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작가 존 파울스(John Fowles 1926~2005)는 1926년 영국 남부 에섹스(Essex) 주의 해안 도시 리온씨(Leigh-on-Sea)에서 태어나 전쟁에 징집되었다가 종전 후 옥스포드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프랑스와 그리스 등지에서 교사로 일했고, 1952년 귀국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63년 발표한 <콜렉터>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파울스에게 작가로서의 명성을 안겨 주었고, 1966년 발표한 <마법사>는 '히피 세대들의 필독서'로 떠오르면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파울스는 런던을 떠나 영국 남서부 라임 레지스(Lyme Regis) 지방으로 이주하여 글쓰기에 전념하는데, 이곳이 바로 그의 최고의 작품 <프랑스 중위의 여자>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1969년 발표한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파울스의 모든 소설들 가운데 가장 큰 찬사를 받은 작품으로 전후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로 불리며 현대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1981년에는 제레미 아이언스와 메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 메릴 스트립은 이 영화로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대영제국이 가장 번영했던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1867년 3월, 영국 남서부 라임 마을, 춥고 세찬 바람이 부는 어느 날 아침, 귀족 가문의 찰스 스미스슨은 약혼녀이자 부유한 사업가의 외동딸인 어니스티나 프리먼과 함께 성벽을 따라 걷다가 방파제 끝, 세찬 바람 속에서 검은 옷을 입고 서 있는 사라 우드러프라는 여인을 우연히 보게 된다. 찰스는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다가가지만 자신을 꿰뚫어 보는 그녀의 얼굴에서 강한 인상을 받는다. '여성이라면 얌전하고 순종적이며 다소곳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 시대'에 그녀의 얼굴은 자신을 찔러 죽이는 '창'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그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여인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찰스는 아마추어 생물학자로서 화석을 채집하기 위해 외진 숲을 돌아 다니다 사라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몇 번의 만남과 마을의 소문을 통해 사라의 사연을 알게 된다. 

그 사연이란, 어느 날 폭풍으로 난파된 프랑스 선박이 근처 해안으로 표류해 오고, 마을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고 있던 사라는 구조된 프랑스 중위를 간호하게 되었는데, 그 프랑스 장교와 부도덕한 밀애를 나눴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정조를 잃고 실연당한 여자로 생각, 심지어 정신 이상자로 몰아세우지만 사라는 그런 주위의 비난은 무시한 채 스스로 '남에게 따돌림받는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해 살아가고 있던 것.


"전 수치심과 결혼했어요. (...)어떤 모욕이나 비난도 저를 자극할 수 없어요. 그 경계를 넘어선 곳에 저 자신을 두고 있기 때문이죠. 전 아무것도 아니고, 이젠 더 이상 인간도 아니에요. 그저 프랑스 중위의 창녀일 뿐......" (p.231)


찰스는 이런 사라를 보며 연민과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끼며 도움을 주겠으니 이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 것을 제안하지만 사라는 이곳을 떠나는 것은 수치심과도 결별하는 일이 된다며 거절한다. 그러나 찰스가 새 삶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보이며 거듭 설득하자 사라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찰스는 가엾은 여인에게 자신이 도움을 줬다는 뿌듯함과 함께 '자유 의지'를 운운하며 그녀와의 사적인 만남이 한 순간의 불장난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에 안도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도움을 주고 받으며 스쳐 지나가는 사이로 일단락 된 듯 보이는데, 찰스가 백부로부터 호출을 받고 잠시 라임을 떠난 사이 사라는 사라지고 설상가상으로 찰스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던 백부가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되어 저택과 작위를 상속 받지 못하게 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돈만 많은 집안 딸 답게 약혼녀 어니스티나가 보여주는 숙녀답지 않은 태도는 찰스를 실망시키고 사라가 남겨놓고 간 편지는 찰스를 더욱 심란하게 만든다. 


