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월이다.

내내 한파 속에서 두꺼운 옷을 입으며 추운 겨울을 견뎌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봄이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내 앞에 봄에 맞춰 도착한 책들이 있다.



첫 번째 책은 한강 작가 독서모임 멤버들과 함꼐 읽고 있는 단편소설 《노랑무늬영원》이다.









봄을 담았다고 했지만 사실 한강 작가의 책은 봄과 어울린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다소 무거운 한강 작가의 《노랑무늬영원》 은 봄이라고 하기엔 무거운 책이다. 그럼에도 봄을 닮았다고 말하고 싶은 건, 그럼에도 살고 싶다는 몸부림이 있기 때문이다.

살고 싶은 희망. 그래도 회복되고자 하는 몸부림.

그 몸부림 속에 파란 돌을 줍고자 하는 그 몸부림이 희망을 말하는 것 같기에 나는 봄을 닮았다고 말하고 싶다.


두 번째 책은 백수린 작가의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의 소유자 백수린 작가님의 소설집은 하나씩 천천히 읽고 싶은 책이다. 책 제목처럼 봄밤에 홀로 남은 시간 한 편씩 조용조용 꺼내고 싶은 책이다.

책 속에 나오는 작가의 말을 먼저 나누고 싶다.



탄핵으로 혼란한 정국, 온갖 사고가 끊이지 않고 경제 상황은 갈수록 좋지 않다.

예전과 같이 봄의 정취를 느껴볼 여유가 없는 지금 우리는 추위에 너무 익숙해져 봄이 온다는 사실도 잊고 있다.

상황이 갈수록 안 좋아지다보니 우리가 이 어려움을 통과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꿈도 꾸지 못한다.

이런 시국에 백수린 작가는 용기내어 말한다.


겨울의 한복판이라도

봄을 기다리기로 선택할 수 있다고.

봄이 온다고 믿기로 선택할 수 있다고.


그래서 소설의 배경이 겨울인데도 일부러 '봄밤의 모든 것'이라고 정했다는 작가의 말을 들으며 다시 용기를 내 본다.

우리에게 봄은 오고 있다고..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의 봄은 온다고 믿기로 한다.


마지막 책은 <친밀한 이방인>으로 유명한 정한아 작가의 소설 《3월의 마치》










3월인 지금 한없이 잘 어울리는 책이다.

노년 여배우 이마치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자기 치유로 나아가는 사이코드라마'라는 부제가 내 마음을 강하게 잡아당긴다.


시인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제목처럼 우리는 이미 봄이 왔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들을 나열하다보니 어느 누구보다 우리는 봄이 오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하니 이 모든 희망을 담은 책 한 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일홍 에세이 《행복할 거야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제목 그대로 이대로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하고 싶다.

나도 그리고 모두 행복만 하길 바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백수린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끝까지 봄이 온다고 믿어야만 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추운 겨울 한복판이다 하더라도 봄은 찾아온다고 믿어야 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절규했지만 끝내 봄이 찾아왔듯

우리의 힘든 삶에도 끝내 봄은 올 것이라고 믿어본다.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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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치매 어르신을 돌보며 인생을 만납니다 - 10년 동안 치매 어르신들과 함께하며 얻은 삶의 지혜
서은경 지음 / 설렘(SEOLREM)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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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살고 있는 수십 억 명의 사람들 중 같은 나라 대한민국에 살고 대한민국의 수천 명의 사람들 중 인연이 닿을 확률은 어떻게 될까? 더구나 그 인연이 다른 모임에서의 만남도 아닌 순수한 온라인에서 인연이 되기 위해서의 확률은 더 낮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타인과 인연을 맺는다는 건 낮은 확률을 뚫고 찾아온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 기적 중 하나가 바로 에세이 《오늘도 치매 어르신을 돌보며 인생을 만납니다》의 작가 서은경 간호사님이다.  블로그 인연 3600명의 인연 중 한 명이니 3600 대 1의 확률을 뚫고 찾아 온 기적이다.


블로그에서는 '치와와'님이라는 닉네임으로 이 분을 알게 된 건 단순히 '경로당'이라는 한 글자였다. 그 글자가 아니였다면 나는 이 분과의 인연을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온 가족 호주 여행을 계획하며 남편이 투덜거린 '경로당 투어'  한 단어를 그 분의 어르신에 대한 관심의 촉이 발동하여 기적을 뚫고 찾아왔으니 말이다. 


