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 지음, 한기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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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든

초월주의 사상가 랠프 왈도 에머슨의 땅인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짓고 2년여(2년2개월2일)시간을 보냈다. 이때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7년후쯤인 1854년에 이 책<월든>에 담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법정 스님의 <무소요>의 내용이 떠오른다. 아마도 법정 스님이 살아생전에 이 책을 좋아했다는 말이 실감 난다. 아마도 월든을 체화한 것인가 싶기도 할 정도로.

 

“천국은 머리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발밑에도 있다.”

 

맞다. 맞아, 천국은 왜 늘 머리 위에 있다고 생각할까, 발밑에도 천국이 있는 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환경 고전 수필의 명작으로 꼽히는 이 책<월든>은 열여덟 번째 이야기로 엮여있다. 삶의 경제학을 시작으로, 장소와 삶의 목적, 독서와 삶의 소리, 고독, 손님들, 콩밭, 마을, 호수, 베이커 농장, 더 높은 법칙, 동물 친구들, 따뜻한 집, 예전의 주민과 겨울 손님들, 겨울 동물들, 겨울 호수, 봄이란 제목의 글까지, 옮긴이의 말처럼, 이 글들을 썼던 시대보다도 한참 후인 오늘의 우리에게 절실하게 다가온 것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속에 담긴 메시지가 더욱 선명하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특이한 책이라고 평했다. 아마도 주제가 자연적이고 보편적이어서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소로는 왜 숲속으로 들어갔을까, 그 이유는 신중한 삶을 보내기 위해,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만을 직면,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음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뭐, 모든 게 들어있네, 생로병사 인생역정이 죽음 앞에서 과연 나는 후회 없이 살았느냐는 질문에 답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의 오두막에 있는 세 개의 의자, 하나는 고독을, 둘은 우정을, 셋은 친교를 위한 의자라고,

 

 

 

 

첫 번째 이야기, 삶의 경제학- 사치품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원시적인 다른 수많은 안락함을 누림에 있어서는 가난한 자

 

꽤 촌철살인이다. 시저와 폼페이의 비극에서 나온 구절을 인용한다. 거짓된 인간 사회에서는 속세의 부를 좇느라 거룩한 모든 위안은 허공에 흩어질 뿐이라고, 집을 소유한 농부는 집 때문에 더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질 뿐이며, 오히려 집이 그를 소유한 셈이 되고 만다. 또 보자, 농부들은 생계 문제를 실제 문제보다 훨씬 복잡한 공식으로 해결하려 한다. 겨우 구두끈 하나를 사기 위해 가축을 떼로 키우는 것이다. 안락과 자립을 얻으려고 능숙한 솜씨로 털로 엮은 덫을 놓고 돌아서는 순간 자기 다리가 덫에 걸리고 만다. 이것이 바로 농부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간들은 이제 자신들이 쓰는 도구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배가 고플 때면 아무 생각 없이 과일을 따 먹던 인간이 이제는 농부가 되었고, 은신처가 필요하면 나무 밑으로 들어갔던 그가 이제는 가옥 관리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두 번째 이야기 내가 살았던 장소와 삶의 목적에서 기억에 남는 대목은, 시간이란 내가 낚시하는 냇물일 뿐이라는 문장이다. 물을 마시는 동안 모래가 깔린 바닥을 보고 그것이 얼마나 얕은지를 알게 된다. 시간의 얕은 흐름은 이내 흘러가고 만다. 그러나 영원은 그대로 남는다. 더 많은 돈,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해 아등바등 살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살만한데. 미래의 자신의 살을 갉아먹으면서까지….

 

대목마다. 삶의 지혜와 자연, 해방된 삶이란 무엇인지, 자신을 스스로 틀에 가두고, 속박하는 인간의 본능, 거기서 벗어나는 지혜, 아마도 거상 임상옥에 나오는 계영배처럼, 차지 않고 넘치지 않도록 일정한 수준이 되면 흘러내리는, 그래서 늘 그만큼만을 인간의 욕심은 한정이 없어, 끝내는 자신을 그 욕심의 제물로까지 받치고 만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이런 생활을 통해, 자연과 함께 삶을, 그리고 시장과 이웃 사람들과 마을, 그리고 정부에 관한 생각들을 정리했을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 후회 없이 살았노라는 말을 하기 위해, 윌든을 떠나, 광장으로 다시 나와 시민 불복종을 강연하고, 책을 쓰고.

