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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비밀
톰 녹스 지음, 서대경 옮김 / 레드박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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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식량을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면서 동족을 죽이는 유일한 종족이다. 정치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만으로 수많은 의미 없는 살상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지닌 내면의 악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많이 인용된다. 제의적 이유로 벌어지는 살인도 마찬가지다. 특히 합리적 사고방식이 팽배한 오늘날에는 제의적인 이유로 벌이는 많은 일들은 무조건적인 비난의 대상이 된다. 톰 녹스의 <창세기 비밀>은 바로 제의적 이유로 벌어지는 살인인 인신공희에 본격적으로 접근한 팩션이다.

소설은 의문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런던의 형사 포레스터의 이야기와 터키의 유적 발굴 현장을 취재하러 갔다가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기자 로브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나타난다. 고대로부터 행해졌던 인신공희의 풍습과 창세기 신화의 비밀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되며 접점을 만들어 간다. 현대에 일어나는 의문의 살인사건에서 시작하여, 터키의 유적, 에덴동산, 인신공희, 예지드 교, 검은책으로 끊임없이 화두는 옮겨간다. 그러는 동안에 마침내 인류의 오랜역사에 관한 창세기 비밀이 파헤쳐진다.

팩션의 매력은 숨가쁜 전개와 같은 장르소설적 재미에 지적 흥미가 더해진 데에 있다. 그러나 <창세기 비밀>은 전개가 다소 느려 팩션의 매력을 십분 살려 내지는 못하고 있다. 괴베클리 테페 유적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나 살인이 인신공희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설명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소설 전반부에 쏟아 붓는 바람에 중반부를 넘어서야 비로소 주인공들이 본격적인 위기에 처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책장을 한참이나 넘겨야 긴장감을 동반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추리적 기법임에도 그리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고 가속도가 붙지 않는 것은 극중 사건과 인물의 심리에 크게 몰입이 되지 않았던 탓도 크다. 또 다방면의 학문들에 대한 설명이 중간중간 삽입됨으로써 이야기의 흐름이 자꾸 끊긴다. 풀어 놓고자 하는 이야깃거리가 많을 수록 그것들을 한 방향으로 이끄는 구심력이 중요하지만, 이 책은 거기까지 독자를 배려하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비밀>은 매끈하게 잘 쓰여진 팩션임이 분명하다. 지적인 동시에 하드고어적인 잔혹함이 곳곳에 배어있다. 역사, 고고학, 종교학, 심리학, 유전학, 영문학 등 다양한 방면의 학문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동원되어 수준 높은 팩션의 경지로 이끌고 있다. 결론적으로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의 이야기를 신석기 혁명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는 발상도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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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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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야기라고 하면 가족 간의 불화와 반목, 이해와 화합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플롯이 떠오른다. 여기에 적당한 감동과 건전한 주제의식은 기본이다. 감정의 과잉에 거부감이 없다면 눈물샘을 짜내는 신파도 어울린다. 특히 가족의 의미가 퇴색해 버린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렇다. 가족이란 보편적인 화두에서 출발하여 극단의 정서적 체험으로 이끄는 것이 가족의 참의미의 재생을 가능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오랫동안 감추어진 출생의 비밀 같은 가족사라도 간직하고 있다면 모든 준비가 갖추어 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가족의 반목과 화해의 과정을 그리면서 독자를 감화시키고 가족의 참의미를 되묻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이 모든 재료를 다 갖추어 놓고, 의외의 방식으로 요리해 내 놓은 작가가 있다. 등단 6년 만에 새 장편 소설을 들고 돌아온 천명관이다. 그의 전작 <고래>의 독특한 내러티브를 기억하는 사람이면 그가 가족이라는 소재를 결코 평범하게 풀어내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령화 가족>은 우리가 가족 이야기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갖가지 요소들을 파괴된 형태로 드러내 보인다. 뭔가 뒤틀리고 억지스럽고 투박하다. 그러나 천명관이 전작에서부터 밟아온 기이한 행보를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가상의 공간에서 완벽하게 극화된 인물들이 끝없이 기이한 행각을 펼치던 소설 <고래>를 기억한다면 말이다. 그는 뻔한 건 이야깃거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소설가 중 하나다. 아마 그의 얼굴에는 "정해진 건 없다"라고 써 있는 건 아닐지.