하나의 글이 계기가 되어 서로를 알게 되며 내가 서은경 작가님의 블로그를 보며 처음에는 '어라?' 했던 마음이 점점 탄성으로 변하게 하는 데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이 분은 찐이다라는 생각과 함께 출간 준비부터 출간 소식까지 기다리며 보게 된 나를 설레게 하는 분이다. 


사심이 담긴 저자 설명이 너무 길었다. 


에세이  《오늘도 치매 어르신을 돌보며 인생을 만납니다》 는 서은경 작가의 10년간 요양병원에서 치매 어르신과 함께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작가의 이야기이다. 



누구에게나 치매란 무섭다. 이름만 들어도 치솟는 두려움과 함께 우리는 치매에 대한 배척 또는 편견에 둘러싸이게 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건만 하늘을 탓하게 되고 애써 부인하고자 한다. 어디 그게 당사자나 또는 보호자의 일일 뿐일까? 

쉬운 일반 업무를 해도 되건만 치매 어르신을 돌보는 돌봄 간병사나 간호사 일을 하는 경우에도 왜 굳이 이 힘든 길을 택했느냐는 주위의 나무람이 돌아온다. 남들이 가지 않으려고 하는 길 왜 굳이 고생길을 자처하느냐며 나무라기 일쑤다. 


서은경 작가 또한 마찬가지다. 좀 더 쉬운 일로 갈 수 있을지언정 어르신들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작가는 어르신들의 선의를 끄집어낸다. 행동심리이상 증상으로 예상치 못한 불상사가 돌발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이 다반사다. 실습하는 학생들마저 묻는다. 


"선생님은 왜 여기 계세요?" 


왜 나는 여기 있는가?  작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답해간다. 


거부 반응이 심한 이화 어르신이 '내 딸 하자'라며 생긴 특별한 라포를 시작으로 서은경 작가는 어르신들과의 관계를 쌓아간다. 


이 곳에서는 돌려줄 것도 받을 것도 단 하나밖에 없다. 바로 '사랑'. 


현상 유지가 최선인 현대 기술의 한계인 이 질병 앞에 사회는 이 병을 '물리쳐야 할' 대상으로 보지만 작가는 '더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 일을 위해 저자는 어르신들의 안에 숨겨져 있는 사랑을 발견하여 끄집어낸다. 


그 사랑을 발견함으로 어르신을 좀 더 건강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저자가 어르신과 함께 하며 느끼는 일의 가치였다. 



이 책은 치매 어르신의 '돌봄'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는 이 '돌봄'이라는 의미를 곰곰히 생각해본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돌봄을 받거나 돌보는 일을 하지 않은가? 


나 역시 엄마로서 아이들을 돌본다. 그리고 이제 노쇠해져가는 부모님의 돌봄을 걱정한다. 직장에서도 상사의 돌봄을 받고 동료들을 돌보기도 한다.  책 속에서 저자가 말한 간병사의 마음과 태도가 어르신의 상태에 반영이 된다는 글을 보면서 나는 자문해본다. 


"나는 내 돌봄의 대상을 잘 돌보고 있는가?" 


나는 내 아이들에게, 또는 내 일을 잘 돌보고 있는가? 


부끄럽지만 그 질문에 자신있게 답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저자가 설명하는 한국 돌봄의 현실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까 생각한다. 그건 우리가 일상의 돌봄에서부터 가치를 적게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돈을 벌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노동이 평가절하되는 육아와 가사 노동과 같은 일반 돌봄부터 이 사회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상에서부터 인정하지 않는 돌봄의 현실이 치매 어르신들을 향한 돌봄의 현장은 가야 할 길이 더욱 멀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길을 가야 하는가? 


저자를 보면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의 천장미 간호사가 한 말이 떠오른다. 


알아주지도 않는데 환자를 돌봐야 하느냐는 재원샘의 한탄을 들으며 천장미 간호사는 말한다. 


"할 수 있으니까요. 할 수 있는데 안  할 이유가 없잖아요." 


비록 고된 일상이지만 어르신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데 안 할 수가 없다는 저자. 


목적지는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곳이어야 하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꿈 어르신을 위한 센터를 향해 달려나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부끄러워진다. 과연 나는 내 길에 자신있게 답하고 있는가. 