 

인생에 가끔은 누구든 <월든>에서 그곳에 들어가, 신중한 삶을 위해,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만을 직면하기 위한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출판사에서 보내 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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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자가 아닙니까? - 성x인종x계급의 미국사
벨 훅스 지음, 노지양 옮김, 김보명 해제 / 동녘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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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자가 아닙니까?

 

벨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저자다. 1952년생이니 2차 대전 이후 미국 사회, 가난한 흑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인종과 성적차별, 계층적 차별까지 경험했던 훅스의 생애사적 기억은 그의 이론과 활동의 자양분이 됐다. 벨훅스, 그의 외가 증조할머니의 이름, 벨 블레어 훅스에서 따온 것으로 꽤 상징적이다. 노예제 역사에서 시작, 해방 후에도 겪어야 했던 자본주의 시장에서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역사를 겪은 흑인 여성의 삶이기에.

 

이 책은 42년 전, 1981년에 쓴 것이다. 19살 때 초고를 그리고 10년 후, 박사학위를 받고 출간했다고, 당대 미국 페미니즘의 인종차별과 흑인해방운동의 성차별을 모두 비판하면서 흑인 여성의 경험에서 출발하는 페미니즘과 사회정의의 방향을 찾는다. 현실을 넘어서는 연대와 해방의 정치학을 언어화하려는 노력으로, 당대 앤젤라 데이비스의 <여성, 인종, 계급>과 나란히 흑인 여성 페미니즘 사상과 실천을 미국 여성학 중심으로 부상시켰다.

 

<난 여자가 아닙니까?>, 19세기의 흑인여성인권운동가이자 작가인 소저너 트루스가 1851년 오하이오 여성권집회에서 했던 유명한 연설에서 따온 제목, 난 여자가 아닙니까, 이 한 문장에 압축된 모든 것들... 훅스는 여기서 미국 사회에서 흑인 여성들이 노동자로서, 여성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 이런 현실에 대해 기존 페미니즘과 흑인 해방운동 모두 적절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 한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노예제 아래에서 노동력착취와 성적 폭력으로(영화 “뿌리”의 주인공 킨타쿤테와 그 가족의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꽤 오래전에 우리나라 TV에서도 방영된 드라마 작품, 원작은 알렉스 헤일리 소설“뿌리”다. 그의 딸 키지가 열여섯 나이에 다른 사람에게 노예로 팔려 가는….), 고통받아 온 여성들은 자본주의 시장에서도 저임금노동자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거칠한 강인한 가모장으로 정형화됐다.

현대 자본주의, 가부장제, 인종주의에 대한 훅스의 비판은 철저하지만, 이런 억압과 차별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삶과 저항 가능성에 대해서는 따뜻한 희망적인 눈길로 보고있다.

 

흑인 여성은 백인 여성을 기준으로 설정된 규범적 여성성에서 제외됐고, 이러한 배제는 해방이나 강인한 여성이 아닌, 묵묵히 참아내는 능력으로 인식되면서 변혁의 힘이나 해방의 상상력은 제한된다. 그래, 그렇다면, 40여 년이 지난 지금, 훅스가 그렇게 강하게 비판했던 것들이, 어떤 모습을 변했을까, 아쉽게도 한 치의 변화도 없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외형적 변화, 이는 본질의 변화가 아닌 주변 환경과 사회 여건이 바뀜에 따라 보이는 현상일 뿐,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난 여자가 아닙니까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과 여성됨의 의미와 기준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우리 사회 속에서 난 여자가 아닙니까라는 말은 어떻게 들릴까, 여성은 누구이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여성은 무엇이며, 페미니즘에서 여성은 무엇일까, 같은 여성지만, 백인, 중산층이라는 의미와 그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김보명의 해제 첫머리에 나오는 이 책 313쪽의 인용문의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란 단순히 남성 우월주의를 끝내려는 투쟁도 아니고, 모든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갖게 해주는 운동도 아니다.”

