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리드 누네즈의 장편소설 <어떻게 지내요>를 읽는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의 원작인 이 소설을 조력 자살, 죽을 권리로 이해한다. 영화는 주로 본문인 친구 마사와 잉그리드의 관계에 주목했으니 소설 또한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죽을 권리, 잘 죽을 권리로만 생각한다면 이 책을 반절만 이해한 게 된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제목은 '어떻게 지내요'이기 때문이다. 


시몬 베유의 말. 


이웃을 오롯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어떻게 지내요?" 하고 물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생을 마무리하는 친구에게도 집중하지만 왜 여기에 전애인을 대비했을까를 고민한다. 


세상에 비관적인 전애인을 왜 끼워넣었을까? 


그건 고통을 끝내고 싶어 조력 자살을 준비하는 친구 마사의 태도와 대비되기 떄문이다. 


먼저 전애인의 태도를 보자. 


"여하튼 확실히 난 이제는 예전처럼 예술이 지닌 구원의 힘을 믿지 않아. 그런 걸 믿을 사람이 누가 있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봐. 난 인간이 옳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완전히 버렸어." 


전애인의 말에는 세상을 향한 어떤 걱정거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모든게 끝났다는 비관론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는 지구 위기를 걱정하지만 "어떻게 지내요"?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라는 공감대가 없다. 


반면 친구 마사는 다르다. 


"만사가 끔찍하고 미래에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다면 세상을 뜨기가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내가 사라진 이후, 한없이 풍요롭고 한없이 아름다운 세상이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견딜 수가 없어. 그마저 빼앗기면 위안이라고는 없는 거지." 


두 사람의 태도가 확연히 다르지 않은가? 


전애인은 모든 게 끝장난 마당에 토론해봤자 필요없다는 입장과 

내가 죽고 나서도 아름다운 세상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친구의 입장. 


과연 누가 이웃을 사랑하는 태도인가? 


영화 <룸 넥스트 도어>에서 잉그리드는 전애인에게 대답한다. 



전애인의 말대로 이 세상은 비극이다. 


이미 우리는 비극을 피한다는 이유로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를 만들어내고 '손절사회'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이 과연 비극을 피할 수 있나? 만약 그게 비극을 피하는 방법이라면 비극은 더 심각한 디스토피아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비극 속에서 살아나가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를 본다. 


황동만은 변은아의 코피의 의미를 알아차린다. 


"도와줘." 


도와줘라고 말하지 못해 코피를 흘리는 변은아. 



지금 우리의 모습은 '도와줘'라고 말하지 못하는 변은아처럼 혼자서 코피를 흘리고 있는 사회가 아닐까? 


황동만은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도와줘'라고 말하라고 한다. 


도와줘라고 말하는 느낌. 그건 무엇일까? 





구덩이를 피하지 못한다. 하지만 30미터 폭을 1미터로 넓혀주어 구덩이를 견디게 해 준다. 


자폭하고 싶어하는 당신을 구해내고자 건져낸 그 단어. 

나를 건져냈습니다. 


비극 속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건 도와줘라는 말 한 마디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서로 불쌍히 여기며 도와줘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어떻게 지내요"? 가 프랑스어로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라는 뜻이라면 한국어로는 "도와줘"라는 말이라고 말하고 싶다. 


도와줘. 

도와주세요. 

어떻게 지내요?

무엇으로 고통받나요? 


이 한 마디가 왜 이리 힘들까. 우리는 이 한 마디를 하지 못해 얼마나 홀로 더 많은 코피를 흘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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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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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까 생각하다보면 어떻게 살지 답이 나오거든요." 

- 드라마 판타스틱 대사 중에서 



몇 년 전, 사전의료연명의향서 를 작성하고 남편에게 통지했다. 이미 발급 끝났으니 만약 내가 불가피한 일이 발생할 경우 연명치료를 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또한 내가 죽는다면 수목장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내 결정에 웃으며 말했다. "그건 산 사람들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야."  그리고 남편은 그 질문에 대한  논의를 거부했다. 내 생명인데 왜 남편은 그건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하는 걸까. 몸이 아픈 사람은 자신에 대한 권리를 모두 빼앗기게 되는 것일까?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어떻게 지내요』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확장판이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의 원작소설이기도 한 이 소설은 말기암으로 조력 자살을 계획하는 친구 마사와 친구의 마지막을 동행하는 잉그리드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메인인 두 사람의 관계에만 집중하지만 소설은 잉그리드의 전애인의 비관론적 세계론, 그리고 잉그리드의 주위에서 노화와 죽음 등을 바라보는 두 가지 축으로 나뉘어져 있다. 왜 시그리드 누네즈는 두 친구의 이야기 외에도 주위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함께 나란히 가져갔을까? 


