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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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형서점들과 인터넷 서점 장르 소설 - 추리, 판타지, SF 등 - 코너를 “점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본 장르 소설 열풍이 거세지만, 일본 문학계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를 두 명 -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 “오엔 겐자부로(1994)” - 이나 배출했을 정도로 “순문학(純文學)” 분야에서도 그 성취가 뛰어나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일본 순문학 작품들은 많이 접해보지 못했다. 그나마도 “무라카미 하루키”, “아사다 지로” 등 현대에 활동하고 있는 작가 작품들 정도일 뿐 일본 근현대 문학계를 이끌어온 유명 작가 작품들은 거의 접해본 적이 없어 늘 아쉬움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런 아쉬움을 달래줄 멋진 작품을 만났다.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불릴 정도로 확고한 문학적 위치에 있는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문(원제 門(1910) / 비채 / 2012년 1월)>이 바로 그 작품이다. 이제는 고전(古典)의 반열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된 작품이지만 100 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읽어도 전혀 시대와 공간에 대한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작품이었다.

 

책은 1910년 어느 일요일 한가로운 일상에서 시작한다. 도쿄 시내에 있는 관청에 다니고 있는 하급 공무원인 “소스케”는 매사에 심드렁한 그런 사람이다. 선친의 유산인 집과 골동품 처리를 숙부에게 일임하면서 동생인 “고로쿠”를 맡겼지만, 숙부가 돌아가신 후 더 이상 돌봐줄 수 없다는 숙모와 동생 학비와 거취 문제, 그리고 숙부의 석연치 않은 유산 처리 문제를 매듭지어야 하지만 미적대며 그저 편지만 보내고는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를 유유자적하며 보낸다. 아내인 “오요네”도 그런 그에게 몇 번 숙부네로 가보라고 말을 건네긴 하지만 재촉하지는 않는, 말 그대로 “부창부수(夫唱婦隨)”인 그런 아내이다. 고로쿠는 그런 형 내외가 못내 답답하기만 하다. 소스케와 오요네는 함께 살면서 지금까지 6년 동안 한 번도 반나절 이상 어색한 기분으로 지내본 적이 없었고, 말다툼으로 얼굴을 붉힌 적은 더욱 없었던 금실이 좋은 부부다. 둘에게 사회는 그저 일상생활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는 곳 이상이 아닌 그런 곳으로,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서로뿐이었고, 또 그것으로 충분한, 도쿄라는 대도시에서 산속에 살고 있는 듯한 심정으로 살고 있는 부부다. 한때 그 누구보다도 활기차고 전도유망한 대학생이었던 소스케가 이렇게 사회와 동떨어져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숨겨둔 사연이 있었다. 아내인 오요네는 사실 교토대학 재학 시절 가장 친한 친구인 “야스이”의 부인 - 책에서는 야스이와 요오네가 동거 생활하는 걸로 나오는데, 실제 부부였는지 아니면 애인이었는지 명확하게 언급하진 않는다 - 이었는데 그만 친구였던 소스케와 사랑에 빠져 버리면서 야스이를 버리고 그를 따라나서 버린다.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숨어 살다시피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기에 행복했지만 그 행복 이면에는 세 번에 걸친 임신 실패라는 커다란 아픔과 슬픔 또한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유일하게 서로의 집을 왕래할 정도로 친해진 집주인 남자에게서 옛 친구인 야스이의 소식과 함께 그와 만나는 자리에 초대를 받게 된다. 거절하기 어려운 자리이지만 결코 만나서는 안되는 사이였기에 소스케는 야스이를 피하기 위해 회사에 휴가를 신청하고 산사(山寺)로 도피해 버린다. 그곳에서 소스케는 참선(參禪)으로 자신의 번민을 잊어 보려고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다시 돌아온다. 다행히 야스이는 자신이 없는 동안 다녀가는 바람에 다시금 평온한 일상이 반복된다. 그런데 그의 고민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하다. 새봄이 왔다고 좋아하는 오요네에게 다시 또 겨울이 올 거라고 불퉁거리는 그의 마지막 말을 들어보면 말이다.

 

이 책, 중반까지는 참 평온한 느낌이었다. 갈등이라고는 숙부와 얽힌 유산 문제가 있지만 자꾸만 피하려는 소스케와 오요네 부부 때문이지 그다지 긴장감이 들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중반 이후 소스케 부부의 숨겨진 사연이 드러나면서 본격적인 갈등이 고개를 든다. 특히 세 번에 걸친 유산의 아픔과 두려움에 눈물 흘리는 오요네와 자신도 가슴 아프지만 그런 아내에게 내색하지 못하는 - 심지어 건강이 나빠진 아내에게 임신한 것이 아니냐며 반색하기까지 한다 - 소스케의 모습에 짠한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종반에 이르러 두 부부를 사회와 담을 쌓고 살아가게 만든 장본인 - 물론 두 부부가 가해자이고 야스이는 피해자이니 장본인이라고 지칭하면 억울해할 것 같지만 -이자 결코 마주쳐서는 안 될 사람인 옛 친구 야스이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긴장감은 극에 달하게 되고, 일견 소스케와 야스이가 만나서 파국(破局)으로 치닫거나 또는 화해(和解)를 하는 결말을 기대해보기도 했지만, 숨어 버리고 마는 소스케의 소심한 모습에서 오히려 작위적이지 않은 현실감을 느껴볼 수 있었고, 나또한 그런 상황이었다면 그처럼 도망가 버리고 말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정이입이 되어 버렸다. 결국 다시 찾은 평온, 이런 상황을 알지 못했던 아내는 봄이 온다고 기뻐하지만 마음 고생을 단단히 했던 소스케가 겨울이 올 거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마지막 대목에서 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기에 입가에 절로 미소를 짓게 되었다.

 

책을 덮고 나서 이 책이 과연 100 여 년 전에 씌여진 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시대를 알 수 있는 몇 몇 단어 - 이토 히로부미, 조선총독부 등 - 만 고친다면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부부 이야기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글이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1910년대 격변기의 시대상에 매몰되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았던 어느 소시민의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춘다. 그렇기에 당시 가장 화제가 된 사건인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도 이 부부에게는 그저 신문이나 라디오에서만 떠들어 대는 하나의 뉴스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선거철을 맞아 쇄신에 통합에 요란 법석을 떠는 정치 뉴스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지만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는 “남”의 이야기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말이다. 또한 그 시대 소설 특유의 과장되거나 또는 격정적인 필치가 아니라 밋밋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담백하면서도 두 부부를 곁에서 직접 관찰하면서 글을 썼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세세한 면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또한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 감춰진 슬픔과 아픔을 드러내는 장면에서도 역시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끄집어내어 우리들에게 들려준다. 그렇기에 작가의 글솜씨에 취해 책을 읽노라면 어느새 주인공이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바로 우리들 이야기라는 느낌을 들게 만들어 버리는, 제대로 감정이입이 되어 주인공의 말과 행동에 절로 탄식이 터져 나오고 안타까워하며, 다시 찾은 평온함에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게 만든다. 이처럼 100년 전 이야기이지만 전혀 옛날이야기 같지 않다니 참 놀라울 따름이다. “현재도 전혀 낡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가히 기적이다"이라는 어느 일본 소설가의 평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그런 작품이었다.

