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 글을 올리다보면 조회수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조회수는 내 노력과 비례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과연 계속 글을 써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고 내 글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했다.

평소에는 내 글을 잘 보지 않던 동생이 이런 날은 귀신같이 알고 전화를 해 왔다.

"언니, 미안한데 내가 잔소리를 좀 해야겠어.

언니 글에 왜 평가를 받고 싶어해? 언니 글이니까 쓰면 되지 평가가 뭐가 중요해?"

동생의 잔소리를 듣고 보니 정신이 확 들었다.

어차피 내 글의 목적이 계속 쓰는 것이었는데 조회수에 떠밀려 내 글의 목적이 주객전도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전 구글러 출신 정김경숙님의 영어 공부에 대한 열정을 쓴 에세이 《영어, 이번에는 끝까지 가봅시다》를 읽던 중 '정체성'에 대한 문장이 눈에 띄었다.

40세에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15년째 영어를 배우고 있는 정김경숙님.

그 분은 이제 더 이상 구글출신이 아니다. 경력이 좋아 여러 곳에서 이직 제안을 받지만 그 제안들을 거절하고 미국에 남아 여러 직업을 경험하고 있다.

스타벅스 종업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마트 종업원, 우버 기사로도 일한다.

그래도 명색이 구글 출신이고 50이 넘은 나이에 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하는 이유는 '영어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있었기 떄문이다.














저의 정체성을 '영어 하는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정김경숙님은 영어를 배우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단 한 가지로 정했다.

"영어 하는 사람"

수많은 업무 가운데서도 늘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영어 공부하는 시간을 확보했고 늘 영어를 가까이 하며 영어를 손에 놓지 않았다. 상황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정한 정체성에 맞게 행동했을 뿐이었다.


'영어 하는 나'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에게

영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함없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피곤하다고 해서, 새해라고 해서, 휴일이라고 해서 결심하거나 쉬거나 하는 게 없었다.

자신의 정체성에 맞게 변함없이 하는 사람이 되는 게 목적이었다.

그러니 구글에서 나왔다고 해서 영어 공부를 중단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이제 다양한 사람의 영어를 들어보겠다는 목적에 공부 방향을 틀어 다른 방식의 영어공부를 하게 된 것 뿐이었다.


정김경숙님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이 '상황'이 변수가 되지 않았다.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니 상황에 개의치 않고 영어 공부를 해나가는 게 중요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조회수가 적다고 글을 쓰지 않는다면 내가 매일 글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잘 알아주지 않는다고 포기해버린다면 과연 나는 글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작가란 무엇인가?

책을 출간해서 작가가 아닌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도 나의 '정체성'을 다시 세워가기로 했다.

'매일 글 쓰는 사람'

'매일 읽는 사람'

이 정체성에 어떤 변명을 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매일 글을 쓰고 읽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정했으니 이 정체성에 충실하기로 한다.

저는 매일 글을 쓰고 읽는 사람입니다.

이 정체성을 끝까지 놓지 않고 붙잡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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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
조엘 디케르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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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을 알기 위해서는 프롤로그를 꼭 읽어야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존경하는 스승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을 조사한 걸 토대로 책을 써서 두 번째 책을 써서 대성공을 이룬 마커스 골드먼.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묻는다. 


"해리 쿼버트가 정말 그런 짓을 저질렀습니까? " 


이 질문에 대해서 짐작한다. 해리 쿼버트가 바로 범인이겠구나. 이 책은 해리 쿼버트가 어떻게 살인을 했는지 밝혀내겠구나 라는 걸 짐작케 한다.  해리 쿼버트. 그가 저지른 일은 어떤 사건인가?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은 의아함을 자아낸다. 

시작하는 부분이면 챕터가 1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 책은 31부터 시작되어있다. 

스승인 해리 쿼버트가 제자 마커스 골드먼에게 책과 글쓰기에 대해 권하는 부분인데 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결론부터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성임을 짐작케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떤 결론부터 보여주는가? 


바로 해리 쿼버트의 정원에서 33년 전에 죽은 15세 소녀 놀라 켈러건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 유골에는 해리 쿼버트를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주었던 소설 <악의 기원> 원고가 함께 묻혀 있다. 


