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작가의 에세이 <책을 덮고 삶을 열다>에서 이자크 디네센의 <바베트의 만찬>을 이야기한다. 젊은 시절 젊은 장교 로렌스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마르티네,
프랑스의 파리로 건너가 유명한 프리마돈나로 성공할 수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필리파. 마르티네와 필리파 자매에게 동화 속 해피엔딩과 같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야기들을 보며 작가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일인가 일어날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이것도 인생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그거야말로 내 인생 아닌가.
늘 읽고 쓰고 아둥바둥 살아가고 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드라마라면 너무 지루한 이 인생도 인생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는다.
블라인드 심사로 이루어진다는 이 문학상에 최은미 작가의 <김춘영> 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화운령에서 있었던 사건을 조사하는 소설 속 나는 김춘영을 인터뷰한다. 구술자 김춘영과 마지막 면담을 남겨두고 있는 날, 4월에 눈이 쏟아진다. 구술자와 면담자와의 오붓하고 그들이 진정 원하던 내용을 풀어내려고 했건만 갑자기 내린 폭설 때문에 난데없는 불청객이 들어온다.
등산하던 중 갈 곳을 잃은 부부, 정체 불명의 물체를 쫓다가 들어온 군인 2명.
문제는 구술자 김춘영이 면담 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부부는 김춘영이 이 마을의 역사적 현장의 당사자, 즉 중요 인물인 것처럼 질문을 쏟아붓는다. 김춘영으로부터 역사 소설속에서나 볼 수 있는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기대한다. 그런데 김춘영은 그 역사 현장에서 한 발짝 떨어진 술을 파는 여자였을 뿐이었다. 화운령이라는 동네의 역사의 당사자가 아닌 김춘영은 사람들 앞에서 당황해하며 사람들을 피해 방으로 들어가게 된다.
소설에서 면담자 박선생은 김춘영 할머니의 생애를 인터뷰하면서 조직의 압력을 받는다.
박선생, 우리가 쓰는 건 라이프 스토리가 아니라 라이프 히스토리야.
김춘영씨의 인생은 라이프 히스토리가 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인생에서 라이프 히스토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위인전에 나올 수 있는 인물들은 소수인데 반해 이름 없이 살아가는 라이프 스토리는 넘쳐난다.
<책을 덮고 삶을 열다>에서 정혜윤 작가가 말한 '어떤 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런 라이프 스토리가 대부분이다.
이게 인생이야기라 말할 수 있을까라고 우리가 묻는 건 '라이프 히스토리'만을 우선시하기 떄문이다. 그래서 개개인의 고유한 라이프 스토리가 묻혀버린다. 김춘영씨도 비록 술집 여자로 살아왔지만 한 여성으로서 그 시대를 살아낸 이야기는 라이프 히스토리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묻혀버린다. 우리 또한 화려한 인생들만을 바라보다가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의 라이프 스토리를 초라하게 여겨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해야 한다.
일어날 줄 알았는 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그것도 인생 이야기라고.
결국 라이프 히스토리는 라이프 스토리가 모여서 라이프 히스토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어제 미팅을 위해 광화문을 지나치던 중 교보문고에 붙은 한 문구를 발견했다.

살아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난 이 문장을 모든 라이프 스토리는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라이프 히스토리가 아닌 라이프 스토리 자체가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
완전하게 아름답지 않지만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라는 건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에 다다를 수 있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아마 나는 라이프 히스토리를 만드는 주인공은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만의 라이프 스토리는 아름답게 만들어 갈 수 있다.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라이프 스토리.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그래도 해나가고 있다는 나만의 라이프 스토리로 오늘도 아름다움의 한 조각을 맞춰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