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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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알림 신청을 해 놓고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거장의 깊이와 장르소설적 재미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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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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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서의 소설의 본질에 충실한 책.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인물들로 인해 전통과 현대적 정서가 함께 드러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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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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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울리는 이야기들이 있다. 단지 이야기의 전달 수단으로서의 글이 아니라, 글이라는 재료를 잘 닦고 문지르고 가다듬어, 마치 빼어난 용모를 자랑하는 관상용 소품처럼 활자만 바라봐도 흐뭇해지게 하는 작품 말이다. 정확하게는 의미를 되새기기도 전, 활자가 시신경과 만나는 찰나의 울림이 큰 소설을 말하는데 내게는 김연수의 소설들이 그렇다. 이런 소설들은 시간의 연속 선상에 놓인 장면들을 따라가지 않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정서적 감응을 이끌어낸다. 미장센이 제거된 스토리텔링에 아름다움을 첨가하는 다양한 시도는, 말하자면 텍스트의 이점을 최대한 살린 글쓰기의 전범인 셈이다. 가령 영화 제작자가 소설을 검토하다가 "이런 건 표현할 수 없어"라며 내던져버릴 소설이 있다면, 그것은 역으로 소설이 소설로 밖에 존재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소설이라는 말이 된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매체로서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활자가 그 자체로 빛이 나는 것은, 어떤 의미로 현대 소설이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성취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자의 농담(濃淡), 여백의 활용, 활자들의 배열 방식, 이미지의 삽입과 같은 노골적인 시각적 효과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원더보이>는 충분히 매력적인 텍스트로 존재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우주의 물리적 법칙들을 망각해 버린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단순한 인과법칙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우주의 비밀에 다가가려는 소년의 내면에 집중할 것을 처음부터 요구한다. 역설과 모순형용으로 가득 찬 소제목들은 우주의 정지와는 전혀 관계 없는 소년의 시끄러운 내면의 모습이며, 그것은 활자 자체에 가해진 다양한 기법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진다. 시간을 멈추고,염력을 발휘하게 되고, 타인의 생각을 듣게 되는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들이 벌어지는 동안, 우리가 받아들여 왔던 세계의 질서는 파편적으로 흩어진 활자처럼 깨어진다. 홀로 남은 정훈은 부조리한 세상을 온 몸으로 겪는다.

 

그래서 <원더보이>는 일견 초능력을 갖게 된 한 소년이 부조리한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까지 비현실적으로 '원더러스'한 이야기는 아니다. 작가는 시종일관 불합리한 '전체'에 놓여진 한 '개인'의 내면을 좇는다. 그리하여 소설은 분노와 투쟁보다 외로움과 슬픔에 더 근접해 있다. 대개 외로움과 슬픔의 근원은 상실로부터다. 특히 부모를 잃는 경험은 일생에 걸쳐 개인에게 닥칠 수 있는 가장 큰 시련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크나큰 상실의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많은 성장 소설에서 성장의 동력으로 나타난다. 이 소설이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오스카가 그랬고, 죽은 아빠의 스웨터를 42일 내내 입고 다니던 <사랑의 역사(니콜 크라우스)>의 알마가 그랬고, 또 신화가 사라진 처용포에서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는 <꽃피는 고래(김형경)>의 니은이 그랬다.소중한 것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그것들은 소중하지만 평소에는 잊고 살기 쉬운 그 무엇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것은 내면의 보호막이 걷혔을 때 최초로 대면하게 되는 무방비 상태의 자아일 것이다.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보호막이 없어진 자리에 각자는 자신만의 껍질을 새로 입히게 된다. 상실로 인해 생긴 구멍은 딱 그 빈 자리만큼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중심으로 무한히 커진다. 상실의 아픔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내면은 더욱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화전 같은 것이다. 잡목과 들풀이 태워진 자리에 새로운 밭을 일구듯이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는 것은 단순한 치유 그 이상의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소설에서도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은 정훈이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홀로 병원에서 깨어나는 부분이다. '원더보이' 정훈에게는 아버지가 사라져 간 빈 자리에 놀랍게도 초능력이 깃든다. 상대방이 말하지 않아도 그 생각이 들리기 시작하고 그 감정들이 읽히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 또한 타인에게 여과없이 전해진다. 감정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경계 없는 왕성한 소통이 시작된 것이다. 작가는 이 순간을 '시간이 멈추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화전을 모두 불태우고 새로운 작물이 수확되기를 기다리는 시간, 즉 성장의 도움닫기가 시작된 것이다. 아빠에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속죄의식의 발로인 것처럼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전할 수 있고, 듣지 않아도 느끼게 되는 정훈에게 물리적 시간의 정지는 10광년 이상 떨어진 별빛이 지구에 닿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벌어준다.

