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장강명 지음 / 유유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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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낡은 관행과 근본없는 갑질에 대해 이처럼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작가님. 미약하지만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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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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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아요. 꼭 읽어 보세요. 정말 강추!" 라는 말이 남발하는 책 소개만큼이나 그 책에게 안 좋은 리뷰는 없는 것 같다. 꾸준히 따라 읽는 작가는 아니지만 평소 잘 쓴다고 생각하던 한국 작가 중 한 명인 최은영의 첫 장편소설에 대해 극찬 일색의 리뷰를 보다가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읽기 시작했다.

"정말 강추합니다" 등등의 리뷰들을 보지 않고 읽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그들이 말한 '너무 좋'은 부분이 언제 나오나를 애태우며 책장을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좀 더 책에 집중할 수 있고 적어도 내 관점과 취향을 좀 더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근 문학계에서 드물게 큰 팬덤을 가지고 있는 소위 '장르 문학'과 '정통 문학'의 경계에 서 있는 한국 작가들의 장편 몇 편을 추천받아서 읽었는데, 하나같이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책이 좋지 않았다기보다 나와는 맞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좋은 책이 있다면 그건 정말 좋은 일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취향은 다 다르도록 되어있다. 개인의 경험, 신념, 그리고 환경에 따라 누군가에게 '너무 좋'은 책이 다른 어떤 이에게는 별로일 수 있다. 그래서 감정을 많이 실은 책 리뷰는 그리 신뢰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래서 <밝은 밤>은 별로였을까? 어떤 책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좋다, 나쁘다로 한정된다는 법은 없다.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 한눈 팔 겨를 없이 몰입하면서 읽었던 것은 사실이다. 작가가 천착해온 '여성'과 '위로'에 대한 주제가 전반적으로 함축되어 있어서 좋았다. 아주 극적인 상황으로 인물을 몰아가기보다 평균적인 여성들이 겪는 소외감이 세심한 터치로 그려진다.

이 소설은 억압적인 남성중심 사회로부터 상처받은 여성, 그리고 그들 간의 위로와 연대에 관한 이야기다. 4대에 걸친 여성들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그들은 딱 평균적일만큼 억압받았고 딱 남들만큼 비참하며, 고만고만하게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들의 억눌린 삶 이면에 가슴 아픈 근현대의 역사가 흐르기는 하지만, 이 소설의 인물들은 역사 안에서의 개인으로서 받은 상처보다 오히려 가정 내에서 가해지는 가부장제의 폭력과 억압으로 더 아파한다. 그러나 소설 속 남성들은 여성들의 삶에 곁가지로 등장할 뿐 소설 전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억압적 사회 분위기를 정면으로 공격하기보다 여성의 삶 속에서 뿌리내린 '한'의 정서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탐색하고자 한다. 칼보다는 환부를 보여주며 무기의 비정함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소설은 4대를 흘러오는 동안에도 남성중심의 이데올로기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내며 사회 전반에 잔존하는 구시대적 가치관에 칼을 들이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무엇보다 공감과 위안, 휴머니즘의 가치를 역설하는 따뜻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소설에는 이따금 작가와 인물의 완전한 분리에 실패한 것 같은 서술이 끼어들 때가 많다. 소설 속 인물의 말이 계속해서 작가의 말로 여겨진다면 그 소설의 세계에는 온전히 몰입하기 힘들다. 이것이 30대의 일인칭 여성화자를 택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촘촘하게 짜여진 서사만으로 충분했을 텐데, 문제는 소설이 결말로 나아가고 있음을 너무 노골적인 성장담의 형식으로 그려내려 했다는 점이다. (깨달음을 얻었으니 곧 소설이 끝나겠구나.) 그 과정에서 화자인 '지연'이 자신에게 해주는 말은 작가 자신이 스스로에게 혹은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라는 측면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끊임없이 따라가는 중심서사는 '지연'의 이야기이기보다 증조모인 '삼천'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증조모의 단짝이었던 '새비'나 그의 딸인 '희자'의 존재가 서사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인데 반해, 엄마의 친구 '명희'나 나의 친구 '지우'는 대체 왜 필요했었나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소설 속 어떤 역할도 하지 않은 채 기능적으로만 소모되는 인물들이다. 본래의 기능은 대를 이어 지속되는 '여성간의 연대'를 완성시키기 위한 장치이겠지만 이들이 소설에서 하는 행동을 보면 여성의 연대라기 보다는 그저 우정 판타지를 보여주고자 작위적으로 만들어졌을 뿐이다. 이 소설에 대해 "너무 좋아요, 강추"했던 사람들은 리얼리즘을 갉아먹는 이 우정 판타지까지 좋았다는 것이겠지. 아니면 내가 너무 비관적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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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chinko : The New York Times Bestseller (Paperback, 영국판) - 애플TV 드라마 '파친코' 원작
이민진 / Head of Zeus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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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역사를 관통하는 인물들의 애환을 그린 작품은 얼마든지 있지만, 그 역사의 거센 물결을 한발짝 비켜간 삶의 모습은 어땠을까. 억압과 폭정에 시달리던 식민지배 시대에 그 식민지에 살지 않았고, 공포와 굶주림으로 고통받던 전쟁의 순간에 한 발짝 떨어져 있던 민족의 삶의 모습은 조금 더 나았을까. 한국계 미국 작가 이민진의 소설 <Pachinko>는 한국인으로서 한국 근현대의 중대한 사건의 한 중심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몇 세대에 걸쳐 보여준다.

