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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도
펠릭스 J. 팔마 지음, 변선희 옮김 / 살림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SF소설과 영화의 단골 소재인 “타임머신(Time Machine)"의 개념은 “쥘 베른”과 함께 ‘과학소설의 아버지’로 불린다는 영국의 과학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인 “H.G.웰스(Herbert George Wells; 1866 ~ 1946)의 소설 <타임머신(1895)>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타임머신>을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작품에서 시간 여행자는 공간의 세 평면인 길이·너비·두께와 네 번째 차원인 시간, 즉 “4차원(四次元)”의 개념으로 시간 여행을 설명하고 있다는 데, 시간 차원을 제4차원으로 간주한 것은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특수상대성이론(1905)”에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하니 이보다 10년 전에 비록 소설 속 허구이긴 하지만 4차원 개념을 정립한 셈이니 놀라지 않을 수 가 없다. 그런데 이런 “시간여행(Time Travel)"은 과연 웰스의 머릿속에서 나온 순수한 창작이었을까? 혹시 웰스는 실제로 타임머신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든 알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이름 모를 과학자가 타임머신을 발명했다거나 또는 미래의 시간 여행자가 웰스를 방문해서 그런 정보를 주진 않았을까? 그래서 실재(實在)하는 타임머신을 웰스가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4차원에 대한 개념이나 시간여행을 그렇게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그려내지 않았을까? “조나단 스위프트”가 시간여행자였고 타임머신을 통해 미래를 다녀와서 그걸 토대로 <걸리버 여행기>를 썼다는 설(說)이 있는 것처럼 허무맹랑하지만 한번쯤은 의심(?)해볼 만한 그런 상상일 것이다. 스페인 작가 “펠릭스 J. 팔마”의 <시간의 지도(원제 El Mapa del Tiempo /살림출판사/2012년 2월)>는 이처럼 H.G.웰스와 시간여행에 얽힌 재미있는 상상을 그려낸 소설이다.
작가는 과거를 다시 돌이킬 수 있고 우리들이 걸어온 발자국 위를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감격과 놀라움이 가득한 모험에 초대한다는 팸플릿의 글과 함께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막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젊은 청년의 이야기로 1부를 시작한다. 웰스가 <타임머신>를 발표한 지 1년 후인 1896년, 8년 전에 희대의 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에게 연인 “마리”를 살해당한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리가 살해당했던 곳에서 권총으로 자살하려는 “앤드류 해링턴”을 뒤이어 달려온 사촌인 “찰스”가 가까스로 막아낸다. 찰스는 앤드류에게 최근 런던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머레이 시간여행사”에게 부탁하여 8년 전으로 돌아가 연인을 구해내자고 제안한다. 반신반의하면서 찰스를 따라 나선 앤드류는 머레이 사장에게서 자신들의 시간여행은 로봇과 인류가 전쟁을 벌이고 있는 “2000년”으로 밖에 할 수 없다는 말에 실망하지만, <타임머신>을 집필한 H.G.웰스라면 혹시 타임머신을 실제로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며 그렇다면 과거로의 여행도 가능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둘은 웰스를 찾아가게 된다. 웰스는 자신을 찾아온 두 청년에게 자신의 집 2층에 있는 타임머신을 제공하고, 앤드류는 8년 전 과거로 돌아가 마리를 살해하기 직전 잭 더 리퍼를 살해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데, 그러나 현실은 전혀 바뀌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되고 크게 실망한다. 웰스는 그런 앤드류에게 또 다른 우주, 즉 평행우주(平行宇宙)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그 곳에서는 마리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위로한다. 2부에서는 머레이사의 2000년으로의 시간여행을 소개한다. 로봇과 인간의 최후의 전쟁이 벌어지는 2000년 5월 20일로의 2차 시간여행 원정대에 참여하게 된 귀족 출신의 소녀 “클라라”는 로봇의 대장인 “솔로몬”과 처절한 사투 끝에 승리를 거둔 인간 대표 “섀클리턴” 대장에게 한 눈에 반하고야 만다. 현재로 돌아온 어느날, 미래에서 새클리턴 대장이 클라라를 찾아온다. 미래에 놓고 간 클레어의 양산을 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둘은 하룻밤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섀클리턴 대장이 미래로 돌아가면서 기약 없는 이별을 하고 만다. 그런데 미래의 로봇을 만들어낸 상인을 죽이기 위해서 비슷한 시간대로 수차례 시간여행을 해온 섀클리턴에게서 편지들이 도착하고 클라라는 그가 말했던 시간여행 입구에 답장들을 가져다 놓는다. 3부에서는 웰스와 동시대의 작가이자 훗날 문학사의 한 획을 긋는 작가인 “브람 스토커(<드라큘라>의 저자)”와 “헨리 제임스(<나사의 회전>의 저자)”의 아직 발표하지 않은 작품을 빼앗아 자신의 작품으로 발표하려는 시간 여행자가 그들을 위협하고, 현재의 웰스는 그 사건으로 미래로 튕겨져 나간 또 다른 우주의 웰스가 보내온 편지를 받고서 그 위협에 대처한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책들보다 큰 판형에 작은 글씨체, 줄 간격도 빽빽하고 560 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인지라 처음에는 언제 다 읽지 하는 생각에 꽤나 겁을 먹고 시작하였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니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상황 묘사가 꽤나 사실적이고 이야기 구성 또한 흥미롭고 재미있어 읽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 어느새 처음의 우려는 금세 잊고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1부를 다 읽고 나니 맥이 탁 풀린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SF 소설인 줄 알았더니 1부에서 시간여행은 연인을 잃고 상심해서 자살하려는 청년을 달래기 위한 일대 연극(演劇)이었던 것이다. 