내 일상 돌봄의 의미부터 내가 가고자 하는 일에 그리고 지금의 일에 진심으로 임하고 있는가를 계속 질문하게 된다. 

평소에도 이웃으로 작가님을 응원해왔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작가님의 말을 인용해 말해본다. 


"어떻게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작가님과 함께 세워질 센터 건립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깊은 존경심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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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왜 더 부자가 되는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로버트 기요사키 지음, 오웅석 옮김, 톰 휠라이트 세무 어드바이저 / 민음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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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돈‘이다. 돈을 위해 일하지 말고 돈이 자신을 위해 일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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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왜 더 부자가 되는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로버트 기요사키 지음, 오웅석 옮김, 톰 휠라이트 세무 어드바이저 / 민음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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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많은 재테크 전문가들이 이제 막 시작하려는 초보자들에게 권하는 책이 있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책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이다. 

1996년에 쓰여진 이 책은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에게 영향을 미친 두 아버지들의 가르침을 비교하며 제대로 된 금융마인드로 쓰여진 이 책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경제공부에 필수 기본서가 되었다. 


먼저 로버트 기요사키는 두 책의 비교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초등학교라면 

이 책은 대학원이다. 

로버트 기요사키 

부끄럽지만 나는 이 책을 구입하기는 했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음을 밝힌다.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의 신작 『부자는 왜 더 부자가 되는가』를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대학원급 교육이라고 강조하고 먼저 기본서를 읽어볼 거라고 권한다. 

하지만 나는 기본서를 읽지는 못했기에 이 글에서는 내가 읽은 부분만 정리하고 추후 두 권의 차이점을 남기는 글을 쓰고자 한다. 


초등학교 과정인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와 대학원 과정인 『부자는 왜 더 부자가 되는가』 를 비교하면 우리는 차이를 좀 더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기본서인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지 않았지만 목차를 통해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게 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기본적인 내용이 저자의 신작 『부자는 왜 더 부자가 되는가』 에 상당부분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두 책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 


『부자는 왜 더 부자가 되는가』 의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톰 휠라이트'는 누구인가? 바로 로버트 기요사키의 돈을 관리해주는 재무 매니저 회계세무 전문가이다. 


2002년부터 로버트 기요사키 부부의 재무를 관리해주는 톰 휠라이트는 이 책에서 단순히 서문 역할을 하지 않는다. 로버트 금융사키가 '투자자'로서, 또는 '부자'로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다면 톰 휠라이트는 금융 전문가로서, 세무 전문가로서 바라본 저자의 이론을 보충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은 로버트 기요사키와 톰 휠라이트의 공동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부자는 왜 더 부자가 되는가』 에서 줄곧 비판하는 책이 있다. 


바로 <이웃집 백만장자>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책 역시 읽지 못했다) 


웃로버트 기요사키는 <이웃집 백만장자>의 시대는 이미 끝났음을 강조한다. 저자가 말하는 '이웃집 백만장자'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이 조언들을 보면 의아할 수 있다. 


학교와 일자리는 이해할 수 있다. 학교와 일자리만으로 부자가 되기 힘든 세상인 건 요즘 초등학생도 다 아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저축과 빚을 갚고 주식 장기 투자의 이웃집 백만장자의 시대는 맞지 않다는 그 말은 내게 충격이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서도 저축하는 사람은 '패배자'다라는 이론과 '집은 자산이 아니다'라는 이론을 로버트 기요사키는 『부자는 왜 더 부자가 되는가』 에서도 줄곧 이용해 나간다. 



이웃집 백만장자들은 이미 몰락했다며 이 이론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대에 맞는 금융의 법칙. 그 법칙은 무엇일까? 저자는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주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먼저 저자는 부의 법칙을 알기 위해서 '금융의 역사'를 꼭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저자가 인용하는 그래프가 있다. 

1895년에서 2015년까지 산업평균지수를 살펴볼 때 미국 경제의 침체기가 언제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 


저자는 그 때를 바로 정부가 '돈을 대량으로 찍어낼 때'라고 말한다. 


미국정부가 '양적 완화'일 떄는 소비를 촉진하고 산업을 부양하기 위함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역으로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돈을 찍어낼 떄마다 부자만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진다. 


왜 그럴까? 로버트 기요사키가 이 부분에서 '저축하는 사람은 패배자'라고 하는 이유이다. 