당연하게도 소설은 사회, 역사를 중심으로 끌어오기 보다 개인적인 디아스포라의 삶에 치중한다. 이민 세대의 삶 속에 고국의 모습은 간접적으로 암시될 뿐이다. 이 소설이 집중하는 것은 고국을 떠난 이들이 겪는 어려움이 세대를 거듭할 수록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준다. 이민 1세대와 2세대, 3세대는 서로 다른 삶의 모습을 가진 만큼 고국에 대한 감정 또한 차이를 보인다. 이민 1세대에게 있어서는 정착 자체가 큰 도전이며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과 외로움, 고국과 두고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큰 정조를 이룬다면, 그 이후 세대는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없음에도 이방인 취급을 받아야만 하는 경계의 삶에 대한 갈등이 가장 큰 갈등의 축을 이룬다.

책에는 분단 전에 조부모가 이민을 와서 한 번도 한국 땅을 밟아본 적 없는 이민 3세대가 신분증을 만들기 위해 남과 북을 선택해야하는 부조리한 상황이나, 평생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말을 하고 일본 문화를 배웠는데 한국인의 신분증을 가져야하고 직업 선택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니까 이들이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조국에 대해 의식하게 되는 것는 오로지 타의에 의해 강요될 때 뿐이다. 이러한 부조리에 대해 가장 큰 갈등을 보여주는 인물이 이민 2세대인 노아이다.

세대간의 차이가 있음에도, 인물들의 혈관에 흐르는 강한 민족성은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짙은 가족주의나 희생과 인내 같은 한국적 정조가 모든 인물들에게 깃들어 있다. 또 떠나온 고국이지만 나라의 역사를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소설은 일제강점기 전과 후, 일제강점기, 해방과 전쟁, 분단과 독재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에서 벗어난 한국인들에게 그 역사는 어떤 의미로 이해되는지 개인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플롯이 몇 세대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인물이 너무 많다. 세대가 흐를 때마다 주요 인물들이 바뀌면서 몇 년 동안 이전 세대의 인물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몇년 후에 한줄의 언급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수많은 인물들이 이야기 안에서 유기적으로 얽히기 보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통해 하나의 의미만을 던져주고 물러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앞뒤가 맞게 잘 직조된 이야기라기보다는, 어제도 흘렀고 내일도 흐를 강의 일부분인 것처럼 유려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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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rce (Paperback) - 『키르케』원서
Madeline Miller / Little, Brown and Company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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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시대는 지났다. 물론 고전 문학 속에는 여전히 신화의 레퍼런스가 남아 있다. 하지만 현대 문학에서 신화적 담론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면 이질감을 느낄 정도로 이제는 한물 간 이야기다. 그러니 모티프의 차용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화의 시대를 배경으로 신화 속 인물의 삶을 따라가는 소설이 이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사람과 읽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 모두 같은 질문을 떠올렸을 법하다.



