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기쁨
멕 메이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쥐어주는 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픔과 기쁨
멕 메이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죽고 싶은 게 아니다.

뼛속 깊이 스며드는 피로, 극심한 공포로 인한 피로를 느끼며 나는 살아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야말로 바로잡아야 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죽고 싶지 않지만 살아 있으면 안 된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의 마음. 그걸 감히 짐작할 수 있을까?

활동이 왕성한 시기의 학창 시절, 느닷없이 찾아온 불청객처럼 우울증은 책상 밑에 숨게 한다. 여러 곳을 전전하며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아도 되풀이되는 상태. 이 우울증은 입체적 우울처럼 온 몸과 마음을 잠식한다. 괜찮을만하면 다시 찾아와 조롱한다.

멕 메이슨의 장편소설 『슬픔과 기쁨』은 극도의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려온 마사와 주변인물들의 이야기이다. 한 때가 아닌 인생의 3분의 2를 우울증에 시달려온 마사. 학창시절도, 첫 번째 결혼과 직장도 모두 내주어야 했을만큼 이 우울증은 마사라는 개인의 인생을 좀먹는다. 빙 돌아 비로소 찾은 사랑하는 패트릭과의 관계까지도 쉽게 흔든다.

소설에서 마사의 행동은 극단적으로 비춰진다. 그 극단적인 행동은 이제껏 인내한 패트릭과의 관계마저 위협한다.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사의 이야기를 읽으며 드는 질문은 하나이다.

이런 극단적인 무기력함을 병 때문에 무조건 용인하여야 하는가?

우울증이 모든 결과에 대한 보호막이 되어줄 수 있는가?

어쩌면 이런 질문을 하는 나 조차도 마사의 병을 비난하며 조롱한 첫번째 남편 조나선과 같은지 모른다. 자신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바로잡지 못하는 마사의 무기력함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남편 패트릭이 마사에게 말한 "당신은 어쩌면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아"라는 말처럼 말이다.

책 제목 『슬픔과 기쁨』에서 알 수 있듯, 마사의 병은 모든 삶이 슬픔으로 가득차 있는 우울이다. 아니 어쩌면 마사에게는 우울이란 이름보다 더 깊은 이름이 필요할 듯 하다. 패트릭을 사랑함에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상처주어야 하는 이 상태는 슬픔을 넘어 절망으로 돌아서게 하니까 말이다. 아이를 갖기를 그토록 소원했지만 아이 있는 삶을 바라지 못하는 그 마음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절친한 동생은 아이를 넷이나 가지고도 자신은 한 명의 아이마저 바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매순간 자신의 슬픔을 마주하는 것일 것이다.




좋았던 부분을 보지 못하는 것. 그것만큼 가장 불행한 인생은 없을 것이다.

소설 속 마사의 어머니의 직업이 왜 못쓰는 전자제품이나 고철을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조각가로 설정했을까 질문해본다.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제품도 다시 아름답고 훨씬 튼튼한 물건으로 변신시켜주는 것. 그건 결국 우리 모두의 인생과 동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사의 인생도 학창시절도 날리고 남편 패트릭도 떠나고 모두 끝난 것 같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더 좋은 인생으로 업사이클링 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환자 개인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 엄마 실리아에게 이모가 있었고 마사도 함께 한 아버지와 동생 잉그리드, 그리고 다시 손을 잡아 준 패트릭이 있듯이 개인의 인생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기 위해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주변의 인내가 필요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 역시 깊은 우울증에 잠식한 듯 하다. 그만큼 소설은 마사의 상태에 깊이 몰입하게 한다.

책 후반부까지 치달은 깊은 우울 상태에서 벗어나는 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부분은 많이 아쉽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도 그런 것이리라.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니까.