 

여기서 제목이기도 한 <문>은 어떤 의미일까? 작품 해설에서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기 내면의 '문”을 의미한다고 말하는데 좀 어렵다. 또한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 문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기도 하는데 역시 어렵다. 작가가 직접적으로 언급한 문은 소스케가 산사(山寺)를 찾아갔을 때 듣게 되는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힘으로 열고 들어 오너라" 라는 대목인데, 열어 달라고 소리쳐도 결코 열리지 않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직접 열어야 만하는 그런 문이다. 소스케에게 그 “문”은 사회와 단절하게 만든 야스이와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도 없는, 오직 소스케 스스로가 해결해야 되는 그런 문이지만 소스케는 결국 그 문을 열어 제치지 못하고 그 문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다보지만 도저히 왔던 길로는 되돌아갈 용기가 없어 다시 가로막고 서 있는 육중한 문짝을 바라보게 되고, 결국 그 문 아래에 꼼짝달싹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그렇다고 날이 저문다고 해서 결코 열리지 않을 문을 바라보고만 서 있는 “불행한” 사람이 바로 주인공 소스케인 셈이다. 그런데 그가 꼭 불행하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문 앞 계단에 앉아서도 편하지는 않겠지만 쉴 수 있을 그런 사람 같아서 말이다. 열어 제치고 들어가는 것도, 여는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것도, 미련이 남아 계속 머뭇거리는 것도 모두 “자신”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결국 작가는 “문”이라는 존재를 반드시 부수거나 통과해야만 하는 장애(障碍)가 아니라, 때로는 멈춰 서게 하고, 때로는 쉴 수 있게 하며 때로는 뒤를 돌아보게 하는 다중(多重)적인 의미로써의 “문”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소란스러울 정도로 극적인 전개나 반전, 충격적인 결말은 없었지만 읽은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묘한 여운이 가슴 속에 느껴지는 그런 책이었다. 처음에는 욕설을 연상케 하는 그의 이름 때문에 잊혀지지 않겠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엉뚱한 생각을 말끔하게 가셔준 담백하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하는 이 책 때문이라도 오래 기억될 그런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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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치드 매치드 시리즈 1
앨리 콘디 지음, 송경아 옮김 / 솟을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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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빅 브라더(Big Brother)"에 대한 예언은 <1984년>이 지난 지 30 년이 다 된 지금 IT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점점 더 현실화되고 있는 듯 하다. 하늘에는 지상에 있는 50cm 급 물체도 선명하게 식별해낼 수 있는 인공위성이 수백 개가 떠 있고,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CCTV는 사람의 이동 경로와 행동을 모두 영상에 담아내고 있으며 - 하루에 CCTV에 노출되는 횟수가 평균 83회(수도권 기준, 2010년 12월 자료) 이른다고 한다 -, 여기에 인터넷 및 SNS 사용 기록, 신용 카드 사용 내역, 유무선 전화 통화 기록 및 위치 추적 등 마음만 먹는다고 하면 한 사람의 하루 동안의 모든 행적을 분(分) 단위로 기록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국가 비밀 기관이나 모 권력 단체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감시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면 절로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런데 이런 ”감시“ 차원을 떠나서 실제로 출생, 진학, 직장, 결혼, 사망에 이르기까지 국가 또는 사회 기관에 철저하게 통제되고 만들어지는 박제(剝製) 같은 삶을 산다면 어떤 느낌일까? “엘리 콘디(Ally Condie)”의 SF로맨스 소설 <매치드(원제 Matched/솟을북/2012월 1월)>는 모든 것이 통제된 미래 사회에서의 열일곱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시기를 알 수 없는 가까운 미래, 개인의 삶 전체를 “소사이어티”라는 국가 기관이 완벽하게 통제하는,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가 현실로 이뤄진 그런 세상이다. 이곳에서는 결혼도 소사이어티가 정해주는 반려자 - 물론 신체적, 정신적 분석을 통해 적합한 짝을 찾아주는 “매칭 시스템”에 의해 정해지지만 - 와 하게 되는데, 소년소녀가 17세가 되면 “매칭 파티”를 열어 소사이어티가 정해주는 반려자를 만나게 되고 결혼 계약은 21세가 되는 해에 이루어지며 양쪽 남녀의 임신 가능성이 최고조에 이르는 24세에 아이를 가지게 된다. 바로 건강한 후손을 가질 가능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서이다. 올해 17세가 된 소녀 “카시아 마리아 라이스”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부모님과 함께 시청에서 열리는 매칭파티에 참석한다. 기다림 끝에 드디어 카시아의 매칭 상대가 발표되는데, 다른 소녀들처럼 다른 도시의 남자가 아니라 믿을 수 없게도 바로 이웃에 살고 있고 가장 절친한 친구인 “잰더 토머스 캐로”였다. 다음날 아침 카시아는 매칭 상대의 정보가 들어 있는 마이크로카드를 열어 보는데, 카드에서 잰더가 아닌 다른 남자의 사진을 보게 되고는 크게 당황하게 된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학교 친구인 “카이 마캠”으로 그저 친구였을 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터였다. 카시아를 담당하는 “오피셜” - 오늘날의 경찰과 비슷한 개념으로 개인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 은 시스템 오류에 의한 매우 드문 일이며, 카이는 “일탈자”로 결혼을 할 수 없는 신분이기 때문에 카시아의 매칭 상대는 잰더라고 다시 확인해준다. 카시아는 실수였겠거니 하고 넘어가지만 “하이킹(Hiking)" 수업을 카이와 함께 히면서 카시아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몰래 남겨 주신 “시(詩)” - 이 사회에서는 80세가 되면 강제로 사망하게 되고, 시나 그림, 음악 등 예술 작품도 위원회에서 결정한 100 편 이외에는 금지된다. 