돈은 정부가 계속해서 찍어내게 되어 있다. 계속 찍어내게 되면 돈은 희소성이 떨어지니 저축해서도 값어치가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저축하는 사람은 패배자이다. 그래서 부자는 '돈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부자들은 어떤 점에 강조할까? 


여기서 저자가 자신의 오랜 세무 회계 파트너 톰 휠라이트를 공동 저자로 초대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톰 휠라이트는 부자들이 '세금 감면'을 어떻게 이용하며 돈을 벌어들이는지를 알려준다. 


돈을 많이 벌어 그에 응당한 세금을 내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도덕률 대신 돈을 벌되 세금 감면 혜택을 이용해 세금을 덜 내고 돈을 더 축적하는 것. 


저자가 책에서 줄곧 강요하는 부의 계급에서도 세금 내는 비율을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톰 휠라이트는 세무 회계사로서 로버트 기요사키가 세금 감면을 위해 어떻게 투자하고 있는지 간단하게 설명해준다. 

더 벌고 덜 내는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오류라고 말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예전에 만났던 보험 설계사 분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 분은 잘 사는 사람들과 상담을 할 때와 나와 같은 보통 사람일 때의 상담의 종류가 다르다고 했다. 보통 일반인들은 연말정산 또는 보험 혜택에 집중하는데 반해 부자들은 '세금 감면' 에만 집중한다고 한다. 당연히 보험 설계사들이 그들에게 내미는 상품도 다를 수 밖에 없다. 그 대화를 떠올리며 역시 부자들은 오랜 시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부자는 왜 더 부자가 되는가』 에서 강조하는 건 한 가지이다. 


제대로 된 '금융교육'


돈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금융교육이 저자가 말하는 이 책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세금을 적게 내는 전문투자자 계급인 I 부분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말한다. 곧 이는 저자는 금융 교육을 강조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정부가 세금을 내게 하는 방법이 아닌 세금을 지원하게 해 주기 떄문이다. 


그 중에 하나로 저자의 경험을 비롯하여 '포르쉐 경제학'을 말한다. 포르쉐 자동차를 구매하기 위했던 경험에서 저자의 부채를 내서 임대수익을 통해 포르쉐를 저렴하게 구매한 단계를 가르쳐준다. 그렇지만 문제는 임대수익을 내기 위한 한국의 세법이 달라 과연 이 부분이 한국에 통용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자들이라면 임대료가 아니라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하고 글에 대한 리뷰는 다시 쓰여져야 함을 고백한다. 

먼저 저자가 권유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다시 읽어 두 권의 책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고 

저자가 비판한 <이웃집 백만장자>를 읽지 않았기에 저자의 비판점과 내 생각을 다시 비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런 로버트 기요사키의 비판을 인식하고 있어서인지 20년이 지나 <이웃집 백만장자>의 후속편 <이웃집 백만장자 / 변하지 않는 부의 법칙>도 출간되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나는 다른 세 권의 책을 읽고나서 말할 것이다. 


세무와 부채를 이용한 금융 교육이지만 서문에서 많은 힘을 투여한 느낌이라서 정말 금융 교육을 알려줘라고 하기엔 아쉬운 부분이 많다. 만약 한국판 세무 전문가가 미국에 비해 한국형 세무 전략도 알려주는 설명을 추가했다면 독자들이 이해하기 좀 더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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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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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을 겪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말한다. '빨리 잊고 이별의 상처를 극복하라고.'

누군가를 하늘로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말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라고.'

세월호와 같이 10년이 지나도 애도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슬픔이 극복해야 할 대상일까?'

슬픔조차도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보여지는 이 시대를 보면서 씁쓸했다. 그 슬픔을 이겨내라는 말은 오히려 우리가 상대에게 깊은 애도를 건너 다음의 강으로 건너가지 못하게 해 준다.

예소연 작가의 소설 《영원에 빚을 져서》에서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지피지기는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을 잘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슬퍼할 수 있는 것도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영원에 빚을 져서》 에서는 주인공 세 친구가 나온다.

동이, 혜란, 석이.

셋은 대학 시절 캄보디아 봉사활동에서 만난 사이다.

이 세 명의 친구는 동이가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상을 치른 후 얼마 되지 않아 혜란으로부터 석이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실종 장소는 이들이 봉사활동을 갔던 캄보디아. 동이와 혜란은 그들의 추억의 장소 캄보디아로 가서 그들과 친하게 지냈던 학생 삐썻을 만나며 그들의 시절이 다시 소환된다.

