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멸 알베르토 모라비아 Alberto Moravia 시리즈 1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정란기 옮김 / 본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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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멸>은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작품으로 1963년 장 뤽 고다르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이 '연민'이라는 주제로 인간의 심리를 파헤쳤다면, 이 작품은 '경멸'이라는 감정을 통해 인간 관계에서 오는 소통의 어려움과 그로 인해 무너져 가는 인간 관계를 리카르도와 에밀리아 부부를 통해 보여준다.


리카르도와 에밀리아는 결혼한지 2년이 좀 넘은 부부이다. 결혼 생활 2년 동안 이 부부의 애정은 완벽하다고 할 정도로 좋았다. 그러나 결혼 후 2년이 지난 어느 무렵부터 에밀리아의 태도가 이상해진다. 그 시기는 리카르도가 아내를 위해 무리해서 장만한 집 대출금을 갚기 위해 극작가의 꿈을 잠시 접고 시나리오 일을 시작한 시기이다.


리카르도는 자신의 집을 갖고 싶어한 아내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집을 샀고 그 할부금을 갚아 나가기 위해 하기 싫은 시나리오 일을 하게 되었으나,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정도 희생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새 집으로 이사간지 얼마 안되서 에밀리아는 이유를 대며 따로 자자고 요구하고 시종일관 냉담한 태도로 반응하니 리카르도는 이해할 수가 없다. 리카르도는 에밀리아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며 그녀의 진심을 알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도 알겠지만 난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아. 단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고 있는 거야. 대출금을 갚아야 하니까 마지못해 하는 거라고. 하지만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 일을 하는 게 모두 소용없게 된 것 같아." (p.85)


그러니까...나는 시나리오 일 정말 하기 싫은데, 돈 갚기 위해 억지로 하고 있다. 근데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왜 이 일을 해야하는가...라는 약간의 협박과 자기연민, 하소연이 섞인, 참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부끄럽고 짜증나는 말인데, 문제는 이런 식의 말을 소설이 끝날 때까지 한다는 것이다. 


근데 에밀리아는 또 어떤가. 사랑이 식은 건 분명한데 "당신을 사랑해. 같은 말 계속하게 하지마. 난 이 집에서 남아서 살 거야." 급기야 '끌어안은 두 팔을 느슨하게 풀며 소곤'거리길, "키스해줘, 응?" (p.92)


리카르도와 에밀리아는 자신들의 속마음을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 리카르도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헤어지겠다고 생각만 할 뿐 용기가 없어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에밀리아는 왜 태도가 변했는지 속시원히 그 어떤 말도 해주지 않는다. 

한 명은 내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 나 자신을 희생해가며 돈을 버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러는거니...또 다른 한 명은 난 변한거 없는데 너 혼자 왜 그러니...


대화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두 사람. 너무나 당연한게 리카르도는 입만 벌렸다하면 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사랑한다고 거짓말을 했냐,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일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반면 에밀리아는 "왜 그런 걸 알고 싶어해?", "왜? 더 이상은 캐지 마. 그게 우리 둘을 위해 좋아."(p.136)라며 피하기만 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읽는 나도 참 답답했다. 


이렇게 출구없는 대화만 주고 받다 서로 감정이 격렬해진 두 사람, 리카르도는 폭력적으로 돌변하고 급기야 리카르도는 에밀리아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난 당신을 경멸해. 이게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이야. 이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된 이유야. 난 당신을 경멸해. 당신 몸이 닿을 때마다 언제나 몸서리쳐졌어. 진실을 말했어. 난 당신을 경멸해. 난 당신이 싫어!"(p.146)


아내의 사랑을 다시 얻기 위해 나름 노력했지만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경멸'이라는 말까지 들은 리카르도. 도대체 무엇이 이 남자의 문제일까...

안스럽다가도 피해의식에 젖어서 꺼떡하면 사랑 타령하면서 내가 왜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냐는 남자, 정말 짜증난다. 게다가 이 남자는 여자가 보내는 신호를 자기 맘대로 해석,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한다. 좋은게 좋은거라는 그런 태도와 자신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바티스타 앞에서 본인은 못 느끼는 그 비굴한 태도가 아내인 에밀리아에게는 모욕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에밀리아도 못마땅하다. 처음엔 오히려 에밀리아가 나쁘다고 생각했다. 누추한 셋방살이 하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묻던 그녀를 위해 리카르도는 무리해서 집을 샀고, 그 돈을 갚기 위해 하기 싫은 일까지 하게 됐으니, 비록 리카르도가 치사하게 당신을 위해 일하는 거라고 생색을 좀 내도 어느 정도는 비위를 맞춰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또한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바티스타 앞에서 아내인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비굴하게 행동한 리카르도가 나라도 싫었겠지만, 그 순간의 그 모욕적인 느낌을 남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면 리카르도가 저렇게 사랑과 자신의 일을 연결지어 찌질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정말 남편의 태도에 정나미가 떨어져 같이 있기 싫으면 헤어지자고 분명히 말하던가...헤어지자고 했다가 갈 곳 없으니 일단은 여기 있겠다는 건 또 뭔가...