소설은 각자의 삶을 향해 집을 떠났던 남매들이 몇 십년이 흐른 뒤 다시 한 집에 모이게 되면서 시작된다. 칠순을 넘긴 노모 밑으로 기식하러 들어오는 중년의 세 남매의 초라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가장 왕성하게 자신의 가정을 꾸려야 할 나이에 오히려 빈털털이가 되어 집으로 들어온 남매들의 애처러운 상황을 그리면서도 작가는 동정어린 감상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전과 5범에 하는 일 없이 식량을 축내며 방귀만 뿡뿡 뀌어대는 120키로 거구의 첫째 오함마,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루어 놓은 것이라곤 10여년 전에 세기의 졸작영화 한 편을 만든 것이 전부인 둘째 오인모, 바람을 펴 두 번째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친정으로 들어온 막내 미연에 발랑까진 그녀의 딸까지 합세해서 평균나이 사십 구세인 가족. 우여곡절 끝에 스물 네 평 아파트를 채운 다섯 가족의 훈훈한 이야기가 바야흐로 펼쳐진다고 하면 좋겠지만 이야기 속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피자 한 판을 시켜 삼촌에게 한 조각 건네지도 않고 혼자 먹어치우는 조카, 조카의 비행 현장을 포착해 그것을 빌미로 조카를 삥뜯는 삼촌, 조카의 속옷을 훔쳐내 수음을 하는 삼촌, 이혼 서류에 도장이 마르기도 전에 새 남자와 일을 벌이는 여동생. 이 가족의 일상은 이렇다.

한 마디로 이 이야기는 막장 가족이 알고 보니 더 막장이더라는 기막힌 이야기다. 소위 막장 드라마가 욕먹는 이유는 갈 데까지 가본다는 식의 배짱 때문이다. <고령화 가족>은 뻔뻔스럽게도 그런 식의 막장 코드를 아주 풍부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고래>의 능청스러운 화법이 자연스레 오버랩되는 것도 바로 이 막장코드 때문일 것이다. 현실적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사실적인 삶에 근접해 있는 대신 상상의 폭이 상당히 제한되기 마련이다. 아마도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말도 안 되게 막 나가는 가족이 탄생한 것이리라. 따지고 보면 책임질 능력도 없으면서 스무 명 남짓 되는 자식들을 주렁주렁 낳아 옷대신 거적때기를 덮어 키우는 흥부 이야기도 오늘의 기준에서는 막장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이야기이기에 가능한 것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천명관은 터무니 없는 일들을 늘어 놓으며 '이것은 이야기'라는 사실을 끊임 없이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한 편의 막장드라마도 이야기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품격은 지니고 있다. 오로지 시선 끌기만을 위한 자극성 소재의 나열은 아니라는 점에서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와 차이를 보인다. 웬수처럼 지내던 형 오함마의 극적인 인생역전에 통쾌해하는 나(비록 그 결과가 참혹한 폭행으로 이어진다해도),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꺽꺽 울음을 터뜨리는 오함마, 난봉꾼 같은 삼촌에게도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조카. 막장 가족에게 한 가닥 가족애가 비치는 순간 유쾌한 웃음은 찡한 감동으로 변한다.

