼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그의 믿음과 소망이 그저 사탕발림이거나 허언(虛言)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그가 걸어왔던 삶에 있다. 이 책에서 들려준 것처럼 배고프고 병들었어도 오직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모든 고난과 시련을 이겨왔던 그의 삶 말이다. 고(故) 이윤기 선생은 서른아홉 살 김명곤을 가리켜

 

 

김명곤의 삶을 만나면, 우리가 산 삶은 지우개로 북북 지우고 싶어진다! 그가 살아온 험하고도 아름다운 삶을 들으면 문득 그를 닮고 싶어진다!

 

 

라고 평했다고 한다. 험하고 고통스럽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이 바로 그가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달래주는 우리 시대의 “광대”로서 앞으로도 늘 함께 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절로 들게 만든다. 물론 그도 시절이 하 수상한 지금, 정치(政治)에 나설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꿈꾸는 광대”라는 그의 꿈과 열정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만큼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처럼 장관의 자리에 올랐던 “누구”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물론 이 책의 작가가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누구”의 자서전을 읽지 않아 그가 어떤 예술적 삶을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20여년을 수더분하고 착한 시골 청년의 이미지로 살아온, 그리고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를 소개하는 지적인 모습을 보여준 그가 갑작스레 - 물론 그를 아는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 정치 일선에 나서서 지극히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모습을 보여주자 그를 좋게 봐온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함께 “배신감”마저 들었었다. 아직도 정권에 머무르고 있는, 또한 이번 총선에 국회의원으로 나선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누구”에게 묻고 싶다. 언젠가 모든 자리에서 떠나 다시 무대로 돌아왔을 때 그를 반겨할 사람들은, 또한 그의 진정성을 믿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또한 “누구” 때문에 가슴 속에 깊은 생채기를 입은 어떤 이들의 상처는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누구”도 “넓고 큰”이라는 의미의 “광대”의 뜻을 지금이라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길 바래본다. 괜히 이런 글 썼다가 사달 - 인터넷 검색해보니 사고나 탈을 의미하는 단어는 “사단”이 아니라 “사달”이 맞는 표현이란다 - 이 날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한때나마 그를 좋아했던 팬으로서 안타까움에 해보는 넋두리 쯤으로 여겨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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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와 뼈의 딸 1 -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4-1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4
레이니 테일러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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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하고는 영 거리가 먼 여성 취향의 장르라고만 여겼던 “판타지 로맨스” 소설을 근래 들어 몇 편의 시리즈와 소설들을 읽고 나니 부담 없이 재미있게 읽어볼 만한 꽤 “괜찮은” 장르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뱀파이어, 늑대인간, 요정, 타락천사 등 오래된 신화 속 존재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시간과 공간에 등장하여 모험과 사랑을 펼친다는, 이른바 현대판 신화라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꽤나 매혹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물론 불멸의 존재들과 펼치는 로맨스는 말랑 말랑하고 낯간지럽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지만 말이다. 작품성과 상업성을 함께 갖춘 한 해 최고 작품에 수여하는 미국의 도서상인 내셔널 북 어워드(NBA) 최종 후보에 오른 바 있는 실력파 작가라는 “레이나 테일러(Laini Taylor)” - 인터넷 서점에 올라와 있는 작가 사진을 보니 짙은 핑크빛 머리색이 꽤나 인상적인 미녀 작가이다 - 의 <연기와 뼈의 딸(원제 Daughter of Smoke and Bone / 랜덤하우스코리아/2012년 1월)>은 어쩌면 신화 속 존재들 중 가장 친숙한 존재이자 신비로운 존재인 천사(天使)가 21세기 현대 시대에 강림(降臨)한다는 전형적인 판타지 로맨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에 특이한 존재가 하나 더 등장한다. 다른 소설들처럼 사랑의 대상이 창백하고 가냘프기만 한 “인간” 여성이 아니라 또다른 신화속 존재이자 천사의 대적자인 “키메라”족 여성을 설정한 것이다. 판타지 로맨스 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나 할까? 이 설정만으로도 얼마나 기막히고 애절한 사랑이 담겨 있을 지 미뤄 짐작할 수 있는 이 책, 마치 <오페라의 유령>을 연상시키는 멋진 표지를 넘겨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옛날 옛적에 천사와 악마가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프라하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는 17세 소녀 “카루”는 여러모로 “특이한” 여학생이다. 먼저 도대체 영 이상하지만 묘하게도 잘 어울리는 파란색의 긴 머리카락과 뽀안 살결과 쭉 뻗은 긴 다리, 예쁜 걸 넘어서 생기가 넘치고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비밀과 미스터리를 품고 있는 까만 눈동자는 참 매력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에 제우스의 머리에서 완전한 성인인 채 튀어나왔다고 주장해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개인사에 대해 전혀 알려지지 않은 면이나 주머니에는 고대의 구리 동전들과 엄지손톱만한 크기의 옥으로 만든 진기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며, 부츠 속에 숨기고 다니는 칼, 총알 자국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움푹 패고 반짝거리는 흉터와 기괴한 흉터들은 그녀를 더욱 신비롭게 만드는 그런 요소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녀가 들고 다니는 스케치북에는 미술 수업에서 그린 그림들 이외에도 기괴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케릭터들이 그려져 있는데, 예를 들어 허리 아래로는 뱀이고 허리 위로는 인간 여자로, 카마수트라 조작 같이 동그랗고 완벽한 젖가슴을 드러내고, 천사 같이 아름다운 얼굴에 우산처럼 생긴 코브라의 목과 이빨이 있는 그림을 그려 놓고 “이사”라고 이름을 붙여 놓고 이 생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곤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남들보다 개성이 뚜렷한, 그냥 좀 유별난 소녀쯤으로 여길 수 있지만 실제 그녀는 정말 “특별한” 존재이다. 스케치북 속의 기괴한 생명체들은 그녀 말대로 “실재(實在)”하는 존재들로 그녀는 그 생명체들이 운영하는 마법가게의 주인인 “브림스톤”의 명으로 전세계 곳곳과 연결되어 있는 “비밀의 문(포털)”을 통해서 온갖 동물과 심지어 사람의 이빨들을 수집해오는 심부름을 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전 세계 도처에 있는 많은 문들에 검은 손자국들이 나타났는데, 모두 목재나 금속 문에 불에 타서 깊게 그슬린 손자국이었다.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기이한 그림자가 있는 아름다운 남자들과 여자들이 나타나서 손자국을 남기고는 하늘로 날아가 사라졌는데, 그때 보이지 않는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는 그들 뒤로 열기가 물결쳤다고 한다. 즉 “천사”들이라는 것이다. 카루는 모로코에 있는 제마 엘 프나 광장에서 한달 간격으로 만나 수집한 이빨들을 건네 받아오던 “이질”을 만나던 중 그녀를 미행해온 천사와 마주쳐서 격투를 벌이게 되고, 심한 부상을 입고 가까스로 도망쳐 포털을 통해 가게로 돌아오지만 그만 의식을 잃고 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번도 비운 적이 없는 브림스톤이 자리를 비우고, 카루는 절대 열려 있지 않았던 브림스톤 책상 너머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는 그 문을 열어 들어간다. 그 문 너머의 세상은 하늘에 달이 두 개가 떠 있는 “또다른 세계”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늑대 형상을 한 키메라의 공격으로 거의 죽을 뻔한 상황까지 몰리지만 브림스톤에 의해 가까스로 구출되어 다시 마법의 가게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브림스톤을 그녀를 불같이 화를 내며 그녀를 가게에서 쫓아내버린다. 일주일 동안 자신의 집에서 몸을 추스린 그녀에게 전령사인 “키시미시”가 온몸에 불길에 휩싸여 날아와 브림스톤이 선물했던 “위시본”을 건네주고는 그만 그녀의 손안에서 죽고 만다. 그리고 전세계의 모든 포털이 일제히 불길에 쌓여 맹렬하게 타오른다. 브림스톤의 마법가게로 가는 모든 입구가 막혀버린 것이다.

