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이부치 - 단 한마디를 위한 용기
최덕현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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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이부치“ 라는 단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운가?

 

최덕현 작가의 글과 그림<뚜이부치>는 난징 대학살의 기억, 1937년 난징에 들어간 점령군대 일본 육군 16사단 20연대 소속 육군소위 아즈마 시로(東史?는 남경대학살 50주년이 된 1987년 <아즈마시로 일기>를 세상에 내놓았고, 당시 기자회견은 아즈마와 모두 3명이 했다. 한 사람은 1937년 12월 13일 난징 일본군에 함락됐을 때 중국의 패잔병과 젊은 남자들 500명의 포로를 일제 사격으로 처형했다고 증언했다. 다른 한 사람도 숫자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 자리에서 아즈마는 ”나는 이것을 공표함으로 인해서 비난 받을런지 모른다. 또 목을 자른 장소, 일시도 써 있습니다. 중국측에서 알면 어떤 반응이 있을런지 모른다. 오늘 여기에 이르기까지 감출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이렇게 서두를 꺼내고 50년 전의 일기를 보여주었다. 6년 후, 아즈마의 전우이자 상관은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그를 고소, 일본 최고재판소는 2000년, 아즈마의 상고를 기각, 2006년 1월에 아즈마는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의 일기를 토대로 우치야마 가오루(內山薰, 필명)는 <난징 대학살, 기억의 암살>부제(아즈마 시로(東史郞)는 왜 재판에 졌는가)라는 책을 중국 베이징에서 2007년 12월31일에 출판했다. 학살사건 70주년에.

 

우치야마의 말에 따르면 재판소의 법정에는 두 개의 정의와 진실이 존재한다. 하나는 사실 그대로의 정의와 진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허구의 정의와 진실, 즉 만들어진 거짓의 정의와 진실이다. 아즈마의 정의와 진실은 대일본제국의 망령 속에 지금도 난징대학살 범죄를 부인하는 국가의 거짓된 진실과 정의에 터 잡아 재판이 진행됐다. 넘쳐나는 증거도 모두 인정되지 않았다. 이른바 아즈마 기억에 대한 암살 즉, <기억의 암살>이 이뤄졌다.

 

양심의 가책 속에서 자신의 학살행위는 국가의 명령에 따른 것이고, 나는 그저 모든 것을 잊고 싶다. 우리는 군인으로서 명령에 충실했을 뿐, 누구를 죽인 적이 없다고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믿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난징학살에 투입됐던 군인들, 아즈마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던 그의 상관도, 상처 입은 영혼이다. 비록 우익의 조정을 받았다 할지라도...

 

일본과 한국 국가범죄에 대한 사죄 없는 꼴은 똑같아,

 

이는 마치, 베트남전쟁 중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은 80여 건, 9000여 명에 이른다. 현지에 위령탑이 세워진 대표적인 사건들은 퐁니·퐁넛 학살, 빈안 학살 등이 있다. 빈안 학살은 1966년 맹호부대에 의해 민간인 1004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하미 학살은 꽝남성 디엔반현에 위치한 하미마을에서 1968년 2월 22일 역시 해병대 소속 청룡부대에 의해 민간인 총 135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이보다 앞선 1966년 12월 3일, 12월 5일, 12월6일에는 꽝응아이성 빈선현 빈호아사에서 청룡여단에 의해 주민 430명이 희생된 사건이 벌어졌다. 그중 12월6일에는 빈호아사 꺼우 마을의 동코 우물가에서 벌어진 학살로 141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의 법원이 인정한 학살사건, 한국군이 베트남 중부 휴양도시 다낭에서 12킬로 떨어진 꽝남성 디엔반현에 퐁니·퐁넛이란 마을이 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2월12일 오전, 이 마을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 청룡부대 소속 군인들이 수색 정찰 도중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에게 “빵을 나눠줄 테니 모여라”고 했다. 마을 주민들이 모이자 일제히 사격을 가해 74명이 즉사했다. 희생자는 대부분 부녀자와 어린이 등이었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8세 소녀 응우옌티탄도 끼어 있었다. 재판정에 나온 63세인 응우옌티탄 씨에게는 그날의 참상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1초 단위로 선명하다. “당시 우리 마을은 남베트남 군인 가족들….