 

모든 불평등, 즉, 성별, 인종, 계급, 지배, 피지배, 이데올로기, 서구문화의 여러 결에 스며들어있는 이런 것들을 근절하겠다는 결심이다. 미국 사회를 재조직해 제국주의, 경제적 팽창, 물질적 욕망보다 사람의 성장을 먼저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결심이다.

 

억압적인 요소의 근절과 사람이 무엇보다 우선인 사회를 만들 결심. 이것이 바로 훅스가 세상에 보내는 메시지다.

 

이 울림이 우리 사회에서 공명하기를, 여전히 우리 사회에 여기저기 깊숙이 그리고 아주 음습하게 자리하는 성별, 인종, 계급, 지배와 피지배의 이데올로기가 스멀스멀 머리를 쳐들고 나타나는 지금, 바로, 여기서. 훅스의 책이 왜 42년 만에 우리를 찾아왔는지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쓴 비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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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탈역사 - 예술의 종말에 관한 단토와의 대화
아서 C. 단토.데메트리오 파파로니 지음, 박준영 옮김 / 미술문화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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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탈역사

 

아서 C 단토,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인 그는 1964년 <예술계>를 발표, 그것이 미학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말한다. 이 책은 아서 단토와 이탈리아 미술 비평가 데메트리오 파파로니가 예술을 둘러싼 여러 주제로 나눈 대화들을 담은 대담집이다. 단토가 철학자로 성장하기까지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아서가 천착했던, 탈역사와 다원주의. 딱딱한 글쓰기가 아니라 대화체로 돼 있어, 읽기 편하다. 어려운 예술과 철학의 문제는 아무리 쉽게 써도 정신 차리고 집중해서 읽어야 할 듯한데, 조금 읽기 편하다.

 

이 책에는 ‘주디의 방에서’의 파파로니 해설과 함께, 예술과 탈역사라는 제목 아래 역사와 탈역사, 양식과 서사, 탈역사, 천사대 괴물, 분석철학으로서의 예술 비평이 실펴있다.

 

어떤 인공물은 예술품이 되고, 또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지 못하는가?

 

도대체 왜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고, 또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지 못하는가, 단토 이전에는 이런 문제는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니까, 예술품에는 나름대로 갖춰야 할, 형식이 있었다. 전시 공간에 들어있는 누가 봐도 즉, 고정관념 속에 형상화된 그런 것들, 거기에 덧붙인 설명 혹은 해설이, 눈에 보이는 작품, 딱 봐도 예술작품처럼 보이는.

 

그런데 무엇이 예술품을 한 갓 실제 사물에 불과한 것과 구별해 주는가, 20세기 이전 예술 이론가들은 이런 질문을 한 번도 제기한 적이 없었다. 예술로 여겨지는 것 대다수가 그 밖의 것들과는 너무나 달라 보였기에 아무도 이런 문제로 고심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은 보이는 대로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단토는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 슈퍼마켓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상자와 외향적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공품이고 무엇이 예술품인가, 그는 “이론”이라고 말한다. 한 대상을 예술계로 끌어올려 그것을 바로 그것과 똑같은 실제 사물로 주저앉지 않게 부축해 주는 것이라고, 꼭 눈으로 봐야만 어떤 대상이 예술품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이론이라는 것을 무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도식화, 틀에 갇힌 예술은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이런 역사는 끝난 것이다. 그의 이론이 “예술의 종말”이라 표현하기에 마치 예술이 끝났느냐고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은 끝난 게 아니다. 눈으로 보는 예술에서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예술로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단토가 보기에 작품에 점차 철학이 깃들면서 그것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일은 ‘눈’이 아닌 ‘정신’이 맡게 되리라는 헤겔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현대미술의 서막인가, 뒤샹의 작품 <샘>의 이야기

 

