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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창비 / 2017년 7월
평점 :
애니 프루의 <브로크백 마운틴>을 감명 깊게 읽고, 이안 감독의 영화를 다시 보며 마지막 장면에서 울컥하다 동성애를 다룬 소설을 한 편 더 읽고 싶어졌다.
<싱글 맨>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 1904~1986)가 1964년 발표한 소설로 2009년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톰 포드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감각적이고 세련된 영상과 주연 배우 콜린 퍼스의 섬세한 연기로 주목을 받았다. 영화 '싱글 맨'은 톰 포드의 데뷔작으로 디자이너 출신의 감독이 만든 영화답게 의상, 소품 등의 연출이 고급스럽고 스타일리쉬하다. 무엇보다 톰포드의 안경을 쓰고 톰 포드가 디자인한 수트를 멋지게 차려 입은 콜린 퍼스의 모습은 완벽 그 자체!
<싱글 맨>은 교통사고로 연인을 먼저 떠나 보낸 58세의 대학 교수인 조지의 하루, 1962년 크리스마스 휴가를 앞 둔 어느 하루의 이야기이다.
조지가 아침에 잠에서 깨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소설은 조지의 일상적인 하루를 따라간다. 일어나서 샤워하고 아침을 먹고 학교로 출근해서 강의하고, 퇴근 후 죽은 연인의 옛 여자였던 도리스의 병문안을 갔다가 체육관에 들려 운동도 하고 수퍼마켓에 가서 장도 본다. 저녁엔 가까운 동네 친구 샬럿과 저녁을 먹고 혼자 바에 들려 술을 마시던 중 우연히 제자 케니를 만나 묘한 분위기에 휩싸이다가 함께 집으로 와 또 같이 술을 마신다.
겉에서 보면 조지의 하루는 그저 조용하고 평온해 보인다.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으로 삶의 순간마다 찾아오는 상실의 아픔과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성소수자로서 감수해야 하는 고독감과 분노로 조지의 내면은 부서질듯 위태롭다.
외로움을 느낄 만한 빈 공간이 없는 작은 집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연인 짐이 떠난 후 '자기도 모르는 새 점점 폭력적으로 되어'(p.19)감을 느낀다.
그러나 조지의 그런 내면은 사회가 원하는 '심리적 가면'으로 가려져 있다.
자신을 '퀴어'라는 한 단어로 깍아내리며 '차마 말할 수 없는 것', 언제 어디서 '훤히 드러날지 모르는 것' 취급을 하는 사람들, '이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니, 비난이 아닌 동정을 받아야 한다고'(p.26) 싸구려 동정이나 해대는 사람들에게 조지는 마음 속으로 분노한다.
수업 중에 '소수집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조지는 자기도 모르게 흥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소수집단을 좋아하지 않거나 미워한다고 인정하는 것이, 가짜 자유주의적 감상주의로 우리 감정을 속이는 것보다 낫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하면, 안전밸브가 생깁니다. 안전밸브가 있으면, 실제로 박해를 덜 하게 됩니다." (p.71)]
차라리 솔직하게 싫어한다고 인정하는게 낫다는 조지의 말은 그동안 그가 성소수자로 살며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혐오와 경멸의 시선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1962년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엄청나게 심했던 그 시기에 성소수자가 자신의 짝을 잃는다는 건 좀 더 큰 고통이 따르는 문제가 아니였을까 생각해본다. (애니 프루 소설에서 사람들이 성소수자에게 어떻게 린치를 가했는가...) 상실의 아픔을 주변 사람들과 나눌 수도 없고 떳떳하게 연인의 장례식에도 갈 수가 없다.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고 철저히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한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마음의 빈 자리를 채워줄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조지가 겪은 상실감은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조지는 수업 중 학생들에게 계속 말한다.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은 자기 상황을 미워합니다. 미움의 세계에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만나게 된다 해도 사랑을 알아볼 수 없어요! 사랑을 의심하게 됩니다! 사랑 뒤에 무엇이, 무슨 꿍꿍이나 계략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p.72)]
이런 상황에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육체는 또 다른 상실감을 안겨준다. 조지는 학교에서 테니스 경기를 하는 잘생기고 건강한 학생들을 보며 젊음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그들의 날렵한 움직임은 잔인하면서도 우아하고 유연하며 관능적이다. '격렬한 반응을 바라는 감각이 조지에게 찾아들고, 조지는 떨리는 쾌감을 느낀다.'(p.51)
'이 젊은 동물들의 아름다움에 진심으로 고마워하'(p.51)는 조지는 연인을 잃고 나날이 늙어가는 육신에 갇혀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젊고 아름다운 육체가 발산하는 삶의 에너지를 갈망하고 자기 안에도 그런 감각이 있기를 바란다.
다 죽어가는 도리스의 병문안을 갔다가 체육관에 들른 조지는 어린 소년과 윗몸일으키기를 하며 활기를 얻고 살아있음을 느낀다.
[체육관에 있으면 어찌나 기쁜지! 이렇게 태평한 육체의 민주주의 상태로 평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곳에는 못되게 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화를 내는 사람도, 짜증을 부리는 사람도 없다. (...) 사우나에서는 가장 나이가 어린 아이들도 천진하게 벌거벗고 육칠십대들과 나란히 앉아 서로를 허물없이 대한다. 모두 동등하게 여겨질 뿐, 지나치게 흉물스럽거나 지나치게 잘생긴 사람은 없다. 다른 곳보다 체육관에서는 모두가 더 착해질까? (p.111)]
너무나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나도 매일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는데 각자가 자신의 몸에 집중하며 운동하는 그 곳의 분위기는 뭔가 평화롭고 허물없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운동을 하고 나면 나 자신이 리셋이 된 기분이랄까...육체가 느끼는 만족과 쾌감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중요하고 큰 힘을 발휘하는지 새삼 다시 느꼈다. 조지 아저씨, 잘 하셨어요! 이 책에서 참 기분 좋은 장면이었다.
<싱글 맨>은 작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소설 속 조지와 같은 나이인 58세에 발표한 작품으로 이셔우드가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작품이라고 한다. 작가도 동성애자임을 생각하면 '조지는 이셔우드의 분신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셔우드는 조지가 자신의 모습은 전혀 아니라고'(p.197) 했다고 하지만, 이 책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로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어느정도 실현한 유일한 책'이라고 말한 것으로 봐서 자전적인 요소가 없다고 보기는 힘들거 같다.
동성 간의 사랑 이야기라기 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혼자 남은 한 게이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처음의 내 기대와는 어긋낫지만, 특별한 사건 없이 조지의 일상과 내면을 좇아가면서 성소수자로 산다는 것, 혼자 남는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꼭 성소수자가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상실의 아픔과 외로움으로 어느 순간 우리 모두는 '삶의 수인'(p.14)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지의 이 말을 기억하고 싶다.
"나는 살아 있어. 살아 있어!"(p.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