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피소드로 읽는 서양철학사
호리카와 데쓰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 시절 세계사를 공부할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서양 철학사를 개념 정리하는 것이었다. 밀레토스, 헤라클레스토이스, 파르메데스, 아낙사고라스 등 비슷비슷한 이름에 헷갈리는 그리스 철학자들부터 근·현대의 회의론, 경험론, 실증주의, 실존주의, 공리주의, 허무주의 등등 “~론”, “~주의”로 끝나는 수많은 철학 사조들과 철학자들을 매칭시켜 외우기란 나에겐 영 어렵기만 했다. 따분해하고 재미없어 하는 아이들에게 세계사 선생님은 악처의 대명사인 소크라테스의 처 “크산티페”의 이야기, 항상 머리맡에 권총을 두고 잘 정도로 겁이 많았던 쇼펜하우어, 항상 정확한 시간에 산책하기로 유명했던 칸트, 엄격한 조기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존 스튜어트 밀의 이야기 등 재미있고 흥미로운 철학자들의 일화를 종종 소개하시면서 분위기를 전환시켰던 기억이 난다. 호리카와 데쓰의 “에피소드로 읽는 서양철학사”(도서출판 바움, 2010년 2월)”은 세계사 선생님처럼 어렵고 딱딱하기만 철학자들의 개인적인 삶과 그들의 사상을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중세 기독교 중심의 스콜라 철학의 사조에서 벗어나 인간중심의 새로운 철학을 열었던 17세기 근·현대의 데카르트, 스피노자, 홉스에서부터 일반인들에게는 좀 생소할 수 있는 20세기 미국 실용주의 철학자 존 로티에 이르기까지 교과서나 각종 인문서적들에서 한 두번씩은 들어봤을 근·현대의 철학자들의 삶과 일화, 그들의 철학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프롤로그의 작가의 말에서처럼 위인으로서의 정형화된 삶이나 딱딱한 철학이론의 소개가 아니라, 철학자들의 삶을 중심으로 그들이 제각기 다른 출생과 환경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세계와 인생을 이해하고 화해하는지, 즉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고 발전시켜왔는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근 현대 시대를 “이것이 모던이다”(17~18세기), “조화의 쾌감(18~19세기)”, “역사의 종말(20세기)”로 나누고 각 시대 첫 장에 한 두 페이지 정도로 시대 철학 흐름을 소개하고 각 시대에 해당하는 철학자들에 대하여 그들의 삶과 일화들을 먼저 소개하고 그 후에 그들의 사상에 대하여 간략히 짚고 넘어가는 형식을 취한다. 철학자들의 생애도 각종 철학서나 인문서적 뒤에 실리는 딱딱한 글들이 아니라 에피소드 위주로 간략 간략히 소개하고 있는데, 30세 가까이 차이가 나는 연인의 저택에서 숨진 로크, 볼테르의 연인이었던 샤를레 후작 부인, 취미라고는 정해진 시간에 산책하고 친구들과 식사하는 것 밖에 없었던 독신주의자 “칸트”, 릴케, 니체, 퇴네에스, 프로이트 등 수많은 지식들과 염문에 빠졌던 루 살로메 등 쉽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그런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책에는 최근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으로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동물행동학 교수인 “리처드 도킨스” 도 언급하고 있는데, 물론 다른 철학자들처럼 그의 삶을 소개하고 사상을 살펴보는 별도의 장을 할애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을 통해서 20세기 과학과 철학이 만나 새로운 해석들을 가능하게 한 “사회생물학”, “분자생물학” 등을 소개하는 일종의 장치 정도에 그치지만 역시 잠깐 언급되는 언어학자 “촘스키”와 더불어 이 책에 등장하는 가장 의외의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시대 순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시대의 흐름 따라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아니면 자신이 관심이 있는 철학자 편을 골라서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작가는 “글을 마치며” 에서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인생의 시간을 보내며 가능하면 충실하게 보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으로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 끝에 자신만의 철학 스타일과 인생관을 만들어내며 이 책에서는 그런 “영혼의 테라피”를 추구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철학자들 하나하나의 삶을 들여다 보면 작가의 말대로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치열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면서 그들만의 주관적인 삶과 경험을 객관화시킨 것이 바로 그들의 “철학”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깊이 있는 서술은 아니지만 이 책처럼 철학자들에 대해서 그들의 삶에 먼저 접근해보는 것도 딱딱하고 어려운 철학을 이해하는 첫걸음으로 시도해볼만 한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책의 분량으로 인해 다루지 못한 철학자들, 즉 고대, 헬레니즘, 중세 철학자들이나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 베버, 케인스 등 작가가 미처 소개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철학자들에 대하여 다음 기회로 넘기겠다는 작가의 약속이 이뤄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