1913에 미국 뉴욕에서 선보인 뒤샹의 레디메이드 남성 소변기 <샘>, 여기저기 자주 소개되기에 대충을 알고 있을 것이다. 현대미술의 시작이라고 불릴기도 한 그의 소변기와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어떻게 다른가, 소변기를 예술 작품으로 격상된 일상의 대상으로, 워홀의 상자, 이는 일상의 대상과 똑같은 예술작품으로, 전자(뒤샹의 작품)는 뒤샹의 말에 따르면 공장에서 만든 대상을 이용하는 것은 예술의 정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한 방식이며 자신의 작품은 뜻도 의미도 없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규정되도록 해주는 서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후자(워홀의 상자)는 실제 브릴로 상자와 시각적으로 똑같아 보이기에, 양자의 차이, 뒤샹에서 워홀로의 진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미술, 방독마스크를 걸어놓고 아무런 설명이 없다. 이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상의 평범함을 전시 공간에 옮겨놓았을 뿐인데,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게 예술품인가?, 무엇을 전달하려는 거지라는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예술작품은 눈이 아닌 정신으로

 

단토의 예술이란 눈으로 보고 느끼고 해석하는 게 아니라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말처럼, 작품은 ‘눈’이 아닌 ‘정신’으로, 느낌이다. 자신이 느끼고 해석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이나 담긴 정신이 어쩌고저쩌고하는 해설보다는 보는 사람이 어떻게 느끼고 해석하는가, 어찌 보면 나만의 예술 세계인 셈이다. 그 누군가에 의해서 조작된 정의로 만들어진 대상화된 예술이 아닌,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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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 시민불복종 미래와사람 시카고플랜 시리즈 8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황선영 옮김 / 미래와사람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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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불복종

 

헨리 데이비드 소로,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실천적인 초월주의 철학자, 자연주의 문학자, 노예해방론자다. <월든>을 비롯하여 수려하고 맑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지만, 노예제도를 인간의 탐욕과 이기라 보고, 옳지 못한 정부와 사회에 대해 반대, 저항하고 맞설 것을 주장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주장한 상태주의자이기도 했다. 그의 이런 관심과 기여는 시민 불복종과 평화적인 저항이라는 정치적 이론 등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죽은 소로는 살아 있는 현대 사회에 끊임없이 경고한다.

 

이 작은 책 <시민 불복종>은 1849년(조선은 철종이 즉위한 해다, 유명한 장동김씨 일파의 세도 정치판 속에서 온갖 불합리한 일들이, 영화<군도>는 철종 13년에 일어난 민초의 항거다)에 문화회관에서 했던 강연의 제목 “시민 정부에 대한 저항”을 <시민 불복종>으로 이름을 바꿔 출간한 것이다. 50쪽 남짓의 소책자 속에, 담긴 이야기는 1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놀랄 정도로. 아마도 권력의 속성이란 보편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 판은 시카고계획의 하나로 소개됐다. 비폭력저항 운동의 마하마트 간디, 마틴루터 킹, 레프 톨스토이 그리고 만델라에게로 이어지는 평화적인 저항의 흐름,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다

 

정부가 하루빨리 이런 모습을 체계적으로 보여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모토를 실행에 옮기면 결국 전혀 다스리지 않는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라는 결론이 나온다고 시작된 글,

 

문제는 정부가 매 순간 온전함을 잃는다는 것이다. 이런 정부를 어떻게 제대로 만들 것인가?

 

미국 정부에는 단 한 명의 산 사람이 지난 활력과 힘조차 없다. 국민에게 정부는 딱딱한 나무로 만든 총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쯤이면, 소로는 정부를 인정한다. 무정부주의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가 보는 정부관은 정부에 내재한 문제, 정부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람들을 어떻게 속일 수 있는지, 또 그들은 정부에 어떻게 스스로 속을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는 점을 지적한다. 정부는 그 무엇도 아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기꺼이 내버려 두도록 돕는 편리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평한다.

 

다수의 힘은 그저 가장 힘이 세기 때문에 통할 뿐, 정의롭지도 양심적이지도 않다.