 

 

 

나고야 시장 가와무라 다카시(河村たかし)는 일본 정부의 혁신을 부르짖으며, 정당을 만들기도 했지만, 국가이익 앞에서는 역시, 한통속일 수밖에. 나고야시와 자매우호 도시인 난징에서 일어난 학살을 부정하는 그의 태도에서 이중성을 엿볼 수 있다.

 

안정효의 <하얀전쟁>에서는 전쟁에서는 인간이 모두 죽는다고, 비록 육체는 살아 있더라도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 모든 병사의 영혼이 마르고 죽어버린다. 하나의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무차별 살인의 마당에서는 보람찬 도전조차 없다. 이는 이 책<뚜이부치>, 하나의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무차별 살인의 마당에서,

 

아즈마 시로의 기억 속에 난징 대학살 현장에는 인간은 없었다. 다만, 살인 병기만이, 일본 정부가 뭐라고 하든, 난징에서 이뤄진 민간인 학살은 전쟁범죄다.

 

일본은 왜 난징 사람들에게 ”뚜이부치“라는 말 한마디를 건네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베트남의 퐁니·퐁넛의 학살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건네지 못하는가?

 

이 책 뚜이부치를 통해, 일본과 한국의 모습을 다시금. 안정효의 말처럼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누군가의 기억 속에 지옥으로 남아있는 그런 하얀 전쟁이다.

 

 

 

난징 대학살은 유대인 학살과 원폭 투하와 함께 2차 세계대전의 3대 비극 중 하나로 꼽힌다. 1937년 12월13일부터 6주간 동안 벌어진 잔인한 학살... 아즈마시로는 50주년기념일인 1987.12.13.일 난징 대학살 기념관 앞에 무릎을 끓고 ”뚜이붙이“라는 말을 건넨다. 이 책 속에는 일본군 위안부로 한국인과 중국인 등이 있었음을 증언한다. 난징대학살은 전쟁, 인권, 광기,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갈등 등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출판사에서 보내 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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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의 흑역사 - 방송의 중립에는 좌우가 없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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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생리학>의 지은이 발자크를 소환한다

 

세상이 엄혹하면 늘 기자의 자격을 묻는다(서강대 언론문화연구소 홍성일 연구원) 자격 시비 의도는 정치적 의도, 언론 권력과 정치 권력의 공모 관계도 포함된다. 이 구도에 강준만 선생의 이 책<MBC의 흑역사>은 어떤 면에서는 딱 들어맞는다. MBC의 흑역사는 문재인 정권의 동안 그리고 윤석열 정권에 들어서 그 보도 태도를 주요 이슈를 들어 설명한다.

 

MBC사령답이 바뀐 후, 이명박, 박근혜 때 회사에서 해고됐거나, 노조 활동으로 탄압과 핍박을 받았던 그룹이 화려하게 사장으로 주요 간부로 복귀하면서, 언론노조,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던 88명의 기자를, 뺑뺑이 돌리고, 보직해임, 창가 옆에 책상과 의자 종이 명패, 전화기 한 대, 불만이면 얼른 나가셔…. 이런 꼴 보고 싶지 않거들랑,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한술 더떠보자, 출입처에 따라 붙여진 이름 예를 들면 법조팀을 인권사법팀으로 바꿔 ‘인권’을 강조하면서, 노조 파업 미참가자들을. 그들이 당했던 것과 똑같이 갚아주었다고한다. 이는 또 다른 차별과 혐오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그들이 그렇게 싫어했던 그 짓을, 그들이 하고 있다. 아마도 지은이는 이 대목에서 화가 난 듯하다.

