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늘 그 모양이다. 죽은 지 오래될수록 산 사람들에게 끼치는 죽은 사람들의 영향력은 미미해진다. 세월이 삶을 풍화시킨다. 세월이 죽음을 풍화시킨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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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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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의 사망으로부터 시작된다. 평생 사회주의 신념에 따라 사셨고 빨치산에 활동했던 낙인 때문에 시골 구례에서 감시받는 삶을 살아 왔던 아버지. 딸이 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을 안고 살아가 자신과 가족을 힘들게 한 패잔병이나 다름없었다. 시대가 변했고 사회주의는 이미 패배한 사상임에도 신념을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가 한심했다. 그리고 이 빨치산이라는 족쇄를 채운 아버지를 원망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주가 된 나. 장례식장을 정하며 정신없이 와중에 생전 아버지와 함께 했던 지인들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빈소가 차려진다. 아버지의 부고를 알게 된 지인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와 정반대의 사상을 가진 사상의 적이지만 아버지의 가장 막역한 사이인 박선생부터 아버지의 정치적 동료인 박동식, 아버지의 빨치산 시절을 함께 했던 전우 그리고 베트남 혼혈아인 소녀까지도... 외동딸인 나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며 아버지의 삶 속의 퍼즐이 하나 둘 맞춰진다.

지지리 궁상 같은 삶임에도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에 따라 사람들을 대하고자 했던 아버지. 아버지만의 방식으로 삶 속에서 사회주의를 실천하고자 했던 아버지. 조문객들이 들려주는 얽히고 설킨 사연들마다 아버지의 신념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각자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힘이 되어주었음을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비로소 알게 된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죽음 후에 삶의 흔적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아버지의 해방 일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반쪽뿐인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큰 퍼즐 속에 퍼즐조각을 끼워 맞추듯 장례식장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버지의 삶이라는 큰 퍼즐이 완성된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 퍼즐을 보며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며 아버지가 겉으로는 패배한 사상가일지 모르나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키며 삶을 살아간 진정한 혁명가였음을 알게 된다. 인민 해방이라는 기치를 삶 속에서 이루어냈고 죽음을 통해 비로소 해방을 맞이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준 족쇄 앞에서 원망했던 나도 비로소 해방되어 아버지의 마지막을 아버지의 방식으로 떠나보내게 된다.

지지리 궁상 같은 삶 속에서도 사회주의를 잊지 않고자 했던 아버지. 아버지가 살아온 세월이 전혀 지지리 궁상 같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사람에 대한 온기와 따뜻함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난과 빨치산 딸이라는 굴레에 갇혀 잘 보이지 않았던 그 온기와 따뜻함이 아버지의 죽음 앞에 선명히 드러나며 아버지의 존재를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한다.

정지아 작가는 인터뷰에서 말한다. 이 소설을 쓰면서 자신 또한 해방되어 갔다고. 한반도의 슬픈 현대사를 통과한 아버지의 삶. 그 삶은 결코 실패한 게 아니었음을.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였음을 알게 되며 저자 자신도 그 굴레에서 비로소 자유를 누린다. 그 여정이 너무 따뜻하고 아련하기까지하다. 읽고 난 후 부모님이 유난히 그리워진다. 내 곁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유난히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밤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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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리커버)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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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는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 후보작으로 올라 단숨에 화제가 된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이다. 검색해보니 한국인 영한번역가인 얀톤 허님이 도서전에서  『저주토끼』를 알게 되고 흥미를 느껴 마침 자리에 있던 정보라 작가님께 번역을 하고 싶다고 요청해서 영어 번역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특성 상 외국인 번역가가 번역한 작품들이 많이 채택되는데 한국인 번역가가 번역한 작품이 후보작으로 선정되는 건 이례적이라고 한다.

 

나 역시 고백한다. 공포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단편보다 장편을 선호하는 내 취향상 이 소설이 부커상 후보작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저주토끼』를 만나지 못했으리라는 걸. 부커상 후보작이라는 명성은 내 취향을 극복할 정도로 힘이 세다. 

 

소설에는표제작인 <저주토끼>을 포함하여 <머리>, <즐거운 나의 집> <재회>, <차가운 손가락>등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있다.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가업으로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도 안 된다. 

불문율에는 이유가 있다.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두 개'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고 한다. 

타인을 저주하면 결국 자신도 무덤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이다. 

 

<저주토끼>는 읽으면 알 수 있다. 왜 이 단편이 표제작으로 선정되었는지를.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저주토끼 이야기. 유일하게 자신에게 친구가 되어주었던 친구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저주토끼를 만들어 친구의 원수를 몰락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저주토끼가 서서히 그리고 급격하게 어떻게 한 가문을 파괴시켜나가는지 그려지는데 이 소설의 특징은 글의 묘사가 너무 담담하여 더욱 오싹함을 자아내게 한다. 소설에서 왜 저주에 쓰이는 물건이 이쁘게 만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함부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물건인지 책 곳곳에 나와 있는 암시는 이야기 결말의 복선이었음을 알게 되어 등골을 더 오싹하게 만든다. 여러 단편도 좋았지만 다른 단편들보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매우 강하다. 

 

두 번째 단편 <머리> 또한 평이한 이야기 속에 반전이 매우 강렬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주인공의 배설물로 만들어진  존재인 '머리' 배설물로 만들어졌기에 배설물의 주인인 주인공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 '머리'의 존재를 주인공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매번 화장실에 갈 때마다 나타나는 '머리' 가 끔찍해 가족에게 말하지만 반응은 미지근하다. 

 

" 알을 스는 것도 아니고 무는 것도 아니면 그냥 두지 그러니." 

 

이 심드렁한 반응은 후에 결혼한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뭐 별거 아니네. 그냥 내버려둬요. 기어 나와서 집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알을 까는 것도 아니잖아?" 

