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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평점 :
품절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작가의 말' 중
김훈(1948~)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문장이 짧으면서 힘이 있어 매우 가독성이 높았다.
'하얼빈'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곳으로, 소설은 제국 확장의 야욕을 위해 하얼빈으로 올라오는 이토와 그 이토를 암살하기 위해 동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해 가는 안중근을 교차로 보여준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전의 행보와 암살, 그 후의 체포와 재판, 사형을 당하기까지의 이야기가 빠른 전개와 함께 '강도 높게 압축'(p.304 작가의 말)되어 있어, 생략된 이야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작가는 영웅 안중근이 아닌 고뇌하고 흔들리는 인간 안중근을 그리고 싶었다고 하는데, 첫 아들을 품에 안고 아기에게서 나는 젖냄새를 맡으며 '출처를 알 수 없는 슬픔'(p.27)을 느끼는 안중근의 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또한 나라를 위해 투신해야 한다는 대의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또 천주교인으로서 지켜야 하는 도리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이토를 죽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그를 죽임으로써 어떤 결과를 얻는지, 그것이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안중근은 고뇌하고 끊임없이 생각한다.
다음은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하고 체포된 후 장춘에서 호송열차를 타고 여순감옥으로 가는 장면이다. 이토에게 세 발의 총을 쐈지만 이토의 생사여부를 모르는 안중근은 자신이 그를 죽인 이유를 이토가 알고 있는지, 일본 천황은 이토가 총을 맞은 이유를 알고 있는지, 이 세상은 내가 이토를 죽이려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지 등을 생각한다. 안중근의 이 치열한 내면의 모습이 나는 가장 인상깊었다.
[거기에, 비틀거리는 이토의 모습이 떠올랐다. 총알 세 발이 명중한 것은 확실했다. 이토의 몸속에 총알이 박힐 때, 총알이 안중근의 몸에 신호를 보내오는 듯했다. 안중근은 그 신호를 믿었다. 그리고 조준선 너머에서 이토가 비틀거렸고, 키 작은 일본인이 이토를 부축했다. (…) 이토는 죽었는가? (…) 이토를 살려놓고 이토를 죽이는 이유를 이토에게 말해주었으면 좋았겠는데 이토가 죽었다면 이토를 죽인 이유를 이토에게 말해줄 수가 없겠구나. 메이지는 이토가 총을 맞은 이유를 알고 있을까. 이토가 죽었다면 이토 없는 세상에서 이토를 죽인 이유를 말해야 하지만, 그 세상은 이토가 만들어놓은 세상이므로 내말을 알아듣기가 어렵겠구나. 이토가 죽었다면, 총알을 맞고 나서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 왜 총에 맞았는지를 알았을까?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더라도, 총을 쏜 자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알고 죽었을까. 이토가 죽었다면, 그것을 물어볼 길이 없겠구나.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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