이 소설을 추천하기엔 몰입감이 심하다. 그렇지만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쥐어주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슬픔 속에서 한 가닥 기쁨을 볼 수 있는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쥬디 할머니 - 소설가가 사랑하는 박완서 단편 베스트 10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가들이 사랑하는 박완서 작가의 단편 베스트 10편을 모은 <쥬디 할머니>를 진작 읽었지만 이제서야 작성한다. 못 했다기 보다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박완서 작가의 단편에 대한 소회가 아직도 내게 벅차 오르기 때문이다. 


먼저 표제작인 <쥬디 할머니>를 읽는다. <쥬디 할머니>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왜 출판사에서는 이 소설을 표제작으로 정했을까? 그 부분은 소설 말미 반전 부분을 읽고 나서야 무릎을 치게 된다. 1981년에 발표된 시절을 봐야 한다. 여성에 대한 인권은 전혀 없던 시기. 여성은 무조건 희생되어야만 했던, 남성의 전유물이라고만 여겨졌던 80년대 쥬디 할머니는 그야말로 혁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란 건 좋은 거였다. 말을 하니까 한결 기운이 났다. 

그래, 난 다시 울타리를 칠 수 있을 거야. 새로운 울타리를. 

나는 다시 울타리를 칠 수 있을 거야. 할머니는 오로지 그 생각만 했다. 



희생양이 되기보다 자신의 서사를 멋있게 포장하는 쥬디 할머니의 당당함은 오히려 주변을 더 초라하게 만든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시대의 한계를 타개하기 위해 비록 거짓으로 쌓아올린 쥬디할머니의 울타리를 누가 욕할 수 있을까. 


이러한 모습은 <쥬디 할머니>에서뿐만 아니라 <공항에서 만난 사라>에서의 무대소 아줌마에게서도 드러난다. PX에서 물건을 뺴 돌리는 일에도 능하면서도 당당했던 무대소 아줌마. 

아부도 하지 않고 양키와 살림 차린 점원들에게 '쌍노메 베치'를 날리며 비웃는가 하면 영어 한 마디 못 해도 당당하고 과부가 되어서도 아이 셋을 데리고 미국에 가서 내 나라 말로 실컷 내 나라 욕하면서 살 거라는 무대소 아줌마의 모습은 쥬디 할머니의 당당함과 겹쳐진다. 


삼천만이 양키 덕을 입는 입장이거늘 그녀 혼자 그것을 거슬러 홀로 양키에게 덕을 베풀려 들다니, 그것은 얼마나 고독하고 얼토당토않은 짓인가. 그렇지만 그녀라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인물들을 보며 마흔까지 평범한 가정 주부로 있다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한 박완서 작가가 쓴 여성들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멋있고 당찬 여성들이다. 어찌 이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박완서 작가의 인터뷰를 모은 <박완서의 말>에서 박완서 작가는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말하면서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안이한 태도, 속물근성과 기회주의적 속성 등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 글을 보았다.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해서도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던 작가의 신념은 <도둑맞은 가난>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집안이 망하고 망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 스스로 생을 마감해버린 가족들의 죽음 앞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은 나는 그 와중에도 공장에서 만난 상훈과 사랑을 하며 삶을 이어간다. 상훈과의 미래를 꿈꾸고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훈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는 자신의 가난마저도 있는 자들의 장난감같은 것이라는 걸 알게 되는 장면은 우리가 우스개 소리로 말하는 '개천에서 용이 말라버렸다'라는 희망 멸종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가난이란 무엇인가. 결국 마지막 단편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틀니>가 아닐까. 


월북해버린 오빠로 인해 공무원인 남편의 출세길이 막혀 남편의 구박을 받고 있는 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친정엄마, 언제 북에 있는 오빠가 와서 위험해 질 지 모르는 살얼음판과도 같은 현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가장 무거운 틀니가 되어 괴롭히는 게 아니던가. 

