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은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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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기에 꼭 기대하는 문학상 작품집이 있다. 바로 '김승옥문학상'이다.

10년 이상의 중견작가, 작가명을 가린 작품만으로 심사하는 블라인드 심사로 유명한 이 문학상은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매년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게 된다. 올해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의 대상의 영예는 최은미 작가의 『김춘영』을 비롯해 황정은 작가, 강화길 작가, 김인숙 작가, 배수아 작가, 최진영 작가 등 이미 알만한 굵직한 작품들을 써낸 작가들이 수상의 명예를 올랐다.


먼저 대상을 차지한 최은미 작가의 『김춘영』을 기대를 가지고 보게 된다. 화운령에서 있었던 역사를 살아낸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프로젝트. 소설 속 면담자인 박정윤은 김춘영씨와의 몇 차례 인터뷰 후 마지막 인터뷰만을 남겨두고 있다마지막 인터뷰때 김춘영씨와의 깊은 인터뷰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연구팀에 전화를 거는데 동료 연구가는 그에게 말한다.

박선생, 우리가 쓰는 건 라이프 스토리가 아니고

라이프 히스토리야.


김춘영씨의 생애에서 화운령의 역사적인 장면을 포착하라는 말. 개인적인 김춘영씨의 라이프 스토리가 아닌 역사의 굴곡이 보이는 라이프 히스토리를 찾아야 한다는 연구팀의 압박. 하지만 김춘영은 역사의 현장이 아닌 이 마을에서 술을 팔며 살았던 평범한 여인이었을 뿐이었다.

소설을 보면서 생각한다. 라이프 히스토리와 라이프 스토리는 상극인 것일까?

우리는 라이프 스토리들이 모여서 라이프 히스토리가 된다는 걸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크고 굵직한 생애만이 인정을 받고 영웅대접을 받는 시대에 개개인의 사소하지만 평범한 나날들은 왜 작게 취급하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 자신도 힘들게 현장을 살아왔지만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화려하고 멋진 이미지에 기가 죽고 나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것이 아닐까?

최윤미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투사 없이, 역사 현장이라는 접점이 없어도 온전히 한 개인의 생에 언어를 입히는 것.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그 답은 개인이 라이프 히스토리만을 갈구하지 않고 라이프 스토리를 중시하게 될 때, 평범한 삶이 소중함을 받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지 않을까라고 답하고 싶다. 그 답은 연구팀이 아닌 평범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라이프 히스토리가 아닌 라이프 스토리들이 존중받는 시대. 그 답의 실마리를 나는 최진영 작가의 <돌아오는 밤>에서 찾는다. 챗지피티, 검색, 핸드폰으로 연결되는 매체 기술에 대한 설명은 내가 평론가가 아니므로 제쳐둔다. 내가 최진영 작가의 글에 주목하는 부분은 친구 이향기가 죽고 그의 동생을 만나고 돌아오던 길, 지하철은 끊기고 핸드폰은 방전되고 다리는 다쳐서 제대로 걸을 수 없다. 영국에서 오는 길이라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어두운 밤길을 걷는데 그가 만난 건 도움의 손길이 아닌 강도 3인조였다. 돈도 빼앗기고 신분증도 빼앗는 그들은 말한다. 네 신분을 알고 있으니 경찰에 신고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그 순간 끝장이라고. 폭력과 협박 속에 간신히 도망쳐온 그녀는 빈 상가 건물에서 112에 신고하며 다음을 기약한다.

힘들어하던 그녀에게 항상 든든한 의지였던 친구 이향기가 남긴 편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다시 시작해.

비록 폭력과 협박을 받은 후 다시 시작하라는 향기의 유언과 같은 편지가 더욱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기죽지 말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용기. 우리가 끝까지 행복을 추구하는 건 권리라며 상황이 어렵더라도 그 권리를 포기하지 말라는 친구 향기의 말은 어떤 삶 속에서도 우리가 행복해야 할 이유를 제시해준다.

그 밖에도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무관심으로 멍청해서 생겨나는 평범한 악의 모습들을 그린 황정은 작가의 <문제없는, 하루>는 정말 우리의 하루가 문제없는 하루가 맞는지를 정면으로 물어봐주어 역시 황정은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외국어와 해석이라는 사실로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 김혜진 작가의 <빈티지 엽서> 또한 좋았다. 배수아 작가의 글에서는 심사위원의 말대로 나는 종종 길을 잃었고 다시 길을 찾기 위해 다시 읽어야 할 듯하다.