에둘러 가고 있지만, 결국 이야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전형적인 가족 이야기로 되돌아 간다. 삼 남매가 한 집에 모이게 된 난감한 사건(?)을 겪고도 오히려 들뜬 마음이 되어 매끼니마다 고기 반찬을 차려내는 어머니는 흔한 가족 드라마의 헌신적인 모습 그대로다. 아닌 척 하지만 이 가족들은 모두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낸다. 이렇듯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희생은 결국 이들이 가족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가족 안에는 모든 형태의 가족이 공존한다. 핏줄을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의 가족도 이 안에 존재하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과 결혼을 통해 새로이 가족 구성원에 편입된 이도 존재한다. 어떠한 과정으로 형성되었든 결국 이들 가족은 동일한 운명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오늘날에는 가족의 이상적인 형태를 말할 때, 가족의 형성 과정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재혼, 입양 등의 특수한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 가족들에 대한 편견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작가는 이 가족의 모습을 통해 점점 다양화되고 있는 가족의 형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낡은 소파 위에 앉아 이 가족에 대해 억측을 늘어 놓는 할머니들을 욕하려거든 겉만 보고 한 가족을 판단하는 그 모습이 혹시 당신의 모습은 아닌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은 예기치 않게 빵빵 터지는 웃음을 마련해 두고 도무지 심각해질 순간을 주지 않는다. 딸의 가출을 알게 되는 심각한 순간에 엉터리 맞춤법의 편지가 발견된다든지, 연쇄살인범에 대한 비장한 분노가 표출되는 순간 유치장으로 장면이 전환된다든지 하는 식이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이 작가 사람 웃기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고래>에서 각종 법칙을 나열하며 잡다한 사건에 대한 서술을 대신했다면, <고령화 가족>에서는 사람들의 얼굴에 쓰여진 한 줄 요약글을 통해 구구절절한 인물 소개를 대신한다. 서술을 아끼는 대신 버라이어티한 대중 문화의 요소요소를 적절히 차용한다. 막장 일일 연속극으로 출발해서, 중년남자의 애환을 그린 인간극장이 되었다가, 청소년들의 비행 현장을 추적하는 피디수첩이 되기도 한다. 또 황당한 첩보영화가 되는가 하면 어이없는 촌극을 그린 시트콤이 되어 빵 터지는 웃음을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문제적 인물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서사가 전통적인 소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형식과 관습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소설 쓰기는 근대를 거슬러 자유롭게 펼쳐지는 이야기의 전통에 오히려 근접해 있는 것 같다. '야이기꾼'으로서의 그의 특출난 자질은 여전히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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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럼의 마녀와 사라진 책
캐서린 호우 지음, 안진이 옮김 / 살림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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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재판 혹은 마녀사냥은 집단 군중심리로 인해 무고한 자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우고 몰아가는 행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현대에도 줄곧 쓰인다. 구국 영웅 잔다르크가 화형되는 역사의 한 장면이 보여주듯이 계몽 시대 이전 비합리적이고 무지몽매한 사고의 결과로 나타난 비극이기도 하다. 17세기 미국의 식민지 시대 세일럼이라는 한 마을에도 힘 없는 여성들이 마녀로 몰려 교수형을 받게 된 마녀재판이 있었다. 마녀재판의 희생자는 말그대로 무고한 '희생자'라는 것이 오늘날 역사를 바라보는 자들의 일반적인 시선이지만, 그들이 정말 마녀였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이런 상상력에서 출발한 소설이 <세일럼의 마녀와 사라진 책(원제:The Physick Book of Deliverance Dane)>이다. 실제 역사 학자이자 마녀사냥의 희생자였던 엘리자베스 호우의 후손인 작가 캐서린 호우는 세일럼의 마녀사냥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상상력을 가미해 소설을 썼다. 역사적 사실을 비틀고 소설적 상상력을 가미해 판타지와 미스테리를 넘나드는 다양한 재미를 한 권의 소설에 담아 내고 있다.

소설의 프롤로그에서 17세기 메사추세츠 주 마블헤드에서 죽어가는 딸을 지켜보는 피터 펫포드의 모습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다. 그리고 바로 300여년의 시대를 뛰어 넘어 하버드에서 박사과정 자격 시험을 치르는 주인공 코니의 모습으로 장면이 옮겨진다. 마치 영화의 서막처럼 역동적인 시작을 알리고, 이야기는 숨가쁘게 전개된다. 엄마의 부탁으로 학교 근처 마블헤드의 할머니 집을 정리하게 된 코니는 그 곳에서 딜리버런스 데인이라는 글이 쓰여진 양피지가 들어 있는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코니가 딜리버런스 데인에 대해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소설은 두 시대를 넘나들며 마녀재판의 진실에 접근해 가기 시작한다.