해리 쿼버트 교수의 개인 저택 정원에 묻힌 유골, 

자신의 대표작인 <악의 기원> 원고,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해리 쿼버트는 살인 용의자가 되기에 충분했다. 모든 사실이 해리 쿼버트가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더구나 30대의 무명 작가와 15세 소녀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악의 원고>가 허구가 아닌 사실이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해리 쿼버트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며 공격했다. 


이 사실에 믿을 수 없던 마커스 골드먼은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시작한다. 

이 책은 두 권의 긴 이야기로 나눠져 있지만 읽을수록 양파껍질을 벗기듯 매번 새로운 장으로 접어들게 한다. 


작은 오로라 마을인 만큼 죽은 소녀 놀라 켈러건은 모든 사람과 엮어 있다. 

<클락스 식당>의 주인 가족, 해리 쿼버트 저택 주인, 오로라 경찰서, 친구 등등 이들이 들러주는 증언은 계속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모습이 나오며 과연 이 소녀는 다른 누군가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이 맞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한 사람의 증언이 앞서 이 사건에 대해 말했던 사람의 증언에 대해 반전을 하게 되는 형식이다. 

사건을 추리해 갈수록 이 사건에 대한 용의자들이 좁혀져 가는 게 아닌 점점  확대되어간다.

이 사건을 따라가다보면 결국 한 가지 의심을 하게 된다. 


"어쩌면 이 동네 사람들 모두 한통속이 되어서 소녀를 죽인 게 아닐까?" 


의심 가지 않는 사람이 없는 이 상황은 2권째에서도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에서 또 다른 의문점은 바로 왜 해리 쿼버트는 자신과 놀라 켈러건의 사랑을 쓴 책 제목을 <악의 기원>으로 정했을까? 


분명 소설은 금지되었기에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건만 이 사랑을 악의 기원이라 했는가. 

제목대로라면 해리 쿼버트가 소녀를 죽인 피해자가 되어야 마땅해야 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책을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던 이 질문을 마지막에 가서야 깨닫게 된다. 

왜 해리 쿼버트는 자신의 소설을 <악의 기원>이라고 지었는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설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이 소설은 모든 사람들이 놀라 켈러건을 죽인 범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각자 다른 누군가에게 악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악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 결국 가장 잔혹한 살인이라는 악의 형태를 통해 또 다른 작은 악들이 드러나게 됨을 보여준다.


그래서 소설은 말한다. 


이  사건은 1957년 8월 30일에 있던 이야기일 수 있고  1960년대 또는 1964년, 1975년에 발생할 수도 있었다고 말하는 건 각자의 작은 악들이 드러나고 있는 시점이였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에는 몇몇을 제외하곤 많은 인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바꾸기를 원했다. 

악의 기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 그 인물들은 자신들이 잘 살아왔다고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진실이 드러날 때마다 결국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책에서 해리 쿼버트는 작가들의 파라다이스를 말한다. 

작가가 이야기를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곳. 


어떻게해야 그 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해리 쿼버트의 질문에 마커스 골드먼은 이미 일어난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해리 쿼버트는 말한다. 


그야 물론이지만 현재를 바꿀 수 있어. 



현재를 바꾸라는 건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악을 정정당당하게 고백했더라면, 또는 사건이 밝혀질 때 자수했더라면 결말을 다르게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러므로 현재를 바꿀 때 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노라고 말이다.  


프랑스에서 조엘 디케르 현상을 이끌어내며 600만 부 판매한 베스트셀러이자 다수의 상을 수상한 소설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 소설을 읽고 글을 쓰면서 가장 리뷰 쓰기가 힘든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그 이유는 바로 책에서 소개한 글쓰기의 비법대로 나는 과연 쓰고 있나 여러 번 곱씹게 되기 때문이다. 


글쓰기 강의를 토대로 하며 이 책이야말로 좋은 글쓰기의 표본임을 말하고 있는 듯한 조엘 디케르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의 자신감 답게 두 권의 이야기가 매 장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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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 쇠락하는 산업도시와 한국 경제에 켜진 경고등
양승훈 지음 / 부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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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GM이 떠난 빈 중소도시의 쇠퇴를 취재한 르포 《실직도시》가 출간되었었다. 


