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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안녕히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8
구보데라 다케히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요즈음 새로 짓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가보면 운동시설, 보육시설, 문화센터, 학원, 학교, 도서관, 대형 마트 등 온갖 편의시설들과 상가(商街)들이 빼곡히 마련되어 있어 단지 내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휴일에는 단지 밖을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고들 하는데, 며칠이야 단지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불편하거나 지루하지 않겠지만 평생을 단지 내에서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요새는 “은둔형 외톨이”라고 해서 집 안에 틀어박혀 일체의 사회 활동이나 대인 관계를 기피하고 있는 사람들 - 일본에는 현재 이런 사람들이 130만 명이 넘는다고 하며 우리나라도 30만 명에 달한다고 하며 그 숫자가 매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 도 있다고 하니 불가능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일반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답답해서 단지를 두르고 있는 담벼락이 마치 감옥의 창살로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구보데라 다케히코”의 <모두, 안녕히(원제 みなさん、さようなら/비채/2012년 2월)>는 이처럼 평생을 아파트 단지 내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나는 이십대 청춘이다.
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은둔형 외톨이다.
나는 평생, 내가 태어난 아파트 단지를 한 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제는 준비가 됐다.
청춘의 상처들이여, 모두 안녕히…
“사토루”는 도영 후로쿠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쭉 살아온 올해 중학교에 들어가게 된 소년이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무결석, 무지각으로 졸업한 그가 중학교에는 단 하루도 등교하지 않는다. 이렇게 된 데는 초등학교 졸업식 날 친구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괴한에 의해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충격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게 되면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의 병을 알기에 어머니 “히나”씨는 사토루에게 학교갈 생각이 없으면 가지 말라고 말하고는 두 번 다시 학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사토루는 입주민 생활복지관에 있는 시청각실과 도서실을 매일같이 드나들고 극진 가라테의 창시자 “오야마 마스다쓰(최배달)”의 책을 교본 삼아 체력단련에 힘쓴다. 사토루가 운동과 함께 하루도 빼먹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순찰”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친구 107명 모두 한 아파트 단지에 살았던 터라 친구 사귈 걱정이 없었지만 하나 둘씩 이사를 가자 아는 사람이 점점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단지에 남은 동창생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 보는 데 이를 “순찰”이라 부르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단지를 돌아다닌다. 한번도 출석한 적이 없었지만 중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 사토루는 단지내 상가에 있는 케이크 숍 “타이지론느”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사토루는 단지 내 유치원에서 보육교사로 일하고 있는 초등학교 여자 동창인 “사키”와 연인 관계가 되어 약혼까지 하게 되지만 단지를 벗어날 수 없는 그의 처지 때문에 결국 그녀와 헤어지고야 만다. 세월은 계속 흘러 친구들은 학업에 취업에 결혼에 계속 단지를 떠나고 아파트 단지 또한 시간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낡게 되면서 빈집들이 늘어나고, 결국 단지의 동창생들은 모두 떠나고 사토루 혼자만 남게 된다. 그는 과연 아파트 단지를 벗어날 수 있을까?
자신의 눈 앞에서 친구가 죽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소년이 자신 스스로 아파트 단지에 자신을 가둬놓고 그 안에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엉뚱하게도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 쇼(The Truman Show, 1998)>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트루먼”은 자신이 태어나고 30년을 줄곧 살아온 세계가 TV 세트장이었음을 알게 되자 현실 세계로 연결된 문을 열고 나가며 끝을 맺는다. 현실 세계의 온갖 위험에 면역력이 전혀 없는 트루먼은 어쩌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쓸쓸이 죽어갔을 지도 모르지만 현실 세계로 나가는 문을 열고 나가는 트루먼에게 현실 세계는 거짓된 세계와 작별하는 “해방”이자 “희망”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미지의 위험에 대한 공포보다는 진실을 마주한다는 기쁨과 희망이 더 컸기에 트루먼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시청자들에게 그렇게 환하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사토루에게 아파트 담장 너머 바깥세상은 “공포”의 공간이다. 그것도 막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친구를 죽인 괴한이 그가 바깥으로 걸어 나오는 즉시 덮치고 말 거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위험이 존재하는 그런 공간 말이다. 그 공포가 친구들과 작별하고, 깨져버린 사랑에 대한 슬픔보다 더 컸기에 그는 아파트 담장 안의 세계를 떠나지 못한다. 사실 이 책의 결말은 사토루가 결국 어떤 “계기”로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것을 쉽게 예측해 볼 수 있을 정도로 “뻔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결코 그 결말이 식상하지 않고 감동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작가의 꼼꼼하고 치밀한 이야기 전개와 심리 묘사 때문에 주인공인 사토루에게 절로 감정 이입하여 그가 바깥세상으로 나가기를 응원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계기”가 “슬픔”이어서 가슴 아프지만 그 슬픔으로 인해 바깥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사토루의 발걸음에 희망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나가는 열쇠가 그 계기는 서로 달랐지만 결국 “희망”이었다면 억지스러운 결론일까? 영화와 이 소설, 설정과 이야기 둘 다 전혀 닮은 데가 없지만 두 주인공 모두 바깥세상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비슷하다고 느꼈기에 영화를 연상시킨 것 같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기도 한 “모두 안녕히”라는 말에서 트루먼의 마지막 인사 “여러분, 다시 못 볼지 모르니 미리 인사하죠. 굿 모닝,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 성장 소설 특유의 재미와 감동을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었던 멋진 책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에 고통스러워 하는 분들이 있다면 천형과도 같은 공포와 고통을 결국은 이겨내고 희망을 향해 걸어 나가는 사토루의 삶이 위로가 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