 

권력이 일단 국민 손에 들어오면, 다수에게 통치할 권한이 생기고 통치 기간도 길어진다. 이렇게 돌아가는 현실적인 이유는 다수가 옳을 확률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저 다수의 힘이 가장 세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다수가 사실상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정부 말고, 양심에 따르는 정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시민들은 입법자에게 자기 양심을 조금이라도 넘겨줄 수밖에 없는 것인가?, 소로는 우선 사람이 되고 나서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사람이 돼라. 된 사람이 되고서야 든 사람도 난사람도 되는 법,

 

사람을 부당하게 감옥에 보내는 정부 아래에서 정의로운 사람을 위한 진정한 자리는 감옥이다. 법에 따라, 법이 무엇인가? 애초 양심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국가)는 양심을 준수한다. 법이 있다는 이유로 조금이라도 덜 정의로워진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법을 존중하는 마음 때문에 선한 사람들조차 날마다 불의의 하수인이 되어버린다. 법을 존중하지 않아서 감옥에 가는 게 아니라 법을 존중해서 감옥에 가야 하는데, 이것이 거꾸로 된 것이다. 이런 대목 때문에 여전히 소로의 주장이 지금도 통한다고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의로운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양심적인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사회가 아니라 감옥이라는 말, 불의에 대항했다는 이유로, 임금을 올려달라고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는 것이다. 소로는 법을 정의만큼 존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가 규탄하는 미국 정부와 한국의 현 정부는 다른가? 내가 내는 세금이 어디에 쓰이는가?, 나는 시민으로서 정의를 위해서 어떤 일을 했는가?, 정부가 더 나아지도록 돕기 위해서 어떤 일을 했는가?, 내가 기대하는 정부는 어떤 모습인가?

 

현명한 사람은 정의를 운에 맡기지 않는다. 어떤 정부 아래서든 인간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양심에 따라 국가를 섬기되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비난하는 불의에 우리를 맡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시민 불복종의 핵심이다.

 

소로는 법을 무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법을 따를 구실을 찾는 것이다. 법에 순응할 준비는 마쳤지만, 법이 그 기대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인간답게 그 어떤 정부 아래서도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라. 난관과 역경이 있더라도 그래야 우리가 기대할 수 없는 정부를 만드는데 좀 더 다가갈 수 있다고, 국가보안법이나 반역죄가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행동을 왜곡시키더라도.

 

 

<출판사에서 보내 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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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락, 튀르키예 공화국의 자화상 - 대사가 바라본 튀르키예의 과거와 현재
조윤수 지음 / 대부등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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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가 본 튀르키예의 과거와 현재

 

튀크키예에 관한 책이 자주 눈에 띈다. 그리고 대사를 지냈던 은퇴 외교관들의 책도 늘었다. 트렌드인가, 주재국의 생생한 현장,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현장에서의 생생한 경험은 연구자들과는 또 다른 특정국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정보다. 물론 그 가운데는 결이 전혀 다른 책도 있지만 말이다.

 

이 책 제목은 조금 길다. <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락, 튀르키예 공화국의 자화상>이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전편 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락은 튀르키예가 현재 다민족국가를 형성하게 된 배경과 아울러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과의 문화, 경제적인 관계도 함께 봐야 한다. 그리고 후편의 튀르키예 공화국의 자화상은 1923년 독립전쟁의 영웅 아타튀르크(투르크의 아버지)로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본래 이름에 의회에서 붙여준 아타튀르크가 합쳐진 것)의 정교분리 세속정치체제 구축, 이후 2003년에 등장한 대통령 에르도안 아타튀르크가 구축한 세속시스템(케말리즘)을 점진적으로 해체하면서 이슬람의 사회적 영향력을 높이고 정교 통합 방향으로 몰아가는 듯한 모습이다. 한편, 튀르키예의 외교정책의 기본노선 축을 친서방에서 친이슬람으로 옮기고 있어, 분쟁의 화약고 중동, 동서양을 잇는 튀르키예의 경제방향 등 예측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살펴본다.