한때 현대중공업과 한국지엠의 공장이 세워지며 많은 노동자들이 유입되었지만 경기의 쇠퇴와 함께 중공업이 문을 닫고 지엠이 미국으로 공장을 이전하며 군산은 급격하게 쇠퇴의 길을 걷는다. 기업과 공장이 사라지자 사람들도 떠나가고 남은 몇몇의 사람들만 예전의 활기를 그리워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24년, 이제는 다른 도시를 쓴 르포가 출간되었다. 

2021년 군산에 대한 르포보다 심각하다. 2024년도에는 불안한 울산의 미래를 예측한 르포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이다. 


울산이 어디인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석유 화학등 대기업의 제조업 시설이 한 곳에 밀집된 공간이다. 그런데 왜 저자 양승훈 교수는 '울산'을 디스토피아로 말했을까? 

아직까지 전국 2위의 GDP를 기록하고 있는 울산의 미래가 불안하다고 강조하며 울산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을까? 



지역 경제가 살고 비슷한 중산층들이 살아날 수 있는 해결책. 

그 답을 전형적으로 갖고 있는 도시의 표본이 바로 '울산'이다. 대기업 공장 정규직으로 근무하며 높은 임금을 받으며 중산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탄탄한 제조업이 밑바탕이 되고 있었다. 




평생 굳건할 건만 같았던 '울산'이 왜 불안한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2021년 출간되었던  《실직도시》가 도움이 된다. (저자는 다르다). 

군산은 왜 한 순간에 쇠퇴하고 말았는가? 방준호 기자가 쓴 <실직도시>에서 군산의 역할이 바로 '지엠'의 생산기지였기 떄문이라고 말한다. 


지역이 대기업 생산 기지만 가지고 성장하는 모델은 10년짜리라고 봐요. 

자동차도 조선도 결국 산업 사이클이 있고, 하강기에 접어들면 

의사 결정 기구 같은 핵심적인 기능이 없는 지역 생산 기지부터 잘려 나가죠. 


<실직도시> 중에서 



군산은 미국 지엠회사의 '생산 기지'일 뿐이었다. 

한때 호황기를 누릴 때에는 여러 곳에 투자를 하며 공장을 세우지만 불황기에 접어들면 가장 먼저 축소되는 부분은 '핵심 기지'가 없는 '생산 기지' 즉 공장부터 가장 먼저 철수한다. 

지엠 또한 사업이 어려워지며 물건만 만들어내는 군산의 공장을 가장 먼저 철수했다.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의 저자 양승훈 교수는 왜 울산이 바로 군산과 같은 이 전철을 밟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 용어를 바로 '구상과 실행의 분리'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자동차나 선박을 구상하는 엔지니어들이 현장중심주의라서 공장과 밀접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구상하는 엔지니어가 있는 연구소는 수도권으로 옮겨오고 울산은 이제 공장만 있는 즉 '생산기지'만 덜렁 남아있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점점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현실에서 공장마저 수도권으로 이전할 수 있는 현실. 

이 공장마저 없게 되면 울산의 경제가 몰락하는 건 한순간임을 이미 앞선 군산의 예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에서는 울산의 미래가 불안할 수 밖에 없는 세 가지 핵심 키워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성, 생산직, 대기업 정규직 


이 세 가지는 이제까지 울산 경제를 떠받들며 많은 노동자를 중산층으로 만들어 준 키워드였다. 

공장이기에 대부분의 노동자가 남성직이며 대기업 정규직으로 생산직에서 근무하는 도시. 

그들을 중산층으로 만들게 한 이 세 가지가 이제 역으로 울산의 미래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공장은 많지만 그 외 일자리가 없는 도시. 

여성의 일자리가 없으니 부산이나 수도권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여성들. 

대기업 정규직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이주 노동자로 대체되며 점점 좁아지는 청년 취업률. 

막을 수 없는 수도권 집중 현상과 날로 변해가는 국제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는 울산의 현실을 암울하게 전망한다. 


수도권 집중현상과 국제 추세는 막을 수 없으니 이제 울산의 쇠퇴는 막을 수 없는가? 

당연히 그럴 수 없다. 하지만 문제를 안다면 답을 찾을 수 있다. 

울산을 강하게 막아선 것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한다. 자신들의 리그를 강하게 지키며 정규직 자리에서 정년연장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에게 청년을 위한 정책으로 갈 수 있도록 변화하고 공장만 모아 있는 제조업 중심에서 '구상과 실행'의 공간이 함께 할 수 있는 연구 시설의 확충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구소가 떨어져 있는 생산기지는 결국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기에 지속 가능한 제조업으로 되기 위한 엔지니어링 클러스터를 만들고 부산,울산, 경남등 함께 동남권이 함께 연대해야 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해결책은 과연 실현가능한가? 

