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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의 매 ㅣ Mr. Know 세계문학 44
대실 해밋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해밋의 <몰타의 매>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조금 필요했습니다. 처음 수십 페이지를 읽어내기까지, 아니 백여페이지를 읽어내기까지 쉽게 이야기에 빠져들지 않더군요. 공교롭게도 하드보일 탐정소설의 대표작인 챈들러의 <안녕 내사랑>이나 맥도널드의 <소름>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뭐 이런 게 하드보일 탐정소설의 특징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니 그 이유를 알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바로 문체 때문입니다!
챈들러는 물론이고, 맥도널드도 자신의 만의 독특한 문체를 가지고 있는 작가입니다. 문체보다는 사건의 논리적 전개에 집중하는 앨러리 퀸이나 크리스티 류의 탐정소설 작가와는 조금 다르죠. 게다가 그 문체가 상당히 건조하고, 차갑습니다. 챈들러와 맥도널드의 경우 자기만의 썰렁하지만 매력적인 유머를 종종 늘어놓기도 합니다. 반면 해밋은 거칠고 직선적이며 유머라고는 눈씻고 찾아보기 힘듭니다. 주인공 샘 스페이드가 종종 농담을 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농담이라기보다 이죽거리는 말투에 가깝습니다.
90여페이지를 읽고나서 겨우 해밋의 문체에 적응했습니다. 이 즈음 샘 스페이드의 캐릭터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고, 사건도 점차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총 280여 페이지의 분량을 감안하면 발동이 늦게 걸린 셈이죠. 이후 상황은 흥미진진하더군요.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상황인데도 말이죠.
80여페이지에 이르렀을 때 매우 중요한 짧은 일화가 등장합니다. 샘 스페이드가 팜므파탈인 브리지드 오쇼네시에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한 남자가 돌발적으로 발생한 사고 앞에서 목숨을 잃을 뻔 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납니다. 그는 그 길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춥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거죠.
이 일화는 작품의 중심 사건과 그다지(심하게 말하면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작품의 몰입에 가속력을 주더군요. 도대체 무슨 사건이 벌어지려고 이 난리야?하고 투덜거릴 무렵 묘한 흡입력을 발휘하더군요. 사건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기계적인 호기심을 뛰어넘어 각 인물들을 둘러싼 상황을 생각하게 만들었으니까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이후 상황들이 워낙 급변하며 흥미롭게 펼쳐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일화는 어디선가 읽었던, 매우 익숙한 설정의 이야기입니다. 폴 오스터의 몇몇 소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나고, 하루키의 단편에서도 본 적이 있습니다. 레이몬드 카버의 작품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고요. 언급한 작가들이 모두 해밋의 후배들이고, 폴 오스터와 하루키는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의 열렬한 팬이라고들 하니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겠지요. 암무튼 이러한 작가들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해밋의 작품이 단순한 싸구려 범죄소설의 영역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증거겠죠?
연보를 보니 <몰타의 매>는 해밋이 만36살의 나이가 되던 1930년에 출간되었더군요.
사족을 한가지 더 붙이면, 우리에게는 ‘말타의 매’가 익숙하지만, ‘몰타의 매’가 맞는 표기입니다. 몰타(Malta)는 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한 섬나라지만 영국연방이랍니다. 다녀오신 분의 말에 의하면 풍광이 아주 좋은 나라라고 하더군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사실 저도 해밋의 작품은 ‘말타의 매’가 더 익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