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의 비극 동서 미스터리 북스 4
엘러리 퀸 지음, 이가형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Y의 비극>을 읽으며 점점 확고해진 생각은 주인공 도르리 레인에게서 아무런 매력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은퇴한 연극배우이고, 나이를 초월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으며, 시도 때도 없이 셰익스피어를 인용하고, 귀가 들리지 않는, 그야말로 독특한 캐릭터로 중무장한 도르리 레인에게 느낄 수 있는 것은 호감이 아니라 ‘가짜’ 같다는 공허함뿐입니다.

<Y의 비극>은 주인공 도르리 레인만큼이나 괴상한 사람들의 집합소인 해터 집안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도르리 레인은 전작 <X의 비극>에서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운 분석력과 직관으로 범인을 밝혀내죠. 늘 그렇듯 범인은 전혀 뜻밖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 도르리 레인은 깊은 고뇌에 빠집니다. 한 집안을 둘러싼 끔찍한 비극의 핵심에 도달하고, 직접 목도했기 때문이죠.

그 충격에 레인은 일순간 병자의 모습처럼 얼굴빛이 어두워지기도 하고, 심하게 앓은 듯 초췌한 몰골로 사람들 앞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도르리 레인의 고뇌에 저는 5%도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사건을 둘러싼 진실이 충격적이지 않아서라기보다 도르레 레인이라는 인물이 뭘 해도 가짜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도르리 레인은 그냥 탐정소설 속에 등장하는 독특한 탐정이라는 느낌입니다. 이런 인물의 심경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불행히도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마저 놀랍지 않았습니다. 읽는 내내 크리스티가 쓴 어떤 작품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범인 역시 예상한 대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범죄를 둘러싼 설정은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범죄의 전말을 밝혀내는 도르리 레인의 논리가 치밀하다기보다 작위적이라는 인상입니다.

게다가 왜 이리 긴지요. 확인해보니 본문만 439페이지군요. <X의 비극>도 조금 장황하다는 느낌이었는데, <Y의 비극>은 좀 심합니다. 정말이지 퀸은 크리스티의 군더더기 없는 화법을 부러워해야할 것입니다. 어차피 범인의 심리나 탐정의 고뇌를 묘사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작품을 읽는데 장황한 묘사와 설명은 결코 반갑지 않습니다. 읽는 내내 크리스티의 경쾌한 문체가 그리웠습니다. 동시대에 활약했지만 크리스티의 작품이 퀸의 작품보다 좀더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행히 <Z의 비극>은 이 두 작품에 비해 분량이 적은 편이라니 한 번 기대해보겠습니다.

덧붙임. 흔히 회자되는 ‘세계 3대 OOOOO’ 리스트말입니다. 그 기준이라는 게 지극히 상대적이며 절대적이지 않은 리스트라는 거...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이 작품이 그런 류의 리스트에 종종 이름을 올리는 작품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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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2-25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azy devil님 추리의 '고전명작'에 집중하고 계시네요^^
저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아직 못읽고 있어요. 작품 고를때 참고할께요~
잘 보고 갑니다. (세계3대 어쩌고 해도, 역시 자기맘에 들어야^^)

lazydevil 2008-02-25 12:14   좋아요 0 | URL
요즘 어쩐일인지 뒤늦게 장르소설, 특히 추리물에 빠졌습니다. 편식은 참으로 안좋은 것인데... 그래서 쥬베이님이 추천하신 좋은 책들은 찜만 해놓고 자꾸 밀어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