마녀재판을 받아 처형된 이가 실제로 마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뒤엎는 소설적 상상력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그 역사적 사실이 무엇이든 간에 역사를 각색한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현상들에 대해 인간이 부여한 의미들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에 대한 또 다른 진실에 닿게 된다. 역사학자인 작가가 마녀사냥에 대해 역사학적 시선이 아닌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써내려간 이 작품은 사실과 허구를 모두 비껴난 채 새로운 진실을 향해 손을 뻗고 있다. 마녀 재판이 열린 17세기 당대 뿐 아니라 합리적인 이성으로 사고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진실, 즉 마녀라는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같은 것에 대해서.

<세일럼의 마녀와 사라진 책>은 장르 문학다운 숨가쁘게 전개되는 스토리텔링과 긴장감은 물론이고, 뛰어난 글솜씨로 활자 읽는 맛까지 고루 갖추고 있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아우르고, 재미와 지적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켜 준다는 점에서 팩션이 매력적인 장르라고 생각한다면 이 소설은 그 매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식민지 시대의 미국 역사 일면을 공부할 수 있음은 물론, 연금술이나 주술 등 서구 사회에서 미결로 남아 있는 여러 미신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작가는 딜리버런스 데일이 살았던 17세기의 풍속들을 마치 그 곳에 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능숙하게 묘사하여 한층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탄탄한 구성과 스토리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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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의 지붕
마보드 세라지 지음, 민승남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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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사회의 거대한 흐름에서 한발짝 비껴 서 있는 제3세계 국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 신문 국제면에서 전쟁이나 불안한 사회정세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되곤 하지만 신문에서 알려주는 한 나라의 사회적 정세는 우리와 무관한 다른 세상의 일처럼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학 속에 묘사된 제 3세계의 모습은 다르다. 특수한 사회 문화적 환경을 생생하게 그리며 인류 보편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한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할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그들과 공통의 정서를 공유할 수 있어 좀 더 우리의 삶에 닿아있는 느낌이다. 실용주의자들이 넌픽션을 아무리 강조해도 인지적 측면과 정서적 측면을 모두 자극하는 이러한 문학의 효용에 비할 게 못 된다.

할레드 호세이니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국가에 대한 얼마간의 지식과 정서적 교감을 체험했던 독자라면 또 다른 이슬람 국가인 이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테헤란의 지붕>은 이란 출생의 미국 이민자인 작가 마보드 세라지가 쓴 소설이다. 국제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슬람 사회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 외에도 이란에서 보낸 작가 자신의 유년기 체험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할레드 호세이니의 작품들과 상당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테헤란의 지붕>은 독재와 억압으로 얼룩진 이란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성년기의 문턱에 있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젊은이들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투쟁을 그린 소설이다. 문학을 사랑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소년 파샤는 그의 친구 아메드와 사랑하는 여인 자리, 아메드의 연인 하피메와 함께 꿈같은 여름을 보낸다. 그러나 친미 왕조의 독재로 인해 어두운 사회 분위기는 파샤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던 '닥터'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들의 아름다운 여름은 끝난다. 소설은 암흑과도 같은 시대에 순수한 낭만을 꿈꾸었던 주인공이 비극에 맞딱뜨리며 소중한 것들을 지키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다.

소설에는 친미독재왕조의 억압으로 수많은 금기 속에 살아야 했던 젊은이들의 고뇌 속에서 사랑과 자유에 대한 눈부신 갈망이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외세의 간섭이나 독재, 이에 대항하는 지식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그리 낯선 모습은 아니다.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권력자와 피권력자가 빚어내는 갈등이라는 것이 시공을 초월하여 인류 보편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을 보면 페르시아의 이국의 모습이 더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소리 높여 항거하는 이들에게는 보복이 행해지고, 숨 죽여 숨어 지내는 이들에게는 굴종이 강요되던 시대. 그러나 이 소설은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도 비관과 좌절의 정서에 머물지 않고 시종 휴머니즘의 시선을 드러낸다.