먼저 이 책을 말할 때 잉그리드의 전애인에 관하여 시작해야 한다.  기후위기 시대,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대통령 당선, 테크기업에 의해 잠식되어가는 부의 흐름, 전애인의 강의는 과격하다. 어느 논의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전애인은 질문을 받지 않으며 이 지옥 같은 삶에 아이를 낳는 것 또한 죄라고 여긴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기후위기는 심각해진다. 개천이 말랐다는 탄식 아래 결혼은 하되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들이 늘어간다. 자신에게 이득이 안 되는 사람은 쉽게 '손절'하는 시대. 노키즈존과 노실버존이 판치다보니 어느 출판사에서 <손절사회>라는 책까지 나왔다. 이미 이 시대는 소설 속 잉그리드의 전애인이 말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질문해야 한다. 비관하고 포기하는 쪽이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지인가? 


이 전애인의 비관론에 반대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말기를 살아가는 친구 마사이다. 






실날같은 희망마저 뺴앗기는 순간 우리에게는 아주 작은 위안마저도 사라진다는 사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비극적인 시대에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친구와 잉그리드의 관계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아간다.  잘 죽고 싶기에 조력 자살을 선택하는 친구. 


사람들이 이 병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영웅 서사를 만드는 방법밖에 없나 봐. 

생존자는 영웅이다. 어린아이라면 슈퍼 영웅이고. 그저 할 일을 하는 의사들까지도 영웅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하는 거야. 그런데 도대체 왜 암이 한 사람의 패기를 판단하는 일종의 시험이 되어야 하는 거지? 


이것이 싸우는 내 나름의 방식이라는 걸 사람들도 이해해야 해.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조력 자살은 허용되지 않는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라는 원론적인 말을 할 뿐이다. 하지만 그 말은 죽음 조차도 삶의 한 부분이라는 걸 부정하는 우리의 형태가 아닐까? 잘 죽고 싶은 소망도 자신의 삶을 잘 결정하고 싶다는 방식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잘 사는 것에 대한 논의는 있지만 잘 죽는 것에 대한 논의는 거부한다는 건 우리가 생의 한 부분만을 생각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은 결국 사와 함께 이어져 생사가 되거늘 우리는 늘 사를 거부한다. 그건 마치 비관론에 휩싸여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잉그리드의 전애인과도 같은 선택이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소설은 얼핏 보면 조력 자살하는 친구와의 동행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소설은 말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좀 빨리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과 좀 늦게까지 세상에 유예하는 인간의 동행이라고 생각해본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며 다만 시기에 차이가 있는 것 뿐이므로. 마지막을 향해 가는 인간들끼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건 결국 이 소설의 첫 장이자 제목이기도 한 시몬 베유의 말. "어떻게 지내요?"와 프랑스어 의미인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라는 질문이다. 힘든 이 시대 우리가 비극 속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건 서로가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는지 물으며 함께 견디는 것.  잉그리드의 고민을 들어주고 공감하며 안아주었던 피트니스 강사와 같은 사람만이 이 시대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전애인은 비극적인 결말을 말하는 것에 그친다. 해결책은 없다며 더 나아가길 거부하는 전애인의 한계가 명확한 이유는 오히려 사람의 삶을 더 지옥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보는 관계일지라도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며 위로해주는 강사와 같은 사람은 비록 비극적인 상황일지라도 더 나아가게 만든다. 인생의 말기를 살아가는 친구의 곁을 지켜주는 것이 비록 합법적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설을 잘 죽는 것에 대한 소설로 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비극적인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며 타인을 대할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잘 죽는 것에 대한 논의도 비록 겁이 날지언정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절망적인 뉴스만이 들려오는 이 때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말이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 


어떻게 지내요?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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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기쁨
멕 메이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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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쥐어주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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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기쁨
멕 메이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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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죽고 싶은 게 아니다.