 

주인공의 고통에 무관심한 가족들. 주인공에게는 별 일인데 주변에서는 그냥 내버려둬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후에 깨닫게 된다. '그냥 내버려 둬요.'와 같은 무관심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그리고 이야기 결말 후에도 이 무관심으로 인해 주인공은 더 외로워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슬프게 만든다. 

 

표제작인 <저주 토끼>도 좋았지만 내게 가장 좋았던 작품은 <즐거운 나의 집>이었다. 솔직히 표현한다면 답답하지만 모든 이야기들 중 가장 반전이 무서웠던 작품이면서 한국형 호러 소설다운 작품이라고나 할까. 가장 즐거워야 할 집이 어떻게 가장 무서운 집이 되는지 알게 되는데 이 강력한 반전 앞에서 나는 뒤통수를 치는 강렬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밖에도 AI의 공격을 그린 <안녕, 내 사랑>,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한 <흉터>와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피임약의 부작용으로 임신하게 된 여성이 어떻게 파멸되어 가는지 보여주는 <몸하다> 등 다양한 소재 속에 이야기들은 다채로운 매력을 빛낸다. 

 

이 책에 대한 호불호가 강하지만 내게는 요즘 인기있는 SF소설과 다른 한국형 호러 소설을 보는 듯한  이 소설집 또한 매우 재미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다른 소설집 <여자들의 왕> 또한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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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초록을 내일이라 부를 때 - 40년 동안 숲우듬지에 오른 여성 과학자 이야기
마거릿 D. 로우먼 지음, 김주희 옮김 / 흐름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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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구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한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는 과학자의 초청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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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초록을 내일이라 부를 때 - 40년 동안 숲우듬지에 오른 여성 과학자 이야기
마거릿 D. 로우먼 지음, 김주희 옮김 / 흐름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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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기후위기라는 단어는 가장 많이 접하는 단어가 되었다. 기상이변, 빈번해지는 가뭄과 홍수의 연이은 재앙을 접하며 우리는 '기후위기'를 쉽게 말하곤 한다. 이제 기후위기는 이 세상의 표준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여기 『우리가 초록을 내일이라 부를 때』의 저자이자 나무 탐험가인 마거릿 D. 로우먼은 사라져가는 숲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과학자이자 숲지킴이이다. 더 숲이 나빠지기 전에 우리가 바꿀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초록을 내일이라 부를 때》의 저자의 마거릿 D. 로우먼을 뭐라고 소개할까. 나는 그녀를 나무에게 선택받은 과학자라고 말하고 싶다. 나무를 사랑하는 천성, 어려서부터 식물과 나무를 사랑하는 마거릿 D. 로우먼은 자연이 놀이터이자 친구였다. 누군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도 자연에 둘러싸여 꽃과 식물을 채집하며 어떤 식물인지 스스로 배우는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천상 과학자였다.


자연을 탐험하면서

평온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현장 생물학자를 직업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 나무였다. 대부분 고독이었다.

대부분 야생화였고, 나뭇잎이었고,

자연의 작동 원리를 궁금해하는 호기심이었다.


나무를 사랑했고 자연이 하나의 놀이터이자 학습터인 저자가 현장 생물학을 선택한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녀에게는 이 당연한 선택이 저자가 자란 1950년대에는 결코 당연한 선택이 될 수 없었던 시대였다. 과학계, 특히 생명과학 분야인 생물학에 여성은 전무후무했던 시대, 저자는 여성에 대한 편견, 그리고 온갖 성추행을 견디며 공부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사랑은 상대방을 알고 싶어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취향, 기쁨과 슬픔 등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저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무와 식물을 알고 싶기에 무엇이 나무를 해치고 나무가 언제 행복해하는지 현장 탐험을 시작한다. 그 궁금증이 이어져 미국 윌리엄스 대학교에서 다시 먼 호주로 오게 한다. 현장에서 밤을 지새우며 나뭇잎을 관찰하며 알게 된다. 나무를 보려면 나무 우듬지, 즉 나무의 상층부 또한 제대로 보아야 함을. 이제까지 나무 중간 부분까지만 이루어졌던 관찰 범위는 결국 사람의 엄지 발가락만 보고 병명을 진단하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알게 되고 저자는 나무의 우듬지를 향해 연구를 시작하는 첫 번째 과학자가 된다. 나무에 오르기 위해 슬링샷을 만들고 장비를 만든다. 나무를 훼손하지 않고 더 잘 알기 위해 우듬지 통로까지 만들며 나무의 탐험을 더욱 확대해간다.

《우리가 초록을 내일이라 부를 때》에서 저자는 많은 나무를 소개시켜준다. 코치우드, 유칼립투스, 거인가시나무, 적나왕나무 등등 수많은 나무를 소개하며 그 나무의 특징을 이야기하며 호주와 미국을 넘어 말레이시아, 아프리카 등 나무와 숲을 지키기 위한 저자의 여정은 매우 다급하게 느껴지게 한다. 저자의 어린 시절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기후위기'. 이 기후위기가 조금씩 생태계 다양성을 파괴되는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음에 저자는 고령의 나이에도 숲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저자는 숲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의 힘을 강조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무와 가까이 할 기회를 얻고 나무를 경외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할 것을 말한다. 그 경외심과 사랑이 나무를 지키는 데 관심을 갖게 하며 우리의 소비 등이 나무를 살리기 위한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한 사람이 지구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내가 될 수 있고 여러분이 될 수 있다. 이 책은 그 한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는 초대장이다.

저자는 묻는다. 지구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는 숲 지킴이에 함께 해 줄 수 있겠느냐고.

이 책을 읽는다면 당신은 어느 새 저자에게 Yes라고 외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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