 

시간의 정지와는 별개로 초능력자의 신분으로 80년대를 견뎌내야 했던 정훈의 처지는 꽤나 힘겹다. 정훈의 초능력은 국가에 대한 봉사수단으로 사용되기를 강요받지만 실상은 유리 겔러의 염력과 같은 눈요기감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이해하고 있다. 사실 상대방의 생각을 읽고 기분을 이해하는 것 따위가 무슨 초능력이란 말인가? 그것이 초능력일 수 있는 까닭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 조차 억압받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능력을 초능력으로 치부하는 이 절묘한 비틀기는, 당대의 사회상을 우회해서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다. 권대령이 맹신하는 국가 체계 안에서는 개인의 죽음조차도 개별적인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개인은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전체 속의 개별성이 억압받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정훈의 자아 찾기는 어쩌면 광활한 우주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개체로서의 존재의미를 찾아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훈이 홀로 남겨져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근원적인 고독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별적으로 존재하기에 타인과의 소통과 관계맺기가 중요하다는 것의 반증이다. 정훈에게 깃든 초능력은 상대의 감정에 감응하고 이해하고 나누려는 노력이다. 그것이 광활한 우주에 나홀로 존재하는 이유이자 흔적이 된다.


 개인의 성장은 하나의 무리 속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광활한 우주에서 하나의 개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가, 없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특별한 것을 뜻한다는 논리로 전환되는 과정에는 개별성에 대한 이해와 여기에서 비롯되는 '레종 데트르(Raison d'etre)'의 발견이 있다. <원더보이>는 메타포가 넘쳐나는 소설이다. 그래서 모순과 거짓으로 가득찬 사회에서 진실된 삶의 이미 찾기를 시도하는 소년의 협소한 이야기이기보다 오히려 우주의 비밀에 닿기 위한 한 소년의 여정으로 읽히기를 요구한다. '누군가의 슬픔 때문에 내가 운다면 그건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걸' 깨닫는 순간 정훈은 한 뼘 성장한다. 이것이 정훈이 발견한 우주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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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1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원더보이>를 읽고있는데, 제게는 아직 너무 힘든 소설입니다.
김연수의 문장이 너무나 아름답고, 텍스트, 아니 문단의 틀을 벗어난 글들에 참 많이 감동하고 있지만 의미 파악이 너무 힘들어요. 이것이 과연 소년의 내면을 파악하는, 좇는 글인지, 그저 재미만 주려 쓴 글인지에 대한 개념부터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깐짜나부리 2012-04-12 13:17   좋아요 0 | URL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더이상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특히나 김연수의 소설처럼 다양한 은유가 포함된 작품은 독자의 역할이 보다 크겠죠?

백운호 2012-05-3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이 소설 다 읽고 마땅히 표현할 방도를 찾지 못해 리뷰 쓰는 걸 포기하고 있었는데, 정말 명쾌하게 풀어내셨네요. 사유의 내공에 감탄하고 갑니다.
 
