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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티드 맨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1-1 ㅣ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1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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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레바논을 공습해서 주민들의 혼을 빼놓았을 때에도 우리 독일인들은 불안한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한 끝에 씩씩하고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방어대책에 관해서만 떠들어댔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방어를 위해 우리의 씩씩한 청년들에게 군복을 입혀 레바논으로 보냈다. 레바논 사람들이나 다른 아랍인들이 보기에는 부시나 블레어 같은 용감한 세계 지도자들의 허락과 격려를 받으며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깡패 녀석을 우리가 보호하겠다고 서둘러 나선 꼴이었을 테니 곱게 보이지 않겠지.(p.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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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티드 맨>에 등장하는 독일 정보국직원 귄터 바흐만의 입에서 튀어나온 불만은 작가 존 르 까레의 육성이나 다름없다. 국가 정보기간의 비열한 이면을 폭로하곤 했던 그의 작품은 단순한 스파이물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는 권력기관에 대한 혐오와 허울뿐인 외교정책에 대한 냉소와 무섭게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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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이 말을 하면서 갑작스레 화를 분출하는 모습은 바흐만이 조금 전부터 짐작하던 것이 사실임을 확인해주었다. 그는 비록 지금 자기들 두 사람이 은쟁반에 놓인 훌륭한 도자기 잔으로 영국 차를 마시며 집에서 직접 만든 스코틀랜드 식 쇼트케이크를 맛있게 먹고 있고, 차를 거르는 도구와 우유가 담긴 물병과 끓인 물이 담긴 주전자가 모두 고급스러운 은식기이지만, 그녀의 말투에 가끔씩 배어 있는 분노의 불길에는 아주 깊은 뿌리가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다.(p.2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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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국 직원인 귄터 바흐만이 동료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이 장면은 마치 르 까레 작품의 특징을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인물의 분노를 드러내는 이 장면은 참으로 우아하고 고상하다. 르 까레의 작품이 여느 스파이 소설과는 달리 문학적 향기가 넘친다. <원티드 맨>도 예외는 아니다. 작가의 타고난 우아함과 교양은 작품 곳곳에 스며있다.
르 까레는 분노와 냉소를 늘 점잖고 고급스럽게 표출한다. 그렇다고 비판의 날이 결코 무디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선동적인 문구나 논리적인 연설보다 통렬하다. 희생당하는 소수를 보듬고 안쓰러워하는 따스한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즉 르 까레의 스파이 소설에는 사람이 있다.
분노와 냉소로 가득 차 있지만, 점잖고 우아하게 드러내며, 무고하게 희생당하는 사람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 스파이 소설, 그것이 바로 르 까레의 소설이고, <원티드 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