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코의 죽음 - An Inspector Morse Mystery 4
콜린 덱스터 지음, 장정선.이정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스티븐 킹은 대중소설 작가임을 망각하지 않는 작가입니다. 그런데 한 단편집 후기에서 문학적 상피성이 자기를 늘 괴롭힌다고 고백한 적 있습니다. 실제로 스티븐 킹의 작품은 종종 보편적인 대중소설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그의 몇몇 단편과 중편은 정말로 뛰어납니다. 그는 대중소설을 쓰는 작가치고는 꽤 쓰는 편이 아니라,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갖고 있는 정말로 잘 쓰는 작가이도 합니다. 그런데 그의 문학적 상피성 속에 감춰진 ‘싸구려 상상력’과 ‘B급 정서’가 그를 자꾸 제자리(?)로 끌어내는 거죠. 그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쫓아 마구 써대고, 그 결과 작품의 수준이 들쭉날쭉합니다. 결국 그가 말하는 문학적 상피성이 그를 제대로 괴롭히는데 실패한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콜린 덱스터의 <제리코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스티븐 킹을 들먹였군요. 문학적 상피성을 논하자면 콜린 덱스터도 결코 뒤지지 않는 작가입니다. 덱스터의 문학적 상피성은 이른바 ‘예술적 교양’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이 들어나는 방식은 ‘잘난 척’입니다.

그럼 누가 잘난 척을 할까요? 당연히 작가 자신과 모스 경감입니다. 모스 경감 시리즈는 3인칭 소설이지만 1인칭 소설이나 다름없습니다. 대부분의 추리소설이 그렇듯 사건 전개의 동시성을 확보하기 위해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데, 작가의 목소리와 모스 경감의 목소리가 매우 흡사합니다.
특히 모스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더욱 그런 양상을 보이는데, 짐짓 작가는 모스와 독자에게 정답을 알려주지 않은 채 능청스럽게 범인의 머리 속을 슬쩍 들쳐 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독자를 따돌리고 작가와 모스 둘만 범인을 알고 있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때마다 둘은 키득 거리도 잘난 척하는데, 불쌍한 루이스 경사와 독자만 늘 바보가 되는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모스는 덱스터입니다. 책날개에 실린 덱스터의 사진을 보면, TV 시리즈에서 모스 경감을 맡은 배우보다 더 모스 같아요.

불쌍한 루이스와 독자가 바보가 되는 순간은 또 있습니다. 작가와 모스만이 알고 있는 문학, 클래식, 언어학, 역사 따위를 이야기할 때입니다. 넘치는 교양을 주체할 길 없는 작가와 모스가 잘난 척 하는 것에 속수무책을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루이스 경사.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리코의 죽음>(1981)은 해문에서 나온 (아마도) 마지막 모스경감 시리즈입니다. 그런데 작품연보를 살펴보니 시리즈의 초기 작품이더군요. 그래서인지 데뷔작 <우드스톡행 마지막 버스>(1975)와 매우 분위기가 흡사합니다. 이 작품에서 모스는 란치아를 타고 다니는데 어느 순간 무스탕으로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콜린 덱스터의 문학적 상피성은 종종 유머러스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제리코의 죽음>에서는 루이스에게 첫 번째 사건의 범인을 설명하고 지목하는 대목이 특히 그러합니다. 술도 한잔 했겠다 매우 격정적으로 범인이 누구인가 설명하는 모스의 모습은 순간 감동이며 모스의 천재성과 박식함이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장면이 그 어떤 대목보다 코믹한 상황입니다. 데뷔작 <우드스톡행 마지막 버스>에서 실연의 상처 때문에 눈물짓는 불쌍한 모스가 웃겨 보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아... 왜 문학적 상피성 어쩌구 하느냐고요? 모스가 고대 그리스 비극을 들먹이며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울다가 웃기는 형국입니다.

아마도 큰 이변이 없는 한 당분간은 콜린 덱스터와 모스가 잘난 척하는 걸 못 볼 것 같습니다. 모스 경감 시리즈의 국내 출간이 조용히 중단된 듯 하니까요. 돌이켜보면, 그간 해문에서 소개한 다른 추리소설들에 비해 모스 경감 시리즈의 번역은 매우 충실한 편입니다. 조금 투박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본래 작품의 어투를 잘 살린 듯 하여 좋았습니다. 때론 설명 없는 무차별 의역보다 역주가 달린 직역이 고마울 때가 있는데 모스 경감 시리즈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반면 시리즈 첫 권인 <옥스포드 운하 살인사건>에 실린 유일한 해설은 다시 읽어보니 정보나 분석 모두 심히 빈약한 수준이더군요. 추리소설 전문가로 알려진 분이 쓴 해설임에도 모스 경감 시리즈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것이 너무 역력히 드러나요

이제 모스를 만나려면 다시 읽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겠죠. 출간된 작품 중 딱 한 권만 다시 읽는다면 무엇을 고르겠느냐는 질문을 한다면, <숲을 지나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두 권을 고르라면 고민이 되네요. <제리코의 죽음>도 유력하고, <옥스포드 운하 살인사건>도 만만치 않고, <우드스톡행 마지막 버스>도 다시 읽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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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6-0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데빌님 서재에서 보고 보관함에 담아 놓은 책들도 한가득이고, 캐드펠시리즈도 얼른 다 마련해야 하는데-
이렇게 아닌듯 은근한 애정을 드러내시면 모스경감시리즈도 자꾸 눈에 아른아른거리잖아요 ㅠ
그런데 선뜻 장바구니로 안가는게요, 잘난척하는 작가는 좀 개인적으로 안좋아하는데,,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폴오스터같은 작가 문체에서 왠지 잘난척 삘이 느껴지거든요. 폴오스터와 비교해서 비슷한 느낌인가요?? 리뷰만 보면 왠지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잘난척할 것 같은데- 잘난척이라는게 참 오묘하게 호오가 엇갈리잖아요^^;; (엄청 주절주절)

lazydevil 2009-06-03 22:06   좋아요 0 | URL
캐드펠 시리즈... 저도 마찬가집니다. 마음만 앞서고 손은 더디고 늘 읽을 책은 풍년이죠^^
폴 오스터하고는 전혀 달라요. 콜린 덱스터는 대놓고 잘난척 합니다. 그런데 귀여워요.^^ 모스 경감도 마찬가지고요. 근데 저는 오스터가(를) 개인적으로 좋아(했어)요. 그의 초기작은 언제 한번 다시 읽어볼까 생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