할아버지가 남겨준 시는 바로 100편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금지된 시였다 - 룰 그와 공유하고, 그에게서 글자 - 또한 이 사회는 기계를 통해 글을 읽고 쓰기 때문에 글자를 사람이 직접 익히지는 않는다 - 를 배우면서 그를 점점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잰더 또한 가장 친한 친구이자 멋있는 남자였던 터라 잰더와 카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그러던 중 카이는 시 외곽 지역으로 노역을 가게 되고 - 사실은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는 거지만 -, 카시아 또한 어머니 때문에 가족 전체가 시 외곽의 농장으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 카시아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소사이어티의 음모가 밝혀지게 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통제된 미래 사회, 출생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국가 기관에 관리되는 사회라는 “SF적”인 설정이 참 흥미롭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작가는 그런 설정에 대한 사전 설명은 전혀 없이 바로 여주인공 카시아의 매칭 파티부터 이야기를 바로 시작하고, 사회에 대한 모습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관련된 설정들을 조금씩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책의 대부분은 우연한 실수 - 사실은 “기획”된 오류였지만 - 에 의해 매칭 상대가 될 뻔 했던 카시아와 카이가 금단(禁斷)의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이 꽤나 길게 진행되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된다는 뻔한 결말로 마무리 짓는다. 물론 3부작이니 남은 2부와 3부에서는 서로 이별한 두 남녀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재회하여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는, 거기에 사회 통제 시스템이 무너지는 혁명을 두 주인공이 주도할 것이라는, 역시나 뻔한 예상도 가능할 것 같다. 즉 이 책, 여느 “판타지 로맨스” 소설처럼 “판타지” - 여기서는 SF - 는 단지 배경일 뿐 “로맨스”가 주인 그런 책인 셈이다. 카시아와 카이의 로맨스 과정이 설득력 있게 잘 그려지긴 했지만 로맨스보다는 SF적인 면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여느 판타지 로맨스 소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수준의 재미 밖에 느낄 수 가 없었다. 물론 통제된 사회에 대한 모순점들도 언급 - 예를 들어 80세가 되면 강제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점이나 붉은 알약을 먹으면 일정 시간의 기억이 지워져 버리는, 즉 기억까지 강제로 통제하는 그런 사회 - 하고 있지만 신중하고 깊이있는 통찰이라기 보다는 역시나 소설적 배경으로써만 다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책 도입부나 중반부에 소사이어티 사회의 역사적 배경과 각종 사회 통제 시스템들에 대한 부연 설명을 좀 더 자세히 해서 SF적인 요소나 통제 사회의 위험성을 좀 더 살렸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로맨스를 좋아하는 여성분들에게는 참 재미있을 책이지만 나처럼 감성이 무딘 남성들에게는 크게 어필하기 어려운 그런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건이 보다 본격화되는 2부와 3부에서는 SF적 설정이 좀 더 부각되어 로맨스와 적절하게 균형을 이뤄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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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 - 개정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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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신(神, God)”이 실재(實在)하신다면 요즘 인간세상을 굽어보시며 어떤 생각을 하실까? 아마도 이래저래 심기가 불편하실 것 같다. 한 때는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초개같이 버리던 창조물(創造物)인 “인간(人間)”들이 요즘은 자신의 말씀을 따르기는 커녕 자기들이 만들어 낸 “돈”을 창조주(創造主)인 자신보다 더 숭배하고 있으며, 자신을 믿고 따른다는 “신도(信徒)”들도 어떻게 하는 짓들마다 “신(神)” 욕 먹이는 짓만 골라 하는지 신자(信者)들과 불신자(不信者)들 모두 밉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화가 치밀어 확 갈아엎어 버릴까(終末) 싶으시다가도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그래도 내가 만든 자식들인데 하시며 화를 꾹꾹 눌러 참고 있으실 것 같다. 그런데 영미 언론 선정 100대 지식인(그중 5위)에 오른 세계적인 정치학자 겸 저널리스트라는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종교 비평서 <신은 위대하지 않다(원제 God Is Not Great: How Religion Poisons Everything / 알마 / 2011년 12월)> 는 꾹꾹 눌러 참은 “신(神)”의 화를 더 북돋울 만한 지극히 “불경(不敬)”스러운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신은 죽었다”고 대놓고 외치던 “니체” 만큼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작가는 서문(序文)격인 “1.좋게 말해서”부터 강력한 어조를 쏟아낸다. 작가는 종교에 반대하는 주장 중에서 결코 물리칠 수 없는 것이 네 가지가 있는데 첫째, 종교가 인간과 우주의 기원을 완전히 잘못 설명하고 있다는 것, 이 첫 번째 잘못 때문에 최대한의 노예근성과 최대한의 유아독존을 결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둘째, 종교가 위험스러운 성적 억압의 결과이자 원인이라는 것, 셋째,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희망사항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넷째, 자신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경로를 통해 아주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단언하며 지금까지 수십 개국의 수많은 장소에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고 말한다. 이처럼 신을 불신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 우리의 원칙들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들이 오로지 과학과 이성만을 신봉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에 어긋나거나 이성을 능욕하는 모든 것을 불신하며, 서로의 의견들이 많은 면에서 갈릴 수 도 있지만, 자신들은 모두 자유로운 탐색, 개방적인 정신, 순수한 사상적 연구를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신념을 교조적으로 떠받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러한 믿음에 관한 논쟁은 모든 논쟁의 기초이자 기원인데, 철학, 과학, 역사, 인간의 본질에 관한 모든 논쟁이 여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며, 믿음에 관한 논쟁은 또한 선한 삶과 정의로운 세상에 관한 모든 논란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신앙은 우리가 죽음, 어둠, 미지의 것, 그리고 우리 서로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자신은 설사 종교를 금지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종교는 자신처럼 행동 - 종교의 각종 의식이나 행사, 그리고 그들이 믿는 모든 행위들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고 상대방에게 상응하는 조치를 요구하지 않는 그런 행동 -을 할 능력이 없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종교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글을 쓰고 읽는 자신과 우리들을 파멸시킬 계획, 인류가 힘들게 얻은 모든 성과를 파괴할 계획을 짜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종교는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는 것이 바로 그의 주장이다.