<Circe>는 제목에서 보듯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하급여신이자 마녀인 Circe(영어 발음으로는 '썰씨'에 가깝고. 우리말 표기는 '키르케'다. 이하 '키르케')의 이야기를 재해석한 소설이다. 왜 하필 키르케인가? 여성이자 하급 여신인 키르케의 위상은 약자의 프레임을 씌워 부당한 외부 환경에 저항하도록 만들기에 적합하다. 인물이 처한 장애는 서사(특히 성장서사)에서 중요하다. 순탄한 운명이라면 인물의 번민과 갈등에 설득력을 불어 넣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자라는 위상만으로 키르케라는 인물이 문제적 인물이 되지는 않는다. 이 긴 서사의 주인공이기 위해서는 그녀가 수많은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욕망을 가진 존재라는 점이 무엇보다 더 중요했을 것이다. 이 욕망은 전능한 신들의 약자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야욕과는 구별된다. 갖기 힘든 것, 심지어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가 키르케의 욕망을 이룬다.



불멸의 존재(Immortal)로서 영생 동안 고독했던 그녀의 욕망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곧 사라질 인간들(Mortal)이다. 그리고 인간들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매번 좌절로 이어지는 것은 그녀가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불멸의 삶 때문이다. 즉, 신의 세계에서 축복으로 여겨지는 영생이 키르케에게는 저주나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죽은 후에도 영원히 살아야 하는 삶이란 곧 영원한 고독이기 때문이다. 그 고독의 끝은 없다. 키르케의 신성은 그녀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 운명을 전복시킬 마지막 하나의 행동을 위해 복선을 촘촘히 쌓아 올린다. 키르케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신의 시대는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운명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그것을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신성에 의해 강조되는 운명은 이성의 시대에는 먹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운명론적 인식은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오늘날까지도 개인을 좌절시킨다. 키르케를 옭아매는 운명은 신화적 개념이기보다 주체성 실현을 막고 있는 모든 장애에 대한 메타포로 이해된다. 세계의 거대한 힘에 쉽게 체념해 버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소설은 키르케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다.



<키르케>의 세계관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하나의 굵직한 서사의 줄기에서 뻗어나온 수많은 신화들이 키르케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얽혀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고유명사들의 홍수와 개연성 없는 사건의 산발적 배치로 혼란스러웠던 그리스 로마 신화 읽기가 이 소설에서는 수월하게 느껴진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글라우커스Glaucus, 스킬라Skylla, 데우달러스Daedalus, 파시파에Pasiphae, 이카루스Icarus 등 수많은 신화 속 인물들이 키르케를 둘러싼 하나의 이야기 속에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I thought once that gods are the opposite of death, but I see now they are more dead than anything, for they are unchanging and can hold nothing in their hands.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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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시절 열린책들 세계문학 103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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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초기작 <버마시절>은 대표작 <1984>나 <동물농장> 만큼의 수사적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소설 못지 않게 수많은 에세이를 남겼던 이력만큼 오웰은 르포르타주 형태의 리얼리즘에서 오히려 그 작가적 특징이 더 두드러진다. 작가의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독설과 패기가 한층 두드러질 뿐 아니라 정치 사상의 원류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버마시절>은 수많은 식민지 담론을 낳았던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별개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다. 소설은 버마가 영국령 식민지로 전락한 역사적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인물의 초점은 영국인 플로리에게 맞춰져 있는데 그는 백인 지배계층으로서 그 불합리한 통치에 스스로 반성하고 비판할 줄 아는 좌파 지식인이다. 그는 식민지 출신의 투쟁의식을 가진 시혜적 지식인이 아니며 그의 정의와 분노는 언제나 바람직한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이 인물의 독특한 지점이다.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고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시인함에도 불구하고 행동에 나서야 될 순간에는 망설인다. 플로리는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의 비겁함을 '동양인들을 잔인하게 대해야 하는 법 따위는 없'지만 '다른 백인들의 의견과 배치될 때는 감히 동양인을 감싸 주지 못'한다는 말로 변명한다. 이런 아이러니에 갇혀 적당히 타협하며 식민지 버마 땅에서 행세하는 영국인 클럽에 소속되어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반제국주의를 주장하는 소설의 초점 인물이 제국주의의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의 입체성으로 인해 담론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측면도 있다. 

