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을 좋아합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문예지죠. 그런데 성인(실상은 나이 먹은 꼰대!!)인 제가 봐도 재미있습니다. 간간이 실린 청소년들의 글솜씨를 엿보는 것도 재미있고요. 골치 아픈 문예지는 곁에 있어도 후루룩 넘겨보고는 끝. 반면 <풋> 아기자기한 기획기사와 글들을 찬찬히 살펴보곤 합니다. 철없는 어른이~ㅎ.
<은교>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칠십줄의 시인이 열일곱 소녀 은교에게 사랑을 느끼고, 더 나아가 ‘온몸’으로 사랑하고픈 욕망을 그린 작품이죠. 한마디로 작가의 로망(혹은 욕망)을 소설로 풀어낸 작품인데..., 좀 불만스러운 대목이 있기는 하지만 딴죽을 걸 맘은 전혀 없습니다. 작가의 원숙한 ‘글빨’이 잘 드러나기도 했거니와, 어차피 욕망이 빚어낸 관념이고, 소설이잖아요.
<풋> 2010년 봄 16호에 <은교>의 작가 박범신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이 인터뷰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작가의 생생한 육성으로 <은교>의 집필에 관한 뒷이야기와 생각들을 들려주더군요. 그 중에는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작가를 이해하고, 작품을 이해하고, 글쓰기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좋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역시 훌륭한 작가는 인터뷰도 잘합니다.
개인적으로 <풋>에 실린 작가의 인터뷰를 먼저 읽었습니다. 좋은 인터뷰 덕분에 박범신이라는 작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은교>를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문제는 <은교>는 청소년들이 읽어볼 만한 작품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은교>라는 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걸 마음은 없습니다. 문제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문예지에 하필 <은교>에 관한 인터뷰를 실었어야 하는 거죠. 인터뷰 내용을 보면 “내 안에 욕망이 너무나 눈물겹게 불타고 있다” 뭐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인터뷰 내용을 살펴보면 작품에 관한 작가의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발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터뷰에서 만났을 때와, <은교>라는 소설로 형상화된 것을 직접 읽었을 때는 그 느낌이 달랐습니다.
<은교>라는 작품은 작가의 젊음에 대한 동경, 열망을 소설로 배설한 작품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나이 먹은 작가의 마스터베이션같은 작품입니다.(과한 표현 죄송~^^;:)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은교’라는 십대 여자아이는 실체가 없어요. 도무지 캐릭터가 잡히지 않아요. 관념이죠. 작품 자체가 욕망이 빚어낸 관념 덩어리입니다. 이런 소설을 십대 혹은 이십대 독자들이 읽고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관념의 산물 은교를 이해하라고요? 아니면 욕망이 분출된 흔적들을 공감하라고요? 아니면 늙어가는 불쌍한 남자들을 이해하라고요? 이건 저 같은 꼰대의 몫인 거 같습니다.
페이퍼를 잘 쓰지 않습니다. 게을러서 읽은 책들의 독서일기도 제때 쓰지 못하는 걸요. 그런데 워낙 좋아하는 잡지의 신중하지 못한 처사가 뒤늦게 눈에 거슬려 끼적거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