"간청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 주세요. 오늘 오후와 내일 아침에 기다리겠습니다. 안 오시면, 다시는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p.269)


책을 읽다보면 전지적 화자는 찰스의 행동과 생각을 좇아갈 뿐 사라의 내면은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사라에 대해 계속 의문이 생긴다. '이 여자는 왜 이러는 걸까? 이상한 여자네...수상하네...' 계속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찰스는 사라에게 끌리면서도 자신의 신분과 체면, 약혼녀 어니스티나를 생각해서 사라를 이성적으로 멀리하려고 노력하지만 자신의 마음 속에 이미 깊숙이 들어온 사라의 존재를 감정적으로 도저히 밀어낼 수가 없다. 찰스는 사라의 부탁대로 그녀를 만나러 가고 이야기는 점점 더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이 소설은 찰스가 자신의 실존적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소설 맨 앞에 '모든 해방은 인간 세계의 회복이며 인간 자신에 대한 인간관계의 회복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소설 전체의 제사(epigraph)로 씀으로써, 이 소설의 주제가 인간의 자유와 해방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라를 만나기 전 찰스는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였다. 일하지 않고도 여유롭게 살 수 있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적당한 교양과 과학적 지식까지 겸비한, 거기다 신흥 부유층 딸과의 결혼을 앞두고 재산도 더 불릴 수 있는 그야말로 미래가 창창한 그런 신사였다. 

그러나 우연히 사라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찰스는 그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낡고 진부한 신사계급의 껍질이 깨지는 것을 경험한다. 

찰스는 결국 파혼까지 해가며 자신의 의지로 사랑을 선택하지만 그 사랑은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사랑이기에 그에 따른 댓가를 톡톡히 치른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낡은 사회적 관습을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욕망과 만나는 과정은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현대의 실존주의와도 연결된다.


이 소설은 1867년의 이야기를 1967년에 살고 있는 화자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서술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진행되다가 중간에 갑자기 작가가 일인칭 시점으로 개입하는데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니스티나는 같은 세대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그녀는 1846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던 날 세상을 떠났다.(p.40)]


[나는 모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모두 상상이다. 내가 창조한 인물들은 내 마음 바깥에 존재한 적이 없다.(...) 물론 소설가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아는 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알랭 로브그리예와 롤랑 바르트의 시대에 살고 있다. (p.128)]


1876년의 이야기를 하면서 히틀러가 나오고 롤랑 바르트가 나온다. 또한 갑자기 일인칭 '나'가 불쑥 나와 소설의 이야기로부터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이런 서술 방식은 소설 내내 계속 된다. 

급기야 소설 후반부에 가면 작가가 소설 속 인물로 두 번이나 등장, 기존 소설의 형식을 벗어난 과감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다음과 같다. 


[지금 너를 이용해 먹을 수 있을까? 지금 너를 가지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 그것은 바로 전지전능한 신-그런 불합리한 존재가 있다면-의 시선이다. 우리가 흔히 신의 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야비하고 의심 많은(누보로망 이론가들이 지적했듯이) 도덕적 특질을 가진 시선이다. 이 시선을 나는 찰스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그 사내의 얼굴에서 분명히 읽을 수 있다.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그 사내의 얼굴은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얼굴이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가면을 쓰지 않고, 내가 바로 그 사내라는 것을 인정하겠다.(p.526)]


이어서 등장 인물들에게도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하며 한 가지 결과를 작가가 정하지 않고 두 가지 결말을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총 세 가지 결말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찰스의 상상이고 나머지 두 개는 위에서 말한 찰스가 처한 딜레마를 아예 없애고 두 가지 결말을 순서대로 보여준다.

작가는 왜 마지막 한 가지 결말을 제시하지 않고 여러 결말을 제시하는 소설을 썼을까? 

