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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 - 문화 군주 세종대왕의 형님 이야기
이복규 지음 / 유아이북스 / 2025년 4월
평점 :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효령대군의 재발견
지은이 이복규 선생은 기존에 소개됐던 역사적 인물을 다른 각도에서 톺아보기를 시도해왔다. 이른바 고정된, 굳어진 어떤 인물에 관한 이미지를 해체하고 새롭게 조명해보는 흥미로운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 책<효령대군>, 역시 그런 작업 중의 하나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책 구성은 태종 이방원이 왕좌에 오르기 전, 정안군의 사저에서 1396년 여흥민씨(원경왕후)와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효령대군, 형 양녕, 동생 충녕(후일 세종)과 두 살 터울로 본명, 휘자는 보일시(示)변인 보(𥙷)였다. 당대에는 피휘법이라 하여, 왕은 이름은 잘 쓰지 않는 한자를 골라서 썼는데 이를 벽자라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효령
태종은 효령을 세자로 선택하지 않은 이유로 “술을 잘 마시지 못하기 때문”리고 했다고 한다. 아무튼 효령은 이런 이유로 왕위계승에서 밀렸으나, 실록(태종실록과 성종실록의 배치되는 기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무튼 세종이 세자에 오르게 된 배경에는 태종의 점지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눈치챈 양녕이 거짓으로 광기를 부리고, 도망 다니며 문제를 일으키면서 효령에게 이르기를 부왕의 마음은 정해졌으니, 헛수고할 필요가 없다고, 효령이 이 말을 듣고 절로 달려가 밤새 북을 두들겨 북 표면의 가죽이 부풀어 올랐다고 하여 효령 북이라 부르기도...
왕좌의 게임, 태종은 공성에서 수성으로 전환을 위해 “문민 통치에 적합한 충녕을”
태종은 왕좌 게임의 승자다. 두 번에 걸친 변을 일으키고, 그 칼에 형제들의 피를 묻히고 올라선 왕좌, 이제 공성은 끝이다. 수성으로 전환하기 위해 조선에 필요한 것은 무관 풍의 양녕이나 자질이 미약하고 성질이 심히 곧은 효령이 아닌 이른바 문민 통치를 기대할 수 있는 충녕이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 나와 군사 등, 권력의 향배에 영향을 미치는 부문을 자기가 직접 챙겼는데, 이른바 세종의 안정된 통치기반 조성을 위해, 문제가 될 소지의 싹을 자르는 일을 직접 한 것이다. 이는 17세기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쇼군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아, 자식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닛코에 은거, 자식들의 세력 안정에 저해될 인물들을 닛코로 불러들여 처리해버린다. 시대 영걸들의 생각은 비슷한가 싶다.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삼는 조선, 독실한 불교 신자?, “불교 신앙”을 가까이한 효령
효령을 둘러싼 이야기, 6명의 왕을 거쳐 91세까지 장수한 효령, 양녕이든 효령이든 형제의 우의로 왕좌를 양보한 것일까, 글쎄다 이는 태종이란 인물을 잘 봐야 한다. 양녕을 꼬드겼다는 이유로 민무구, 무질 형제를 처단했다. 또 세종의 장인 심온 역시 외척 발호 예방 차원에서 싹쓸이를, 이럴진대, 왕좌를 놓고 자식들 사이에 시비가 붙는다면 기 경험자인 태종이 이를 어떻게 처리했을 것인가, 상상이 가능한 일이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자는 누구인가, 조정의 신하들이다. 그들에게 주군 세종은 역사의 중심이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의 우애를 미덕으로 강조하며, 삼강오륜을 중히 여기던 시대 질서와 이런 분위기에서 부모에게 효를 다했다고 하여 효령이요, 시묘 역시 정효군이었으니, 왕이 정한 일을 왈가왈부할 수 있으랴, 후일 양녕은 충녕, 세종의 장자 문종의 죽고 왕좌에 앉은 단종을 내치고 왕이 된 수양을 찾아가 축복했다는 말이 전한다. 양녕이고 효령이고, 효와 형제의 우애를 알았다는 이들이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역모를 잘했다고 하고 또 침묵을 지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복규 선생의 돋보기는 오롯이 이 책의 주인공 효령만을 들여다보지만,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주변도 볼 것이다. 역사적 사정도 살필 것이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들은 꼬꼬무다.
효령대군 행적의 인문학적 가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약점을 지적했다던 남명 조식은 지금 학자들은 비로 먼지를 쓸고 물을 뿌릴 줄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하늘의 이치를 말하여 남을 속이여 이름을 도적질하려 하다 화가 다른 이에게까지 미친다고, 지은이는 효령을 효제충신의 실천자로 봤다. 이른바 삼강오륜을 실천했다는 말이다. 이를 오늘날의 가치로 바꿔보자면, 문화 다원주의 추구, 혈연중심주의와 학연중심주의의 극복이다. 이른바 위버멘쉬(니체가 말하는 초인)라는 말인가,
장수의 비결은 내 마음을 비운 덕이다. 물론 효령의 아내가 33년 동안 본디 허약체질이었던 효령의 건강을 보살폈다는 말이다. 술도, 음식도, 무엇보다도 세속에서 벗어나는 명상, 불교를 깊이 믿었다는 점이 스트레스를 덜 받게 했다는 것인데...
이 책을 읽는 동안 유학과 유교를 섞어 쓴 이유는 뭘까, 뭔가 개운치 않다. 효령을 효제충신=부모에 효도하고, 형제 우애, 나라에 충성했다. 불경을 해독하고 원각사를 지을 때 감독도 했다고 전하는데, 그가 남긴 글이 있었다는 말은 없다. 그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아무튼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이야기, 왕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산속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됐다고, 그런데 후손들이 번창했다 하니...7남 2녀의 자손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행간을 잘 보면 또 다른 힌트가 있을 듯하다. 양녕과 효령의 조카 수양이 그의 조카를 죽이고 왕좌를 빼앗은 걸 보고, 어떤 마음이었을까? 종실 어른으로 이런 삼강오륜이 물구나무서는 일을 보고도. 그러니 이들은 천수를 누린 것이다. 동생의 손자면 이들에게도 손자였을 것이고, 그렇게 우애가 깊었다던 형제의 손자가 죽임을 당했는데, 이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이 대목에서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일 뿐인가, 그 행간과 이면에 패자의 눈물을 찾으려 하는 것은 무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