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를 찾아서
하나 미쉘 지음, 이윤정 옮김 / 정은문고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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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되지 않는 역사는 결코 끝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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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를 찾아서
하나 미쉘 지음, 이윤정 옮김 / 정은문고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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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계 외국인들이 쓴 한국에 관한 소설들이 대부분이다. <파친코> 의 이민진 작가처럼 디아스포라 소설을 쓰는 경우도 많고 <작은 땅의 야수들>의 김주혜 작가처럼 한국 역사를 배경으로 쓰는 작가들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종류의 소설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삼풍백화점'이라는 역사적 비극 속에 한국의 검은 현대사를 그려낸 재미 외국인 하나 미쉘의 미스터리 소설 『재를 찾아서』이다.



굉음이 크게 한 번 크게 울리더니, 

건물 한가운데가 그대로 주저앉았어요.  


소설은 '대명타워'의 붕괴부터 시작된다.

삼풍백화점이라 할 수 있는 대명타워.

남편 재는 그 곳에서 수영장 개축을 위한 공사를 한 후 소식이 없다.

생존소식을 들으면 좋겠지만 적어도 생사여부라도 알면 좋으련만 남편 '재'에게서 아무런 소식도 없다.

두 아이를 이웃에게 맡기고 사고 현장으로도 가보지만 어느 누구도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는다.

과연 아내 '새'는 남편 '재'를 찾을 수 있을까?


『재를 찾아서』 에서 한국 역사의 비극적인 역사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다.

정경유착으로 인한 부정부패, 빨리빨리 성장에 취해 일어난 부실공사,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들의 비리들, 돈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이 모든 비리의 온상들이 '새'와 '재'의 만남의 역사부터 시작해 '명희'의 가려진 역사 그리고 태한그룹 회장이 그려낸 회고록에 차곡차곡 담긴다.




소설을 통해 한국의 검은 역사들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각각의 역사들이 

삼풍백화점, 대명타워와 같은 붕괴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삼풍백화점 비극과 연결된 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새'와 '재'가 만나게 된 독재 정권 민주화 운동과 삼풍백화점과 과연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해외 입양등이 삼풍백화점과 연관이 있나?

하지만 소설은 이 모든 역사들이 하나로 모아져서 '삼풍백화점'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 속 '대명타워'라는 현실적 비극을 만들어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역사들의 비극의 총결합체가 마지막 남편 '재'의 거대한 비밀이라는 걸 이 소설은 말해준다.


소설 마지막,

대명타워 무너지기 직전, 평안한 하루를 보내는 여러 사람들이 나온다.

식구들을 먹일 반찬거리를 사는 주부의 모습,

회사 은퇴 후 무심했던 아내를 위해 선물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서 아내를 위한 선물을 고르던 남자,

그리고 아내 '새'와 두 아이들과의 새로운 삶을 꿈꾸던 남편 '재'

그들이 바란 건 무엇이었나.



그가 바란 건 단 하루다.

오늘이 지나면

언제나 내일이 있다는 사치를 누릴 하루.


우리에겐 평범한 하루가, 그리고 내일을 꿈꾸는 그저 평범한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사치'가 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부패한 엘리트들이 만들어가는 역사로 인해서 말이다.

그 역사가 쌓여 삼풍백화점이 되고

그 역사가 치유되지 않아 세월호 참사라는 또 다른 비극이 된다.

그 역사의 쓴뿌리를 없애기엔 악의 뿌리는 '돈'의 힘으로 너무 거대하고 공고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끝낼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그러니 더욱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준다.

소설은 정의를 약속하지 않는다. 

통쾌한 해피엔딩을 바라지만 앞서 말했듯 악의 뿌리는 매우 공고하다. 돈이 없는 서민들은 돈에 의해 쉽게 무너진다.

한국의 모든 역사 부분에서는 다소 지루함이 느껴지지만 이 모든 게 남편 '재'라는 인물의 이야기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은 소름이 돋는다.


 해결되지 않는 역사는  결코 끝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소설이다.  






