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rce (Paperback) - 『키르케』원서
Madeline Miller / Little, Brown and Company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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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시대는 지났다. 물론 고전 문학 속에는 여전히 신화의 레퍼런스가 남아 있다. 하지만 현대 문학에서 신화적 담론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면 이질감을 느낄 정도로 이제는 한물 간 이야기다. 그러니 모티프의 차용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화의 시대를 배경으로 신화 속 인물의 삶을 따라가는 소설이 이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사람과 읽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 모두 같은 질문을 떠올렸을 법하다.



<Circe>는 제목에서 보듯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하급여신이자 마녀인 Circe(영어 발음으로는 '썰씨'에 가깝고. 우리말 표기는 '키르케'다. 이하 '키르케')의 이야기를 재해석한 소설이다. 왜 하필 키르케인가? 여성이자 하급 여신인 키르케의 위상은 약자의 프레임을 씌워 부당한 외부 환경에 저항하도록 만들기에 적합하다. 인물이 처한 장애는 서사(특히 성장서사)에서 중요하다. 순탄한 운명이라면 인물의 번민과 갈등에 설득력을 불어 넣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자라는 위상만으로 키르케라는 인물이 문제적 인물이 되지는 않는다. 이 긴 서사의 주인공이기 위해서는 그녀가 수많은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욕망을 가진 존재라는 점이 무엇보다 더 중요했을 것이다. 이 욕망은 전능한 신들의 약자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야욕과는 구별된다. 갖기 힘든 것, 심지어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가 키르케의 욕망을 이룬다.



불멸의 존재(Immortal)로서 영생 동안 고독했던 그녀의 욕망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곧 사라질 인간들(Mortal)이다. 그리고 인간들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매번 좌절로 이어지는 것은 그녀가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불멸의 삶 때문이다. 즉, 신의 세계에서 축복으로 여겨지는 영생이 키르케에게는 저주나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죽은 후에도 영원히 살아야 하는 삶이란 곧 영원한 고독이기 때문이다. 그 고독의 끝은 없다. 키르케의 신성은 그녀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 운명을 전복시킬 마지막 하나의 행동을 위해 복선을 촘촘히 쌓아 올린다. 키르케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신의 시대는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운명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그것을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신성에 의해 강조되는 운명은 이성의 시대에는 먹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운명론적 인식은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오늘날까지도 개인을 좌절시킨다. 키르케를 옭아매는 운명은 신화적 개념이기보다 주체성 실현을 막고 있는 모든 장애에 대한 메타포로 이해된다. 세계의 거대한 힘에 쉽게 체념해 버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소설은 키르케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다.



<키르케>의 세계관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하나의 굵직한 서사의 줄기에서 뻗어나온 수많은 신화들이 키르케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얽혀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고유명사들의 홍수와 개연성 없는 사건의 산발적 배치로 혼란스러웠던 그리스 로마 신화 읽기가 이 소설에서는 수월하게 느껴진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글라우커스Glaucus, 스킬라Skylla, 데우달러스Daedalus, 파시파에Pasiphae, 이카루스Icarus 등 수많은 신화 속 인물들이 키르케를 둘러싼 하나의 이야기 속에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I thought once that gods are the opposite of death, but I see now they are more dead than anything, for they are unchanging and can hold nothing in their hands.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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