가을이 깊어간다. 올해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은 가을을 통과하기에 더없이 좋은 소설집이었다.

이 가을을, 그리고 내 삶을 깊이 들여다보며 소중하게 만들어주도록 작은 길을 터 준 느낌이라고 할까.

소설을 읽으며 나의 라이프 스토리를 더 사랑하고자 용기를 내게 만들어준 이 소설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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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이가 피아노 학원을 등록했습니다.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지 2주째. 

기초인 바이엘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직은 쉬운 단계이기 때문에 피아노 치는 걸 즐거워 합니다. 


아이보다 한 학년 어린 동생이 있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제 아이보다 피아노를 어린 시절부터 배워서 체르니를 배우고 있다고 합니다. 피아노를 치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체르니를 치게 되면 수준이 급격하게 높아집니다. 많은 아이들이 피아노를 포기하는 부분도 바로 체르니 과정입니다. 체르니를 배운다는 3학년 동생은 차마 그만 두지 못하고 선택한 방법은 '도망'이라고 합니다. 피아노를 치는 대신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숨어 매일 선생님이 그 학생을 찾느라 숨바꼭질 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묻습니다. 


너는 피아노 치는 게 좋아? 그러면 재미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다시 말합니다. 


네가 쉬운 걸 칠 때는 재미있다고 말 할 수 있어. 

하지만 힘든 과정까지 올라가면 그 과정까지도 견디고 즐길 수 있어야 정말 재미있고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그 동생은 어려운 체르니를 치기 싫어 도망다닌다는 건 피아노를 좋아하지 않는 거야. 정말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건 싫은 부분까지 감수할 수 있는 것. 그걸로 결정할 수 있어. 


제 말을 듣고 나면 아이는 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아직 두고 봐야 하기에 지금은 그저 아이를 지켜 볼 뿐입니다. 

  어제 글쓰기 수업을 들었습니다. 수업 마지막 클로징,  한 장면이 들어옵니다.


빛이 없어도 나아갈 수 있는가? 


타인의 칭찬보다, 기대가 없어도 성과가 없는 어둠 속에서도 나아갈 수 있는가라는 걸 묻는 강사님의 질문에 마음이 두둥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 질문해보았죠. 과연 나는 빛이 없어도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인가?

제 삶의 슬로건은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겠습니다> 입니다.
더 좋아해야만 끝까지 할 수 있다라는 걸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 앞에 서 있자니 다시 생각합니다. 아이에게 힘든 걸 좋아해야 한다고 그걸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거라고 하지만 과연 나는 힘든 걸 좋아하나? 하지만 자신 있게 YES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게 과연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걸까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확실하고 강력하게 종교적 선을 추구한 조시마 장로는 그의 유언에서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저 한 우연한 순간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사랑해야 한다. 

순간적인 사랑이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고, 심지어 악당조차도 그런 사랑은 하는 법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한 순간만을 좋아하는 사랑. 그 사랑은 악당조차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영원토록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짜 사랑이죠. 역사를 돌아보면 위인전의 인물들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귀가 안 들린 가운데서도 끝까지 음악을 만들어낸 베토벤, 가난 속에서도 음악을 사랑한 모차르트, 귀양 살이 중에도 끝까지 글을 쓰고 자신을 단련한 정약용 등.. 그 분들은 어둠 속에서도 나아갈 수 있었기에 사후에라도 빛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영원을 사랑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혜진 작가의 소설 《오직 그녀의 것》에서는 편집자 홍석주가 주인공입니다. 












  많은 편집자의 로망이기도 하지만 편집자 홍석주 또한 작가를 꿈꾸며 글쓰기를 배웠습니다. 글쓰기를 포기했을 때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또는 행운이 없어서. 또는 바쁜 회사 생활에서 찾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압니다. 글쓰기를 포기한 이유는 순전히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요. 



 홍석주는 한순간 사람을 사로잡는 뜨거운 열정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 한순간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말한 순간적인 사랑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적인 사랑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모든 걸 좋아하는 것. 그것을 일깨우고 유지하는 의지를 가질 수 있는 대상만이 오직 자신의 것, 그녀의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걸 소설 속 편집자 홍석주는 책 만드는 일에서 찾았고 편집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좋아한다는 것. 그걸 말할 때 저는 떠오른느 드라마가 있습니다. 
김태리씨가 펜싱 선수로 출연한 드라마 <스물 다섯, 스물 하나>입니다. 
한 때 잘 나가는 펜싱 기대주에서 그저 그렇고 그런 펜싱 선수가 되었던 나희도. 
그녀는 자신의 신세가 슬프지만 펜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좋아서.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죠. 