《영원에 빚을 져서》 는 우리 시절의 슬픔들이 소환된다. 캄보디아에서 세월호 참사 사건을 듣게 되고 캄보디아 학생 삐섯은 캄보디아에서 있었던 꺼삑섬 사건을 들려준다. 물놀이 축제에서 다리에 끼워 죽은 사람들. 세계 최악의 압사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된 "프놈펜 압사 사건" 이야기를 해 준다.

물에 빠져 배가 침몰한 사건과 다리에 끼워 압사된 죽음.

그 사건을 들으며 세 친구는 죽음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뭐 그런 죽음이 다 있어."

그런 죽음이 다 있냐는 질문.

그 질문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주류들이 주로 하는 이야기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사고나 사건을 접할 때 그 종류를 파악하고 빨리 단정지어버리려는 것. 이태원 참사 사건도 그랬고 세월호 참사 사건도 그렇다.

하지만 슬픔에 결이 다를 수 있을까? 세월호가 침몰한 슬픔도 다리에 끼워 압사된 죽음도 결국 슬픔은 한 종류일 수 밖에 없다.

누군가를 잃고 떠나보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같고 다름을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왜 슬픔을 구분하려 하는가?

동이, 혜란, 석이 세 친구들 중 슬픔에 가장 감정이입이 많이 되며 공감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은 '석'이었다.

그리고 세 친구 중 가장 거리감을 두고 지켜보는 사람이 '동이'였다. 그런데 세 친구 중 가장 힘든 시절을 사는 사람 또한 '동이'이다. 가장 형편이 안 좋고 어머니 오랜 투병 생활로 힘들어한 사람이 동이였다.

왜 작가는 슬픔에 가장 거리감을 두는 '동이'에게 안 좋은 상황을 허락했을까?

동이에게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다. 힘들게 대학에 다니고 캄보디아에서 돌아와서도 홀로 엄마 병간호를 하면서 자신이 남들보다 더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엄마가 살아계실 때 최선을 다했다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동이는 혜란의 흔적을 찾으면서 엄마와 함께 있었던 그 시절을 생각한다.




자신은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가늠하려고' 했음을.

상대방의 마음과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상대방의 통증을 '가늠하려고' 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가늠하려고 하다보니 슬픔에 기준을 두게 된다.

어떤 슬픔은 빨리 극복할 수 있는 종류이고 어떤 슬픔은 극복하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리는 종류이다.

그리고 그 정한 기준하에 우리는 슬픔을 대하고 상대방에게 이만해도 되지 않겠느냐며 빨리 일어서라고 독촉한다.

그 기준과 독촉 속에 슬픔의 당사자들은 올바른 슬픔을 해내지 못한다.

그 기준 속에 우리는 슬픔의 당사자들을 멀리하게 된다. 그런데 멀리하게 되면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건너보는 마음, 살펴보는 마음, 내일을 살기 위해 다짐하는 마음들."

지나간 상처를 복기하는 건 쉽지 않다. 세월호 사건도, 5.18 사건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모두 그 시절은 고통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잊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왜 그 시절의 기억을 추적하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바로 마음 때문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살피고 건너보며 그 고통 속에 그럼에도 살아보자고 다짐하며 위로하는 마음들. 그 마음들이 사라져간다. 슬픔을 빨리 잊어야만 하고 극복하려고만 한다면 우리가 상대방을 살필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그 마음을 너무 많이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제 예소연 작가는 가장 큰 질문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건너보고 살펴보는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슬픔을 믿을 거야.


슬픔을 극복하기보다 오히려 슬픔을 믿어야 한다는 역설.

처량하고 처절하고 절실한 것들을 믿는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슬픔을 견디며 함께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들린다.

슬픔이 없고 기쁨만 있는 사회는 우리 사회의 아픔을 온전히 포용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을 배척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슬픔을 견디어내는 과정 속에서 '건너보고 살펴보며 다짐하는 마음들'을 가질 수 있다.

제주 4.3사건, 광주 5.18, 세월호 참사, 이태원 압사 사건.

수많은 비극이 계속된다. 없으면 좋겠지만 또 언제 우리에게 이런 슬픔이 찾아올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많은 비극 속에서도 우리는 아직도 슬픔의 힘을 믿지 못하기에 이해하기보다 가늠하고 판단하려고만 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슬픔을 겪어야 이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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