 

 

 

옛날 옛적에, 괴물들이 키운 소녀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천사들이 괴물들의 세계로 열리는 문을 태워 버려서

그녀만 홀로 남겨졌다.

 

 

 

카루는 그동안 거래해온 이빨 수집상들을 만나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원 도구들을 뺏어 브림스톤의 가게로 가는 방법을 찾고 있는데, 그녀 앞에 모로코에서 그녀를 공격했던 남자 천사 “아키바”가 나타난다. 모로코의 싸움 이후 카루에게서 과거에 알고 있는 어떤 여인의 존재를 느낀 그가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지만 결국 동행하게 된 둘은 서로의 알 수 없는 매력에 점점 끌리게 된다. 카루가 17년전 자신이 사랑했던 키메라 족의 여인 “마드리겔”을 느낀 아키바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위시본을 보고 그녀의 정체를 드디어 깨닫게 된다. 추척해온 동료 천사들을 막아서 카루를 피신시키고 첫만남의 장소인 모로코로 날아온 아키바는 그곳에서 카루와 함께 위시본을 쪼갠다. 위시본에 숨겨져 있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면서 그녀는 마침내 모든 것을 이해했다. 천사족과 키메라족의 오랜 전쟁, 전장에서 만나 큰 부상을 당한 아키바를 구해줬던 일, 2년여 만에 키메라 족 축제에 숨어든 아키바와 재회하여 뜨거운 사랑을 나눈 일, 그리고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일 등등....... 이제 온전히 마드리겔의 기억을 되찾은 카루는 과연 이 세상을 평화로 다시 만들자던 아키바와의 약속과 사랑을 이번 생에서 이룰 수 있을까? 그러나 천사와 키메라의 전쟁은 갈수록 더 격렬해지고 카루와 아키바 사이에도 절대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생겨 버린다. 이건 끝이 아니었다.