그것은 독자인 우리에게도 생각해 보라는 뜻이 아닌지, 또한 소설 속 이야기를 빅토리아 시대로만 한정하지 말고 현대까지 연결되는 인간 실존의 문제임을 이런 형식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정말 많은 주제와 빅토리아 시대 충돌하던 가치관 등을 다루면서 즐거운 책읽기를 선사한다. 마르크스주의와 다윈의 진화론, 매튜 아널드의 실존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빅토리아 시대를 재구성한 작가의 글을 내 지적 수준으로 제대로 이해하고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방대한 지식이 집약된 소설이라는 점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 무엇을 써야 하나, 참 힘들었다. 작가가 남녀의 사랑 이야기 외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그 모든 것을 머리로 흡수하여 글로 정리하려니 참 내 능력으로는 벅찼다. 그러나 이 책은 다시 읽고 싶을 정도로 (지적이고 실험적인 면에서)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역사 텍스트이자 전후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실험적인 작품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보람있었고, 존 파울스의 다른 책들을 다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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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01-07 21:4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오.... 드디어 파울스의 세계로 들어오셨군요!
<마법사> 절대 놓치지 마세요. 명작입니다.

coolcat329 2022-01-07 22:43   좋아요 3 | URL
네~~정말 신박한 소설을 만났습니다.
<마법사> 사겠습니다. 골드문트님이 극찬하신 글 읽은 기억이 나네요.
편한 밤 되세요☺

얄라알라 2022-01-07 22: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존 파울스 소설 직접 읽으신 coolcat님께서 보람느끼셨다는 말씀을 리뷰 후반부에서 보니, 아주 공감됩니다. 깊이 읽으셨기 때문에 더 보람있으시겠어요.

저는 희미하게 제목만 들어본 작품은 coolcat님 덕분에 줄거리 알아가네요.

방금 전 본 <Don‘t look up>에서의 메릴 스트립도 굉장히 카리스마 뿜뿜 멋진데 1981년 영화에서는 또 다른 매력도 있겠어요^^

coolcat329 2022-01-07 22:56   좋아요 3 | URL
소피의 선택도 그렇고 이 영화도 그렇고 옛날 메릴 스트립 정말 아름다워요.
이 책 절판됐던데 현대 고전인만큼 개정판 꼭 나왔으면 좋겠어요.
방금 돈룩업 보셨군요. 메릴 스트립도 나오는지는 몰랐는데 더 보고 싶네요~^^
북사랑님 좋은 밤 되세요~

얄라알라 2022-01-07 23: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돈룩업 최고네요^^ 고양이라디오님 페이퍼 읽고, 봐야지봐야지 하다가! 지금 감동먹고 기후 위기 책 뽑아왔어요. 결국 헐리우드판 그레타 툰베리 영화인가? 하면서. coolcat님께서도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를^^

바람돌이 2022-01-08 0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열린책들 세계문학판으로 다시 나와있어요. 저도 보고싶어서 검색해보니 나오네요. 같은 역자인걸로 봐서 개정판인지 아니면 세계문학전집으로 넣으면서 판형을 바꾼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책이 계속 나오는건 좋다고 생각합니다. ^^ 저도 존 파울스의 세계로 들어가보고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편안한 주말 되세요. ^^

coolcat329 2022-01-08 11:53   좋아요 1 | URL
아 맞아요. 열린책들세계문학 상,하권으로 나눠서 2009년인지 개정판이 있긴한데 한 권으로 다시 나오면 좋을거 같아요~^^

새파랑 2022-01-08 08: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을거 같은데 들어가보니 품절이라는 ㅜㅜ 그런데 바람돌이님 답글보니 개정판이 있나 보네요 ^^ 사랑이야기에 다양한 결말이라니 재미있을거 같아요~!!

coolcat329 2022-01-08 11:56   좋아요 2 | URL
상,하권으로 있어요~~^^
사랑이야기에다 빅토리아시대 공부도 됩니다~^^

coolcat329 2022-01-08 11:58   좋아요 3 | URL
상,하권으로 있어요~^^사랑이야기 외에 빅토리아 시대 공부도 된답니다~^^

mini74 2022-02-10 17: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클캣님 글 읽고 영화 찾아서 본 ㅎㅎ 축하드립니다 *^^*

새파랑 2022-02-10 18: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다 샀어요 ㅋ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ㅎㅎ 축하드려요~!!

coolcat329 2022-02-11 1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니님,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