시대가 지났어도 우리의 틀니는 또 다른 형태로 둔갑하여 우리를 무겁게 하고 있다. 누군가는 실직으로 누군가는 질병으로.. 그 틀니는 불안의 형태만 바뀔 뿐 틀니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박완서 작가의 단편집 <쥬디 할머니>를 읽으며 시대를 뛰어 넘은 여성들의 모습을 보고 시대가 지났어도 또 다른 모습으로 변주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좋은 작품이란 이런 것이리라. 고전이 시대가 지나도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해 주는 것처럼 한국의 고전을 만들어낸 박완서 작가의 작품 또한 7-80년대에 쓰여진 작가의 작품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기에 결코 손색이 없다. 이 단편들을 통해 나는 다시 고전의 의미를 되새긴다. 박완서 작가는 분명 한국의 고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함께 글공부하는 벗들과 함께 한강 작가 독서모임을 했다. 


초기작인 <여수의 사랑> 부터 시작하여 10권의 책을 함께 읽어나갔다. 한강 작가의 글은 쉽지 않았다. 고통과 불행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인물들.   그 고통 속을 통과하면서도 끝까지 한 줄기 바람을 찾으며 파란 돌을 찾는 걸 보며 우리의 인생이란 고통 속에 피어나는 희망을 보곤 했다. 


그래서일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이 함께 수록된 에세이 《빛과 실》의 결도 다르지 않다. 


먼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소감 중 우리는 작가의 질문 중 하나를 뺴놓을 수 없다. 


<소년이 온다> 에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참혹한 현실을 쓰면서 한강 작가에게 떠나지 않았던 질문.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 인간을 쉽게 죽일 수 있다는 사실. 이토록 쉽게 폭력적일 수 있고 그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어떻게 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지구 건너편에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어떻게 이토록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지, 그토록 수많은 민간인들을 죽여놓고 큰 소리 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그리고 과연 인간의 역사는 전쟁이 비극을 초래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전쟁을 멈추지 않는 현재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우기는 하는 걸까라는 탄식이 나오곤 한다. 정말 인간의 역사는 희망이 없는 것일까?  그 질문 속에 한강 작가는 말한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끝끝내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남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정말 희망이 없는 것일까? 그럴 수 없다. 한강 작가의 인물들은 그 고통 속에서도 파란 돌을 찾아내지 않았던가. 죽고 싶지만 파란 돌을 잡기 위해 눈물을 흘려야 했던 <바람이 분다, 가라>의 삼촌처럼 고통 속에서도 끝내 파란 돌을 줍지 않았던가. 한강 작가에겐 파란 돌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김광석의 노래 「나의 노래」 였던 것 같다.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있는 한 마시고 노래하리란 김광석의 노래 가사처럼 살아 있는 한 희망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한강 작가의 여러 인물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래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에서도, <채식주의자>에서도 <노랑무늬 영원>에서도 인물들은 모두 희망을 선택한다. 이게 뭐 희망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희망이라고 부른다면 희망이 되지 못할 게 없다는 작가의 글을 보며 한강 작가의 작품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빛과 실》의 표지와 본문 사진들이 한강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다. 



글을 읽기 전에는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책을 읽고 난 이후 이 사진들을 다시 보게 된다. 


거울로 식물을 비추고 있는 모습. 집을 이사하고 햇빛이 들지 않는 북향에 위치한 화단을 키우면서 조경사님은 힌트를 준다. 해가 잘 들지 않으니 거울로 빛을 반사시켜 빛을 주면 도움이 될 거라고. 그래서 여러 거울을 사서 빛을 비춘다. 

해의 움직임에 따라 거울의 각도를 바꾼다. 북향에서도 끝까지 빛을 비추는 일. 그것도 역시 하나의 희망이 아닐까. 햇볕이 잘 닿지 않는 북향에서도 끝까지 거울의 각도를 시시각각으로 바꾸며 빛을 비추는 건 한강 작가의 인물들과 닮아 있다. 빛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작가 역시 빛의 리듬으로 바뀌어간다. 식물들도 끝내 꽃을 피운다. 



한강 작가는 질문한다.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란 무엇일까. 나는 한강 작가가 화단에 빛을 연결해주는 거울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햇볕이 잘 안 드는 북향 화단에 빛을 반사해주듯, 고통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인간의 인생길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인간으로 살아가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인생길에서 서로에게 빛을 반사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북향의 화단의 식물들은 스스로 햇볕을 받지 못한다. 작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거울이란 도구가 필요하다. 

