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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은 노래한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7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200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 1919~2013)은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서 영국인 부모 아래서 태어났다. 1925년 가족이 남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로 이주하면서 어린 시절을 남아프리카의 고립된 농장에서 성장한다. 불행한 유년을 보낸 레싱은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나 타이피스트, 전화 교환원 등의 직업을 전전하면서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경험한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레싱은 한 편의 소설을 들고 1949년 영국 런던으로 향하는데, 그 소설이 바로 <풀잎은 노래한다>이다. 그녀 나이 서른 살이었다.
제목 <풀잎은 노래한다>는 T.S.엘리엇의 시 <황무지>의 '예배당 주변의 나자빠진 무덤들 위에 풀잎은 노래한다'에서 가져왔는데, 책을 다 읽고 나면 풀잎보다는 제목에 생략된 '무덤'이 더욱 연상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백인 남성이 지배하는 식민지 남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메리라는 한 여인의 몰락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농장주 리처드 터너의 아내 메리가 원주민 흑인 하인에게 살해되었다는 기사로 시작한다.
남아프리카에서 영국인 부모 아래 태어난 메리는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도시로 나와 타이피스트로 일하며 자립에 성공하여 남아프리카 백인 여성으로서 나름 자유롭고 안락한 삶을 산다. 그러나 서른 살이 되도록 결혼을 안한 그녀를 두고 친구들이 '나사가 하나 빠졌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문제가 있는 게 분명'(p.66)하다며, 험담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된 메리는 큰 충격을 받는다. 평소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던 그녀는 '남 얘기 하기 좋아하는 여자들이 그녀가 결혼을 해야만 된다고 말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p.73) 남편감을 찾게 되고, 너무나 마음이 급했던 그녀는 리처드라는 남자를 만나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결혼을 하게 된다.
리처드는 시골의 농장주로서 성실하지만 자본 없이 시작한 농사였기에 은행에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하는 일마다 실패해 메리는 생활난에 쪼들리고 고립된 농장 생활로 심한 권태와 외로움을 느낀다. 시작부터 불행이 예상되었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점점 악화되고, 이런 상황에서 집안일을 해주는 하인이 새로 들어오면서 사태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풀잎은 노래한다>는 도리스 레싱의 자전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는 작품으로 백인이 지배하는 남아프리카 식민지 사회의 병폐를 사실적으로 고발하는 작품이다. 백인 우월주의에 기초한 인종주의와 계급주의, 백인 사회의 존속을 위한 집단적 배타주의와 폭력, 남성과 여성의 갈등과 정체성 등을 다루며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여 이룬 백인 문명을 비판하고 그 미래를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사악한 그 무엇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녀를 따라다녔기에 그녀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악한 그 무엇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도대체 뭘 하며 지내 왔기에 윤곽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없다. 그녀가 사악한 그 무엇에 대해 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끌려 다니기만 했을 뿐, 자발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 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p.333)]
메리는 왜, 무엇 때문에 죽었을까? 메리는 자신의 죽음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을까?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p.44), 그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