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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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를 많이 읽으면 사필귀정에 대한 신념이 생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이 세계가 우리의 생각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는 것이다. 통제불가능성에 대한 고려 없는 맹목적인 신념은 종종 사람들을 그릇된 판단으로 이끈다. 우리의 운명이 예측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답을 내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관한 첫 번째 기억은 나의 오랜 신념과 세계의 진실이 충돌하는 시점으로 되돌아 간다. 참되고 성실한 인물이 고난과 역경에 맞닥뜨리고 마침내는 패배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그간 구축해 온 인과응보의 세계관이 무너져 내리는 최초의 경험이었으며, 확고한 신념이 무너진 대신 복잡한 운명에 대처하는 방향성을 찾아냈다는 것이 그 대가였을 것이다.

 

세계의 역동성과 운명의 예측불가능성을 최초로 각인시켰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노인과 바다>의 플롯은 단조롭다. 84일 동안이나 고기를 잡지 못한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치열한 사투 끝에 몸 길이가 5.5 미터 가량 되는 거대한 청새치를 낚게 되나, 상어의 습격으로 살점을 모두 뜯기고 뼈만 남은 물고기를 매단 채 해변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스토리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한 특별한 기교 없이 순행적으로 구성되었으며 현란한 수사 조차 없다. 많은 인물들이 어우러져 복합적인 갈등을 만들어 내지도 않는다. 소설은 처음과 끝 부분을 제외하고는 하늘의 푸름과 바다의 푸름이 만나는 접점 어디쯤에 일개 점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작은 배와 노인의 이미지로만 채워져 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놀랍게도 망망대해 위에 사람 하나, 배 하나, 청새치 하나를 두고 그 안에 인생을 통째로 담아내고 있다.

 

해도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 노인은 홀로 배에 오른다. 해안선은 눈부신 섬광으로, 한 줄기 초록색 선으로 시시각각 변해가고 그 초록색 선마저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오면 노인은 홀로 고독한 항해를 시작한다. 배에는 무료함을 달래줄 라디오도, 허기를 달래줄 먹을 것도, 노인을 도울 수 있는 소년도 없다. 노인은 고독에 맞서 스스로를 위무하고 미끼용 생선으로 허기를 달랜다. 노인은 왼손에 쥐가 나고 줄이 쓸려 상처를 입고 억지로 선잠을 자 두어야 하는 항해의 고비마다 줄곧 소년의 부재를 아쉬워 하지만 오랜 연륜에서 오는 지혜는 홀로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넉넉한 힘을 준다. 노인은 이 한 번의 항해에서 영광의 순간도 쇠락의 순간도 온전히 홀로 맞이한다. 소년의 부재, 즉 노인의 절대 고독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은 자신의 몫일 수 밖에 없다는 인생의 자명한 원칙을 상기시킨다. 

 

노인은 바다라는 운명에 끊임없이 도전한다. 84일 동안 고기를 낚지 못했음에도 항해를 멈추지 않고, 고통스럽고 지쳐도 청새치를 낚은 줄을 놓지 않는다. 고기를 잡은 후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마지막 살점이 모두 뜯겨나갈 때까지 상어에 맞서 싸운다. 배가 해안선에서 멀어질수록 노인은 찬란한 영광에 가까이 다가가고, 다시 해안으로 다가갈수록 그 영광의 기운은 쇠퇴한다. 마침내 노인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빈 손으로 해안에 당도한다. 노인의 항해에는 삶의 희로애락과 인생역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록 아무 것도 바뀌지 않고 가혹한 투쟁으로 인해 고통과 회한만 남을지라도 도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희망을 품을 일도 없다면 그것을 이루고 지키기 위한 노력 또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빈 손으로 출항하고 돌아올 때도 빈 손이었지만 노인의 항해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청새치의 뼈와 대가리는 고스란히 남아 노인의 치열한 사투를 증명해주고 있다. 오두막에 누워 뉴욕 양키즈 경기 소식이 실린 신문을 뒤적거리기만 했다면 달콤한 잠과 사자꿈은 노인의 몫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전생애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분투한다. 그렇게 무언가를 이루고 나면 다음에는 그것을 지키는 일이 남아 있다. 결국 인생은 위대한 도전과 투쟁의 연속인 것이다. 인생에 무의미한 순간은 없다. 실패의 순간조차 인생의 어느 부분에 자취를 남기기 마련이다.