대기업들이 수도권에 집중되는 현실을 막기는 힘들다. 엔지니어링이 있는 연구소를 만드는 것 또한 대기업의 결단이 필요하다. 부산,경남, 울산등의 연대도 각 지자체의 이해 관계로 실현되기 어렵다. 


지자체, 정부, 기업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하는 이 과정은 잘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복잡하지만 지역 소멸되어 가는 이 현실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숙제임을 말한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울산'이 부러웠다. 

이제 지역이 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하는 이 시대에 지역도시의 미래를 누군가가 걱정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있기 떄문이었다.  또한 아직까지 대기업의 공장들이 굳건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나마 울산에서는 해결해나갈 미래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2021년 군산의 암울한 현실이 점점 퍼져가며 이제는 울산의 미래까지 위협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예전에 읽었던 《실직도시》를 다시 펼쳐들었다. 

그리고 이 군산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우리는 이미 군산의 현실을 보았음에도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울산의 현실을 보며 군산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기는 커녕 후퇴하는 한국의 현실을 보게 된다.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위기 의식. 지역이 소멸하는 걸 그대로 방치하면 우리의 사회는 더욱 큰 재난의 쓰나미로 다가올 것임을 저자는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에서  말한다.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나만 아니면 괜찮은가? 

더 늦기 전에  우리 모두의 진지한 고민과 해결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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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너머 자유 - 분열의 시대, 합의는 가능한가 김영란 판결 시리즈
김영란 지음 / 창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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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짓불을 들이대는 것 같다. 

기성 미디어는 물론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많은 미디어들이 저마다 전짓불을 들고서 

'당신은 누구 편입니까'라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더욱 거세지고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이 시대. 1인 미디어의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지 않는다.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글을 써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갈수록 드물어간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의 편'이 아니면 당할 공격들이 두렵기 떄문이다. 예전에는 전짓불과 같은 무기였다면 지금은 악성 댓글이나 사이버 공격으로 전짓불을 들이댄다. 그래서 언론의 통로는 넓어졌지만 목소리는 다양화되기는 커녕 묻혀지고 마는 시대이다. 

말하지 않으면 괜찮을까? 그렇지 않다. 말하지 않으면 당장 논쟁이나 싸움은 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속에 감추어진 불만은 더 쌓여갈 뿐이며 더 심한 분열을 쌓아갈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싸우기 싫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분열의 시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김영란 전 대법관은 치열하게 고민한다. 

법이 정치색을 떠나 편을 떠나 합의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김영란 전 대법관은 그 답을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철학에서 답을 찾고자 한다. 


그렇다면 존 롤스는 누구인가? 

저자는 존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 이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적 이성'에 의한 '중첩적 합의'로 

'합당한 다원주의 사회'를 위해

서로 다른 포괄적 신념체계를 주장하는 

민주시민들이 정치적 정의관에서

 합의를 이루는 사회 



어렵지만 두 가지 키워드에 주목한다. 


'합당한 다원주의' - 여러 생각과 방법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사회

'중첩적 합의' - 모두가 받아들이는 공통된 정치관 


이 '중첩적 합의'의 예로 저자는 미국의 노예제도 폐지론을 말한다. 

노예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긴 후 문제가 되어 남북전쟁으로 이어졌지만 이 노예제도 폐지를 결국 미국 모든 사회가 받아들이며 하나의 법으로 합의를 보는 과정을 '중첩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간주한다. 


『판결 너머 자유』에서 저자는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였던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 법들이 과연 다원주의에 맞게 또는 롤스의 자유주의 이론에 맞게 이 사회에 반영되는지를 저자는 검토한다. 


책에서는 여러 판례들이 소개된다. 전교조 법외노조 활동, 동성애 인정, 소수자의 기본권, 인공수정 자녀등 친권에 대한 개념,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 성전환 허용 사례등 많은 논란을 주었으며 한국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들이다. 


이 중 몇 몇 사건들 중 인상 깊은 사례를 살펴본다. 


