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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 ㅣ 밀리언셀러 클럽 50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0월
평점 :
스티븐 킹의 작품 치고는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스티븐 킹의 작품과는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사건을 전개하는 양상도 다릅니다. 작가의 능청스러운 입담을 제외하면 스티븐 킹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이 작품은 험난한 산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트리샤라는 아홉 살 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길을 잃고, 산 속을 헤매다가, 마침내 구조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죠.
익히 알고 있는 스티븐 킹이라면 이런 이야기 속에 익숙한 괴물들이 등장시킬 겁니다. 소녀의 피를 제단에 바치려는 악마 숭배자나, 피에 굶주린 흡혈귀, 혹은 귀신 들린 살인마 같은 괴물 말입니다. 이들은 소녀를 더 한층 끔찍한 공포에 빠트릴 테니 얼마나 흥미진진하겠습니까? 아니면 산 전체가 살아있는 거대한 악마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 작품에서 스티븐 킹은 이례적으로 자신의 짓궂은 상상력을 억누릅니다. 뜻밖에도 스티븐 킹이 아홉 살 소녀 트리샤에게 던져준 공포는 매우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외떨어진 산 속에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 즉 고립과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정말 이것 뿐입니다. 그래서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는 스티븐 킹의 작품 치고는 싱거운 작품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작가 특유의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배제된 르포타주 형식의 조난기는 아닙니다. 아홉 살 소녀의 눈을 거쳐 투사된 공포의 순간은 꽤 매력적인 환타지로 재구성되고 있거든요. 주인공은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를 바탕으로 자신이 직면한 현실을 비틀어본 것입니다. 소녀가 좋아하는 <반지의 제왕> 풍으로 말이죠. 속내를 알 수 없는 교활한 살인마보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어둠의 기사가 더욱 무서울 테니까요.
소녀가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기대는 수단 역시 환타지입니다. 그것도 다름 아닌 프로야구 선수에 대한 환타지입니다. 독특한 설정이긴 한데, 일단 리그 최고의 구원투수를 추종하는 아홉 살 소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낯섭니다. 정서의 차이일까요?
아무리 한심한 부모라지만 단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야구선수를 수호천사로 삼아 역경을 견디어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과한 설정인 것 같습니다. 작품에 나타난 걸 보면 소녀의 부모는 그렇게 못된 인물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만들어낸 환타지를 갑옷과 무기로 삼아 공포와 맞서 싸운다는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특히 이야기 마지막, 현실적 위험이 코앞에 직면했을 때, 소녀가 맹신하는 환타지가 실제로 비범한 위력으로 발현되는 순간은 무척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그 순간을 간단히 요약하면, ‘몰아의 경지에 빠진 아홉 살 난 소녀가 무지막지한 공포 앞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기에 결국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정도가 되겠군요. 무슨 구도 소설 이야기 같군요. 하지만 실제로 이 작품의 결론이 이것이고 그 과정이 꽤나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소설의 가장 큰 관전 포인트는 작가의 압도적인 묘사력입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야생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소녀의 여정이 그야말로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이는 스티븐 킹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끔찍한 상상력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작가이기 전에 탁월한 문장가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스티븐 킹이 위대한 작가는 아닐지 몰라도 문장을 다룰 줄 아는 실력 있는 작가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역자와 편집자 모두 야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지(그렇다 해도 무성의에 대한 지탄은 피할 수 없습니다.) 야구시합 장면이 등장할 때마다 재미있는 실수가 난발하더군요. 그중 가장 재미있었던 건 그 유명한 양키스의 유격수 데릭 지터를 ‘데렉 제터’로 고집스럽게 표기한 것과 양키스의 투수 앤디 페티트가 타자로 묘사된 대목이었습니다.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두 선수는 양키스의 주전선수로 뛰고 있는데, 경기를 볼 때마다 ‘데렉 제터’가 떠오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