  

나는 이렇게 에너지만을 소모하며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이들의 겉도는 대화를 읽으며 정말 답답했고, 속으로 '아휴, 이 바보야! 자존심도 없냐...', '아 쫌! 솔직히 말을 해! 기분나쁘고 실망했던거 다 시원하게 말하라고!' 얼마나 외쳤는지 모른다.  


이런 두 사람이 갈등하는 가운데 리카르도는 새로운 영화 <오디세이>의 시나리오를 맡게 되고 이 부부는 제작자 바티스타, 감독 레인골드와 함께 카프리로 영화 작업을 위해 떠난다. 

이 곳에서 리카르도는 독일 감독 레인골드와 <오디세이>에 대한 의견 차이로 갈등을 빚는다. 영화로 돈을 벌려는 제작자 바티스타는 '스펙터클'한 요소가 강한 모험 영화를 만들기 원하고, 레인골드는 '오디세이에 해석을 달아 다른 이야기를 만들'기를 원한다. 그가 프로이트식으로 해석한 오디세이는 다음과 같다.


"사실 율리시스는 아내 곁으로 돌아가는 걸 두려워한 사나이였어요. 그의 잠재된 의식은 아내 곁으로 돌아가는게 싫어서 앞길에 장애물이 생기길 바랐고, 또 그렇게 된 거죠. 율리시스의 모험 정신은 조금이나마 고향에 늦게 돌아가고 싶은 그의 무의식적 욕망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아요." (p.186)


"오디세이는 부부 사이의 권태와 인간의 내면을 다룬 이야기에 지나지 않아요. 율리시스는 아내에 대한 싫증을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겨우 극복할 수 있었고, 자기가 아내를 싫어하게 된 원인인 자신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승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겁니다. 바꿔말해 율리시스는 10년간 집에 돌아가지 않으려고 닥치는 대로 모험을 했고, 집에 갈 수 없는 그럴듯한 이유를 찾기바빴던 거예요. (p.187)


레인골드는 <오디세이>가 영웅의 모험담이 아니라 '율리시스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린 드라마'이고, '모든 모험은 곧 율리시스의 무의식이 원하는 것들을 상징'(p.188)한다고 말한다.


이에 리카르도는 그런 레인골드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오디세이>는 호메로스가 쓴 그대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호메로스가 표현한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숨겨진 다름 의미를 해석하고 분석할 필요는 없죠. (...)그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믿었고, 그 작품 안에 표현된 것처럼 정면에서 바로 쳐다본 겁니다. 그러니 우리도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 애쓰기보다 문자 그대로 호메로스가 믿었던 것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193)


근데 이 리카르도의 말이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 나폴리로 가는 중간 쉬기 위해 멈춘 곳에서 바티스타의 차를 타고 왔던 에밀리아가 남편에게 와서 급히 말한다.


"당신이랑 같이 가고 싶어. 제발 그렇게 해줘." (p.196)


사실 이런 부탁은 소설 초반에도 나오는데 그 때 리카르도는 에밀리아의 부탁을 그냥 흘려들었고 지금 그런 상황이 또 생긴 것이다. 항상 노골적으로 에밀리아에게 추근대는 바티스타는 계속 에밀리아와 함께 가고 싶다고 하는데, 그 때 리카르도의 말이 가관이다.


"저는 아무려나 괜찮습니다. 근데 차를 너무 빨리 몬다고 하네요." (p.197)


리카르도는 위에 오디세이에 대해 말한 것처럼 상대방의 말 속의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 자신이 믿고 생각하는 대로만 받아들이고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선한 사람일지라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고 결국엔 혼자 남게 될 것이다. 


결국 레인골드와도 어떤 타협점을 찾으려고 노력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지만, 사실 그는 레인골드의 해석이 억지가 아닌 심리를 기반으로한 논리적인 해석임을 안다. 그러나 레인골드가 <오디세이>를 설명하면서 적극적이지 않은 율리시스를 페넬로페가 경멸한다고 말했을 때, 리카르도는 에밀리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경멸하고 있다는 사실이 연상되었고  자신과 에밀리아 사이를 위험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시나리오 작업을 그만두겠다는 리카르도에게 레인골드는 "당신은 자신의 바람대로 되길 바라겠죠.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p.270) 라고 말한다.


리카르도는 자신의 지성을 믿는다. 지성은 그의 자존심이고 '옳다고 생각하는 근거다.' 그렇기에 매 순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내가 갖고 있는 그 경멸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나는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위해 맘에도 없는 일을 해야하는지 끊임없이 묻는다.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떳떳하게 말할 용기도 없다. 자신의 아내에게 추근대는 바티스타를 두 눈으로 직접 봤음에도 그 앞에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그를 보면 자신의 지성을 믿고 그것에 의지하는 그라는 존재가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에겐 지성만이 있을 뿐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려야 한다는 생각은 못한다. 