1. 인공수정 자녀와 혼외 자녀의 친생추정 문제


한국은 유교사상이 깊게 뿌리박힌 사회이다. 가부장 중심이었던 한국 사회는 호주제가 폐지된 지가 얼마되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핏줄을 중요시하는 한국 사회는 가부장 우선주의 판결이 우세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피가 섞이지 않은 부자 관계를 끊을 수 있도록 할 것인가라는 쟁점이었다. 과학적으로는 혈연관계가 아닌 이 관계에서 대법관 별개의견에서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다. 


"사회적 친자 관계" 




아직까지 법원은 가부장적 가족 제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대법관들의 일부 반대의견에서는 '사회적 친자 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표시한 법관도 있음을 밝힌다. 아직 롤스가 말한 '중첩적 합의'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법원에서  새로운 가족 형태를 인정하는 법적 움직임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음을 저자는 별개의견을 들어주며 설명해주며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느리지만 조금씩 진척되어 있음을 설명한다. 



2. 소수자들의 기본권

이 책에서는 주로 미성년자 자녀를 둔 부모들의 성전환 사례들을 소개한다. 

아버지가 엄마가 되고 엄마가 아빠가 되는 이 현실에서 성전환자의 기본권을 존중해야 하는가 아니면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는 미성년자 자녀들의 보호가 우선시되어야 하는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기본권도 중요하고 미성년자 자녀 보호 모두 중요하기 떄문이다. 


이 책에서는 '사회적 기본재' 를 강조한 롤스의 정의론을 주목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기본재란 무엇인가? 


'자존감의 사회적 기반들'로 그 태도를 뒷받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회적 기반들 을 의미한다. 


이 사회적 기반들이 없을 경우 성전환들에게는 '인간실존'의 문제와 직결되며 그들의 기본권이 침해된다. 그래서 예전에는 미성년자의 보호가 중요시되었지만 이제는 소수자들의 기본권 또한 중요시되고 있는 전원합의체가 있음을 저자는 설명한다. 




『판결 너머 자유』에  있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들을 읽다보면 비록 느리지만 법원이 사회의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법을 형성하기도 하고 해석해나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단지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아닌 변화되는 사회상을 반영하고자 하는 법원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롤스가 말한 '합당한 다원주의'를 위한 '중첩적 합의'가 현실에서도 존재할 수 있을까. 

다수가 아니더라도 같은 편의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서로 합의를 하며 하나의 행복한 결론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묵직한 질문은 앞으로도 사법부에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숙제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중첩적 합의'가 사법부 혼자만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사회의 분위기가 자유로운 토론과 열린 마음으로 대할 때 비로소 사법부도 반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아직도 우리가 갈 길이 멀지만 이 '중첩적 합의'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 


『판결 너머 자유』는 비전공자인 내게 다소 어려운 책이었다. 나와 같은 비전문가에게 이 책에 소개된 판결문들을 중점으로 읽어도 저자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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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해방 - 소용돌이치는 인생의 한가운데에서 마음의 고요를 얻는 법
곽정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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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화려한 방송인이라고만 생각했던 곽정은씨의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 당연히 남녀 관계와 같은 상담서리라 생각했다. <마녀 사냥>의 그린라이트, <연애의 참견> 등에서 주로 조언자로 활동했었으니까. 그런데 『마음 해방』이라니? 더구나 명상 책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책에 순간 선입견이 들었다.  하지만 읽을수록 알게 되었다. 화려함 속에 감춰졌던 상처들과 그 속에서 저자의 고군분투가. 마침내 그 방법 중 하나로 찾게 된 명상의 여정이 어떻게 해방되었는지를 알게 되는 책이었다. 




『마음 해방』은 세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헤아림 - 알아차림 - 현존. 


1장. 헤아림의 문 너머. 

헤아림. 먼저 헤아림의 정의를 찾아본다. <참작>과 <하량>의 순화어라고 설명한다. 

참작. 이리저리 비추어 알맞게 고려하며 하량은 아랫사람의 심중을 살피어 알아줌을 뜻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무엇을 이리저리 비추며 무엇의 심중을 살핀다는 뜻일까에 주목한다. 

