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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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를 많이 읽으면 사필귀정에 대한 신념이 생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이 세계가 우리의 생각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는 것이다. 통제불가능성에 대한 고려 없는 맹목적인 신념은 종종 사람들을 그릇된 판단으로 이끈다. 우리의 운명이 예측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답을 내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관한 첫 번째 기억은 나의 오랜 신념과 세계의 진실이 충돌하는 시점으로 되돌아 간다. 참되고 성실한 인물이 고난과 역경에 맞닥뜨리고 마침내는 패배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그간 구축해 온 인과응보의 세계관이 무너져 내리는 최초의 경험이었으며, 확고한 신념이 무너진 대신 복잡한 운명에 대처하는 방향성을 찾아냈다는 것이 그 대가였을 것이다.

 

세계의 역동성과 운명의 예측불가능성을 최초로 각인시켰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노인과 바다>의 플롯은 단조롭다. 84일 동안이나 고기를 잡지 못한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치열한 사투 끝에 몸 길이가 5.5 미터 가량 되는 거대한 청새치를 낚게 되나, 상어의 습격으로 살점을 모두 뜯기고 뼈만 남은 물고기를 매단 채 해변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스토리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한 특별한 기교 없이 순행적으로 구성되었으며 현란한 수사 조차 없다. 많은 인물들이 어우러져 복합적인 갈등을 만들어 내지도 않는다. 소설은 처음과 끝 부분을 제외하고는 하늘의 푸름과 바다의 푸름이 만나는 접점 어디쯤에 일개 점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작은 배와 노인의 이미지로만 채워져 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놀랍게도 망망대해 위에 사람 하나, 배 하나, 청새치 하나를 두고 그 안에 인생을 통째로 담아내고 있다.

 

해도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 노인은 홀로 배에 오른다. 해안선은 눈부신 섬광으로, 한 줄기 초록색 선으로 시시각각 변해가고 그 초록색 선마저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오면 노인은 홀로 고독한 항해를 시작한다. 배에는 무료함을 달래줄 라디오도, 허기를 달래줄 먹을 것도, 노인을 도울 수 있는 소년도 없다. 노인은 고독에 맞서 스스로를 위무하고 미끼용 생선으로 허기를 달랜다. 노인은 왼손에 쥐가 나고 줄이 쓸려 상처를 입고 억지로 선잠을 자 두어야 하는 항해의 고비마다 줄곧 소년의 부재를 아쉬워 하지만 오랜 연륜에서 오는 지혜는 홀로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넉넉한 힘을 준다. 노인은 이 한 번의 항해에서 영광의 순간도 쇠락의 순간도 온전히 홀로 맞이한다. 소년의 부재, 즉 노인의 절대 고독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은 자신의 몫일 수 밖에 없다는 인생의 자명한 원칙을 상기시킨다. 

 

노인은 바다라는 운명에 끊임없이 도전한다. 84일 동안 고기를 낚지 못했음에도 항해를 멈추지 않고, 고통스럽고 지쳐도 청새치를 낚은 줄을 놓지 않는다. 고기를 잡은 후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마지막 살점이 모두 뜯겨나갈 때까지 상어에 맞서 싸운다. 배가 해안선에서 멀어질수록 노인은 찬란한 영광에 가까이 다가가고, 다시 해안으로 다가갈수록 그 영광의 기운은 쇠퇴한다. 마침내 노인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빈 손으로 해안에 당도한다. 노인의 항해에는 삶의 희로애락과 인생역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록 아무 것도 바뀌지 않고 가혹한 투쟁으로 인해 고통과 회한만 남을지라도 도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희망을 품을 일도 없다면 그것을 이루고 지키기 위한 노력 또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빈 손으로 출항하고 돌아올 때도 빈 손이었지만 노인의 항해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청새치의 뼈와 대가리는 고스란히 남아 노인의 치열한 사투를 증명해주고 있다. 오두막에 누워 뉴욕 양키즈 경기 소식이 실린 신문을 뒤적거리기만 했다면 달콤한 잠과 사자꿈은 노인의 몫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전생애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분투한다. 그렇게 무언가를 이루고 나면 다음에는 그것을 지키는 일이 남아 있다. 결국 인생은 위대한 도전과 투쟁의 연속인 것이다. 인생에 무의미한 순간은 없다. 실패의 순간조차 인생의 어느 부분에 자취를 남기기 마련이다.

 

노인의 항해가 인생에 대한 우의라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면, 노인 산티아고는 그 인생에 대처하는 개별적인 개체로 그만의 개성을 보여준다. 고된 항해가 끝난 뒤 노인은 그의 영광을 증명해 줄 유일한 전리품인 청새치의 뼈와 대가리를 뒤로하고 지친 몸을 누일 침대를 향해 곧장 나아간다. 그는 지나간 과거의 흔적보다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앞만 바라보고 나아간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뒤에도 사자꿈을 꿀 수 있는 낙천성은 산티아고의 위대함이다. 그는 84일 동안 고기를 낚지 못해도 절망하는 대신 '85는 행운의 숫자'라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역겨운 만새기를 먹어야 할 때도 고기보다 나은 처지라고 위안하는가 하면,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사람들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중얼거린다. 노인은 시련과 역경을 담담히 맞이하고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힘든 난관 뒤에는 반드시 행운이 기다리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낙천성은 조화와 순응의 태도에서 나온다. 평생을 바다와 함께해온 노인에게 바다는 경쟁과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보살피고 어루만져야하는 동지이다. 노인은 바다가 가져다 주는 불운과 행운, 역경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그의 이런 태도는 심지어 치열한 사투의 대상인 청새치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노인은 물고기를 죽이는 순간에도 물고기가 휼륭하고 고상한 존재임을 찬탄한다. 비록 낚시줄 하나를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맞서야 하지만 그 조차도 바다가 가져다 주는 운명의 일부인 것이다. 상어들에게 살점을 물어뜯긴 청새치를 외면하는 모습에서 노인은 청새치와 완벽한 일치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상어를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는다. 상어가 가져다 주는 시련조차 운명의 일부인 것처럼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노인은 운명을 수용하면서 시련을 외면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맞선다.

 

<노인과 바다>는 삶에 대한 장엄한 우화이면서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숭고한 지침이다. 이 단순한 모노드라마가 담고 있는 인생은 노인과 바다, 청새치와 상어가 우의하는 바에 따라 매우 다층적으로 읽히지만 운명에 대항하는 노인의 태도가 보여주는 위대한 낙관주의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역동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위대함은 능동성과 낙천성에서 나온다.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노인과 바다>는 비교적 간명한 해답을 내어 놓지만 그 치열한 사투 이면에 숨은 인간 정신의 정수는 오랫동안 깊이 있는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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