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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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나의 생일을 자축하며 나에게 선물한 책이다.

필기체로 멋스럽게 적혀있는 제목과 골드카키빛 표지에 그려져 있는 여러모양의 나뭇잎들, 평화로운 작은 마을을 검은 실루엣으로 표현한 띠지를 두른 이 책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책을 읽고 나서 위로를 받은 경험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젠 <올리브 키터리지>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메인 주 바닷가 마을 크로스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13편의 이야기를 연작 형식으로 담고 있다.

주인공 올리브 키터리지는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정년퇴임한 74세의 여인이다. 남편 헨리의 말에 따르면 단 한 번도 사과를 한 적이 없는 사람, 아들 크리스토퍼는 올리브에게 편집증적이며 너무 화를 많이 내고,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고 한다. 성질이 불같은 엄마를 더이상 참기 힘들다며 "이젠 엄마에 대한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을 거에요."(<불안>) 라며 흥분한 올리브 앞에서 너무나도 침착하게 말을 한다.

 

이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녀는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고 무뚝뚝하며 늘 자신은 옳고 타인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세상을 대한다. 거구의 몸에 발사이즈는 275, 화난 듯한 얼굴에 "젠장","빌어먹을","염병할","우라질" "닥쳐" 같은 거친 말들도 서슴없이 하는 '쎈'여인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살로 마음 속에 상처를 지니고 있는 여린 여인이기도 하다.

 

13편의 단편은 올리브를 중심으로 하는 주변 이웃 주민들의 이야기이다.

따뜻한 심성을 지닌 올리브의 남편 헨리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각각의 단편들은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하나하나 칼로 도려내듯 날카롭게 보여준다.

 

끔찍하게 자살한 엄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한 때 올리브의 제자였던 케빈(<밀물>). 엄마의 그늘에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던 피아니스트 앤지 오미라(<피아노 연주자>). 거식증이 걸린 소녀를 도와주는 과정에서 사랑과 관심에 굶주린 자신과 마주치는 하먼(<굶주림>). 모든 것을 함께 했다고 믿었던 남편이 죽은 후 알게 된 진실과 그로 인한 씻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는 말린(<여행 바구니>) 등 멀리서는 안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각자 짊어져야 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풍성하게 보여준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주인공 올리브도 힘겹긴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아들 크리스토퍼와의 갈등, 남편 헨리와의 냉랭한 관계, 잘난 박사 며느리를 보며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헨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혼자가 된 상황 등 겉은 씩씩해 보이지만 속은 여린 그녀도 일상의 슬픔과 외로움을 견뎌내는 것이 버겁다.

 

<튤립>에서 남편 헨리가 갑자기 뇌줄중으로 쓰러지고 올리브는 혼자가 된다. 매일 요양원에 가서 헨리에게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는 올리브. 혼자 있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람들과 있는건 더 견디기 힘든 현실. 의지할 곳은 아들 뿐인데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크리스의 목소리는 늘 어딘가 쌀쌀맞고 올리브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크리스토퍼, 내가 어쨌기에 네가 날 이렇게 대한단 말이니."

크리스와 전화를 끊고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식탁에 무너지듯 앉아 스스로 내뱉는 말이다.

이 상황이 난 너무 슬펐다. 왜냐면 나도 가끔은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늙어서 자식도 떠나고 혼자가 된다는 상상을 하면서 막연히 그 오지도 않은 외로움에 몸서리를 치곤했는데, 이렇게 글로 마주하니 그 상황이 너무 서글프게 다가왔다.

 

내가 가장 재밌게 읽은 이야기는 마지막 <강>이었다.

매일 아침 하는 강변 산책 도중 쓰러져 있던 잭 케니슨을 발견하는 올리브. 그녀가 평소 재수없다고 여기던 잭 케니슨과의 만남이 그녀의 일상에 특별함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p.466 <강>

둘 다 말을 하고 들어줄 말동무가 필요한 듯했고, 그렇게 했다. 그들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리고 좀 더 들었다. 

 

 

서로 말하며 듣고 또 말하며 듣는 그 훈훈한 공기가 나에게 훅 들어와 벅찬 감동에 두 눈을 감게 만들었다. 노년의 혼자가 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유일한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축복과도 같은 것.