"난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거든. 
  지고 실패하는 데 익숙해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중 

올림픽 출전이라는 꿈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또는 지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것. 

지고 실패하는 것마저도 실망하지 않고 그 과정까지 사랑하는 것.
그 사랑과 의지가 나희도를 끝내 펜싱을 끝까지 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저도 생각해봅니다. 
과연 나는 좋아하는 걸 끝까지 좋아할 수 있는가? 
내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이 과정을 끝까지 감내할 수 있는가? 

좋아하는 걸 더욱 좋아하겠습니다. 
이 말을 다시 정정해봅니다. 
빛이 없더라도,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더 좋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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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식기
아사이 료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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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하게 살 수 없다면 당신의 삶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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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식기
아사이 료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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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체로부터 해당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사이 료의 소설 『생식기』를 읽게 된 배경은 책 표지 뒷면의 한 줄 이었다.


정해진 길을 벗어난 삶은 실패작인가요?


이제껏 인간 이외 다른 종(種) 들이 인간을 탐구하는 인간탐구하는 소설은 많았다.

동물 또는 사물의 입장에서 인간의 행동을 통해 말하는 소설들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 『생식기』 처럼 한 남성 생식기, 더구나 동성애자 남성의 생식기가 화자가 되어 인간을 말하는 소설은 이 소설이 최초가 아닐까?


먼저 나를 이 책으로 유혹한 한 문장을 생각해본다.

정해진 길을 벗어난 삶은 실패작인가요?

소설 속 화자인 남성의 생식기의 역할을 생각해보자. 이성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람이 자신의 재능에 맞게 그 재능을 쓸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도 그 재능을 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생식기의 역할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동성애자로 태어난 생식기의 주인공 다쓰 쇼세이에게 생식기는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특히 한국이나 일본과 같이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곳에서 동성애자 남자의 생식기는 정해진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쇼세이의 생식기는 묻는다. 정해진 역할을 벗어난 삶은 실패작인 거냐고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타인과 다른 삶들을 실패작으로 여겨지고 거부되어 온 다쓰야 쇼세이. 그가 택한 길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관심있는 척 '의태'하는 것이다. 동성애자라는 개체를 거부하고 혐오하는 이 시대에 굳이 헌신하고 싶지 않는 그는 열심인 척, 또는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그는 자문한다.

내가 왜?

이 사회가 나를 인정하지 않는데 내가 왜 이 사회를 위해 공동체에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래서 그는 최소한으로 일한다. 그저 자신의 정체성을 들키지 않고 먹고 살 경제적인 자립심이 있을 수 있을 정도로만 말이다.


아사이 료의 『생식기』 는 다쓰 쇼세이가 이 공동체의 발전에 헌신하지 않기로 한 배경을 상세히 설명한다. 쇼세이의 생식기의 설명을 따라가다보면 나라도 나를 거부한 이 사회를 위해 나를 바치고 싶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더 놀라게 하는 부분은 나도 그들의 다양성을 인정한다하지만 내가 인정한다고 하는 부분마저도 이성애자의 우월권이며 특혜라는 부분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들 자체의 존재가 왜 인정해 줘야 하는가?

소수자들은 이미 존재하는데 다수를 차지하는 이성애자들이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부인하는가?

이 강력한 질문 속에 나 역시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인정한다는 것조차도 철저하게 이성애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현재 조금씩 '다양성'을 말하며 소수자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그 역시 소수자가 만들어낸 분위기가 아닌 신의 역할을 하려하는 이성애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일 뿐이다. 그 분위기에 소수자들은 그에 맞춰 행동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만약 이 소설이 소수자인 다쓰야 쇼세이의 존재를 거부하는 사회라서 공동체에 봉사하지 않는 쇼세이의 행동을 합리화하는데 그쳤다면 이 소설은 그저 그렇고 그런 소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사이 료는 쇼세이와 같은 동성애자이면서 정반대의 행동을 택하는 직장 동료 '소우'의 존재를 통해 반전을 드러낸다.

부정형의 의사 표시는 아무도 안 봐 줘요.