그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우리 스스로 빛을 비추기보다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빛을 반사해주는 거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냘프고 연약한 나무가 끝내 울창해지듯 우리도 비로소 희망을 피워낼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친구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모에게 버려지고 위탁가정을 맴돌다 인생의 단짝 피스켄을 잃은 루이사는 이제 살아갈 이유가 없다. 밑바닥 인생. 이제 조금만 있으면 18세 성년이 되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는 눈꼽만큼도 없다. 어차피 막장 인생이니까.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바람이 있다면 유명한 화가 C.야트의 작품 <바닷가의 초상>을 꼭 보는 것이다.

돈 있는 사람들은 <바닷가의 초상>에서 바닷가의 풍경만을 칭송하며 큰 돈을 본다. 하지만 루이사는 다르다. 그 곳에 있는 세 명의 아이들이 보인다. 자신과 같은 외로움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아이들을. 그래서 마지막으로 경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를 몰래 잠입한다. 한 번이라도 실물로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간단한 희망을 가지고. 하지만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루이사는 잡히고 도망치던 중 실제 화가인 C.야트를 만나게 되고 그 그림에 대한 오랜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부유한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세 아이의 외로움. 그 외로움을 찾아 여행하게 된다.


이 친구들의 우정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프레드릭 버크만은 '예술'에 비유한다.

화가의 초기작이 그려진 배경을 따라가는 여행이니만큼 우정은 어떻게 예술과 비교할 수 있을까?

가장 굴곡이 많은 시기, 열네살과 열 다섯살. 1년이라는 짧은 시절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파괴시키기도 또는 변화시키기도 충분한 시간이다. 세 명의 소년들. 테드, 요아르, 화가, 그리고 또 다른 소녀 알리까지 네 명의 긴 우정 이야기가 시작된다.

모두 인생의 어두움을 살고 있는 청춘들. 누군가는 가정폭력에, 누군가는 아버지의 암투병으로 어려운 환경이고 누군가는 무능력한 부모님에 의해 떠밀려든다. 그들은 서로를 쉽게 알아본다.

왜? 같은 외로움을 가진 아이들은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우리와 같은 과라는 것을.

같은 과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은 서로를 품어준다.

네 명의 친구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세상이 밑바닥인 세상을 보았다. 자신들을 위해서는 꿈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를 위해서는 기꺼이 꿈을 꾸어 주었다. 꿈을 꿀 수 없는 환경에서 화가를 위해 기꺼이 꿈을 꾸어주는 어마어마한 바보들.

험난한 생활 속에서 우정만으로 존재이유가 되어주듯 예술 또한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서로를 위해 꿈을 꾸어주었고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끝까지 절망으로 가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같은 과였기에 서로가 밑바닥일 때도 끝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찾아왔고 함꼐 해 주었다.


그리고 기꺼이 같은 과라는 걸 아는 순간 루이사에게 그리고 루이사는 다른 아이를 알아보고 손을 내민다.


화가의 그림이 인정 받을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묘비에 그렇게 쓰려고.

사랑해. 그리고 널 믿어.

우리가 서로에게 항상 했던 말이거든.

193p


사랑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사랑해, 그리고 널 믿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들.

이들의 우정은 이미 한 폭의 그림이었고 위대한 완성이었다. 그 우정이 그림이 되었고 끝내 기적을 만들어냈다.

나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을까?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저 사랑해. 널 믿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이 소설은 그걸 충분히 담아낸다. 이미 나이 먹은 나는 소설 속 우정을 찾을 수 있는 행운은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나와 같은 과'를 만나면 서로 안아주고 싶다. 힘내라고. 그게 이미 어른이 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누군가가 유난히 그리워진다. 소식이 끊긴 오랜 친구들이 유난히 보고 싶어진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서로 사랑한다고, 널 믿는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