 

강준만, MBC는 왜 선전, 선동하는 공영방송이 되었는가?라는 분석

 

아마도 이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지 않을까, 마치 화두처럼, 공영방송 MBC가 이명박, 박근혜시기 동안 얼마나 얻어터졌는지를. 그런데 방송이 공영방송이 정파적이면 안 되지. 공영이란 이름을 지켜야지. 글쎄다.

 

1984년의 발자크를 소환해보자. 그는 당시 유행했던 ~생리학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이른바 풍자 장르의 트랜드에 따라 공무원과 기자를 풍자한 글을 썼다. <기자생리학> 벌써 백 수십 년 전의 현상이고 일이다.

강준만 선생이 단단히 별렀나 보다. 책 제목이 MBC의 흑역사니 그 중심은 당연히 MBC이겠지만, 채널A 이동재 기자와 한동훈 검사장의 짝짜꿍 설과 윤석열 때리기, 이재명 밀어주기, 조국 구원하기. 등 거의 종교적 구원파 수준에서 정파적으로 어용의 입이 된 MBC라고, PD수첩이고, 스트레이트고, 해서는 안 될 일, 참으로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참언론인과 기레기의 기막힌 경계선에서.

 

발자크는 말한다. 우선, 때리고 변명은 나중에, 헛다리 짚었다면, 죄송합니다. 대신에 아니면 말고, 뻔뻔한 얼굴로 무신 일 있어 하는 표정으로…. 이게 기자의 생리학이라고,

 

언론의 자유라고? 부끄럽게도 이들은 오지 약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 대해서만 자유롭다

 

백 수십년 년 전에 발자크가 한 이 말, 언론의 딜레마와 역설을 주장하는 정준희 등의 주장도 이와 아주 흡사하다. 언론의 자유의 생래적으로 이러하기에 이를 지키려는 자들은 늘 자신을 돌아보고 경계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마치 “펜과 칼”처럼, 모순(세계에서 가장 강한 창으로 못 뚫는 방패가 없다고, 또 한편으로 이 방패는 세계에서 가장 강해서 제아무리 강한 창이라도 뚫을 수 없다고)이기에, 늘 외줄을 타듯, 긴장을 늦출 수 없다는 말이다.

 

한국 언론 세계의 이중적 구조

 

정준희 등은 <언론자유의 역설과 저널리즘의 딜레마>(멀리깊이,2022) 언론자유는 그 자체로 모순과 역설을 품고 있다며, 그 역설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로 언론이 더 많은 자유를 향유 할수록 오히려 시민의 자유가, 특히 약자의 권리가 침해되는 경향을 마주한다. 둘째, 언론은 억압하는 권력에 자유를 헌납하고, 관용하는 주권자와 그 대행자에게는 자신의 자유를 남용한다. 셋째, 언론은 정치 권력과 시민에 대해서는 자유를 달라고 하지만 자본이나 언론사주가 통제하는 자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딱 이 말이다. 이 책에서 MBC를 질타하는 것은 이 역설에 해당한다.

 

MBC는 사회적 흉기-기자협회 윤리강령 “공정 보도” 의무 위반

 

그렇다. 보도 태도도 문제지만, 여러 사정으로 언론의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함께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같은 조직에서 일하던, 일했던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요즘 TV 드라마<D.P.>의 약한 자를 괴롭히는 비겁자들과 뭐가 다른가?, 내 뜻과 다르면 모두 배반자인가, 공영방송의 개념은 누가 만들었나, 생각과 가치가 다른 사람이 함께 모여 공동의 목표를 향해가는 그 과정이 언론자유의 과정이다. 이를 조금 넓혀 사회로 확대해보면, 왜 사회적 흉기라고까지 말하는지 이해가 조금은 될 듯하다. 지은이의 주장을 다 이해하라는 건 아니다.