*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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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듣는 사람들
조던 태너힐 지음, 김산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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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예민함과 아픔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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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듣는 사람들
조던 태너힐 지음, 김산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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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증정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보통 사람들보다 예민한 사람들이 있다. 가볍게 부딪혀도 누군가는 가볍게 넘어가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과하게 반응하며 매우 아파한다. 그럴 때 우리의 반응은 무엇인가. 예민한 사람들에게 '그까짓 거 가지고 유난'이라고 핀잔을 하곤 한다. 별 거 아닌 일에 심하게 반응한다며 그들의 예민성을 비웃는다. 일반적이지 않기에 예민함은 보통 잘못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BBC드라마 원작소설이기도 한 조던 태너힐의 장편소설 『소리를 듣는 사람들』 또한 그런 예민함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소리'에 대한 예민함을 가진 사람들.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그들의 청각적인 예민함은 유난스러움이 되고 그들의 외로움은 광적인 집착으로 매도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간신히 감지할 수 있는, 매우 낮게 반향하는 음조가 있었다.

소리를 듣는 사람들 20p




조용한 밤, 온순한 남편 폴의 사랑스러운 아내이자 축구선수 애슐리의 엄마이자 존경받는 선생님이었던 클레어는 낮게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 낮게 들리는 소리.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에서 울리는 낮은 소리는 클레어를 괴롭게 한다. 한밤중에도, 새벽에도 그 소리는 계속된다. 모든 전기를 차단해도 울리는 소리. 그 소리에 남편과 딸은 예민해서 그렇다며 좋게 끝내자고 한다. 하지만 이 소리로 인해 불면증이 생기고 피곤증을 일으키며 수업까지 차질을 일으킨다. 클레어는 혼란스럽다. 오로지 자신만 듣는 이 소리. 과연 자기가 잘못 된 것일까? 왜 분명히 존재하는 이 소리를 다른 사람들은 못 듣는단 말인가?

자신만 듣는 소리이기에 누군가와 의논할 수 없다. 심리치료도 의학치료도 이 소리를 막을 수 없다. 과연 클레어가 잘못인 것일까? 클레어는 이 혼란 속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카일 또한 똑같은 소음을 듣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으로 같은 소리를 듣는 사람을 만난 클레어는 카일과 함께 소리의 근원을 찾아 다니지만 부적절한 관계로 오해받아 해고되고 남편과 딸에게도 외면받는다. 가족과 일 모두를 잃을 사면초가 신세에 빠진 클레어에게 같은 소리를 듣는 모임을 알게 되며 클레어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모임에 합류한다. 과연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함께 모여서 그들만의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모두의 생각이 다르듯이 모임의 주관자들과 생각이 다르기도 하고 번민하기도 한다.



모임의 사람들은 각자의 고민을 토로한다. 실성했다고, 병들었다고, 또는 망령이 들었다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말한다. 일반 사람들이 쉽게 무시하는 이 작은 소리들이 누군가의 삶을 통째로 흔들 수 있다고. 그러므로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주는 파괴는 감히 상상도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조던 태너힐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에서의 이 모임이 어떤 범죄나 또는 미스테리로 이어가길 바라는 사람들에게라면 사실 이 소설은 실망일 수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소음의 정체가 거대한 사회 범죄와 연루되어 있기 바랬던 나의 입장으로서는 모임의 전개 방향이 너무 의외여서 당혹스러웠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미덕이 있다면 소음에 대해 주변의 인정을 억지로 받아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류에서 이해받지 못한 예민함은 끝까지 이해받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기에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공감하기 쉽다. 그리고 클레어 또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작가는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기보다 그저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주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따뜻한 연대를 꿈꾸고 사회 정의를 쫓는 소설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예민함과 아픔을 제대로 보아주지 못하는 이 현실을 보여주는 소이라고 이 소설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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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피플 존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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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트리는 뜻밖에 정치적인 빵이다. 겹겹이 쌓인 층과 층 사이, 선처럼 얇은 틈이 숨어 있다. 

