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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윈도 ㅣ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2월
평점 :
책 말미에 실린 해설을 보면, 챈들러는 <빅 슬립>과 <안녕 내 사랑>의 반응이 신통치 않아 세 번째 장편인 <하이 윈도>를 쓸 당시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는군요. 그런 영향 때문이었을까요? <하이 윈도>는 앞 선 두 작품에 비해 가볍고 느슨한 느낌입니다.
<하이 윈도>에서 필립 말로는 본격적으로 정의의 기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단순히 연민이나 동정심이 아닌 투철한 직업관 때문에 악덕을 눈감아주는 반사회적 행동을 합니다. 반면 불의에 희생당한 가여운 영혼을 돕는 일에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짓거립니다. 악당들이 존재해야 자기 같은 부류의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다는 ‘조우커’같은 논리일까요? 아니면 냉철한 프로페셔널리스트의 극치인가요? 이런 필립 말로의 태도가 이후 작품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궁금합니다.
<하이 윈도>는 읽기에 앞서 두 작품보다 부담이 덜합니다. 사건을 둘러싼 정황도 비교적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모호함도 훨씬 덜합니다. 필립 말로는 여전히 불퉁거리는 태도로 등장인물들에게 냉소적인 농담을 던집니다. 하지만 집요한 묘사로 독자들에게 본인의 심기를 쏟아내는 투정이 조금은 줄어든 듯 합니다. 그래서 인지 <하이 윈도우>는 앞선 두 작품에 비해 잘 읽히지 않았나싶습니다. 어색할 정도로 고지식한 번역투의 문장에도 불구하구요.
문제는 앞선 두 작품에 비해 호기심을 끄는 힘이 약했다는 겁니다. 장르소설답지 않게 병적으로 집요한 상황묘사와 쉬지 않고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들의 홍수 속에서도 앞선 두 작품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것은 예상치 못한 사건전개와 오리무중인 사건의 전모 때문이죠.
예상치 못한 사건전개라 함은 엉뚱한 방향으로 사건이 흘러가는 ‘헛다리 집기’ 트릭과 ‘극적인 반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과 등장인물들이 앞을 다투며 끼어들어 사건을 복마전으로 몰고 가죠. 책장이 넘어갈수록 이야기는 실타래처럼 엉킵니다. 사건의 원흉(대장격인 악당!)은 대략 짐작이 가지만 희생자(혹은 의뢰인)와 어떤 관계와 갈등이 있는지가 또 다른 관심사로 떠오릅니다. 그 이면에는 하드보일드 장르의 뿌리인 인간의 욕망과 어리석음에 대한 폭로가 숨어있고, 이 놈은 어김없이 씁쓸한 뒷맛과 카타르시스를 함께 전해줍니다. 근데 <하이 윈도>는 앞선 두 작품에 비해 이 점이 부족합니다. 필립 말로의 팬으로서 사건의 모호함을 감내하더라도 이 점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그래도, 필립 말로는 여전히 매력적인 탐정입니다. <하이 윈도>에서 총 한 방 쏘지 않고, 주먹질 한번 제대로 하지 않지만, 누구보다 멋지게 진실을 밝혀내고, 기죽지 않고 후련하게 전모를 까발리니까요!
참, <하이 윈도>에는 오탈자가 대거 출몰합니다. 특히 후반부에 몰려있는데, 느슨한 책읽기 와중에 곁가지 놀이를 즐길 수 있습니다. 마치 지뢰 찾기 게임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