 

 

 

줄이고 줄였는데도 줄거리 요약이 꽤나 방대해졌는데, 그만큼 많은 설정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 로맨스가 주이고 판타지적 설정은 그저 배경에 불과한 여느 판타지 로맨스와는 달리 꽤나 탄탄한 판타지 설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선과 악으로 상징되는 천사와 키메라 족이라는 설정을 여느 소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이색적인 신화적 상상력으로 치밀하게 구현해내고, 이런 설정들이 아키바와 카루(마드리겔)의 사랑을 보다 더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훌륭한 장치 역할을 해낸다. 즉 판타지적 설정과 로맨스가 어느 한 쪽이 지나치게 강조되지 않고 똑같은 무게감으로 절묘한 균형을 이뤄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즉 현대판 신화로써의 매력을 온전히 보여주는 그런 작품이라고 할까? 거기에 여느 판타지 로맨스 소설들처럼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그리고 실수만 연발해서 남자 주인공을 위기에 빠뜨리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때로는 강인한 여전사로서, 또한 불가능할 것 같은 사랑을 지레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인 “희망”처럼 굳건히 지켜 나가려는 독특하면서도 이색적인 매력의 여주인공 “카루”와 역시나 천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너무나 잘생겨서 비현실적인 외모 - 왜 판타지 로맨스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남성들이 등장하는지 불만이지만 주류 독자들인 여성들이라면 열광할 만한 그런 외모일 것이다 - 에 불멸의 사랑을 찾아 자신의 동료들조차 배신하는, 우수에 젖은 눈빛에 남자인 나도 홀딱 반할 것 만 같은 멋진 남자 주인공 “아키바” 라는 캐릭터 설정 또한 꽤나 매력적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기발하면서도 탄탄한 판타지 설정과 남성인 내가 봐도 가슴을 울리는 애절한 로맨스, 매력적인 캐릭터 등 판타지 로맨스의 장점들만을 고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서로 겉돌지 않고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낸 이 책, 그동안 읽어본 여느 판타지 로맨스 소설들 중에서 단연 발군의 재미와 감동을 갖춘 멋진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초반 도입부 몇 십 페이지만 읽었는데도 이 책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절로 들게 하더니 그런 예감은 역시나 틀리지 않아 500 여 페이지에 이르는 만만치 않은 분량임에도 읽는 내내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몰입감과 재미로 금세 읽게 만드는 참 재미있는 책이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판타지 로맨스는 여성들만 보는 책이야 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남성들에게도 크게 어필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카루의 모험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대목에서 끝나버려 2권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데, 가을에나 출간된다니 꽤나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라는데 너무 잘 생겨서 오히려 비현실적이라는 아키바 역할을 맡을 배우는 누구일까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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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 - 이성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성적 신호의 비밀
오기 오가스 & 사이 가담 지음, 왕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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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이야 마우스 클릭 몇 번 만으로 첫 화면부터 “FBI Warning”이라는 경고문이 붙은 “포르노(Porno)” - 입에 담기가 민망한 단어이지만 어차피 이 서평에서 수 십 차례 언급할 단어이니 “성인영상물”이니 “음란물”이니 뭐니 에둘러 말하지 말기로 하자 -를 손쉽게 구할 수 있지만 우리 때만 해도 “선데이 서울”, “사건과 실화” 등 국내 성인 잡지와 청계천 등 헌책방 골목에서 “은밀히” 흘러나온 “플레이보이”, “허슬러” 등 외국 성인 잡지들만 간간히 접해봤을 뿐 영상물로써의 “포르노”는 몇 몇 아이들 - 소위 뒤에서 논다는 “불량 청소년들” -끼리만 은밀히 돌려 보던 참 “귀한” 것이었다. 