<테헤란의 지붕>은 담고자 하는 이야기나 전달하려는 메시지 자체는 훌륭하지만, 작가의 처녀작인만큼 소설의 구성과 상징의 활용에 있어 약간의 미숙함이 느껴지기는 한다. 우선 긴장감이 떨어지는 미스테리 형식의 전개, 문학적 상징의 의미를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점이 아쉽다. 또 소설의 클라이맥스인 분신 장면의 서술에서도 긴장감이 다소 떨어지고, 너무 일찍 찾아온 클라이맥스 때문에 이후의 이야기는 많이 느슨해진 느낌이다. 클라이맥스 이후 마련해 놓은 최후의 반전도 너무 많은 실마리를 던져 놓는 바람에 의외성을 전혀 찾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그러나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테헤란의 지붕>가 거둔 큰 성과가 있다면 뭐니해도 이란의 현대사에 대한 이해와 이란 문화와 풍물에 대한 호기심을 이끌어 냈다는 점일 것이다. 테헤란의 풍경이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했고, 이란에 관한 여행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이란이 타이슬람 국가에 비해 여러 면에서 개방적인 나라임을 알게 되었으니소설의 영향력 치고는 대단하지 않은가? 오래 전 이미륵의 <압록강이 흐른다>가 독일에 번역되어 소개되면서 타국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했으리라. 이는 신문의 국제면도 하지 못하는 일이다. 오로지 문학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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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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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여류작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첫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처음 영화 시나리오로 구상된 것이었으나, 영화화 되기 어렵다는 주위의 권고에 의해 소설로 탄생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니까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소설이라는 장르를 최대한 활용했으리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작가는 활자만으로 미각을 자극하고 그 미각의 폭을 인생의 넓이로까지 확장시킨다.

소설은 일 년 열두 달이라는 구성 안에 특별한 요리를 하나씩 마련해 병렬적으로 배치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기승전결이 뚜렷한 스토리를 갖추고 있다. 세 자매의 막내인 티타는 막내딸은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가족 전통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 페드로를 언니 로사우라에게 빼앗긴다. 이야기는 이러한 비극적 상황에서 출발하여 좌절을 뛰어 넘는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요리를 통해 보여준다. 형부가 된 옛 연인과의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고 기뻐하고 좌절하는 티타의 모습이 티타가 만드는 음식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이 소설은 한 권의 요리 레시피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인공 티타가 기록한 요리 레시피의 형식을 갖춘 소설이다. 많은 이야기에서 요리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이타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오로지 자신의 미각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요리를 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티타 또한 마찬가지로 매번 특별한 요리를 만들어 낸다. 티타의 요리 속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티타가 느끼는 슬픔, 기쁨, 사랑, 환희 등 모든 감정들이 그녀가 만드는 요리를 통해 나타난다. 그 요리를 먹은 사람은 티타의 수많은 감정들을 공유하게 된다.

작가는 신데렐라에서 모티프를 따온 듯 인물이 파국을 맞이하는 방법에 있어서 명료한 권선징악의 장치를 사용한다. 전통적인 인습에 저항하는 독립적인 여성상인 티타를 비롯해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명쾌한 행복을 마련해 주었고, 전통적 인습에 얽매여 의존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마마 엘레나와 로사우라는 불행한 파국을 맞게 한다. 부엌이라는 공간이 주는 주체에 대한 자각과 재능의 발현이 티타의 다정다감한 본성과 맞물려 전통적인 권선징악 구조가 주는 통쾌함과 전근대성의 파괴라는 강한 목소리를 함께 드러내고 있다. 결국 요리는 단순한 재능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방식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인 것이다.

이 소설이 묘사하는 요리는 인생과 사랑에 대한 은유다. 그들은 마치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초콜릿의 맛과 닮았다.(이 소설의 제목인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역자의 의도일 뿐이지만 제법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작가는 요리라는 특별한 소재를 마음껏 주물러 미감을 자극하는가 싶더니 곧 이를 통해 인생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하나의 레시피가 성과 사랑, 인생의 문제로 확장되는 과정은 자연스러우면서 심오하다.

'환상성'과 '마술적 리얼리즘'을 특징으로 하는 남미문학은 생소하지만 특유의 능청스러움과 유머를 가득 담고 있다.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남미문학의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마르케스의 작품을 보는 듯한 환상성이 작품 전반에 나타난다. 티타 가족의 불합리한 전통의 연원은 무엇인지,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은 어떠한 지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환상적 기법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려버린다.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 상상의 세계를 떠돌게 하는 마법같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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