 

MBC의 반론의 무기로 한국기자협회의 윤리강령과 이를 실천하는 실천요강을 들고나올 수도 있다. 이 요강의 맨 앞에 오는 것이 언론자유다. 회원(기자)은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내, 외부의 어떤 간섭과 압력에도 굴하지 않으며, 언론자유를 위협하는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한다. 이를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 조직 내에서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개인이나 집단에 단호하게 대처하는 게 그런 처분이었다면, 일벌백계, 하지만, 돌고 돌 것이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싶은 충동은 어떤 권력자이든 공통된다. 반대로 입신양명을 지상의 최고가치로 여기는 기자도 있어, 이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 어떤 화학적 반응이 일어날까?

 

마지막으로 조금 길지만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 전문을 적어둔다. 새삼스럽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본디 이런 각오로 기자가 되고, 활동하고, 이런 계율을 지키면서...

 

“기자는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진실을 알릴 의무를 가진 언론의 최일선 핵심 존재로서 공정 보도를 실천할 사명을 띠고 있으며, 이를 위해 국민으로부터 언론이 위임받은 편집-편성권을 공유할 권리를 갖는다. 기자는 자유로운 언론 활동을 통해 나라의 민주화에 기여하고 국가발전을 위해 국민들을 올바르게 계도할 책임과 함께, 평화통일·민족화합·민족의 동질성 회복에 기여해야 할 시대적 소명을 안고 있다. 이와같이 막중한 책임과 사명을 갖고 있는 기자에게는 다른 어떤 직종의 종사자들보다도 투철한 직업윤리가 요구된다. 이에 한국기자협회는 회원들이 지켜야 할 행동기준으로서 윤리강령과 그 실천요강을 제정하여 이의 준수와 실천을 선언한다.”(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

 

여기에 하나 더, 방송의 중립에는 좌우가 없다는 지은이 말에, 생각나는 책, 리영희 선생의<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1994) 머리말에 “진보의 날개만으로는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만으로는 앞으로 갈 수 없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균형잡힌 인식으로만 인정과 발전이 가능하다”는 말...

 

 

<출판사에서 보내 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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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집 - 대한제국 마지막 황족의 비사
권비영 지음 / 특별한서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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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그 불행한 역사 속 인물들

 

작가 권비영, 그의 전작 <덕혜옹주> 이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와 일본의 황족(화족) 나시모토의 장녀로 황태자비가 된 마사코, 황세손 이 구와 그의 아내 우크라이나 출신 미국인 줄리아의 삶을, 이 구의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아리사는 마사코 안에 있는 또 다른 마사코,

 

의민황태자 영친왕, 정상적 상황이라면 순종 황제 뒤를 이어야 할 인물이었다. 세 살 때 영친왕이란 봉호를 받았고, 1907년 황태자가, 이토히로부미의 손을 잡고 대한해협을 건너, 볼모로 일본 땅으로, 1917년 일본육사를 왔다고, 1920년 마사코(이방자)와 결혼, 1926년 순종 승하 후, 이왕의 자리에 올랐다. 1927년 5월에 일본 백작 부부 자격으로 유럽 순방을….

 

1940년 육군 중장에 43년 일본 제1항공군 사령관으로, 해방 후, 영친왕은 귀국을 희망했지만, 1963년에서야 반죽음 상태로 귀국, 70년에 한 많은 세상을 떴다. 이러한 큰 줄기 속에서 이 은과 마사코, 그리고 이들의 둘째아들이자 하나 뿐인 핏줄 이 구,

 

마사코, 영친왕과 정략결혼임은 알았지만, 남편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망국의 한, 늘 황실의 감시를 받는 처지, 창살 없는 감옥, 남편은 대한제국의 황태자로의 삶과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길러진 정체성 경계인의 삶 속에서 산다. 조국이 해방이 되든, 어쨌든 간에 불편이 끊임 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잃어버린 집 


구 만큼은 해방시켜주자는 아버지 이 은의 선택이 미국유학이었다. 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건축가의 길을 걸으면서 그보다 8살 연상인 줄리아와 결혼을 한다. 아버지에게는 또 다른 집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조선이 해방되는 날, 귀국했을 때, 조선여인이 아닌 일본여인과 그리고 미국여인과 결혼한 황실의 후계자들을 조선사람은 어떻게 볼 것인가, 적어도 종친들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강제로라도 갈라서게 할 것이다.