어렵게 구했더라도 비디오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비디오 있는 집 친구 어머님이 외출하시는 틈을 타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 함께 보던, 그러다가 뭘 놓고 가셔서 집에 다시 돌아오신 어머님께 걸려 단단히 혼이 났던 추억들은 중년 남성들이라면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남자들에게 “포르노”는 성적 호기심이 왕성한 사춘기 시절 꼭 한번 만나게 되는 통과의례이자 일종의 “판타지(Fantasy)"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여학생들은 어땠을까? 우리들처럼 성인잡지나 포르노에 열광하진 않았겠지만 아마도 학생 잡지 부록으로 실려 있던 “할리퀸 로맨스((Harlequeen Romance)”로 그런 판타지를 충족시켰을 것이다. 나도 당시 학생 잡지를 자주 사봤던 터라 할리퀸로맨스도 꽤나 읽었는데, 그 이유가 멋진 남자와의 로맨스라는 이야기에 끌렸던 것이 아니라 십대들이 보기에는 꽤나 부적절한(?) 성애 장면 때문이었다. 어쩌면 남자들은 시각적인 자극에 집착했다면 여자들은 머릿 속에 그려지는 상상속 이미지에 열광했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 보스턴대학 출신의 젊고 대담한 두 명의 인지신경과학자라는 “오기 오가스”와 “사이 기담”이 펴낸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웅진지식하우스/2011년 12월)>는 “포르노”와 “로맨스”로 대변되는 남녀들의 각기 다른 성(性) 심리를 해설하고 있는 책으로 “수많은 짓궂은 생각꺼리(A Billion Wicked Thoughts)”라 번역할 수 있는 원제(原題)보다 한글 제목을 정말 기가 막히게 뽑은 그런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책에는 원제 그대로 수많은 생각꺼리들, 그것도 남에게 대놓고 얘기하기 힘든 민망하고 낯부끄러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 어디부터 또는 무엇부터 소개해야 할 지 참 난감하기만 하다. 우선 생소하기만 한 “성과학(Sexlogy)”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보자. 작가는 1886년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이라는 독일 과학자의 <프시코파티아 섹수알리>에서부터 시작된 성과학은 같은 년도에 시작한 전파물리학은 지구 밖의 생물체외 의사소통 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 낼 정도로 눈부신 성장을 거두어왔지만 인간의 성욕이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조차 베일에 싸여 있을 정도로 논쟁이 분분하고 그 성과가 지지부진하다고 말하며 기 이유를 ”데이터 입수“로 꼽는다. 즉 연구대상인 성적인 행동을 직접 관찰하기가 너무도 어렵다 보니, 설문 조사를 통해 데이터를 손에 넣을 수 밖에 없는데, 설문 내용이 철저히 익명이 보장된다고 아무리 안심시켜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성을 연구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 사회 분위기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 연구는 각종 정부기관이나 사회기관들의 지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인간의 욕구가 가진 진정한 패턴을 밝히려는 노력은 섹스를 금기시하는 제도권에 번번이 발목이 잡혀 중단되거나 흐지부지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1886년 크라프트에빙의 연구 이래로 대규모로 사름을 대상으로 성적 욕구를 광범위하게 다루는데 성공한 과학자는 오직 한 사람, 바로 <킨제이 보고서>로 잘 알려진, 또한 "리암 니슨” 주연의 영화 <킨제이 보고서(2005)>로도 유명한 “앨프레드 킨제이” 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기만 한 성에 관한 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온 것이 바로 “인터넷”이라고 할 수 있다. 월드와이드웹이 온라인으로 연결되던 1991년만 해도 미국 성인 잡지가 90종이 채 되지 않았지만 불과 6년 후인 1997년 인터넷에 존재하는 포르노 사이트 숫자가 약 900 개에 이르렀고, 현재 인터넷 여과 소프트웨어가 차단하는 성인 웹 사이트의 수가 무려 250만 개에 이를 정도로, “인터넷은 포르노를 위해 존재한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가히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은밀한 성생활을 직접 관찰할 수 는 없는 이상 어떻게 인터넷이 성과학 연구에 해답이 될 수 있을까? 그건 바로 디지털 발자국이라 할 수 있는 “인터넷 검색 엔진”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억 건에 이르는 검색 데이터를 분석하면 사람들의 성적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이 책에서 신경과학과 성 연구에서 밝혀진 최근의 연구 결과와 인터넷 데이터를 결합하여 인간의 욕망 - 특히 성적 욕망 - 이 왜 그토록 다양한지 해명해보려고 하며 이로써 사람들에게 절대 알리고 싶지 않은 그런 취향을 왜 내가 혹은 내 배우자가 갖고 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들은 50 만 명의 개인별 검색 히스토리를 포함해서 총 10억 개에 이르는 웹 검색 내용을 일일이 여과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또 에로소설 수십만 편과 인터넷 로맨스 소설 수천 편의 내용, 유동 인구가 가장 많다는 성인 웹 사이트 총 4만 개와 성생활 파트너를 구한다는 온라인 구인 광고 500 만 개 이상, 온라인 게시판에 자신의 욕망을 밝힌 수천 명의 이야기까지 자세히 살펴보고 분석해서 이 책의 연구 결과를 내놓기에 이른 것이다. 