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킬 박사와 하이드 (반양장) ㅣ 펭귄클래식 3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 인형극으로 본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에 남습니다. 시험관에 담긴 정체불명의 약물이 내뿜는 뽀얀 연기, 그리고 약물을 마시면 하이드라는 괴물로 변신하는 지킬 박사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 후 영화, 만화 등으로 각색된 다양한 지킬 박사 이야기를 봤지만 제대로 기억에 남는 건 없습니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라 새로울 것도 없고, 무섭지도 않았거든요.
그중 가장 시시했던 건 성인이 된 뒤 보았던 영화 <메리 라일리>였습니다. 스티븐 프리어스가 연출하고 줄리아 로버츠와 존 말코비치가 출연했던 작품입니다. 단순한 공포물이 아니라 매우 진지한 작품이었는데 이렇다할 장면이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을 보면 꽤나 재미없게 보았나 봅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스티븐슨의 원작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기이한 경우>(원작의 본래 제목)를 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진장 재미있더군요. ‘지금까지 본 XXX는 모두 잊어라!’라는 어떤 영화의 진부한 홍보문구가 떠오르더군요. 정말 스티븐슨의 원작은 실로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이더군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하이드가 주는 즉물적인 공포의 순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가 무서운 것은 순전히 ‘내’ 안에 살고 있는 괴물이 ‘남’이 아닌 ‘나’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본 다른 지킬 박사의 이야기는 하이드의 악마적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 대부분이었고, 간혹 지킬 박사의 인간적인 고뇌를 조명한 작품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원작만큼 인간 내면에 자리한 악마성을 공고히 한 경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원작을 읽다보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기이한 경우’는 사라지고 나를 포함한 평범한 인간들의 ‘일반적인 경우’로 치환되는 것이 느껴집니다. 섬뜩한 순간이죠. 이는 원작이 풍기는 모호함과 책의 서문에서도 지적한 흥미로운 구성이 분명히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수많은 하이드들이 출몰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선으로 위장한 인간의 악마성은 이제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흔하디흔한 현실이 아니던가요?
아니 오히려 내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이 하이드일 수 있다는 공포는 사소한 것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하이드일 수도 있다는 것이 진짜 무서운 거죠. 이야기 속 지킬 박사가 느꼈던 건 고뇌가 아니라 공포였습니다. 이 공포는 독자들에게도 그대로 전이됩니다. 지킬은 ‘약물’을 이용해 하이드로 변신했지만 현실 속 우리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하이드가 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끔찍한 실험을 통해서도 이미 증명된 바 있습니다. <엑스페리먼트>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그 유명한 실험 있잖아요. 그 실험을 다룬 다큐멘터리는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끔찍했습니다.
함께 실린 단편 <시체도둑>과 <오랄라>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특히 <시체도둑>은 매우 현대적인 작품으로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스티븐슨의 창작론을 엿볼 수 있는 <꿈의 관하여>의 축약본이 실려 있습니다. 충실한 서문과 참고할 만한 해설을 연이어 읽다보면 작품이 발표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작품의 의미를 여러모로 조망해볼 수 있습니다. <오랄라>의 몽환적이고 모호함에 대한 해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