 

네 사람의 주변, 이 구의 눈에 비친 아버지와 어머니, 조선과 일본의 혼혈인 이 구, 그리고 미국인 아내, 다국적이다. 보통사람의 결혼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에 더해 그들의 생활의 밑바탕에 흐르는 황태자와 황족으로 사는 삶, 이 은과 마사코, 그리고 이들의 아들 이 구와 아내 줄리아의 미묘한 내면 갈등을 아프도록 시리도록 그리고 있다.

 

마사코 꿈이 나타난 아리사는 마사코의 심적 갈등을 그대로 표현해준다. 이방자 여사가 사회복지사업을 했다. 황족종친회가 어쨌다 저 쨌다. 조선은 대한제국의 519년의 역사는 이미 막을 내렸다. 1919년 대한민국은 탄생했고,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시곗바늘은 차근차근 서서히 현대로, 이승만의 의도적으로 영친왕의 귀국을 막았듯…. 망해버린 나라의 왕으로 산다는 것(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매일경제신문사, 2023)이 어떤 한 삶이었는지, 일본 패망 후, 영친왕은 평민으로 그리고 조선인으로 호적이 바뀌고, 외국인 등록을 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고, 조국의 정부는 아카사카의 그의 집을 내놓으라고...

 

 

 

 

마사코는 낮은 목소리로 이리사를 부른다. 영혼을 파고드는 외로움이 구멍 숭숭 뚫린 나무 같다. 무엇 때문일까,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슬픔이 삭아들지 않아서 일까, 아리사는 마사코에게 말한다. "분노를 잠재우세요. 분노는 몸을 상하게 합니다." 조선은 남의 나라가 아닙니다. 마마에게도 저에게도. 사는 땅이 어디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마마께서도 이미 조선인이십니다.", 마사코는 이렇게 내안 또 다른 나, 아리사와 이렇게 대화를 한다.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내 버려진 이은의 가슴은. 그래도 혼만은 잃지 않겠다며, 한국어독본을 만들기도 하는데. 복잡한 심경을 그려낸 이 소설, 지킬 수 없는 것은 조국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집마저 잃어버렸다. 마사코에게도 돌아갈 집이 없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들에게 집은 함께 하는 이들이라는 형상 없는 마음의 집이었다.

 

이 구 역시 황세손이라는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이를 견디다 못해 떠나버린, 도망쳐 버린 구, 줄리아 역시, 그 틀 속에서 시어머니와의 거리감 등. 이 구와 헤어져 하와이에서 입양한 딸 은숙과 살면서, 구의 부음을 듣는다.

 

"줄리아가 머무는 방은 하나의 시멘트 관이다. 살아 있으되 산 것 같지 않은 몸이 머누는 현실의 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에 걸린 구의 사진을 보는 것이 큰 낙이다." 무정한 사람 어쩌자고 불러내는지... 이 가슴 아픔 대목이 이 구의 삶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평범한 삶을 살 수 없게 만든 환경들, 종친들의 잔소리도, 어머니의 차가운 눈길도... 이 구 역시 허수아비 삶이 아니었던가.

 

 

 

.

역사에는 가정이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영친왕이 해방 후, 바로 귀국했다면. 정치적 해석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그의 말년은 어떠했을까, 마사코, 이 구, 줄리아, 그리고 덕혜옹주는…. 상상을 해본다.