목적이 뭐냐고? 바로 성욕을 자극하는 내면의 특정 신호가 남녀별로 어떤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서론과 1장이 끝나면 남자와 여자의 시각 신호, 남자와 여자의 서로 다른 욕망과 심리적 신호 등 남녀간 - 여기에 동성애자들과 양성애자들의 성적 심리까지 포함한다 - 의 서로 다른 성적 신호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결과가 소개된다. 너무 방대하고 민망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다 소개할 순 없고 “포르노”와 “로맨스”로 대변되는 남녀간의 성적 신호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만 간단하게 언급해보자. 작가들은 남자는 “포르노”를 좋아할 수 밖에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유는 남자와 여자의 두뇌는 원하는 성적 자극의 방식이 다른데 남자들은 ‘보는 것’, 즉 시각적인 면을 좋아하는 반면 여자들은 ‘읽는 것’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남자들이 포르노 동영상을 검색할 때 단연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시각 자극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나이’였으며 특이할 만한 사실은 남자들은 마른 몸매보다 통통한 몸매의 여자들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남성들이 여성의 가슴과 엉덩이를 특히 자극적인 시각 신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로맨스의 어떤 면 때문에 열광하는 걸까? 여성들은 로맨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영웅’ 혹은 ‘알파남’, 즉 멋진 남자 주인공에게 매력을 느끼는데, 거칠기만 한 남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성 때문에 변화하여 마침내 부드러운 내면을 드러내는 순간에서 마치 남성들이 포르노에서 느끼는 클라이맥스와 같은 희열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하는 남녀 관계의 진정성과 감정의 교류 속에서 여성의 성욕을 충족시키는 ‘성적 신호’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대놓고 얘기하긴 부끄럽지만 가슴 한 편으로는 정말 궁금한 “성(性)”에 대한 담론들을 만날 수 있어서 참 색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많은 데이터들과 이야기들 때문에 지루하기까지 했던, 상반된 느낌을 갖게 하는 그런 책이었다. 그래서 중반까지는 그래도 텍스트 놓치지 않으려고 꼼꼼히 읽었지만 너무 더디 읽히는 바람에 중반 이후에는 데이터들은 건너 뛴 채 내용들만 골라 읽었으니 제대로 완독은 하지 못한 셈이다. 남녀간의 근원적인 차이라 할 수 있는 “성”에 대하여 제대로 공부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역시 “성”을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하자니 영 부끄럽고 어색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해서 덮어두고 외면한다면 서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만 쌓이게 될 뿐 어렵고 부끄럽더라도 똑바로 직시하고 알아가야 할 것이 바로 이런 “성” 담론들이 아닐까? 서두에서 말한대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주위의 시각에도 꿋꿋이 연구하여 이런 놀랍고도 재미있는 연구 성과를 우리에게 선보인 두 작가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다만 다음에는 좀 덜 적나라하게, 그리고 좀 덜 지루하게 우리에게 선보여 주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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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빌라 연애소동
미우라 시온 지음, 김주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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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 빌라 연애 소동(원제 木暮莊物語/은행나무/2011년 11월)>을 받아들고서 저자 “미우라 시온(三浦しをん)”의 이름이 낯설지 않아 검색해 보니 역시나 재작년 봄에 재미있게 읽었던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 집>의 작가였다. 전작이 큰 재미와 감동보다는 읽는 내내 가벼운 미소가 절로 지어지고 다 읽고 나서 잔잔한 감동을 맛볼 수 있었던, 특히 작가의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애정에 공감하게 되는 유쾌하고 즐거운 책이었던 터라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마나봐야겠다 했었는데 이 년 여 만에 그의 신작으로 다시 만나게 된 셈이다. 익살맞은 만화풍의 표지 그림이 전작 못지않은 재미와 감동을 선보이겠구나 하는 기대를 절로 품게 하는 이 책, 가벼운 마음으로 하드 커버 표지를 열어 읽기 시작했다.