비록 주변에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라 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달라질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비록 그들이 미울지라도 끝까지 노력하고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라도 공동체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소우의.

소우의 주장은 단지 소수자의 개념에서만이 아닌 이 사회의 무기력함과 불의에 진절머리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이 사회가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하지만,

정치가들이 다 그놈에 그 놈이지만, 어차피 이 사회의 불의는 뿌리뽑기 힘들지라도 단지 절망함으로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봐 주지 못한다. 최소한의 의사 표시라도 하지 않으면 철저하게 없는 존재로 보여질 뿐이다.

이 책을 읽은 이후 한 가지 질문만이 남는다.

[온전함] 속에 살 수 있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연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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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작가의 에세이 <책을 덮고 삶을 열다>에서 이자크 디네센의 <바베트의 만찬>을 이야기한다. 젊은 시절 젊은 장교 로렌스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마르티네, 

프랑스의 파리로 건너가 유명한 프리마돈나로 성공할 수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필리파. 마르티네와 필리파 자매에게 동화 속 해피엔딩과 같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야기들을 보며 작가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일인가 일어날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이것도 인생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그거야말로 내 인생 아닌가. 

늘 읽고 쓰고 아둥바둥 살아가고 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드라마라면 너무 지루한 이 인생도 인생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는다. 

















블라인드 심사로 이루어진다는 이 문학상에 최은미 작가의 <김춘영> 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화운령에서 있었던 사건을 조사하는 소설 속 나는 김춘영을 인터뷰한다. 구술자 김춘영과 마지막 면담을 남겨두고 있는 날, 4월에 눈이 쏟아진다. 구술자와 면담자와의 오붓하고 그들이 진정 원하던 내용을 풀어내려고 했건만 갑자기 내린 폭설 때문에 난데없는 불청객이 들어온다. 

등산하던 중 갈 곳을 잃은 부부, 정체 불명의 물체를 쫓다가 들어온 군인 2명. 


문제는 구술자 김춘영이 면담 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부부는 김춘영이 이 마을의 역사적 현장의 당사자, 즉 중요 인물인 것처럼 질문을 쏟아붓는다. 김춘영으로부터 역사 소설속에서나 볼 수 있는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기대한다. 그런데 김춘영은 그 역사 현장에서 한 발짝 떨어진 술을 파는 여자였을 뿐이었다. 화운령이라는 동네의 역사의 당사자가 아닌 김춘영은 사람들 앞에서 당황해하며 사람들을 피해 방으로 들어가게 된다. 


소설에서 면담자 박선생은 김춘영 할머니의 생애를 인터뷰하면서 조직의 압력을 받는다. 


박선생, 우리가 쓰는 건 라이프 스토리가 아니라 라이프 히스토리야. 



김춘영씨의 인생은 라이프 히스토리가 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인생에서 라이프 히스토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위인전에 나올 수 있는 인물들은 소수인데 반해 이름 없이 살아가는 라이프 스토리는 넘쳐난다. 


<책을 덮고 삶을 열다>에서 정혜윤 작가가 말한  '어떤 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런 라이프 스토리가 대부분이다. 


이게 인생이야기라 말할 수 있을까라고 우리가 묻는 건 '라이프 히스토리'만을 우선시하기 떄문이다. 그래서 개개인의 고유한 라이프 스토리가 묻혀버린다. 김춘영씨도 비록 술집 여자로 살아왔지만 한 여성으로서 그 시대를 살아낸 이야기는 라이프 히스토리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묻혀버린다. 우리 또한 화려한 인생들만을 바라보다가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의 라이프 스토리를 초라하게 여겨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해야 한다. 

일어날 줄 알았는 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그것도 인생 이야기라고. 

결국 라이프 히스토리는 라이프 스토리가 모여서 라이프 히스토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어제 미팅을 위해 광화문을 지나치던 중 교보문고에 붙은 한 문구를 발견했다. 




살아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난 이 문장을 모든 라이프 스토리는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라이프 히스토리가 아닌 라이프 스토리 자체가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 

완전하게 아름답지 않지만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라는 건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에 다다를 수 있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아마 나는 라이프 히스토리를 만드는 주인공은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만의 라이프 스토리는 아름답게 만들어 갈 수 있다.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라이프 스토리.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그래도 해나가고 있다는 나만의 라이프 스토리로 오늘도 아름다움의 한 조각을 맞춰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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