 

이야기가 끝나가는 마지막 장은 다 쓰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p.483 <강>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이 남자의 곁에 누우며, 그의 손을, 팔을 어깨에 느끼며 올리브는 생각했다.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 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내 차례가 돌아올 타르트 접시처럼 사랑을 경솔하게 내던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사랑이 눈앞에 있다면 당신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녀의 타르트 접시는 헨리의 선량함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올리브가 가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면, 그건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새 하루하루를 낭비했다는 것을.

 

 

이제 올리브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이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고 서로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안다. 헨리에게 이런 소중한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하루하루 낭비한 지난 나날이 너무나 후회스럽다. 하지만 남은 인생에 '언젠가'는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살아야 한다. 얼마나 용기와 위로를 주는 결말인가...

 

p.484 <강>

그녀는 눈을 감았다. 지친 그녀는 파도를 느꼈다. 감사의, 그리고 회한의 파도를.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햇살 좋은 이 방을, 햇살이 어루만진 벽을, 바깥의 베이베리를. 그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세상이. 그러나 올리브는 아직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많이 지치고 늙었지만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사랑이라는 감정에 자신을 내맡긴 올리브. 첫 이야기 <약국>에서의 올리브와 마지막 <강>에서의 올리브는 얼마나 다른가. 사랑스럽고 따뜻한 여인 올리브...너무나 매력적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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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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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작가 위화가 1993년 발표, 장이머우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어 칸 영화제 심사의원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작년에 읽고 싶어서 중고서점 갈 때마다 찾았으나 가격이 중고가 아니라 안사고 버티다 지난 주 종로에 빈대떡 먹으러 갔다가 우연히 들린 종로책방에서 3500원의 이 책을 발견! 은희경의 <새의 선물>과 함께-역시 3500원- 기분 좋게 들고 나왔다.

 

그날 밤 남편이 어쩌다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는데, 갑자기 "아...어쩌냐..." 하면서 너무나도 슬프게 우는것이 아닌가...다 읽고 나서도 책을 어루만지며 그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에 난 책을 읽기도 전에 그 아픔과 슬픔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민요를 수집하는 어떤 사람이 우연히 푸구이라는 노인을 만나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푸구이는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부인(자전)과 딸(펑샤) 그리고 뱃속에 아이(유칭)까지 있지만 노름에 빠져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집과 땅을 다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다. 불행은 이어서 온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픈 어머니를 위해 의원을 부르러 성안으로 갔다가 얼떨결에 국민당 군대에 강제로 징집이 된다. 2년 동안 전쟁터를 누비다 해방을 맞아 구사일생으로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딸 펑샤는 벙어리가 되어 있다. 힘들게 집에 돌아온 푸구이는 그날 밤 자전과 두 아이를 쓰다듬으며 자신에게 말한다. "나는 집에 돌아온 거야."

 

소중한 가족을 보며 제대로 살아보려는 푸구이 앞에 그 시대는 기가막히게 다가온다.

정권을 장악한 공산당의 토지개혁, 1958년 시작된 마오의 대약진운동으로 수천만의 인민이 굶어죽게 되고 푸구이의 착한 아내 자전도 구루병에 걸리게 된다. 한창 커야할 나이인 아들 유칭은 물로 배를 채우고 딸 펑샤는 유칭의 학비 때문에 남의 집으로 이미 보내진 상태다.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약해진 권력을 다시 잡기 위해 마오는 청년들을 선동, 문화대혁명을 일으킨다. 마오의 사상에 세뇌된 홍위병들이 정치인,지식인,예술인들을 학살하고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이 펼쳐진다. 이런 파란만장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아무 힘도 없는 한 사람이 견뎌내야 하는 삶이란 감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얼마전 본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의 대사가 떠오른다.

 

"제일 좋은 계획은 무계획이야. 인생은 계획대로 안되거든. 계획은 세워봤자 틀어지기만 해. 계획이 없으면 틀어질 일도 없고. 무슨 일이 닥쳐도 아무렇지 않지."