 

본문에 들어가면 보다 본격적으로 신에 대한 “모독”을 해대기 시작한다. 워낙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 요약하기조차 힘든데 몇몇 개만 소개해본다. 작가는 종교가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며 그 예로 인도 캘커타에서 소아마비 박멸운동을 벌였지만, 이슬람교도들이 불길한 서방의 약을 먹으면 성불능과 설사병에 걸릴 거라면서 백신접종이 음모라는 소문을 퍼뜨려 결국 실패했던 사례와 나이지리아 북부에서도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이 소아마비 백신이 이슬람 신앙을 파괴하려는 미국의 음모라고 선포하여 금지시켰던 사례를 예로 든다. 또한 바티칸 가족 위원회 의장인 "알폰소 로페즈 데 트루이요" 추기경이 콘돔에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자그마한 구멍을 몰래 뚫어 에이즈 바이러스가 그 구멍을 통과할 수 있다는 어이상실의 경고를 해대는가 하면,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직자 중 한명으로 꼽히는 “티모시 드 와이트"는 “제너(Edward Jenner)”가 발명해낸 천연두 백신 사용이 하느님의 뜻에 간섭하는 행위라며 반대했었으며, 최근에도 유대교 전통인 할례 풍습의 위험성을 경고한 저명한 유대인의사들의 보고를 무시하고 보건 담당 관리들에게 결정을 미루라고 지시한 뉴욕 시장이나 종교적 교리 때문에 수혈을 거부하거나 응급조치가 필요한 자녀들을 방치한 혐의로 기소되지만 유죄판결이 내려지지 않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한다. 이런 사례들을 비추어 볼 때, 종교는 보편적인 도덕과 윤리가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한 가지 분야에서는 유난히 범죄를 저지르는 성향이 있음을 증명했으므로 자신의 생각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잠정적인 결론, 즉 첫째, 종교와 교회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이 사실이 너무나 뻔히 드러나 있어서 무시할 수 없고, 둘째, 윤리와 도덕은 신앙과 그다지 결부되어 있지 않으며, 신앙에서 유래할 수 없으며, 셋째, 종교는 자신의 행위와 믿음 덕분에 신에게서 특별한 면죄부를 받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무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부도덕하기도 하다는 결론을 내려도 될 것 같다고 말한다. 무지하기 때문에 자기 자녀를 학대하는 정신병자나 짐승같은 놈들은 처벌 받아 마땅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잔인한 행동을 하면서 천국의 허락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미 악에 물들었으므로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창조론(創造論), 즉 “지적설계론(知的設計論)에 대해서도 비웃는다. 종종 창조론자들이 인간의 눈 같은 놀라운 물건이 "눈먼" 우연으로 생겨났을 리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렇게 지적설계론을 주장하는 일파는 정말이지 더할 나위없는 예를 골랐다며 비웃는다. 현재 우리는 눈을 갖고 있는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태어난 이유까지도 잘 알고 있다면서 인간 눈의 해부학적 구조는 사실 "지적인 설계"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지적인 설계자가 최적의 시각을 목표로 했다면, 왜 눈의 위아래, 앞뒤를 거꾸로 만들었겠냐며 반문한다. 우리 눈이 심한 근시가 된 것은 우리가 앞을 보지 못하는 박테리아에서부터 진화해왔기 때문이며, 이 박테리아는 우리와 DNA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진 것처럼, 우리 눈은 일부러 설계한 망막의 맹점에 이르기까지 잘못 설계된 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가장 고등하고 가장 똑똑한 동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보다 열등한 생물인 물수리의 눈은 우리 눈보다 60배나 강력하고 정교하며, 독창적인 재주가 빚어낸 또 다른 ”기적(奇蹟)”인 기생충들, 그 미생물들로 인해 종종 발생하는 실명(失明)은 인류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비극적인 장애 중 하나라고 말한다. 즉, 그렇게 놀라운 물건이라는 사람의 “눈”이 구조적인 면에서 너무 모순 투성이며 하등 생물의 눈보다 훨씬 떨어지는 능력을 보유하는 것을 보면 전혀 지적 설계의 증거라고 볼 수 없다는 해석이다.

 

또한 작가는 “종교가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가”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내세울 주장이 없을 때, 종교적 신념이 사람들을 더 낫게 만든다거나 사회를 교화시킨다는 주장을 끄집어내는 경향이 있는데, 이처럼 믿음이 없다면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방종과 이기심에 빠져들 거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게 된다면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다 믿게 된거나 마찬가지라는 “체스터튼”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면서 신자가 미덕을 행하는 것이 신앙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증거가 결코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신(神)”을 부정하게 된 것이 과학이 발달한 근래에 들어 일어난 일일까? 작가는 신이 존재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 신의 이름으로 악행 저질러졌다는 것, 신을 만든 것이 바로 인간일 가능성, 세상에 피해를 덜 끼치는 대안적인 믿음과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과거부터 항상 있어온 “합리적인 전통”이지만 그런 사람들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항상 가차 없는 억압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들의 정체를 파악할 길이 없으며, 겉으로는 경건한 신자처럼 보인 사람들 중에 남몰래 불신앙을 간직했던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 지도 역시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런 전통을 계승해온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소크라테스, 루크레티우스 - "만물의 본질에 대하여"라는 책을 편찬했던 기원전 1세기의 시인. 그 덕분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原子) 이론이 간신히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졌다 -, 스피노자, 이마누엘 칸트, 프랭클린과 제퍼슨의 친구였던 토머스 페인. 찰스 다윈, 아인슈타인을 예로 든다.

 

작가는 “결론: 새로운 계몽이 필요하다”에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인류의 견본은 바로 인간 그 자체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계몽주의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전의 계몽주의자들처럼 대단히 용감하고 재능 있는 소수의 영웅적이고 획기적인 성과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며, 새로운 계몽주의 운동은 과학의 발달로 연구와 개발의 개념 자체가 혁명적으로 바뀌었고, 성생활과 두려움, 성생활과 질별, 성생활과 폭정 사이의 연관성 - 종교는 이를 무기로 인류를 협박해왔고 근래까지는 잘 먹혀 왔었다 - 을 끊어버리려는 시도가 가능해졌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 범위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새롭고 인본주의적인 문명이 진보주의자들의 꿈처럼 곧바로 발전해나갈 것이라는 믿는 사람은 타고난 유토피아주의자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먼저 선사시대의 흔적을 초월해야 하고, 우리를 굴종과 비굴함과 죄책감이 어우러진 쾌락과 악취를 풍기는 제단과 지하교회로 다시 끌어당기려 하는, 말라비틀어진 손에서 도망쳐야 한다. 그래서 철학의 위안을 부드럽게 제시해주는 말인 그리스인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마음을 깨끗이 하려면 적을 파악하고 싸움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책을 끝맺는다.

 