뼛속 깊이 스며드는 피로, 극심한 공포로 인한 피로를 느끼며 나는 살아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야말로 바로잡아야 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죽고 싶지 않지만 살아 있으면 안 된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의 마음. 그걸 감히 짐작할 수 있을까?

활동이 왕성한 시기의 학창 시절, 느닷없이 찾아온 불청객처럼 우울증은 책상 밑에 숨게 한다. 여러 곳을 전전하며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아도 되풀이되는 상태. 이 우울증은 입체적 우울처럼 온 몸과 마음을 잠식한다. 괜찮을만하면 다시 찾아와 조롱한다.

멕 메이슨의 장편소설 『슬픔과 기쁨』은 극도의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려온 마사와 주변인물들의 이야기이다. 한 때가 아닌 인생의 3분의 2를 우울증에 시달려온 마사. 학창시절도, 첫 번째 결혼과 직장도 모두 내주어야 했을만큼 이 우울증은 마사라는 개인의 인생을 좀먹는다. 빙 돌아 비로소 찾은 사랑하는 패트릭과의 관계까지도 쉽게 흔든다.

소설에서 마사의 행동은 극단적으로 비춰진다. 그 극단적인 행동은 이제껏 인내한 패트릭과의 관계마저 위협한다.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사의 이야기를 읽으며 드는 질문은 하나이다.

이런 극단적인 무기력함을 병 때문에 무조건 용인하여야 하는가?

우울증이 모든 결과에 대한 보호막이 되어줄 수 있는가?

어쩌면 이런 질문을 하는 나 조차도 마사의 병을 비난하며 조롱한 첫번째 남편 조나선과 같은지 모른다. 자신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바로잡지 못하는 마사의 무기력함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남편 패트릭이 마사에게 말한 "당신은 어쩌면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아"라는 말처럼 말이다.

책 제목 『슬픔과 기쁨』에서 알 수 있듯, 마사의 병은 모든 삶이 슬픔으로 가득차 있는 우울이다. 아니 어쩌면 마사에게는 우울이란 이름보다 더 깊은 이름이 필요할 듯 하다. 패트릭을 사랑함에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상처주어야 하는 이 상태는 슬픔을 넘어 절망으로 돌아서게 하니까 말이다. 아이를 갖기를 그토록 소원했지만 아이 있는 삶을 바라지 못하는 그 마음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절친한 동생은 아이를 넷이나 가지고도 자신은 한 명의 아이마저 바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매순간 자신의 슬픔을 마주하는 것일 것이다.




좋았던 부분을 보지 못하는 것. 그것만큼 가장 불행한 인생은 없을 것이다.

소설 속 마사의 어머니의 직업이 왜 못쓰는 전자제품이나 고철을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조각가로 설정했을까 질문해본다.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제품도 다시 아름답고 훨씬 튼튼한 물건으로 변신시켜주는 것. 그건 결국 우리 모두의 인생과 동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사의 인생도 학창시절도 날리고 남편 패트릭도 떠나고 모두 끝난 것 같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더 좋은 인생으로 업사이클링 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환자 개인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 엄마 실리아에게 이모가 있었고 마사도 함께 한 아버지와 동생 잉그리드, 그리고 다시 손을 잡아 준 패트릭이 있듯이 개인의 인생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기 위해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주변의 인내가 필요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 역시 깊은 우울증에 잠식한 듯 하다. 그만큼 소설은 마사의 상태에 깊이 몰입하게 한다.

책 후반부까지 치달은 깊은 우울 상태에서 벗어나는 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부분은 많이 아쉽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도 그런 것이리라.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니까.

이 소설을 추천하기엔 몰입감이 심하다. 그렇지만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쥐어주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슬픔 속에서 한 가닥 기쁨을 볼 수 있는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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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디 할머니 - 소설가가 사랑하는 박완서 단편 베스트 10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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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들이 사랑하는 박완서 작가의 단편 베스트 10편을 모은 <쥬디 할머니>를 진작 읽었지만 이제서야 작성한다. 못 했다기 보다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박완서 작가의 단편에 대한 소회가 아직도 내게 벅차 오르기 때문이다. 