 

 

도쿄 도심에서 다소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는 2층 목조 건물인 “고구레 빌라”. 건물 외벽은 갈색 페인트로, 나무 창틀은 하얀색 페인트를 칠했고, 멀리서 보면 초콜릿 바탕에 생크림으로 장식한 초콜릿 케이크가 떠오르는 그런 집으로 겨우 방 여섯 개가 고작인데, 그나마 주인 할아버지 “고구레” 씨를 포함해 네 가구만 사는 집이다. 그런데 이곳에 사는 네 가구의 사람들은 영 “이상한” 사람들이다. 먼저 고구레 빌라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사에키 플라워숍”에 근무하고 있는 203호에 살고 있는 아가씨 “마유”는 전(前)애인인 “나미키”와 현(現) 애인인 “아키오”와 비록 잠시지만 한 집에서 기묘한 동거 생활을 하게 된다. 집주인이자 일흔을 넘긴 할아버지인 “고구레” 씨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친구의 병문안을 갔다가 자신의 마누라가 자신과 섹스하기 싫다고 투정대는 친구의 말에 흠칫 놀라면서도 자신 또한 죽기 전에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도우미” 여성을 불렀다가 다른 집에 살고 있던 아내가 들이 닥치는 바람에 도우미 여성을 숨기는 일대 소동을 벌이기도 한다. 인근 애견 미용실에서 일하는 20대 여성 “미네”는 고구레 빌라를 지나칠 때마다 마당에 묶여 있는 회색 중형견 “존”을 볼 때 마다 깨끗하게 목욕시켜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전철역 기둥에 돋아난 남성 성기 모양의 이상한 물건 때문에 인연을 맺게 된 “마에다 고로” 덕분에 어찌어찌해서 그 바람을 이루게 되고, 미네가 근무하는 꽃집 여사장인 “사에키”는 같은 장소에서 함께 운영하는 찻집 주인인 남편이 내오는 커피에서 흙탕물 같은 맛을 느끼고는 남편의 부정(不貞)을 의심하고는 밤마다 외출하는 남편의 뒤를 밟아 결국 부정의 현장을 덮치게 된다. 고구레 빌라 201호에 사는, 세무사자격증 취득을 준비 중인 20대 청년 “간자키”는 비어 있는 옆 집 202호를 수시로 드나들면서 방바닥에 구멍을 내어 아래층 102호 여대생이자 이 남자 저 남자와 잠자리를 갈아치우는 문란한 “미쓰코”를 일년 채 훔쳐 보다가 결국 들키게 되지만 미쓰코의 묵인하에 훔쳐 보기를 계속하게 된다. 난소 이상으로 생리를 하지 않은, 결국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인 미쓰코는 친구가 맡기고 간 아이를 돌보다가 그만 아이에게 흠뻑 정이 들어 일주일만에 다시 돌려주고는 온몸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마유의 전애인이었던 나미키는 이대로 단념할 수 가 없어 마유의 곁을 맴돌며 그녀를 “스토킹”하듯이 지켜보다가 꽃 집 단골인 낯선 여인인 “니지코”를 만나게 되어 그녀의 집에 머물게 된다.

 

 

이처럼 이상하기만 한 사람들의 이야기인데다가 입에 담기에는 민망한 “섹스”가 주된 주제이지만 왠지 그들이 혐오스럽지만은 않다. 말없이 떠났다가 훌쩍 돌아와 있을 곳이 없다며 집에 머물게 해달라는 옛 애인을 그녀와 현 애인은 집안으로 불러 들여 전혀 변태스럽지 않은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 주며, 부정의 현장을 들킨 남편을 포악스럽게 다그치기 보다는 함께 가자며 손을 내밀기도 한다. 엉겁결에 맡게 된 아이에게 정이 들어 아이를 떠나보내고 힘들어하는 여대생에게 처음에는 훔쳐보기 변태 성욕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그녀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 위층 청년은 그녀를 위로하며 그녀의 추억의 맛인 흑사탕을 건넨다. 전 애인을 스토커하다가 요리에서 거짓말을 할 때는 모래 맛을, 바람을 피우면 흙탕물 맛을 느끼는 이상한 능력을 가진 여인과 동거하게 된 남자는 그 집을 떠나면서 그녀에게 두 번 다시 모래 맛과 흙탕물 맛이 나는 요리를 만들거나 먹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담은 신호를 보내기로 결심한다. 이처럼 모두 남들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는 저마다의 상처들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지만 그 상처 때문에 사랑을 거부하거나 또는 멀리하지 않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랑을 풀어나가는 이들의 이야기 하나하나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가슴 한 켠에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미우라 시온의 글 솜씨에 “현재 일본에서 ‘인간’을 묘사하는 능력이 가장 뛰어난 젊은 작가”라는 평가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여실히 증명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역시 사람들은 겉만 보고는 판단할 수 없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옳은 걸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영 이상할 것만 같은 고구레 빌라 주민들이지만 어쩌면 그 어느 누구보다도 속 깊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그들이야 말로 정말 “좋은” 이웃들이 아니었을까?