이 책, 여러모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2006)>과 비교되는 책이다. <만들어진 신>을 읽은 지가 3년이 넘어 세세하게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만들어진 신>이 동물행동학자, 진화생물학자라는 작가의 이력답게 과학적 분석과 해석 기법을 바탕으로 신과 종교를 비판하는 책이라면 이 책은 종교의 허상이나 경전의 모순들을 비판하는 이론이나 학설들은 비교적 간략하게 소개하는데 그치고 저널리스트답게 보다 더 신랄하고 강력한 어조로 비판하는 형식을 취한다. 마치 사실(事實) 관계는 간략하게 소개하고 글쓴이의 주장을 보다 부각해서 명확하고 분명하게 쓰는 신문 사설(社)을 읽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런데 신과 종교에 대한 비판 어조가 보다 명확해지고 분명한 것은 좋은데 관련한 이론들을 간략하게 다루다 보니 이런 종류의 책을 처음 읽는 분들보다는 이미 다른 책들을 읽어 봤거나 종교 비판에 대한 관련 지식이 있는 분들에게 더 잘 맞는 그런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책들을 꽤나 읽어봤음에도 책에서 언급하는 여러 인물들이나 이론들이 꽤나 낯설게 느껴져 어렵게까지 느껴지는 것을 보면 결코 쉽지 않은 책인 것 같다. 그간의 종교 비평서들의 “심화학습” 편이라 할 수 있는 이 책, 그래서 읽는 재미와 이해도는 <만들어진 신>이, 강렬하고 신랄한 어조, 자극적인 면에서는 이 책이 좀 더 낫다고 평가하고 싶다. 다만 이 책을 먼저 읽었다면 이 책에 더 후한 점수를 주겠지만 이미 <만들어진 신>이나 몇몇 비평서들을 통해서 접해본 익숙한 내용이었기에 신선함을 그다지 느껴볼 수 없었던 터라 아무래도 <만들어진 신>에 좀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라면 지극히 불편하겠지만 “무신론자(無神論者)”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에 대하여 믿고 안 믿고는 의미가 없는, 다만 기존 권력이자 질서 - 이제는 종교가 도덕적, 관념적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위치에서 내려온 지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 신과 종교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살인과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 위치는 여전히 견고한 것 같다 - 인 종교에 도전하는 흥미로운 이야기 정도로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책 때문에 신심(信心)이 투철한 주변 종교인들과 다툴 생각도 없고, 또한 그들이 갖고 있는 "선의(善意)"를 작가처럼 의심하고 싶지도 않다. 즉, 생각이 서로 다를 뿐 이 책처럼 종교인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단, 작가의 주장처럼 우리들을 파멸시킬 계획을 종교인들이 짜고 있다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읽기 전에는 그간 읽어온 종교 비평서 들보다 더한 재미와 통쾌함을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막상 읽고 나니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평이한 수준이라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종교 비평서로서 탁월한 수준의 논증과 비판을 담고 있는, 읽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한 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기회가 된다면 <만들어진 신>과 이 책이 어떤 점들이 같고 다른지 구체적으로 비교해보는 책읽기를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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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달력 1
장용민 지음 / 시공사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대 마야문명이 예고한 종말(終末)의 날인 “2012년 12월 21일”이 이제 일 년도 채 남지 않았다. 1992년 “휴거(携擧)” 소동과 1999년 “노스트라다무스” 종말 예언처럼 해프닝으로 끝나겠지만 그래도 날짜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니 일말(一抹)의 불안감은 지울 수 가 없을 것 같다. 실제로 예언이 맞을지는 조금 더 두고 볼 일이지만 이런 마야의 종말론 을 소설, 드라마, 다큐멘터리, 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만나볼 수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영화가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2012(원제 Two Thousand Twelve/소니픽처스/2009년)일 것이다. 마야 문명이 예언한 2012년 전(全) 지구적 규모의 화산 폭발, 대지진, 지각변동 등의 자연 재앙이 몰아닥치고 히말라야까지 덮어 버리는 거대한 해일을 피해 몇 몇 국가들이 <창세기(創世記)>의 “노아(Noah)"처럼 “방주(方舟)”를 만들어 탈출한다는 내용인데 스펙터클한 영상과 진한 감동 스토리로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157분)으로 보는 내내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재미있는 영화였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마야의 종말론을 소재로 한 기가 막힌 소설을, 그것도 “우리” 작가가 쓴 소설을 만났다.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운명계산시계> 등 한국형 팩션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장용민”의 <신의 달력 1,2(영어제목 Tzolkin; The Calenda of God / 시공사 / 2009년 7월)>이 그 책이다. 세계 종말에 관련된 책이나 영화 참 좋아하는데, 이렇게 출간된 지 1년이 훌쩍 넘어서야 내눈에 띄이다니 후회 - 그래도 2012년 12월을 넘기지 않고 읽게 된 건 다행이라고 할까? - 가 될만큼 참 재미있는 책이었다.

 

 

(이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전도유망한 역사학자였지만 7년 전 어린 딸 “에밀리”가 악마 숭배자에게 납치당해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고를 겪고는 지난 7년 동안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1만 2천 달러의 빚과 자신에 대한 실망 뿐인 “하워드 레이크”는 이혼을 거부하는 배우자에게 완력을 써서 강제로 도장을 받아내는 탐정(探情)으로 근근히 살아간다. 필라델피아 외곽 빈민가까지 날아가 한 건 해결하고 돌아온 그에게 “에밀리”라는 여인이 사건을 의뢰한다. 납치당했다가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딸이 말하는 남자 “새뮤얼 베케트”를 찾아 달라는 것이다. 단서라고는 이름 뿐이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지라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하고만 하워드는 딸 납치 사건으로 알게 된 형사 “해리”의 도움을 받아 뉴욕에 거주하는 동명의 새뮤얼 베케트 12명의 리스트를 입수하여 차례차례 조사에 나선다. 다섯 번째 새뮤얼을 조사하던 중 아주 특이한 사실을 발견한다. 허름한 군복 점퍼에 맨발로 다니는 이 남자는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들을 구조하는 등 납치 사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또한 자신을 찾아올 남자, 즉 하워드에게 남긴 편지에는 하워드의 과거를 암시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하워드는 해리에게 보다 자세한 자료를 요구하는데, 도저히 믿기지 않는 회신을 받는다. 쫓고 있는 30대 초반의 새뮤얼이 서류상으로는 이미 134세를 넘겼고, 납세 기록에 따르면 1954년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가 근무했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청소부로 근무했다는 것이다. 연구소에 방문한 하워드는 그곳에서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에 골몰했던 무렵, 그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줬던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가 바로 “새뮤얼 베케트”였고 수십 년 후 연구소에서 재회한 아인슈타인이 그에게 자신의 노벨상을 전해 주라는 유언이 담긴 비밀 유언장에 대해 알게 된다. 연구소 원장은 하워드와 면담 후 꼭꼭 감춰두었던 유언장을 다른 곳에 택배로 보내지만 그날 밤 정체불명의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이를 목격한 하워드는 급히 뉴욕으로 돌아와 그 택배를 가로채지만 자신 또한 그 세력에 의해 절대 절명의 위험에 처하지만 바티칸 소속 “린지” 수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또한 자신에게 사건을 의뢰한 에이미 뒤에는 미국 최고의 스타 목사이자 엄청난 부를 쌓은 “언더우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언더우드에게서 새뮤얼 베케트의 존재를 조사해달라는 정식 의뢰를 받은 하워드는 본격적으로 그의 행적을 쫓게 되는데, 다시 재회한 린지 수녀와 동행하게 된 하워드는 조사가 진행되면서 더욱 믿기지 못할 사실들을 알게 된다. 새뮤얼 베케트가 기원후 지난 이천여 동안 인류 역사상 분기점을 이루는 위대한 발견들, 즉 콜롬버스, 뉴턴, 조나단 스위프트,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 뿐만 아니라 최근 인간 DNA를 완전히 해석해 낸 한국인에 이르기까지 그들 앞에 나타나 결정적인 도움을 줬으며, 이천년 쯤 된 오래된 기독교 비밀 무덤에서 발견된 시신이 쥐고 있던, 예수의 실제 초상화로 짐작되는 그림의 얼굴이 바로 새뮤얼 베케트의 얼굴이었다. 즉 이천년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여 승천(昇天)한 것으로 알려진 “예수”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더욱더 믿기지 않는 사실은 예수가 사라진 시기에 마야 문명에 나타난 전형적인 백인 남자 모습의 신(神) “케찰코아틀”도 다름 아닌 새뮤얼 베케트, 즉 “예수”였으며 이처럼 예수는 하늘로 승천하지 않고 지상에 남아 역사의 분기점을 이끌어왔다는 것이다. 위험천만한 모험과 여러 우여곡절 끝에 하워드는 새뮤얼과 만나게 되지만 어이없게도 새뮤얼은 광신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이천년 전처럼 3일 만에 부활(復活)한 새뮤얼은 다시 사라지고, 고대 마야가 예언한 6가지 종말의 징조들이 차례대로 일어나며 세상은 종말에 대한 두려움으로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하워드는 또 다른 마야의 고대 문서에서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 콜럼버스가 비밀리에 방문했었고,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언급되어 있는 공중 도시, “마추피추”로 향하게 된다. 과연 그는 종말을 막아낼 수 있을까? 인류의 시계는 2012년 12월 21일, 마침내 멈춰 서게 된다.