<노 피플 존> 실패담크루 9page 


겹겹으로 이루어져 페이스트리라는 하나의 빵을 만들어낸다. 먹기 전까지는 그 겹들이 똑같은 겹일 뿐이다. 하지만 먹는 순간 느끼게 된다. 안의 겹은 버터 향이 풍기지만 바깥의 겹들은 부스러기로 쏟아진다는 것을.  페이스트리처럼 우리 또한 자본주의 관계를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지만 장소와 신분에 따라 그 겹들이 드러난다. 누군가는 은은한 향을 내지만 누군가는 부스러기 같이 떨어져나간다는 것을 말이다. 정이현 작가의 소설 『노 피플 존』이 바로 관계 속의 페이스트리를 드러내는 소설집이다. 




첫 번째 단편 「실패담크루」 에서  나는 인턴으로 일했던 로펌 대표의 연인이었던 성지연의 초대로 '실패담크루'에 함께 하게 된다.  서로의 실패담을 발표하며 나누는 모임. 하지만 이 곳에서 성공과 실패라는 개념조차도 신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라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가진 게 없는 나는 실패란 치명적이며 아픈 상처이지만 이들에게는 친목회 정도로 소비된다. 그래서 그들은 실패를 담백한 공유라고 말하고 조언이나 피드백을 주지 않는다. 실패조차도 취미로 소비되는 부유한 이들의 모임에 나는 동화될 수 없고 떨어져 나갈 수 밖에 없다. 


현대 사회는 많은 플랫폼을 만들어냈다. 배달 플랫폼은 기본이고 각종 다양한 플랫폼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단 하나의 아이」 에서는 놀이 가정교사 플랫폼인 '케이 파라디소' 가 소개된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놀이선생님. 사진과 학력을 올리고 채용된 한나는 담당실장으로부터 절대 인간적인 교류를 하면 안 된다고 교육받는다.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가. 선을 지키고자 하지만 너무 쉽게 선을 넘으며 한나에 대한 정보를 묻는 할머니. 한나의 부모님이 이혼한 사실을 알자마자 조용히 칼같이 교체된다.  다시 하유라는 아이의 선생님으로 채용되며 긴 시간을 함께 한다. 테리라는 친구와 자주 통화한다는 하유의 문제점을 알게 되며 순수한 감정으로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부모에게 어렵게 말을 꺼내지만 돌아온 건 조용한 차단이었다. 


플랫폼 채용에서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하고 존재함에도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이는 그런 관계임을 소설은 말한다. 그저 필요에 따라 존재할 뿐 어딘가에 남아 있는 흔적만을 남길 뿐이다. 



『노 피플 존』은 제목 그대로 사람들이 함부로 다가오지 않도록 테두리를 치는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사는 사람」에서 김다미는 유명 입시학원에서 일한다. 김다미를 아는 사람들은 학원이름만 가지고 김다미를 평가한다. 남자친구 우재 또한 '어디에 살고' '어디에 근무하는지'로 김다미를 마음에 들어한다. 함께 부유한 동네 임장을 다니며 있어보이려 하는 우재. 뻔지르르하게 옷을 입지만 김다미는 우재의 구두를 바라본다. 그리고 끝내 숨길 수 없는 게 있음을 드러낸다.  똑같은 척하지만 다를 수 밖에 없는 관계. 그게 바로 자본주의 사이에서의 관게의 차이였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이상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언니」에서의 인회 언니다. 

늘 이름으로 기억하며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  일을 도와주는 1학년생들에게 사비로 음식을 사 주면서 늘 분위기가 아닌 원하는 음식을 선택하도록 도와주는 사람. 인회언니에게는 신분이나 위치가 중요하지 않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겹을 만들어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람임에도 자본주의 관계에서는 사람의 선한 성품을 이용하고 내팽개쳐질 뿐이다. 


상황에 따라 쉽게 바뀔 수 있는 여러 관계들. 그 관계들을 누군가는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누군가는 끝까지 변화를 시도하기 위해 용기를 낸다. 인회 언니도 피해자로 전락하지만 단순한 피해자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래도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노 피플 존』 을 읽으면 지금 나의 위치에서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만나게 된다. 부부관계에서도 우리는 같은 겹을 이루나 아니면 한 쪽이 희생하는 부스러기 같은 겹인가. 직장 및 공동체 관계에서 그 틈을 다시 보게 하는 소설이다. 이왕이면 똑같은 관계이길 원하지만 다른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내는 쌉싸르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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