잃어버린 집, 비바람을 피하고, 지친 몸을 눕히고 쉴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세속의 모든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음 편한 그들만의 공간 그 자체를 잃어버린 것이다. 애초부터 집은 없었는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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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흐르는 강 : 한나와 천 년의 새 거꾸로 흐르는 강
장 클로드 무를르바 지음, 임상훈 옮김 / 문학세계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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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흐르는 강, 한나와 천 년의 새

 

새를 좋아하는 한나, 태어난 후, 해마다 아빠는 그녀가 맘에 들어 하는 새들 사주었다. 6살이 되는 해, 운명처럼 천 년의 새를 만나게 되고, 한나는 아빠에게 그 새를 사달라고, 새 값은 무려 오십만 파운드와 럼주 1병….

 

아빠는 집은 물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고도 부족하여 돈을 빌리기까지 해서 새를 한나에게 사주었고. 엄마는 떠나고, 남겨진 것은 한나와 아빠, 그리고 그녀의 천년 세월을 지낸 작은 공주인 멧새, 아빠는 한나를 위해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해서 빚을 갚아나가다 결국 한나가 9살 되던 해 잠들 듯 죽었다. 친척 집에서 지내게 된 한나, 아빠를 잃어버린 슬픔, 천 년의 새에게서 위로를 받았는데, 어느 날 천 년을 살아온 새는 횟대 위에서 웅크린 채로 떨면서, 한나에게 이대로 죽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고, 도와달라고.

 

한나가 토멕에게 들려주는 “모험이야기”

 

한나는 천년의 새를 살리기 위해 거꾸로 흐르는 강물을 마시면 절대 죽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거꾸로 흐르는 크자르강을 찾아 나선다. 물과 사막을 지나 남쪽 지방 어딘가에 있다는 그 강을 찾아,

 

남쪽으로 향해 걷기 시작하던 한나, 말 없는 마차 몰이꾼 노인 이호림과 그레고리를 만난다. 이호림 할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반 바이탄으로 가려 한다. 그곳까지 손님을 태우고 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요량으로. 그레고리 이호림 할아버지를 그곳에 내려주고 혼자 돌아오기 싫어, 한나를 만나기 전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그곳에서 손님을 기다렸다고.

 

한나는, 세상에 이게 말이 되냐고, 결국 나는 정신 나간 사람 둘과 여행을 시작한 거였어라고.

사막이 시작되는 반 바이탄은 흔히 아는 삶의 공간, 살기 좋은 환경 너머, 누군가 가지 않은 길, 고통의 영역으로서 사막의 시작점이다. 사막은 낮에는 한없이 덥지만, 해가 지면 춥다. 하지만, 여기에 반전이 숨어있다. 죽음을 맞이하려고 반 바이탄에 머물던 이호림 할아버지.

 

반 바이탄은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처럼 혼란의 원리로 제시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즉, 자연과 인간, 정치, 종교의 세상이 끝나는 곳에서 사막이 시작된다고, 그리고 토프카는 체코의 동화세계?,

 

사막을 건너는 일행 중 라리크와 함께 사막을 건너면서, 마법 현상을 경험, 사막 끝에 있는 도시 토프카, 여기서 한나는 미래의 삶을 경험하는데…. 누군가와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 라리크를 찾고, 또 다른 세계 향기마을로, 또 다른 나라의 공주로, 느린 곰 토멕을 만나 죽지 않는 물은 찾는다.

 

이제 천년의 새 작은 공주에게 물을 가져다주기 위해 남쪽에서 북쪽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이호림 할아버지와 헤어질 때 앉았던 낡은 소파, 조금 지난 곳에 오두막집. 그리고 거기서 한나를 기다리는 작은 공주 천년의 살아온 멧새(그리 화려하지도 않은 역사를 의미하는가?, 흔하디흔한 멧새)를 만나는데.