먼저 표제작인 <쥬디 할머니>를 읽는다. <쥬디 할머니>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왜 출판사에서는 이 소설을 표제작으로 정했을까? 그 부분은 소설 말미 반전 부분을 읽고 나서야 무릎을 치게 된다. 1981년에 발표된 시절을 봐야 한다. 여성에 대한 인권은 전혀 없던 시기. 여성은 무조건 희생되어야만 했던, 남성의 전유물이라고만 여겨졌던 80년대 쥬디 할머니는 그야말로 혁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란 건 좋은 거였다. 말을 하니까 한결 기운이 났다. 

그래, 난 다시 울타리를 칠 수 있을 거야. 새로운 울타리를. 

나는 다시 울타리를 칠 수 있을 거야. 할머니는 오로지 그 생각만 했다. 



희생양이 되기보다 자신의 서사를 멋있게 포장하는 쥬디 할머니의 당당함은 오히려 주변을 더 초라하게 만든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시대의 한계를 타개하기 위해 비록 거짓으로 쌓아올린 쥬디할머니의 울타리를 누가 욕할 수 있을까. 


이러한 모습은 <쥬디 할머니>에서뿐만 아니라 <공항에서 만난 사라>에서의 무대소 아줌마에게서도 드러난다. PX에서 물건을 뺴 돌리는 일에도 능하면서도 당당했던 무대소 아줌마. 

아부도 하지 않고 양키와 살림 차린 점원들에게 '쌍노메 베치'를 날리며 비웃는가 하면 영어 한 마디 못 해도 당당하고 과부가 되어서도 아이 셋을 데리고 미국에 가서 내 나라 말로 실컷 내 나라 욕하면서 살 거라는 무대소 아줌마의 모습은 쥬디 할머니의 당당함과 겹쳐진다. 


삼천만이 양키 덕을 입는 입장이거늘 그녀 혼자 그것을 거슬러 홀로 양키에게 덕을 베풀려 들다니, 그것은 얼마나 고독하고 얼토당토않은 짓인가. 그렇지만 그녀라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인물들을 보며 마흔까지 평범한 가정 주부로 있다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한 박완서 작가가 쓴 여성들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멋있고 당찬 여성들이다. 어찌 이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박완서 작가의 인터뷰를 모은 <박완서의 말>에서 박완서 작가는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말하면서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안이한 태도, 속물근성과 기회주의적 속성 등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 글을 보았다.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해서도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던 작가의 신념은 <도둑맞은 가난>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집안이 망하고 망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 스스로 생을 마감해버린 가족들의 죽음 앞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은 나는 그 와중에도 공장에서 만난 상훈과 사랑을 하며 삶을 이어간다. 상훈과의 미래를 꿈꾸고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훈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는 자신의 가난마저도 있는 자들의 장난감같은 것이라는 걸 알게 되는 장면은 우리가 우스개 소리로 말하는 '개천에서 용이 말라버렸다'라는 희망 멸종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가난이란 무엇인가. 결국 마지막 단편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틀니>가 아닐까. 


월북해버린 오빠로 인해 공무원인 남편의 출세길이 막혀 남편의 구박을 받고 있는 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친정엄마, 언제 북에 있는 오빠가 와서 위험해 질 지 모르는 살얼음판과도 같은 현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가장 무거운 틀니가 되어 괴롭히는 게 아니던가. 

시대가 지났어도 우리의 틀니는 또 다른 형태로 둔갑하여 우리를 무겁게 하고 있다. 누군가는 실직으로 누군가는 질병으로.. 그 틀니는 불안의 형태만 바뀔 뿐 틀니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박완서 작가의 단편집 <쥬디 할머니>를 읽으며 시대를 뛰어 넘은 여성들의 모습을 보고 시대가 지났어도 또 다른 모습으로 변주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좋은 작품이란 이런 것이리라. 고전이 시대가 지나도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해 주는 것처럼 한국의 고전을 만들어낸 박완서 작가의 작품 또한 7-80년대에 쓰여진 작가의 작품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기에 결코 손색이 없다. 이 단편들을 통해 나는 다시 고전의 의미를 되새긴다. 박완서 작가는 분명 한국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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