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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 ㅣ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1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2년 3월
평점 :
북플 이웃님들을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었는데 마침 도서관 신간 코너에 있길래 빌려왔다. 책을 읽기 전 작가 소개를 읽다가 '1942년... 아우슈비츠...'가 들어간 문장에서 순간 숨을 멈췄다.
이렌 네미롭스키(Irène Némirovsky 1903~1942)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유대계 작가로 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런 작가의 비극적인 최후를 알았기 때문일까... 이렇게 당당하고도 힘있는 문장을 쓰는 사람이 그렇게 끔찍한 죽음을 당하다니,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가슴이 아렸다.
'네미롭스키 선집'의 첫 번째 책인 <무도회>에는 생전에 작가가 남긴 수많은 단편 중 훌륭한 네 편의 소설을 담고 있다.
표제작이자 첫 번째 이야기 <무도회>는 주식으로 갑자기 졸부가 된 부부와 그들의 딸의 이야기로 14살 딸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딸 앙투아네트는 특히 신경질적이고 자신만의 삶을 즐기려는 어머니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는데, 그 증오심은 '칼로 얼굴을 그어버리고 싶을 정도'(p.11)로 이는 작가의 외롭고 불행했던 어린 시절의 삶이 투영된 것이다. 어머니와 딸의 갈등과 부르주아의 허영과 위선을 풍자하는 이 소설은 "내 가엾은 엄마...."(p.75)라는 앙투아네트의 뼈 있는 말로 끝나는데, '오! 이런 결말이라니 너무 좋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두 번째 이야기 <다른 젊은 여자>는 1차 세계대전 중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돌봐준 프랑스 병사와의 나흘 간의 추억을 가슴에 간직한 채 홀로 살아가는 마들렌이라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촌구석에서 사는 게 싫은 16살의 소녀 질베르트의 눈에 마들렌은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외롭게 살아가는 노처녀일 뿐이다. 그러나 마들렌의 이야기를 듣고 질베르트는 '자존감이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낀다.'(p.86)
나흘 간의 보살핌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는 자부심은 마들렌으로 하여금 현재의 외로운 삶을 꿋꿋이 살아가게 하는 큰 동력이지 않았을까...
짧지만 많은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세 번째 이야기 <로즈 씨 이야기>는 자기 자신만의 삶을 살아온 부유한 독신 남성 로즈 씨가 전쟁이 일어나 피난길에 오르며 겪는 이야기이다. 이성적 사고와 신중함을 무기로 자신의 삶을 잘 통제하며 살아온 로즈 씨는 전쟁이라는 '미쳐버린 세상과 접촉하자' 자신이 믿던 논리와 이성도 '덩달아 미쳐 버렸'(p.99)음을 깨닫는다. 그런 와중에 운전기사는 차를 갖고 도망치고 피난 행렬에 끼어 걸어가던 로즈 씨는 마르크라는 청년을 만나는데, 그는 로즈 씨와는 정반대의 인물로 피난길 내내 남들을 돕는다. 로즈 씨는 이런 마르크를 보며 비웃지만, 절박한 상황에서 자신을 이끌어 주고 목숨까지 구해 준 마르크의 행동은 그에게 삶의 놀라운 기적을 선사한다. 늘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던 로즈 씨의 마지막 깨달음은 삭막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온다.
마지막 이야기 <그날 밤>은 1942년, 작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남편의 외도로 마흔 다섯의 나이에 이혼한 카미유는 일곱 살 딸을 데리고 동생 알베르트를 찾아간다. 찾아간 동생의 집에는 마침 먼 친척이자 어릴 적 친구였던 블랑슈와 마르셀도 와 있어서, 오랜만에 만난 네 여자는 밤새 자신의 지난 날들을 이야기한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언니를 보며 결혼을 하지 않은 동생 알베르트, 어쩌다 보니 결혼을 안 하게 된 블랑슈, 평생 자식만 낳고 고생만 하다 죽은 엄마를 보고 혼자 살게 된 마르셀의 이야기 펼쳐진다. 서로가 경험해 보지 못한 삶에 대한 아쉬움, 후회, 자기 연민 그리고 마지막 알베르트의 "언니는 이 모든 걸 우리한테는 절대 얘기하지 말았어야 했어!"(p.141)라는 고통에 찬 외침은 '삶이란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 선택에 대한 댓가를 치러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얇지만 하나같이 긴 여운이 남는 이야기들이다. 레모 출판사에서 앞으로 네미롭스키 선집이 나올 예정인데 다 읽고 싶어졌다. 네미롭스키가 살아서 계속 글을 썼더라면 얼마나 좋은 작품들이 나왔을지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