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뉴욕 거리를 떠돌던 홀든은 문득 영원히 길 건너편에 당도할 수 없을 것 같은 질식을 느낀다. 그 질식은 방황의 끝이 아닌 또 다른 방황의 시작을 알린다. 방황은 절망이면서 그것을 멈출 수 없게 하는 깊은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셀린저는 이 책으로 일탈과 순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전복시킴으로써 큰 반향을 몰고 왔다. 김영하의 신작 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소년들의 이야기이면서, 평범한 소년들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면서, 또 모든 소년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소설의 두 주인공 제이와 동규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진 인물로 강한 개별성을 띠는 동시에 사회적 전형성을 강하게 드러낸다.이 책은 냉소와 거짓으로 가득찬 사회를 향한 두 소년의 절망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홀든 콜필드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소년들의 의식에는 방향성이 없다. 두 소년의 행위 전반에는 어떠한 동기도 없고 목적도 없다. 오로지 운명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제이의 운명은 혼잡한 고속버스터미널의 화장실에서 어린 엄마의 자궁을 박차고 나와 첫 울음을 울었던 순간부터 예견되어 있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나약한 존재에게 있어 그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면 어떤 방향이든 흘러가는대로 운명을 내맡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제이는 동규의 다세대 주택으로 운명처럼 흘러 들어온다. 동갑내기 두 소년의 유년은 그들의 비밀 아지트만큼이나 평화롭다. 선택적 함구증에 걸려 말을 못하는 동규와 그런 그를 유일하게 이해하는 제이 사이의 특별한 유대는 동규가 말문을 트고 일반학교에 진학하게 될 때까지 계속된다.

 

동화 같은 유년이 흘러간 뒤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야 했던 두 소년의 진정한 재회는 거리에서 시작된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최초로 세상에 내던져졌던 제이는 바로 그 고속버스터미널을 거쳐 거리로 내던져진다. 그는 미성숙하지만 순수한 눈으로 교감하던 유년과 같이 마음이 시키는대로 거리 곳곳을 떠돈다. 홀든과 비교하면 제이의 방황에는 출구 자체가 없어보인다. 제이에게 자신의 삶의 방식은 타락이나 방황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당연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이의 일탈은 동정과 연민을 필요치 않는다. 소설은 거리의 삶을 밑바닥까지도 털어내 보여주면서도 허무와 절망의 여지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데, 이는 운명처럼 그를 잡아 끈 목소리가 메시아적 구원을 암시하는 까닭이다. 소설 전반에 걸쳐 노숙, 남녀혼숙, 폭주족 등의 거리의 어두운 일면이 르포르타주처럼 생생하게 펼쳐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수께끼같은 제이의 기행에 대한 질문은 소설적 긴장을 끝까지 유지해준다.

 

동규는 제이에 비해 수동적이며 의존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동규의 방황은 메시아적 구원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를 거리로 내몬 것은 제이의 존재 그 하나 밖에는 없다. 어린시절 함구증을 앓던 그가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었던 대상으로서 제이를 소년 동규는 끝없이 갈구한다. 동규는 예나 지금이나 '소통'에 실패한 상태다. 그의 함구증은 나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규에게는 제이의 존재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다소 신격화된 제이보다는 인간적 고민을 떠안은 동규가 소설 속 진실에 더욱 근접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제이는 실존하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 제이의 행위는 전지적 서술자나 작품 속 관찰자에 의해서만 서술된다. 때로는 그의 행적에 대한 신빙성을 의심해도 좋을 증언도 나타난다. 제이의 흔적은 여기저기서 이어붙인 증언들의 총합으로만 존재한다. 이쯤되면 '제이가 바로 저'라는 동규의 고백처럼, 동규가 유일하게 소통가능했던 존재인 제이는 어쩌면 동규 그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제이의 존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규의 분리된 또 다른 자아였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마술사에 대한 인상적인 우화로 시작한다. 모든 것이 속임수인 세상에서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남겨진 마술사의 조수는 진실을 증명할 힘이 없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마술처럼, 눈을 현혹시켜 놓고 사라져버린 마술사처럼 제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남겨진 동규는 그 환상에 의해 희생되어 버린다. 폭주족에 대해 양가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박승태가 '존재와 정신이 각기 다른 장소에 놓인' 상태였다면 동규는 다른 장소에 놓인 존재와 정신이 각각 다른 육체를 통해 발현되고 있다. 말하자면 제이는 동규의 정신을 투영한 분신인 셈이다. 그 분신이 끝내 산화하는 순간 동규는 영원한 함구의 세계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정에 관한 이야기인가 했다가, 성장에 관한 이야기인가 했다가, 사회 고발의 르포 소설인가 싶더니, 메시아적 이미지로 달려 가는 이 소설은 결국 소통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운명처럼 어떤 목소리를 듣고 그것이 시키는대로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소년과 처음부터 세상과 소통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소년은 결국 차례차례 사라져 간다. 그들의 세상을 향한 마지막 소통의 몸짓이던 광복절 대폭주는 끝내 소통에 실패한 소년들의 비애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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