 

노인의 항해가 인생에 대한 우의라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면, 노인 산티아고는 그 인생에 대처하는 개별적인 개체로 그만의 개성을 보여준다. 고된 항해가 끝난 뒤 노인은 그의 영광을 증명해 줄 유일한 전리품인 청새치의 뼈와 대가리를 뒤로하고 지친 몸을 누일 침대를 향해 곧장 나아간다. 그는 지나간 과거의 흔적보다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앞만 바라보고 나아간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뒤에도 사자꿈을 꿀 수 있는 낙천성은 산티아고의 위대함이다. 그는 84일 동안 고기를 낚지 못해도 절망하는 대신 '85는 행운의 숫자'라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역겨운 만새기를 먹어야 할 때도 고기보다 나은 처지라고 위안하는가 하면,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사람들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중얼거린다. 노인은 시련과 역경을 담담히 맞이하고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힘든 난관 뒤에는 반드시 행운이 기다리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낙천성은 조화와 순응의 태도에서 나온다. 평생을 바다와 함께해온 노인에게 바다는 경쟁과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보살피고 어루만져야하는 동지이다. 노인은 바다가 가져다 주는 불운과 행운, 역경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그의 이런 태도는 심지어 치열한 사투의 대상인 청새치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노인은 물고기를 죽이는 순간에도 물고기가 휼륭하고 고상한 존재임을 찬탄한다. 비록 낚시줄 하나를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맞서야 하지만 그 조차도 바다가 가져다 주는 운명의 일부인 것이다. 상어들에게 살점을 물어뜯긴 청새치를 외면하는 모습에서 노인은 청새치와 완벽한 일치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상어를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는다. 상어가 가져다 주는 시련조차 운명의 일부인 것처럼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노인은 운명을 수용하면서 시련을 외면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맞선다.

 

<노인과 바다>는 삶에 대한 장엄한 우화이면서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숭고한 지침이다. 이 단순한 모노드라마가 담고 있는 인생은 노인과 바다, 청새치와 상어가 우의하는 바에 따라 매우 다층적으로 읽히지만 운명에 대항하는 노인의 태도가 보여주는 위대한 낙관주의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역동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위대함은 능동성과 낙천성에서 나온다.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노인과 바다>는 비교적 간명한 해답을 내어 놓지만 그 치열한 사투 이면에 숨은 인간 정신의 정수는 오랫동안 깊이 있는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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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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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뉴욕 거리를 떠돌던 홀든은 문득 영원히 길 건너편에 당도할 수 없을 것 같은 질식을 느낀다. 그 질식은 방황의 끝이 아닌 또 다른 방황의 시작을 알린다. 방황은 절망이면서 그것을 멈출 수 없게 하는 깊은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셀린저는 이 책으로 일탈과 순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전복시킴으로써 큰 반향을 몰고 왔다. 김영하의 신작 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소년들의 이야기이면서, 평범한 소년들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면서, 또 모든 소년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소설의 두 주인공 제이와 동규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진 인물로 강한 개별성을 띠는 동시에 사회적 전형성을 강하게 드러낸다.이 책은 냉소와 거짓으로 가득찬 사회를 향한 두 소년의 절망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홀든 콜필드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소년들의 의식에는 방향성이 없다. 두 소년의 행위 전반에는 어떠한 동기도 없고 목적도 없다. 오로지 운명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제이의 운명은 혼잡한 고속버스터미널의 화장실에서 어린 엄마의 자궁을 박차고 나와 첫 울음을 울었던 순간부터 예견되어 있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나약한 존재에게 있어 그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면 어떤 방향이든 흘러가는대로 운명을 내맡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제이는 동규의 다세대 주택으로 운명처럼 흘러 들어온다. 동갑내기 두 소년의 유년은 그들의 비밀 아지트만큼이나 평화롭다. 선택적 함구증에 걸려 말을 못하는 동규와 그런 그를 유일하게 이해하는 제이 사이의 특별한 유대는 동규가 말문을 트고 일반학교에 진학하게 될 때까지 계속된다.