 

 

처음에는 이천년을 살아온 의문의 남자 “새뮤얼 베케트”가 방랑하는 유대인 “아하스 페르츠(Ahas Pertz)” -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나 이우혁의 <퇴마록>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바로 “예수(Jesus)"라니 이런 기막힌 - 기독교를 믿는 분들에게는 지극히 불경(不敬)한 - 상상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사실 예수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데 여기서 열걸음 쯤 더 나가 이천년을 넘게 살면서 인류 역사 발전을 이끌어 왔다니 작가의 상상력에 절로 경탄이 터져 나온다. 특히 마야의 신 “케찰 코아틀”과 “예수”의 연관성은 이런 음모론이나 미스터리를 즐겨 하는 나로서도 처음 들어본 이야기라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몇 몇 해괴한 문서들이 검색되긴 하는데, 여기에서도 예수가 직접 바다를 건너 고대 멕시코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환생(還生)한 것 쯤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작가만의 기발한 상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정도 만으로도 놀라운데 작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널리 알려진 온갖 음모론들, 즉 사탄 숭배, 원본의 행방이 오늘날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 ”콜럼버스의 항해록”, 최근 시간여행자로까지 오해받고 있는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의 공중 도시 “라퓨타”의 수수께끼, 예수의 피와 살점이 묻어 있다는 성유물(聖遺物) “롱기누스의 창” - 이 창에 묻어 있는 예수의 피와 살점으로 DNA을 복제해서 예수 재림을 꾀한다는 소설도 있다 -,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단골손님인 히틀러와 고대 유물을 찾아나선 나치의 비밀 집단, 금서(禁書)였다가 최근에 그 정체가 알려진 <유다의 복음서>, 외계인이 전수했다는 루머까지 나도는 아인슈타인 상대성 원리 발견의 수수께끼, 그리고 종말의 날을 예언한 마야 달력 등등 음모론을 총망라하여 마치 블록을 조립하듯이 하나하나 꿰맞춰 전혀 새롭고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창조해낸다. 그런데 이런 블록들이 서로 겉돌거나 어색하지 않고 마치 원래부터 딱 그 자리가 있는 것처럼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내는 것을 보면 작가의 구성력 또한 결코 예사롭지 않은 것을 알게 해준다. 전작들인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1996)>이나 <운명계산시계(2000)>에 대한 호평(好評) 또한 줄을 잇는 것을 보면 15년 넘게 단련된 작가의 내공이 이 책에서 마침내 개화(開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몇 몇 아쉬운 대목도 있다. “롱기누스 창”에 새뮤얼이 결정적 힌트를 준 12 사도의 앞 글자가 새겨져 있고, 거기에는 이천년 전 당시에는 있지도 않은 글씨인 마야 문명의 고대 문자와 심지어 한글(“ㅅ”)까지 새겨져 있다는 설정은 아무래도 억지스럽다. 결국 창을 소유하는 사람은 세계를 지배한다는 엄청난 전설(傳說)을 간직하고 있는 “롱기누스 창”은 그런 전설이 무색하게 그저 새뮤얼의 12 사도의 정체만 알려주는 데 그치고 만다. 그리고 <걸리버 여행기>라는 놀라운 소설을 쓰긴 했지만 “조나단 스위프트”가 인류 역사 발전에 기여한 바가 뭐가 있길래 12 사도에 끼게 되었는지 잘 납득이 가지 않으며 - 결국 조나단 스위프트의 역할은 “공중 도시”의 정체를 안내하는 정도로 그치고 만다 - , 마야의 종말의 징조가 차례차례 일어나는 대목과 마지막 결말 또한 좀 더 긴장감있고 스펙타클한 면을 살렸으면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이처럼 몇 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2권 합계 700 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이 너무 짧다고 느꼈을 정도 참 재미있는 책이다. 요즘 들어 별 다섯개 만점을 남발(?)해서 신뢰성을 크게 잃었지만(^^) 이 책, 하룻 만에 다 읽어낼 정도로 정말 재미있는 책이었으며 특히 우리나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기발한 상상력에 더 후한 점수를 줘서 만점을 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철저하게 주관적인 평점이니 비난하지 말아주시길^^ 종말에 관련된 재미있는 읽을 꺼리를 찾는 분이라면, 평소에 음모론이나 미스터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그리고 예수에 대한 지극히 불경하고 발칙한 이야기라고 해서 혐오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허구니까 하고 웃어 넘길 수 있는 분이라면 이 책 꼭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이 책, 작가 이름을 외국 이름으로 바꿔 놓고 외국 작가가 썼다고 우겨도 통할 만큼 - 물론 "낙장불입" 같은 우리 단어는 삭제하고 말이다 - 외국에서도 충분히 통할 만큼  재미있는 책인데 출판사 홍보글에 보면 구상 단계에서부터 해외진출을 염두에 두고 작업이 진행되어 에이전시를 통해 해외 진출을 모색 중이라는 글귀가 있길래 관련 기사들을 찾아봤지만 출간된 지 1년이 훨씬 넘었는 데도 감감무소식인 것 보면 결국 무산된 것은 아닌지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이 책, 해외 진출이 아직도 추진되고 있다면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적어도 종말의 날인 2012년 12월 21일 전에 이뤄져야 할 테니까. 그때까지 이뤄지지 않고 실제 종말이 일어난다면 - 설마^^ - 진출 자체가 불가능해질 테고, 종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미 이 소설은 적기(適期)를 놓쳐버리고 만 셈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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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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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여야(與野) 할 것 없이 쇄신에, 통합에, 연대에, 물갈이에 난리가 보통 난리가 아니다. 그들의 몸부림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도 예전 같으면 뉴스에 정치의 “정”자만 나오면 아예 리모컨을 돌려 버리거나 꺼버렸을 텐데, 또는 눈과 귀를 닫아 버리거나 또는 총선(總選)과 대선(大選)이 다가오니 “생쑈”를 반복하는 구만 하고 비웃었을 텐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다. 물론 냉소적인 시각은 여전하지만 주변 지인들 중에 평소에는 정치에 관심도 없던 분들이 요즈음 정치 뉴스에 부쩍 관심을 갖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분들이 많아졌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현 정치인들에게 뭔가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택도 없는 소리일 것이다. 이렇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시계 바늘을 잃어버렸다는 10년을 넘어 20년, 30년 뒤로 너무 많이 돌려 놓으신 “누구”의 공 - 딱히 잘하신 일은 떠오르지 않는데 정치와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 분들을 정치판으로 불러들이고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최고조로 이끌어냈다는 점만큼은 만고에 길이 남으실 업적(?)을 쌓으셨다 - 이 가장 크겠지만 “정치”라는 것이 결코 우리의 삶과 전혀 동 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생존”에 직결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정치가 알고 보면 꽤나 재미(?)있다는 것을 국민들이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데는 이제는 “국민 방송”이라 부를 정도로 위상이 커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의 역할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 보니 <나꼼수> 4인방, 즉 김어준 총수, 정봉주 전 국회의원, 주진우 기자, 김용민 PD의 인기가 웬만한 연예인 뺨 칠 정도로 대단하다고 한다. 4인방 중 정봉주, 주진우, 김용민이야 비교적 최근에 뜬 “신성(新星)”이지만 김어준 총수는 그가 창간(創刊)한 “딴지일보”가 벌써 햇수로 14년(1998년 7월 4일 창간)이 되었으니 한참 묵은 “구성(舊星)” - 이런 단어가 있나 모르겠다^^ - 인 것이 다르다 할 수 있겠다. 최근에 인터넷 칼럼으로, <나꼼수 방송>으로, 몇 몇 인터뷰집으로 띄엄띄엄 만나봤던 “김어준”을 책으로 올곧이 만나게 되었다. 2011년 온·오프 라인 통틀어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지금도 상위 목록을 차지하고 있는 <닥치고 정치; 김어준의 명랑시민 정치교본(푸른숲/2010년 10월)>이 바로 그 책이다. 이 책 출간 당시 구입했었는데 이 책 저 책 다른 책들 읽는다고, 그리고 아껴 읽겠다고 몇 달 동안 책꽂이에 묵혀 두었다가 해(年)를 바꾼 올해 1월에 들어서야 읽게 되었다. 역시나 기대에 걸맞게 “김어준식” 정치 해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여실히 증명해주는 책이었다.