 

 

요란스럽거나 기발하지는 않지만 전작처럼 소소하면서도 잔잔한 재미와 감동을 주는 책이었다. 두 권 밖에 만나보지 못했지만 미우라 시온, 참 유쾌하면서도 따뜻한 글을 쓸 줄 아는 작가인 것 같다. 이번에 다시 확인하게 된 그의 이름은 앞으로는 쉽게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은, 나에게는 자주 만나보고 싶은 그런 작가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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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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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안중근 의사의 명언(名言)처럼 책을 읽지 않으면 가시가 돋을 정도는 아니지만 “활자중독증(活字中毒症)”을 염려할 정도로 글 읽기에 집착을 보이곤 한다. 인터넷에 소개되어 있는 활자중독증 테스트를 해보면 20개 중 15개 이상이 해당되니 거의 중증(重症) 수준인 것 같다. 특히 화장실에 갈 때는 신문이나 잡지, 책을 꼭 챙기고 챙기지 못할 때는 주변에 보이는 글들을 꼼꼼히 읽으며, 집을 떠나게 되면 꼭 책이나 잡지를 챙겨가고, 서점에 가면 평균 3시간 이상 서서 책을 읽는다는 항목들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물론 이런 활자중독증이 “난독증(難讀症, dyslexia)" - 소아 혹은 성인이 단어를 정확하고 유창하게 읽거나 철자를 인지하지 못하는 증세 - 과 같은 심각한 학습 장애가 아닌, 어쩌면 자신의 책읽기를 은연중에 과시하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으니 괜한 염려 축에도 못 끼는 그런 것일테다. 그렇다면 아예 글을 읽지 못한다면 - “문맹(文盲,illiteracy)” - 어떤 느낌일까? 전국민 의무 교육 시대를 살고 있으니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지만 - 굳이 상상해보면 “아랍어(Arabic Language)" 책을 읽는 느낌이라고 할까? - 활자가 넘쳐나는 요즈음 시대에 글을 읽지 못한다면 ”매우“ 불편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며, 어쩌면 당사자들에게는 불편을 넘어서 수치스러움마저 느낄 수 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이런 문맹이 불러온 끔찍한 살인을 그린 소설을 만났다. 영국 미스터리 소설계에서 거장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루스 렌들“의 <활자잔혹극(원제 A Judgement In Stone(1977) / 북스피어 / 2011년 11월)>이 바로 그 책이다.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강렬했던 도입부를 선사했던 작품”이였다는 역자(譯者)의 말처럼 이 책은 첫 문장에 이 책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인공인 “유니스 파치먼”이 뚜렷한 동기나 치밀한 사전 계획도 없이, 금전적 이득도 안전 보장도 없이 단지 읽고 쓸 줄을 몰랐기 때문에, 즉 “문맹”이었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단다. 그래도 그렇지 뭔가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커버데일 일가가 문맹이라는 이유로 유니스 파치먼을 엄청나게 구박을 하고 놀려댔거나 또는 협박을 해서 돈을 갈취했다던가 하는 그런 이유 말이다. 절로 궁금증이 드는 대목이다. 작가는 여기에는 더 깊은 사연이 존재한다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침실 여섯 개, 응접실, 식당, 거실,욕실 셋, 주방, 다용도실, 그리고 넓직한 마당이 있는 “로필드 홀”에 살고 있는 커버데일 가족은 고학력에 문화생활을 즐길 줄 아는 전형적인 영국 중산층 가정이다. 안주인인 “재클린 커버데일”은 자신의 몸을 치장하는 데는 시간을 아끼지 않고 신경을 쓰지만 집 안을 돌보는 데는 영 젬병인 그런 여인이다. 남편 “조지 커버데일”과 상의하여 새 가정부를 들이기로 한 그녀는 자신의 집보다 백십킬로미터나 떨어진 런던까지 와서 런던 출신 가정부 면접을 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데, 짙은 감색 레인코트를 입고 나타난 미혼 중년 여성 “유니스 파치먼”를 한눈에 마음에 들어 한다. 그녀의 공손한 침묵과 마음에 쏙 드는 수수한 외모가 마음에 든 것인지만 첫인사부터 “마님”이라고 부르는 유니스의 말이 그만 재클린의 크나큰 약점인 허영심과 속물 근성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약점이 유니스의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인상이나 “그 분위기”라고 표현했을 그 느낌을 받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그 자리에서 유니스를 채용하고 만다. 그런데 유니스는 이제껏 커버데일 가족이 만났을 법한 사람들 중 가장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들이 만일 유니스의 과거를 알았더라면, 그대로 달아나 버리거나 전염병이라도 발생한 양 문을 닫도 빗장을 질러 버렸으리라. 유니스는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글도 깨우치기 전에 수천 명의 다른 런던 학생들과 함께 시골로 피신해야만 했었고, 그 이후 드문드문 학교에 다녔지만 적응을 하지 못하고 졸업할 때가 다 되었는데도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하는 일과 몇 문장 밖에 읽지 못하는 “문맹”이었던 것이다. 손재간이 좋았던 턱에 어찌어찌 살아온 그녀는 병을 앓고 있지만 당최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은 아버지를 베개로 눌러 죽이고, 연금을 부정 수령하는 이웃을 협박하여 연금을 갈취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커버데일 집안의 구인 광고를 본 “이웃”이 그녀에게 권유 - 사실은 유니스를 쫓아 버리기 위해 작정한 것이지만 - 하고 유니스는 이웃이 써준 편지로 커버데일가에 보내어 가정부에 응모하게 되고 채용이 된 것이다. 유니스는 이런 과거를 철저하게 숨긴 채 커버데일 집으로 내려가 가정부 생활을 시작한다. 완벽한 일솜씨로 집안일을 척척 해내고 겸손하고 과묵한 성격의 유니스를 커버데일 부부는 매우 마음에 들어 하는데, 다만 한 가지 불만이 있다. 재클린이 종종 쪽지로 지시한 일들은 제대로 처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일부러 잘 보이는 데 붙여 놔뒀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어디 외출하는 법도 없어 운전을 배우라고 권유도 해보지만 영 묵묵부답이다. 이처럼 아슬아슬한 상황은 계속 일어나고, 결국 그녀의 꼭꼭 숨겨둔 비밀을 커버데일 가족에게 들키고야 만다. 가장인 조지는 “글을 못 읽는다는 걸 알고 있소”라는 동정심 어린 말을 건네지만 유니스는 참기 힘든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결국 유니스는 책 첫 문장에서 언급한, 커버데일 가족 학살 사건, 일명 성 발렌타인데이 학살 사건이라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야 만다.