 

동화 같은 유년이 흘러간 뒤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야 했던 두 소년의 진정한 재회는 거리에서 시작된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최초로 세상에 내던져졌던 제이는 바로 그 고속버스터미널을 거쳐 거리로 내던져진다. 그는 미성숙하지만 순수한 눈으로 교감하던 유년과 같이 마음이 시키는대로 거리 곳곳을 떠돈다. 홀든과 비교하면 제이의 방황에는 출구 자체가 없어보인다. 제이에게 자신의 삶의 방식은 타락이나 방황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당연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이의 일탈은 동정과 연민을 필요치 않는다. 소설은 거리의 삶을 밑바닥까지도 털어내 보여주면서도 허무와 절망의 여지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데, 이는 운명처럼 그를 잡아 끈 목소리가 메시아적 구원을 암시하는 까닭이다. 소설 전반에 걸쳐 노숙, 남녀혼숙, 폭주족 등의 거리의 어두운 일면이 르포르타주처럼 생생하게 펼쳐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수께끼같은 제이의 기행에 대한 질문은 소설적 긴장을 끝까지 유지해준다.

 

동규는 제이에 비해 수동적이며 의존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동규의 방황은 메시아적 구원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를 거리로 내몬 것은 제이의 존재 그 하나 밖에는 없다. 어린시절 함구증을 앓던 그가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었던 대상으로서 제이를 소년 동규는 끝없이 갈구한다. 동규는 예나 지금이나 '소통'에 실패한 상태다. 그의 함구증은 나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규에게는 제이의 존재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다소 신격화된 제이보다는 인간적 고민을 떠안은 동규가 소설 속 진실에 더욱 근접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제이는 실존하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 제이의 행위는 전지적 서술자나 작품 속 관찰자에 의해서만 서술된다. 때로는 그의 행적에 대한 신빙성을 의심해도 좋을 증언도 나타난다. 제이의 흔적은 여기저기서 이어붙인 증언들의 총합으로만 존재한다. 이쯤되면 '제이가 바로 저'라는 동규의 고백처럼, 동규가 유일하게 소통가능했던 존재인 제이는 어쩌면 동규 그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제이의 존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규의 분리된 또 다른 자아였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마술사에 대한 인상적인 우화로 시작한다. 모든 것이 속임수인 세상에서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남겨진 마술사의 조수는 진실을 증명할 힘이 없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마술처럼, 눈을 현혹시켜 놓고 사라져버린 마술사처럼 제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남겨진 동규는 그 환상에 의해 희생되어 버린다. 폭주족에 대해 양가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박승태가 '존재와 정신이 각기 다른 장소에 놓인' 상태였다면 동규는 다른 장소에 놓인 존재와 정신이 각각 다른 육체를 통해 발현되고 있다. 말하자면 제이는 동규의 정신을 투영한 분신인 셈이다. 그 분신이 끝내 산화하는 순간 동규는 영원한 함구의 세계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정에 관한 이야기인가 했다가, 성장에 관한 이야기인가 했다가, 사회 고발의 르포 소설인가 싶더니, 메시아적 이미지로 달려 가는 이 소설은 결국 소통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운명처럼 어떤 목소리를 듣고 그것이 시키는대로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소년과 처음부터 세상과 소통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소년은 결국 차례차례 사라져 간다. 그들의 세상을 향한 마지막 소통의 몸짓이던 광복절 대폭주는 끝내 소통에 실패한 소년들의 비애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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