 

너무나 고달픈 삶과 운명 앞에서 인간이 세우는 계획이란 얼마나 무의미한가. 노름에 빠져 집안을 몰락시키고 나서야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온 푸구이. 착한 아내와 이쁜 자식들을 보면서 "앞으로는 제대로 살아야지" 다짐을 한 푸구이. 그러나 인생이란 이런 아주 작은 바람조차도 무참히 꺽을 수 있는 칼같은 것임을 광기로 얼룩진 중국의 현대사 속의 푸구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 책은 보여준다.

 

푸구이가 겪는 비극을 더이상 쓰지 않겠다. 그 어떤 것을 상상해도 그 이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남편은 많이 울었지만 난 울지는 않았다. 아마도 세상을 초월한 듯 물 흐르듯이 들려주는 푸구이의 이야기가 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인듯 하다.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은 푸구이.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늙은 소를 사서 푸구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또 살아간다. 노래를 부르면서...

 

어린 시절엔 빈둥거리며 놀고,

중년에는 숨어 살려고만 하더니,

노년에는 중이 되었네.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 목적이 없는 듯 하지만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 속에 위대함을 품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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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6-08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로책방 갑입니다. 중고 모서점 더 상 중고가격이 아니니... 인생 정말 걸작입니다.

coolcat329 2019-06-08 11:54   좋아요 0 | URL
제가 레삭매냐님 덕분에 종로책방 알게된 걸로 기억해요^^
 
파우스터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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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님의 서평을 읽고 도서관에 바로 신청한 책이다. "드럽게 까탈스러운 나에게서 별 5개를 뽑아먹은" 이라는 표현에 확~관심이 쏠렸고, 개인적으로는 한국작가가 쓴 스릴러를 읽어보고 싶어서였다. 스릴러소설을 좋아하면서도 그동안 국내 작가에게는 관심도 기대도 안했던 점이 갑자기 미안해졌다고 할까...

 

한마디로 어디에서 펼쳐 읽어도 바로 몰입될 정도로 스릴러가 줄 수 있는 긴장감, 섬뜩함, 기발함을 갖춘 작품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라해도 단 하나 얻을 수 없는 젊음과 청춘. 그 젊음의 에너지를 향한 늙고 추한 욕망을 이토록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다니 그야말로 짜릿한 시간이었다. 

늙고 병든 육체안에서도 결코 죽지 않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나 또한 그런 욕망의 주체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열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자 인류의 발전을 가져온 근본적인 힘이라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탐욕과 욕망이 남을 짓밟고 빼앗아옴과 동시에 그것에 취해 중독이 되었을 때 얼마나 무서운 괴물이 되는지를 '젊은 몸을 조종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노인들을 통해 보여준다.

 

p.299

파우스팅의 여운이 계속되고 있었다. 남선은 취해 잠들었을 은민을 떠올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의 아이이자 나의 청춘이자 나의 분신이다. 나는 그녀의 후원자이자 절대자가 되고 싶다. 아니 그녀가 나고 내가 그녀가 되고 싶다. 남선은 더 밀어붙이고 싶었다. 중독되어가는 걸 알고도 남선은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만약 천억이라는 돈이 있는데 100억만 내면 내가 원하는 젊은 몸을 선택해 내 마음대로 조종하여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면, 비록 늙고 아픈 몸이지만 하루에도 몇 번 씩 젊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삶의 활기와 쾌락, 건강을 느낄 수 있다면, 과연 나는 이로부터 양심을 지킬 수 있을까?

 

기발하고도 독특한 설정의 이 소설을 읽으며 과연 작가는 '이 어마무시한 스토리를 어떻게 마무리 지을까' 내심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고 지루할 새도 없이 이야기가 끝날 즈음 또 한 번의 짜릿함을 선사한다.

 

작가가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라 그런지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하기도 하고 영화로 만들어져도 좋을거 같다. 한국작가의 독특한 스릴러, 재미를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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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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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리뷰가 대만족인 반면 나는 참으로 힘들게 꾸역꾸역 읽었다. 50번째 생일을 두려워하는 늙은 게이 레스는 분명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인물인데, 문화와 감성이 달라서 였을까...읽으면서 글 자체가 이해가 안가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고, '엄청나게 웃긴 소설'이라는 광고 문구가 무색하게 난 2번 정도 피식~하고 웃었던거 같다. 약간 병맛 개그랄까, 난 확실히 병맛을 좋아하지 않는거 같다.

