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시절 열린책들 세계문학 103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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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초기작 <버마시절>은 대표작 <1984>나 <동물농장> 만큼의 수사적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소설 못지 않게 수많은 에세이를 남겼던 이력만큼 오웰은 르포르타주 형태의 리얼리즘에서 오히려 그 작가적 특징이 더 두드러진다. 작가의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독설과 패기가 한층 두드러질 뿐 아니라 정치 사상의 원류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버마시절>은 수많은 식민지 담론을 낳았던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별개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다. 소설은 버마가 영국령 식민지로 전락한 역사적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인물의 초점은 영국인 플로리에게 맞춰져 있는데 그는 백인 지배계층으로서 그 불합리한 통치에 스스로 반성하고 비판할 줄 아는 좌파 지식인이다. 그는 식민지 출신의 투쟁의식을 가진 시혜적 지식인이 아니며 그의 정의와 분노는 언제나 바람직한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이 인물의 독특한 지점이다.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고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시인함에도 불구하고 행동에 나서야 될 순간에는 망설인다. 플로리는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의 비겁함을 '동양인들을 잔인하게 대해야 하는 법 따위는 없'지만 '다른 백인들의 의견과 배치될 때는 감히 동양인을 감싸 주지 못'한다는 말로 변명한다. 이런 아이러니에 갇혀 적당히 타협하며 식민지 버마 땅에서 행세하는 영국인 클럽에 소속되어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반제국주의를 주장하는 소설의 초점 인물이 제국주의의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의 입체성으로 인해 담론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측면도 있다. 

플로리가 영국인으로서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이라면, 그 반대 지점에는 식민지 인도에서 제국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인물들도 있다. 우 포킨과 베라스와미라는 문제적 인물인데, 이들 또한 전혀 다른 시선과 입장으로 제국주의를 바라본다. 우 포킨은 버마인으로써 영국에 호의적이지 않음에도 권력을 위해 제국주의에 굴종하는 인물이다. 같은 동양인인 의사 베라스와미는 다른 이유로 영국에 호의적이다. 그는 스스로를 미개한 민족으로 규정짓고 선진문물을 지닌 영국에 대한 숭배를 감추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서로에게 적으로도 친구로도 규정될 수 없는 다양한 인물 군상들은 그 자체로 소설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소설의 주된 갈등은 식민지와 피식민지 사이의 외부적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로 플로리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그 내적 갈등의 중심에는 영국에서 온 젊은 여성인 엘리자베스가 있다. 엘리자베스와 플로이는 세상 보는 관점에서 부터 삐걱거린다. 표면적으로는 남녀문제로 보이는 이들의 갈등은 실은 식민지를 대하는 시선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플로이는 제국주의에 일종의 혐오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환경과 문화에 흥미를 보인다. 반면 엘리자베스는 유럽의 스노비즘에 젖어 아시아에 대한 혐오와 비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정작 자신은 유럽의 주류 사회에서 낙오된 처지이면서 허세 가득한 문화적 우월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이런 태도는 서구 제국주의의 폭력을 상징한다. 엘리자베스가 플로리를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는 돌고 돌아서 그가 얼굴에 지닌 모반 탓으로 요약된다. 플로리의 모반은 그가 포용하는 식민지의 미개성이다. 그 모반이 엘리자베스를 향해 뚜렷이 형체를 드러낼 때 비로소 그녀는 식민지 사회와의 화해가 결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는 것이다.

플로리라는 인물이 가진 입체성 때문에 이 소설은 완벽한 탈식민주의를 지향하지는 못한다는 명백한 한계를 가진다. 게다가 그의 운명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문다. 그래서 <버마시절>은 정치소설이라기 보다 개인적 연애 소설로 읽히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식민지 담론을 표면화 시킨 인물간의 날카로운 대화를 통해 조지 오웰은 제국의 작가로서의 끊임 없는 고민과 성찰을 담아낸다. 정치소설이 문학적인 완곡어법을 거치지 않으면 자칫 사상의 원색적 선전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텐데 <버마시절>은 자전적 체험을 소설적 배경에 생동감을 더해 주어 읽는 맛을 더해준다. 끈적하고 후끈한 열대의 대기를 감각적으로 묘사할 뿐 아니라, 지긋지긋한 건기를 지나 내리쏟는 스콜에 갈등의 기승전결을 배치하며 열대의 기후와 플롯을 절묘하게 아우른다. 작가는 개인적 경험을 이국의 정취와 함께 낭만적으로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체제에 대한 문제 의식과 통렬한 비판을 녹여냄으로써 메세지와 문학성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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