 

 

책 시작과 함께 결말이 등장하고 그 결말의 깊은 사연을 풀어내는 구성이라 맥이 빠질 법도 하지만 읽는 내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꽤나 재미있는 책이다. 유니스가 자신의 비밀을 감춘 채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커버데일 가에 적응해나가지만 그 과정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얇은 유리잔을 손에 쥐고 서서히 힘을 가하는 것 같은 긴장감을 점점 고조시켜 읽는 내내 불안감을 가시지 않게 한다. 결국 비밀은 드러날 수 밖에 없었고, 커버데일 가족은 어쩌면 우리도 그런 상황이라면 같게 했을 행동, 즉 유니스를 동정하고 그녀에게 글을 가르치려 한다. 그러나 결국 그런 동정심이 지난 40여 년 동안 글을 읽지 못했어도 자기 방식대로 크게 불편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유니스 파치먼에게 크나큰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수치심은 분노로 이어져 끔찍한 살인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유니스의 살인은 자신들은 그런 의도는 없었겠지만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수 도 있었던, 그래서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행위는 아니었을까? 작가는 이 책을 통해서 자신과 다른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가지게 되는 동정심과 선의가 그 사람들에게는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르게 큰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하라고 말하려고 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작가는 유니스의 극단적인 행동에 대한 어떤 정당성이나 또는 일말의 연민을 부여하려고 하진 않는다. 그 집을 떠나버리면 그만이었을 것을 살인까지 저지르는 유니스의 극단적인 행동은 아무리 값싼 동정심의 해악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영 납득이 가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다 읽고 나서 유니스의 과거와 수치심의 크기가 어떻했는지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값싼 동정심의 결과가 이런 끔찍한 살인이었다는 결말이 충격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과장된 화법이라는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 가 없었다.

 

 

그렇다면 추리소설로써의 재미는 어떨까? 사실 미리부터 결말을 제시했고, 그 과정도 쉽게 예측할 수 있으며 마지막 유니스의 범죄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도 이렇다 할 트릭이나 반전을 찾아볼 수 가 없었으니 미스터리한 면은 그다지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굳이 분류하자면 <죄와 벌>과 같은 “범죄소설” 쯤으로 볼 수 있을까? 

 

 

기발한 트릭과 멋진 반전을 기대한다면 실망스럽겠지만 충격적인 첫 문장과 함께 읽는 내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놓을 수 가 없는, 독특하고 이색적인 추리소설을 맛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고픈 책이다. 특히 최근 독서 일기 책들을 여러 권 출간한 장정일 작가의 해설은 꼭 챙겨 읽기 바란다. 사실 책의 재미에 비해 너무 과분한 해설이 아닌가 싶은 느낌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미처 느끼지 못한 재미와 감상을 일깨워주는 멋진 서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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