바로 답은 '나'이다. 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나의 상처, 비하, 신념, 두려움 등등 나의 마음을 헤아리게 한다.  이 마음들이 나를 어떤 족쇄로 나를 옭아매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책에 저자가 소개한 여러 두려움 중 가장 익숙해서 잊고 있던 혹은 40대가 넘어가며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한 두려움을 살펴본다. 그건 바로 '늙어감'이라는 두려움이다. 


그런데 저자는 '늙어감'애 대한 두려움을 '탐욕'에 대한 해방으로 연결시킨다. 


늙어감과 탐욕이라는 해방이라는 조합이 낯설다. 왜 그럴까라는 의아함 속에 저자의 한 문장이 다가온다. 


자신의 노화를 기쁜 마음으로 태연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는 흰머리를 벌레보듯 정색하며 얼굴의 주름살을 증오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현실 속에는 강한 두려움이 있음을 이 문장을 통해 직면한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혐오로 바뀌는 것임을. 

두려움은 혐오을 낳고 혐오는 더 커진 두려움을 낳는다. 이 악순환 속에 늙어가는 내 몸을 용납하지 못한다.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려워만 하는 우리의 마음을 이용하는 소비 자본주의. 

늙는 걸 범죄처럼 여기며 주름살과 흰머리를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하는 우리의 소비 문화는 늙어가는 우리를 더욱 죄인처럼 만들게 한다. 


자신을 다독여주기보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여지기 보다 더 두려워하고 혐오하게 하는 문화에 휩쓸려 여려 노화 방지 제품을 사 들이는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그 동안 두려움이 너무 컸음을. 그래서 내 자신이 내 몸을 인정하지 못했음을 비로소 헤아리게 한다. 




2장. 알아차림의 문 너머. 

나의 두려움, 상처, 비난 등 나를 옭아매고 있는 걸 알았다면 이제는 그 다음 단계인 '알아차림'의 문을 연다. 


헤아림과 알아차림. 비슷한 듯 하다. 하지만 헤아림은 그 마음에 대한 것을 헤아려 짐작하지만 알아차림은 상황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마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원인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 것인지를 말해준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열망하는 것. 

내가 무의식적으로 남의 것을 탐하는 마음, 

내가 무의식적으로 집착하는 것. 

그러한 모든 것들이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폭식하게 되고 과소비하게 되는 습관을 알아차린다. 

내 마음이 어떤 욕망으로 작동되는지 알면 그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다. 

나를 다스리고 나를 위로하며 욕망으로 가지 않도록 내 마음을 다독여준다. 


매번 다이어트에 실패하고 소비 지출 통제에 실패하며 욕망에 휘둘린다. 

이런 내 마음이 욕망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다독여줘야 할까? 

저자는 저자만의 따뜻한 단어를 제시해준다. 


 다정한 목격자. 



나는 내 삶의 다정한 목격자인가? 

나는 내 모든 것을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는가? 

나는 내 나이를, 내 삶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가? 


내가 내 삶에 다정한 목격자가 되어 바라볼 때 비로소 내가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으며 욕망으로부터 끊을 수 있다. 




3장. 현존의 문을 열다.

마지막 문은 '현존'의 문이다. 


현존. 지금 이 자리, 이 삶에 온전히 존재할 수 있게 해 준다. 


내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차린 후 내가 온전히 지금을 받아들이며 존재할 수 있는 현존은 가장 어려운 문이다. 


우리가 하는 무의식적인 생각, 상념, SNS, 온갖 문명은 우리를 현재 자리에서 자꾸 도망가게 한다. 


저자는 진지하게 묻는다. 

스마트폰이 보여주는 온갖 정보와 영상 그리고 넘쳐나는 뉴스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행복인가. 

이것이 삶인가. 

지금 나는 내 삶에 온전히 존재하고 있는가. 


내 마음을 헤아리고 알아차린다해도 결국 현재에 온전히 살고 있지 못하다면 그건 무용지물이다. 

그러므로 애써 현재를 살아야 한다. 애써 현재 내 마음을 관찰하고 내 앞에 있는 대상에게 집중해야 한다. 




선입견으로 읽기 시작한 『마음 해방』은 읽는 동안 무한 위로를 받으며 마지막 장을 덮은 책이다. 

아마도 저자가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며 극복해나가는 여정을 써주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이 책에서 '다정한 목격자' 라는 한 단어를 소중하게 적용한다. 


내 삶의 다정한 목격자가 되어 내 현재를 뜨겁게 안아줄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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