 

영리하고 재치있는 소설임에는 분명하나 "실연을 당한 주인공이 여행을 통해서 새로운 자신을 만나고 삶에 대한 어떤 깨달음을 갖고 돌아오지 않겠느냐..." 라는 예상을 가능하게 했기에 '딱히 재미도 없는데 계속 읽어야 할까?' 10번은 고민했던거 같다. 수시로 과거의 상념에 빠지는 레스 덕분에- 이 점이 특히나 힘들었는데- '아, 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못 읽겠구나...' 싶었다.

 

다른 책 같았으면 그냥 덮었을텐데 퓰리처 상 수상작이라니까! 내가 읽은 퓰리처 수상작은 <로드>하나니까, 허영심이 발동, 또 다들 재밌고 웃기고 감동적이라고 하니까,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어떤 오기가 발동했던거 같다. 그리고 7일에 걸쳐 결국엔 읽은 것이다.

솔직히 부끄럽다. 나의 무식함으로 인해 위트있는 소설을 이해못한거 같아서.

 

내가 미국 뉴욕에 살았을 때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그 시절 길에서 또 일하는 데서 게이들을 많이 봤는데, 정말 레스처럼 마른듯한 몸매에 멋쟁이이고 진짜 모델과 같은 아우라를 풍긴다. 길거리를 세련되게 걸어다니는 잘생긴 남자는 대체로 게이라고 보면 된다고 누군가 말해준 기억이 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같이 매우 예의바르고 친절했다는 점이다. 타국에서의 힘든 생활 속에서 우연히 경험한 그들의 부드러움과 세심한 배려에 나도 모르게 울컥한 적도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 책을 읽고 알게되었다. 그들도 차별받는 소수집단이고 나 또한 동양에서 온 약자이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슬픔을 느낀 구절을 적어본다. 모로코에서 두 소년이 서로 팔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슬픔을 느끼는 레스.

 

p.216~217 

두 소년은 서로에게 팔을 두르고 있다. 레스에게는 너무 낯설어 보인다. 그걸 보고 있으니 슬퍼진다. 그의 세계에서는 한 번도 이성애자 남성들이 이렇게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마라케시의 거리에서 게이 커플이 손을 잡고 걸어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카고 거리에서는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한들 남자 둘이 손을 잡고 걸어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지금 이 청소년들처럼 모래언덕에 앉아 서로의 품에 안긴 채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없다. 허클베리 핀에 대한 톰 소여의 사랑.

 

사랑이란...레스의 레즈비언 친구 조라의 말.

 

p. 231

"나더러 평생의 사랑을 만났다고 하더라." (중간 생략) "하지만 평생의 사랑 같은 건 없다는 걸 다들 알잖아. 사랑은 그렇게 두려운 게 아니란 말이야. 사랑은 씨발, 다른 사람이 편히 잘 수 있도록 개를 산책시키는 거고 세금을 내는 거고 악감정 없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거야. 삶에 동맹을 두는 거라고. 사랑은 불이 아니고 벼락도 아냐. 사랑은 그녀와 내가 늘 해왔던 그런 거 아냐? "

 

이 책은 성소수자를 주인공으로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가볍고 위트가 있다.  다루는 주제는 사랑, 인간관계, 일과 커리어, 나이듦과 외로움, 성소수자의 정체성 등과 같은 살면서 우리가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민들이다. 가볍고 유쾌하지만 때로는 심오한 통찰과 철학적인 사유를 재치있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내가 이 소설의 장점인 이런 위트를 더 잘 이해했으면 좋았겠지만, 레스가 긴 세계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샌프란시스코 자기 집 현관을 오르는 마지막 장면에선, 삶이란 뒤죽박죽 엉망이기도 하지만 어딘가엔 뜻하지 않은 선물도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50번 째 생일, 나에게도 올텐데 그 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

레스를 생각하며 삶의 밝은 면을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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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의 색 오르부아르 3부작 2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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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닥 예쁘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않은 한 여자의 깔끔하면서도 통쾌한 코믹 복수극. 3부작 시리즈 중 2번째 작품으로 공쿠르 상을 수상한 1부작 <오르부아르>도 읽어보고 싶다. 사기, 배신, 음모 이런 이야기를 잘 다루는 작가는 싫어할 수가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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