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이지 않는 도시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평점 :
"여행자는 자신이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발견함으로써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p.40)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이탈노 칼비노(Italo Calvino 1923~1985)가 1972년 발표한 작품으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도시들에 대한 '한 편의 시와 같은 소설'이다.
베네치아의 여행자 마르코 폴로가 타타르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자신이 방문했던 도시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형식으로 된 이 작품은 총 아홉 개의 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와 9부에서는 열 개의 도시 이야기, 2부~8부는 각각 다섯 개의 도시 이야기가 담겨 있어 총 쉰 다섯개의 도시가 나온다.
각 부의 시작과 끝에는 황제 칸과 마르코 폴로의 대화가 나오는데, 이런 구성은 독자로 하여금 각 부에서 다루는 도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마르코 폴로가 묘사하는 55개의 도시들은 '기억', '욕망', '기호', '교환', '눈', '이름', '하늘', '섬세한', '죽은', '지속되는', '숨겨진'과 같은 단어가 들어간 11개의 소제목으로 나뉜다. 이 11개의 주제는 또 1부터 5까지 번호가 매겨져 수학적 규칙을 적용해 번갈아 가며 나오는데, 이런 구성이 대단히 흥미롭다.
내 생각에 이 책은 처음엔 책에 실린 순서대로 읽고 두 번째는 주제별로 따로 다시 한 번 읽는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 같다. 근데 이 책을 한 번만 읽고 덮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열 번을 읽어도 이해가 안가는 도시도 있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가 묘사하는 도시는 매우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 독자는 선뜻 이해하기가 힘든데, 그러면 그럴수록 알고 싶은 마음도 커져 글로 묘사된 도시들을 머리 속으로 상상하며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가상의 도시들이 익히 내가 알고 있는 도시들과 겹쳐지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공간, 도시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자이라의 현재를 묘사할 때는 그 속에 과거를 모두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과거는 마치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거리 모퉁이에, 창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든 단편들에 담겨 있습니다. ('도시와 기억3' p.18)]
마르코 폴로는 자이라라는 도시를 묘사하며 이 도시에 계단 수가 얼마나 많은지, 주랑의 아치들이 어떤 모양인지, 지붕이 무엇으로 덮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도시는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도시 공간의 크기와 과거 사건들 사이의 관계'(p.17)로 이루어 진다고 말하며 평소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그 진정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즉 한 도시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면 유명한 건축물이나 높은 빌딩이 아니라 실제로 도시민의 삶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즉 '보이지 않는' 그런 후미진 곳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상인들이 판매대 위에 진열해 놓은 상품들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사물에 대한 기호로서 가치를 가집니다. 수놓은 머리띠는 우아함을, 금도금한 가마는 권력을, 이븐 루슈드의 책들은 학식을, 발찌는 관능을 뜻합니다. ('도시와 기호들1' p.22)]
타마라 도시에서는 사물을 사물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통해 내가 얻게 되는 모습을 욕망한다. 도시는 인간의 이런 욕망을 부추기는 장소이며 인간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마음껏 분출하고 도시는 그 욕망을 먹고 스스로 몸을 불린다. 이탈로 칼비노는 도시의 이런 속성 때문에 우리는 '도시가 정말 어떤 모습인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p.23) 알 수가 없다고 폴로의 입을 빌려 말한다.
[도시는 텅 빈 체스 판의 위아래로 이동하면서 어디서나 똑같은 자신의 삶을 되풀이합니다. 주민들은 등장하는 배우가 바뀐 똑같은 장면으로 돌아가 연기를 합니다. 그들은 다양하게 변화된 악센트로 똑같은 대사를 다시 말합니다. 똑같은 하품을 하기 위해 입 모양을 바꾸며 입을 딱 벌립니다. ('도시와 교환3' p.83)]
에우트로피아라는 도시의 묘사이다. 어디서나 똑같은 삶, 바로 우리 현대인의 삶이다. 특히 우리 나라는 집도 대부분이 아파트에다 그 구조도 천편일률적이다. 왜냐하면 도시는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언어, 욕망, 추억들도 교환하는 '복잡하게 뒤얽힌 관계들의 망'(p.99)이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는 황제 칸에게 "여행을 하면서 차이가 사라져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각 도시는 다른 모든 도시들과 닮아가고 있습니다. 도시들은 형식, 질서, 차이들을 서로 교환합니다." (p.174)라고 말한다.
우리 나라의 여러 도시들을 생각해본다. 어디를 가도 비슷비슷하다. 어떤 특정 지역의 개발이 인기를 끌면 다른 도시들은 그것을 따라하기 바쁘고 금새 닮아간다. 이러다 책에 나오는 도시 '트루데'처럼 '단지 공항의 이름만 바'뀌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도시만의 매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가 점점 사라지고 있으니 말이다.
[레오니아의 풍요로움은 매일 생산되고 판매되고 구매되는 것보다, 매일 새로운 것들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버려지는 물건들로 측정될 수 있습니다. (...) 청소부들이 매일 쓰레기를 어디로 가져가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 버려지는 양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쓰레기 더미는 점점 더 높아지고 겹겹이 쌓치고 반경을 넓혀갑니다.(...)레오니아를 에워싼, 파괴되지 않는 쓰레기 요새가 산맥처럼 사방에서 도시를 압도합니다. ('지속되는 도시들1' p.148,149)]
우리는 매일 '최신형'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새로운 물건들을 보며 소비가 삶을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칼비노는 이런 풍요로움 속에서 버려지는 물건들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도시를 위와 같이 묘사했는데, 딱 지금 우리의 모습 아닌가 싶다. 플라스틱이나 비닐과 같은 재활용도 엄청나지만 멀쩡한 물건들을 버리고 새로운 물건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사는가...
칼비노는 이런 식으로 인간들의 탐욕과 욕망으로 끝도 없이 팽창하여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는 도시들을 보여주면서 독자로 하여금 지금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현대 도시가 잃어가고 있는 것들, 도시가 진정으로 가져야 할 가치들은 무엇일까?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는 완벽하게 이상적인 도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칼비노가 그리는 이상적인 도시는 '불행한 도시' 안에 있으면서 예기치 않은 순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도시로 묘사된다. 즉 칼비노가 그리는 이상적인 도시는 행복과 불행, 질서와 무질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공간인 것이다.
마지막에 마르코 폴로는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p.208)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서 그것에 공간을 부여하여 지속시키는 것이 지옥을 벗어나는 방법이고 그것이 바로 이상적인 도시라고 칼비노는 말한다.
마르코 폴로가 들려주는 55개 도시의 이야기를 들은 쿠빌라이 칸은 마지막에 '결정적인 정복을 이뤘다 해도 거기서 얻은 제국의 다양한 보물들은 사람을 현혹하는 껍질에 불과하며, 그러한 정복은 대패로 민 체스 판 위에서 무(無)일 뿐이다.'(p.167) 라며 제국 정복의 무의미함을 깨닫는다.
칼비노의 작품은 처음 읽어 보았는데 독특한 구성과 말로 묘사한 55개 도시의 이야기가 매우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건축가가 도시를 설계하듯이 소설의 구조를 계획적으로 설계한 점과 도시에 대해 이런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다니! 칼비노의 예술적인 상상력에 감탄하면서 읽었다.
또한 혼자 여행갈 때 가지고 가도 참 좋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베네치아. 왜냐하면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55개의 도시들은 모두 '베네치아의 무엇인가'(p.113)에서 가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상상력을 이해하기 쉽진 않았지만 나 또한 나름대로 상상하면서 이 많은 알레고리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책이었는데 너덜너덜해진 책이 그것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