다만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연쇄 살인범 “잭 더 리퍼”가 등장하고 비록 연극이지만 연인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청년의 로맨스가 일견 아슬아슬하고 아름다운 면도 있어 이야기로는 재미있어서 2부로 넘어갔다. 이런 2부도 사기극(詐欺劇)이었다! 로봇과 인류가 전쟁을 벌이는 2000년으로 시간 여행하는 “머레이 시간여행사”는 거대한 세트장으로 구성된 일종의 가상 체험이었고, 현재(1896년)의 소녀와 미래의 구원자와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은 실제 - 물론 당연히 실제가 아니어야겠지만 - 가 아니라 웰스가 섀클리턴 대장 역을 맡은 보잘 것 없는 하층민 청년을 대신하여 편지를 써줬다는 것이다. 과연 이 책의 성격이 뭘까, 계속 읽어야 할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앞서 말한 대로 <타임머신>의 저자 H.G. 웰스와 시간 여행과의 비밀스러운 함수 관계를 그려낸 소설로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이건 그런 기대와는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속았다는 생각에 그냥 이대로 책장을 덮어 버릴까 싶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읽은 분량이 아까웠고, 마지막에는 어떤 사기극으로 마무리하는지 두고 보자 하는 생각에, 또한 출판사 책 소개 글에 실려 있는 각종 매체들의 찬사(讚辭)가 결코 광고만은 아니겠지 하는 심정에 3부를 내처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 3부에서 비로소 내가 처음 기대했던, 아니 기대 이상의 이야기가 “드디어” 펼쳐진다. 즉 마지막 3부야말로 이 책의 하이라이트이자 백미(白眉)였던 것이다. 즉 1, 2부는 “가짜” 시간 여행 - 물론 19세기말 영국 빅토리아 시대 모습을 치밀하게 재현해 낸 점은 훌륭하지만 -이었다면, 3부는 작품의 본령인 “SF 소설”로써의 재미를 극대화한 “진짜” 시간 여행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작가는 3부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뜸을 그렇게 오래 들인 셈인데, 1,2부에서 느꼈던 실망이 3부에서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았을 정도로 재미가 있었으니 작가의 의도는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3부까지 다 읽고 나서야 1,2부 이야기도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고, 작가가 각 부를 넘어갈 때 숨겨 놓은 장치들, 즉 1부에서 앤드류가 시간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마주친 의문의 남자의 정체가 2부에서 비로소 드러나고, 2부에서의 거창한 사기극을 벌였던 머레이 시간여행사는 3부에서는 웰스를 위기로 몰고 가는 계기가 되며, 1부에서의 “잭 더 리퍼” 결말이 어떻게 시간의 흐름에 분기점 -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시간의 지도”가 시간 여행으로 인해 바뀌어 버린 역사의 흐름을 기록해 놓은 지도이다 - 을 가져왔는지 2부의 가짜 섀클리턴 대장이 웰스를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등 전체 이야기를 사전에 촘촘하고 치밀하게 구성해놓고 이야기를 풀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19세기 당시의 사회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고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발하고 독특한 설정과 이야기 전개, 연극의 변사(變辭)처럼 때로는 친절하게 때로는 불친절하게 이야기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쥐었다 폈다 하는 작가의 글솜씨야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지만, 인내력 테스트가 아닌 이상 너무 오래 끌어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으니, 아무리 의도가 성공했다고 해도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책, 그런 괘씸함(?)에 별점 하나를 깎았다^^
괘씸하다고 투정을 부리기는 했지만 560 여 페이지라는 만만치 않은 분량 임에도 금세 읽히게 만들 정도로 재미있으며, 그리고 개인적으로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기억에 남을 만한 인상적인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겠다. H.G. 웰스의 <타임머신>, 출간되고 120 여 년이 다 되는 지금까지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들로 다양하게 다뤄졌음에도 아직도 이 책처럼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책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리고 시간 여행자라는 “존 티토”의 예언이나 시간여행자의 증거 사진들이라는 사진들이 인터넷에 심심찮게 화제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시간여행이 현실이 되는 미래의 그 "어떤" 시점까지는 두고 두고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그야말로 최고의 흥행 아이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시간여행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될 작가가 왠지 부럽기까지 하다. 기회가 된다면 원작인 <타임머신>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끝으로 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