나는 지금껏 꿈에 기대어 살려고 애썼다. (...) 이런 이상을 추구하는 생활을 통해 에밀리아가 나의 인간됨을 믿게 하고, 그녀의 사랑과 존경을 되찾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상을 추구해야 할까? 예전보다 더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나의 순수성을 밝히는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다. (p.300)


카프리 섬을 떠나기 전 리카르도의 생각이다. 자신이 생각한 율리시스의 모습, '고상하고 진실한 동시에 가장 시적이고 멋진 모습'(p.299)을 자신에게 투영하고 있다. 그가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이 과연 가정과 이 혼탁한 사회와 세상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중 밖에서 바티스타와 에밀리아의 인기척이 들리자 그가 취한 행동은 나의 이런 생각에 대한 답으로 다가왔다. '한 알만 먹어도 효과가 빠른 수면제'를 두 알 먹고 잠들기.

더 이상 바티스타와 에밀리아의 목소리가 안 들리도록...


역자는 '소설에서는 무엇을 해결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는 것을 보여준 작품' (p.400 작품해설) 이라고 말한다. 

소설 속 리카르도의 생각대로 인간은 '생활이 다르고, 인간에 대한 이상이 다르기 때문'에 살면서 갈등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고매한 이상은 잠시 접어두고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자세와 양보, 이해, 존중...이런 것들이 아닐까 싶다.


<경멸>은 인간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자기 입장만을 생각할 때 인간이 겪는 고립감과 외로움을보여줌과 동시에 그 결과는 얼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독자로 하여금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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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20 11: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믿고 보는 쿨캣님 리뷰~! 이 책도 읽고 싶었는데, 리뷰보니까 더 읽고싶어지네요. 리뷰를 보니 외로운 감정이 느껴진다는~
‘초조한 마음‘과 비교하시니 더욱 더 이해가 되네요^^

coolcat329 2021-04-20 11:55   좋아요 5 | URL
저는 새파랑님처럼 집중해서 빨리 읽고 싶은데 ㅠ 부러워요. 늘 응원의 글 남겨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책 참 재밌어요. 조만간 읽으시겠지만요~~😉

미미 2021-04-20 12: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후반 <오디세이>가 저에겐 엄청난 반전이었어요! 사실 에밀리아가
바티스타 차에 타고 가라는 남편의 사소한 태도로 많은 것을 파악했다고 생각해요. 이 소설은 독서토론 같은 조건이 주어진다면 논쟁이 좀 벌어질것 같은 흥미로운 주제를 담고 있네요.
아내는 물론 스스로에 대해 모르는 남자와 그 남자에 대해 잘 아는 여자의 이야기.영화는 상징들로 가득합니다.😆

레삭매냐 2021-04-20 13:07   좋아요 3 | URL
미미님의 의견에 격렬하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독서모임의 먹잇감으로 아주 좋은
듯 합니다...

미미 2021-04-20 13:14   좋아요 2 | URL
나중에 또 읽을 꺼예요!ㅋㅋㅋㅋ

coolcat329 2021-04-20 14:07   좋아요 1 | URL
이 소설의 또 한 축을 이루는 오디세이 이야기 저도 참 흥미로웠습니다. 세 사람의 각기 다른 해석, 특히 리카르도의 현실과 묘하게 겹치는 레인골드의 이야기가 재밌죠~^^
네~이 소설은 토론에서 아주 그 빛을 발할거 같아요~~🤗

레삭매냐 2021-04-20 13: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주 재미지게 읽었던 소설입니다.

그리고 나선 모라비아 작가의 책들
을 섭렵해 보겠노라고 일단 책들은
사두었는데 <권태>에서 막혔네요.

당장 읽을 책들이 좀 정리가 되면
다시 도전하는 것으로.

coolcat329 2021-04-20 14:09   좋아요 3 | URL
예전에 사두고 놔둔 책이었는데 레삭매냐님 글 읽고 이번에 읽었습니다. 근데 <권태>가 재미없나요? ㅎ 이 책 사려고 보니 표지가 좀 야해서 혹시 새로 나오면 사려고 기다리고 있거든요.

얄라알라 2021-04-23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으. 146쪽 인용문은 다시 읽기 무서워질만큼 강렬하네요^^;

페크pek0501 2021-04-23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건가요? 난 당신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했어, 라고 말하지 말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에 싫은 일도 할 수 있는 거야. 당신은 내게 그런 소중한 존재야, 라고.
하기 싫은 일을 참고 하고 있음을 똑같이 전달하지만 메시지는 다르죠.
흥미로운 작품 같네요... 잘 읽고 갑니다. ^^

coolcat329 2021-04-25 22:43   좋아요 0 | URL
네 상대방보다는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니 이런 소통불능이 오는거 같아요. 저도 페크님처럼 가슴에 와닿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