 

이 책의 집필 동기가 꽤나 웃기다. 김총수는 서문(序文)에서 이게 다 “조국” 교수 덕이란다. 스펙, 얼굴, 기장, 음색, 사상, 이건 토털 패키지, 이만하면 역대 최고 선수라고 열렬 환호했는데 조국 교수의 <진보집권플랜>을 들었다가 재수 없을 수 있겠구나 그리고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문 읽다 덮었단다. 그래서 아무도 안 시켰는데 혼자 불끈해서 돕자고 나선 게 이 책이란다. 그런데 이미 돕자고 출발해버렸는데 조국 바람이 너무 빨리 잦아들어 버렸고, 그래도 기왕 나선 거 내처 달리자, 일이 그리된 거란다. 그러면서 다음 페이지부터 펼쳐질 내용, 어수선하고 근본도 없고 막가니 근본 있는 자들은 괜히 읽고 승질내지 말고 여기서 덮으라고 친절하게 사전 경고한다. 그리고는 반론은 받지 않을 테니 열 받으면 니들도 이런 거 하나 쓰란다. 나는 이 책 읽고 승질이 나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었으니 근본이 없는가 보다^^

 

유명한 “인터뷰어(Interviewer)"로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한 ”지승호“씨와 대담 형태로 이뤄진 이 책, 본문에 들어서면 김어준식 정치 해설이 깨알같이 담겨 있다. <나꼼수>에서 여러번 다루었던 ”가카“의 BBK와 도곡동, 다스 의혹들과 대한민국의 실질적 지배 권력 “삼성” 이야기 뿐만 아니라 심상정, 이희정, 노회찬, 손학규, 한명숙, 유시민 등 야권 정치인들, 박근혜, 홍준표, 원희룡 등 여권 정치인들과 김총수가 조국 교수보다 더 “사모(思慕)”하며 대통령감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로 꼽는 문재인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정치, 경제 세력들에게 김어준 특유의 “무학(無學)”적 통찰과 유쾌하면서도 신랄한 메스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워낙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고, 거리낌 없이 실명(實名)을 거론하고 있어 책 내용을 소개하기가 부담스러운데 - 사실 실제 읽어보면 훨씬 재미있기 때문에 그런 재미를 요약식 소개에 담기가 더 부담스럽다는 게 맞는 말이다 -, 그 중 김어준식 “진보·보수 구별법”과 예언자(豫言者) 포스까지 보여주는 놀라운 혜안(?) 몇 개만 소개해보자.

 

김총수는 진보와 보수가 교육으로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이라는 특이한 주장을 한다. 저 먼 “사바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좌우의 원형질에 해당하는 감정이나 태도가 바로 살고 싶은 “욕망”과 자기 존재를 위협하는 대상에 대한 “공포”라고 한다. 그 시절의 욕망은 먹고 자고 섹스하는 모든 동물이 가진 본능적 욕구라 할 수 있다면 그 시절 가장 큰 공포는 불확실성이었다고 한다. 사자도 두렵지만 풀숲에서 튀어나올지 뭔지 아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 즉 불확실성이 공포의 원형질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주식시장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불확실성인 것처럼 불확실성에는 논리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따로 없으니 인간이 불확실성이라는 공포에 따로 대처할 방도를 찾지 못하니까 굿도 하고, 별자리도 보고, 종교도 생겼다는 것이다. 이런 불확실성이라는 공포에 대처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 바로 좌, 우인데 우(右)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약육강식의 전쟁터”로 이해한다. 그렇다 보니 생존이 상시로 위협받는 약육강식의 환경에선 살아남기 위해 더 강한 포식자가 되어,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고, 더 악착같이 그걸 독점하는 굉장히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인지하는 세계에선 자신이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게 도저히 죄가 될 수 없는 당연한 생존의 권리이며, 더 강한 자가 더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도 죄일 수 가 없는 마땅한 권리 행사일 뿐인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고생해서 자기 것을 챙겼는데, 만약 그걸 누군가 가져가거나 남들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해보면 영 억울하기만 한, 그래서 자기가 강해서 획득한 자산, 그걸 남에게 뺏기지 않을 권리, 그렇게 확보한 자산의 차이로 만들어지는 위계, 그렇게 형성된 계급의 유지, 그 유지를 위해 필요한 질서, 그 질서의 지속적 보장이 그들이 인지하는 세계에선 무척 중요한 요소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격차로 인한 불평등은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이치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뒤처지거나 약한 건 전부 자기 탓이니까. 그렇다면 본능에 가까운 기질적 “우”를 정치세력, 우파(右派)라고 불러줄 수 있는 요인을 무엇일까? 바로 그 요인을 김총수는 “자존심(自尊心)”이라고 꼽는다. 정치적 우파와 동물적 우파와 다른 점이 바로 “자존심”의 유무 차이인데 나보다 더 강한 놈이라 해도, 그게 두렵기는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굴복하기엔 자존심이 상해서 자기 존재에 대한 자부심이 그 본능적 공포를 이겨낼 때 진정한 우파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우파는 자존심이 없는 겁먹은 동물이며 정치적으로 우파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다고 잘라 말한다. 친일도, 친미도, 결국 자존심 없는 우가 동물주제에 인간 우파인척 하는 것이며, 우리 정치는 우파가 많아서가 아니라 우파가 없어서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좌(左)”는 어떤 기질일까? 우가 세계를 약육강식의 정글로 보고 내가 먼저 포식자가 되어 살아남아야겠다는, 공포에 대한 동물적 반응이라면 좌는 정글 그 자체가 문제라고 접근하는 이들로 개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자원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로 본다고 말한다. 좌도 정글의 불확실석이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우가 그 공포에 압도되어 자기만이라도 살려고 반응하는 거라면, 좌는 그 공포를 잘게 나눠 각자가 담당해야 하는 공포의 몫을 줄여서 해결하려 한다. 우가 본능적 반응이라면 좌는 논리적 대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가 처리해야 하는 공포의 크기를 균등하게 만드는, 평등이 아주 중요한 가치로 등장하며, 우가 쎈 놈은 더 가져가도 된다는, 질서와 위계를 당연시 하는 수직적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좌는 누구나 같은 조건에선 같은 정도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 수평적 관계를 지향한다. 그러니 연대가 키워드가 되는 거고. 그 연대를 작동시키는 엔진은 염치가 되는, 우의 엔진이 욕망과 공포인데 반해서 좌의 엔진은 인간이 가진 염치가 되는 것이다. 역시 좌 역시 타고나는 것으로 공포를 이성(異性)으로 제어하면서 논리적 추론을 통해 시스템을 문제 삼는 것이기에 기질을 넘어 하나의 세계관이라고 봐줄 수 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세계관은 근대에 들어서 서양의 기획에 의해 이념으로 정리된 것이지, 좌·우가 그제야 탄생한 건 아닌 타고난 기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좌에도 취약점이 있으니 스스로 지적으로 우월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부지불식간 드러나는 지적 오만이 대중들로부터 좌를 유리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자기들만의 언어로, 자기들끼리만 대단하고 자기들끼리만 정당하고, 자신들의 언어로 거대한 담론을 설법하려들거나 자기들끼리만 잔치를 하고 자기들끼리만 거룩한 순교자가 되는 것이 바로 취약점이라 말한다.

