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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여인 ㅣ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4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챈들러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젠장, 이 사람 정말로 글을 잘 쓰는구나!’입니다. 번역된 작품을 보았을 뿐인데도 작가의 뛰어난 글 솜씨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영어로 된 원작을 읽으면 도대체 어떨까요? 외국어에 젬병인 독자로서는 아마 평생 모르겠지요?
추측 건데 동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챈들러를 내심 질투하거나 흠모했을 겁니다. 챈들러는 대다수 탐정소설 작가들이 보여주지 못한 능력을 과시한 탐정소설 작가입니다. 바로 문체라는 측면에서 말이죠.
또한 현실감 넘치는 인물을 만들어낼 줄 알았다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상천외한 트릭, 개성 넘치는 독특한 캐릭터가 많은 탐정소설에 등장했지만 챈들러가 만들어낸 인물들은 그들이 범접하기 힘든 생동감을 자랑합니다. 작품을 읽다보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의 수기를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탐정소설의 고유 영역이자 한계점이었던 서스펜스와 트릭의 세계에서 벗어나 문체와 생동감 넘치는 인물까지 성취한 챈들러가 어찌 부럽지 않았겠습니까.
<호수의 여인>는 하드보일드 탐정소설답지 않게 매우 나긋나긋한 작품입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건, 이박삼일을 쉬지 않고 격무에 시달리는 필립 말로의 모습은 여전합니다. 늘 그래왔듯 사건현장의 시체를 발견한 첫 목격자도 말로입니다.
그런데 하루에 25불을 벌기위해 하드보일드하게 고생하는 말로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 보입니다. 이기적이고 무례한 의뢰인에 대한 짜증도 덜하고 농담도 많이 합니다. 말로는 이전에도 냉소적인 유머를 과시했지만 대부분 묘사를 통해 독자들에게만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호수의 여인>에서는 극중 인물들과 적지 않게 농담을 나눌 정도로 ‘사교적’ 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즐거워하는 것 같고요. 당연히 말로는 그 어느 때보다 수다스럽습니다.
<호수의 여인>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다른 작품에 비해 ‘짠’한 게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사건과 사건의 연관성이나 인물 간의 관계는 흠잡을 때 없이 치밀하지만 범행의 동인이 되는 설정이 약합니다. 게다가 핵심 인물(범인)의 비중이 적습니다. 독자도 탐정도 범인(들)의 심리를 이해하기에는 작품 속에서 만나는 시간이 너무 적거든요. 그래서 관찰자로 머무르고 ‘짠’한 게 없이 덤덤하게 이야기의 파국을 지켜보게 됩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책에 실린 친절한 해설에서 단초를 찾아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호수의 여인>은 챈들러가 그간 발표한 세 편의 중편을 기초로 완성한 작품이라네요. 다양한 인물과 서로 다른 사건을 잘 끼워 맞췄지만 아무래도 감정까지 융합시키는 것은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아무튼 챈들러의 말처럼 진실을 찾아나서는 것이 탐정의 몫입니다. 심리상담은 정신과 의사가 할 일이지요. 그렇다면 ‘짠한 감정이 어쩌구’하는 불평은 사소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 덧붙이면,
말로가 사건 현장에 마주친 집주인 여자(플록 부인)에게 자신을 ‘파일로 밴스’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플록 부인이 파일로 밴스가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보면 탐정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반면 말로가 이런 농담을 하는 거보면 탐정소설의 독자겠죠? ‘탐정도 탐정소설을 읽는군!’하며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동시에 ‘말로와 밴스가 실제로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닐까요?’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블 코믹스나 DC 코믹스의 히어로들이 서로 알고 지내는 것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