 

이 책을 쓴 동기는 현대 튀르키예를 설명하려면 600년 역사의 오스만 제국과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의 현실을 설명하는 대학강의용 서적이 마땅치 않아, 지은이 조윤수가 직접 자료를 모아 만든 것이다.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로 그리고 600년

 

이 책은 술탄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퇴를 설명한다.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동로마를 점령 이후, 종교적 관용책을 펼치며 이스탄불로 다양한 민족을 받아들였다. 오스만 제국의 전통, 술탄이 등극하면 그의 형제들, 이른바 술탄 계승순위에 들어있는 이들은 모두 죽였다. 이때, 오스만은 상승기류를 탔다. 왕권경쟁자가 사라진 때 번성했다는 것인데, 술탄 계승순위 안에 들어있는 이들을 살려두기 시작한 때부터 하강기류를, 결국, 왕권계승자들을 끊임없이 견제해야 했기에 그랬던 것인가, 또 특징적인 제도라 할까, 노예군대, 용병 “예니체리”의 존재다. 토사구팽이 왜 나왔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한데, 술탄승계를 둘러싼 싸움에서 예니체리라는 조직은 힘을 쓰게 된다. 궁정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는 등, 술탄체제를 지탱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뒤엎는 반역에 가담하기도, 결국 제국의 쇠퇴를 가져오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

 

오스만 제국의 쇠퇴

 

오스만이 다른 지역을 장악하면 장악할수록 점차 무역 경쟁력을 상실하고 무역 상대국인 유럽 국가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스만은 무역을 세력 균형의 하부개념 정도로 인식했던 탓에 유럽 각국에 나눠줬다. 미래의 적들에게 먹이를 내어주고 힘을 기르도록 했다. 또, 보자. 토지소유권의 문제다. 모든 경작지를 국유화, 농부나 장인들에게 융통성이 주어지지 않아, 소득 창출에 제약이, 거대한 공룡 오스만은 긴장감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층부의 부패 역시. 어느 시대건 어느 국가건 흥망성쇠의 사이클 가운데서 보이는 쇠퇴 현상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속도를 올리는 엑셀은 부패와 반란이다. 오스만 역시, 이 경로를 거친다.

 

튀르키예 공화국, 그리고 오늘

 

수백 년간 유럽 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오스만 제국은 1922년 해체된 후, 1923년 건국된 튀르키예 공화국은 1938년 아타튀르크 사후, 국제정치에서 거의 존재감을 잃었다. 한편 제국의 일부였던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이란과 이라크 등은 끊임없는 분쟁과 긴장의 연속이다.

 

튀르키예가 다시 국제무대에서 조금씩 그 위상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 중동의 민주국가 및 경제성장의 모델로 인식되면서 관심 국가로 떠올랐다. 2010년 시작된 아랍의 봄의 물결이 중동, 아프리카 전역에 퍼지고, 2011년 이후 시리아 내전이 계속되면서, 시리아 난민, 쿠르드족 활동, IS 등의 문제에 접근하려면 튀르키예를 빼놓을수 없게 됐다.

 

에르도안의 출현과 이슬람화 경향

 

20년 전에 집권한 에르도안은 튀르키예 사회를 이슬람화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21세기의 술탄을 꿈꾸는 것인가, 케말리즘과 이슬람문화를 적절하게 섞어가면서 국민 요구에 부응해오다, 어느 정도 권력 장악에 자신감이 생긴 후로는 여성의 스카프 착용허가, 주류금지, 이슬람 공휴일에 공공차량 무료 등의 케말리즘에 배치되는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으로, 서구 국가와의 기존협력 구도에서 벗어나, 러시아, 이란과 협조체제를 구축하는 가운데 독자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튀르키예에 대유럽 수출기지를 두고 있는 적지 않은 수의 우리나라 기업들에 에르도안의 대외 정책 방향 변화는 어떤 영향을 얼마나 줄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별로 큰 영향을 없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아무튼 케말리즘에서 이슬람으로, 또 권위주의적 체제로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출판사에서 보내 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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