 

김총수는 이런 구분법으로 한국적 보수가 북한을 대하는 태도를 설명하는 단서 또한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불확실성 그 자체인 북한이라는 두려움을 가장 손쉽게 처리하는 방식은 상대를 악(惡)으로 규정해버려 윤리적 단죄의 대상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것이다. 무섭다고 하기보단 나쁘다고 규정해버리면 북한은 무서워서 싫은 게 아니라 악(惡)해서 싫다고 그래서 단죄하고 척결해야 하는 한마디로 원시인 수준이라는 것이다.

 

김총수의 이런 “좌·우” 선천적 기원설(?) 및 구분법이 정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유효한 해석인지 아니면 김총수식 “개똥철학”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어떤 진보·보수 구별법보다도 쉽게 이해되고 설득력 또한 꽤나 크게 느껴졌다. 물론 내가 “근본”이 없어서 그렇게 이해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말이다^^

 

김총수는 또한 앞으로 벌어질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전망하는데 몇 몇 건은 최근 실제 정치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어 놀라움마저 느끼게 한다. 책 출간은 작년 10월이지만 녹취(綠翠)는 작년 5월이었으니 최근 일련의 정치 상황들, 즉 서울시 보선(補選)과 야권 통합과 연대, 여권 쇄신 바람이 불기 한 참 전이었을 텐데 그는 심상정이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만의 선통합을 주장하고 최후의 순간에는 탈당(脫黨)까지도 예상하고 있으며(P.218), 작년 7월에 있을 한나라당 전당대회 전망에서 "홍준표"가 가장 일반적인 선택이라고 예측하고(P.255.), 서울시장 보선에서 정치판을 크게 흔들었던, 그리고 연일 유력한 대권 주자로 그 이름을 오르내리고 있는 안철수에 대해서도 대선과는 상관없는 분이지만 어찌나 시대를 거꾸로 돌리고 있는지, 정치에 전혀 관심 없던 일반인들까지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온몸으로 자각하게 해준 "그분"의 공로로 일이 그 지경이 되다 보니까 안철수 정도 되는 인물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주기를 바라는 사회적 열망이 생겨났고, 그렇기 때문에 아주 특수하고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안철수 정도 되는 인물이 정치 전면에 나서겠다고 선언하기만 하면 기존 정치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거대한 회오리가 일어날 거라고 전망한다(P. 240~241). 이 정도면 거의 “예언자”급 포스가 아닐까? 설마 녹취 후에 일련의 정치 상황을 보면서 수정을 한 건 아닐 것이다. 그런 “꼼수”는 “누구”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이 책, <나꼼수> 못지않게 참 재미있다. 김어준식 정치 해설은 딱딱하고 어렵기만 한 정치 상황들을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언어 - 여기엔 욕도 포함된다 - 로 가슴 뻥 뚫리는 통쾌함과 재미를 선사하면서도 기성 정치인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그리고 웃고 즐기다가도 가슴 한 켠에는 곱씹어 볼만한 생각꺼리를 던져준다는 점을 장점으로 들 수 있겠다. 경박스럽다느니, 깊이가 없다느니, 여론을 호도한다느니 별별 비난도 많이 듣겠지만 정치를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그리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하는 정치, 시사 평론가가 있었는가? 앞서 언급한 서문에서 그의 말대로 열받으면 그들도 이런 글 쓰면 그만 아닌가? 근데 그런 재주들이 없는지 <나꼼수> 대적용 방송도 만들고 각종 칼럼이나 책들도 쏟아내지만 "그쪽"은 영 인기가 없다.  괜히 트위터 알바나 동원하지 말고, 고소 고발로 그들을 가두려 하지 말고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지금부터라도 그쪽판 김총수를 만들어가는 게 좀 더 건설적인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그쪽 편 몇 몇 논객들을 보면 영 싹수가 안보이니 차라리 김총수와 그의 일당들을 천문학적인 고액으로 매수를 하는게  더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

 

 물론  이 책에 담고 있는 김어준식 담론을 백퍼센트 믿거나 완전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억지스러운 면도 없지 않고 견해가 다른 부분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국민들의 식견도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예전처럼 무지몽매한 수준을 벗어나 왠만한 정치 시사 평론가들이 무색할 정도로 많이 높아졌다. 수긍하는 대목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견해가 다른 부분은 무시하면 될 것 같다. 그렇지만 분명 시국이 아주 엄중해서 평소 정치에 관심 없는 게 쿨한 건 줄 아는 사람들에게, 좌우 개념 안 잡히는 사람들에게, 생활 스트레스의 근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번 대선이 아주 막막한 사람들에게, 그래서 정치를 멀리하는 모두에게 이번만은 닥치고 정치를 외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기대를 훨씬 뛰어 넘는 성공을 거둔 것 같다. 그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에서 “남은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께요”라고 약속했던 것처럼 그는 앞으로도 그 어떤 정치적 외압에도 “쫄지 않고” 끊임없이 뭔가를 해보려고 할 것이다. 그가 하려고 하는 “뭔가”가 이번 총선과 대선에서, 아니 이번이 어렵다면 다음에라도 반드시 결실을 맺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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