플로리가 영국인으로서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이라면, 그 반대 지점에는 식민지 인도에서 제국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인물들도 있다. 우 포킨과 베라스와미라는 문제적 인물인데, 이들 또한 전혀 다른 시선과 입장으로 제국주의를 바라본다. 우 포킨은 버마인으로써 영국에 호의적이지 않음에도 권력을 위해 제국주의에 굴종하는 인물이다. 같은 동양인인 의사 베라스와미는 다른 이유로 영국에 호의적이다. 그는 스스로를 미개한 민족으로 규정짓고 선진문물을 지닌 영국에 대한 숭배를 감추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서로에게 적으로도 친구로도 규정될 수 없는 다양한 인물 군상들은 그 자체로 소설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소설의 주된 갈등은 식민지와 피식민지 사이의 외부적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로 플로리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그 내적 갈등의 중심에는 영국에서 온 젊은 여성인 엘리자베스가 있다. 엘리자베스와 플로이는 세상 보는 관점에서 부터 삐걱거린다. 표면적으로는 남녀문제로 보이는 이들의 갈등은 실은 식민지를 대하는 시선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플로이는 제국주의에 일종의 혐오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환경과 문화에 흥미를 보인다. 반면 엘리자베스는 유럽의 스노비즘에 젖어 아시아에 대한 혐오와 비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정작 자신은 유럽의 주류 사회에서 낙오된 처지이면서 허세 가득한 문화적 우월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이런 태도는 서구 제국주의의 폭력을 상징한다. 엘리자베스가 플로리를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는 돌고 돌아서 그가 얼굴에 지닌 모반 탓으로 요약된다. 플로리의 모반은 그가 포용하는 식민지의 미개성이다. 그 모반이 엘리자베스를 향해 뚜렷이 형체를 드러낼 때 비로소 그녀는 식민지 사회와의 화해가 결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는 것이다.

플로리라는 인물이 가진 입체성 때문에 이 소설은 완벽한 탈식민주의를 지향하지는 못한다는 명백한 한계를 가진다. 게다가 그의 운명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문다. 그래서 <버마시절>은 정치소설이라기 보다 개인적 연애 소설로 읽히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식민지 담론을 표면화 시킨 인물간의 날카로운 대화를 통해 조지 오웰은 제국의 작가로서의 끊임 없는 고민과 성찰을 담아낸다. 정치소설이 문학적인 완곡어법을 거치지 않으면 자칫 사상의 원색적 선전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텐데 <버마시절>은 자전적 체험을 소설적 배경에 생동감을 더해 주어 읽는 맛을 더해준다. 끈적하고 후끈한 열대의 대기를 감각적으로 묘사할 뿐 아니라, 지긋지긋한 건기를 지나 내리쏟는 스콜에 갈등의 기승전결을 배치하며 열대의 기후와 플롯을 절묘하게 아우른다. 작가는 개인적 경험을 이국의 정취와 함께 낭만적으로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체제에 대한 문제 의식과 통렬한 비판을 녹여냄으로써 메세지와 문학성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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