 

한나의 모험은 소녀에서 숙녀로 아이를 낳고 길렀던 아줌마로, 거울을 보면 안 되는 귀한 공주로, 숲속에서 만난 느린 곰 토멕과의 만남으로.

 

마치 아이가 성장하면서 맞이하는 인연과 환경, 때로는 그곳에 머물고 싶은 충동과 포기와 안주를 희망하기도 하지만, 모험 시작의 이유를 잊지 않는다. 인생이란 길고 긴 길 안에는 늘 맑고 싱그러운 숲만 있는 게 아니다. 사막처럼 황량함도, 가로 놓인 강물도 바다도, 이때마다 인연을 맺고 좋은 일을 만나지만, 이 때문에 목적을 놓아버릴 수 없지 않은가,

 

어른이 되는 길이란 마치 한나의 모험처럼, 황당하고 미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믿음과 신념 그리고 용기가 없으면 해낼 수 없다고. 누군가는 입 아프게, 교실에서 이런저런 예를 들어 설명할지라도, 아마, 이 책 한 권을 내밀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네가 한나였다면? 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많은 걸 알려줄 수 있을 듯.

 

우리에게는 천년을 살아온 작은 공주 멧새처럼, 다가오는 운명처럼 소중한 그 무엇이 있지 않은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의 연속 바탕에 깔린 일관된 주제는 목적을 향해 목표를 좇는 흔들림 없는 한나의 의지와 용기가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한나가 사막에서 배운 말 "침묵"

 

 

<출판사에서 보내 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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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비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 노년의 철학자가 산을 오르며 깨달은 것들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최린 옮김 / 와이즈맵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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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철학자가 산에 오르며 깨달은 것들

 

산을 제대로 탄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까마득한 옛날, 구례 쪽에서 남원 쪽에서 산청에서 지리산을 탔던 기억, 그저 무리 지어 산을 오르자 하니 올랐던 것 외에는. 그리고 후지산을 올랐던 게 마지막이었다.

 

이 책<인생의 비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의 지은이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에 우리가 매혹되고, 감탄하지만 꼭대기에 오른다고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란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자취를 따라오고, 우리를 앞장서서 산에서 내려온 후에도 산 정상에 머무르는 '열정'과 함께 산을 오른다고. 작가이자 철학자다운 표현을 한다. '열정'과 함께….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오든 간에, 그가 하는 말에 공감한다.

 

많은 사람이 묻는다. 이미 인생은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있는데 왜 우리는 오르는 행위를 하는 걸까?, 일부러 몸을 고달프게 한 다음 거기서 기쁨을 얻는 것도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고, 우리는 신념 때문에 산에 오르는 게 아니다. 산이 우리 신념을 자극해서 그곳을 오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산이 거기에 있어, 오를 뿐, 전문 산악인들이 산을 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세계 최고령 84세, '히말라야 14좌' 완등 코앞에 두고 부상이라고 SBS가 영국의 가디언 등의 보도를 전했다. 스페인의 등반가 카를로스 소리아가 아직 정복하지 못한 히말라야의 정상 두 개 중 하나인 네팔의 '다룰라기리' 등반 중 다리를 다쳤다고, 코로나19로 희생당한 이들과 함께하는 마음에서 생애 마지막 도전을 한 것이라고.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는 용기를 내면 극복 못 할 게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다.

 

산에 오르는 이유는 제각각일 것이다. 높은 산에서 우리는 무엇을 새롭게 배우게 될까? 그 산의 취약점과 강함이라고, 지은이가 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다나 시골과 달리 산만이 내게 육신이 있다는 걸 느끼도록 해주기에. 산의 오솔길이나 암벽 위에 있으려고 애쓰는 것, 그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아마도 산을 오르는 이유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처럼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도 우리 몸뚱이는 여전히 활력이 넘쳐나고 육신의 긍정적인 힘을 강요하기에. 또 다른 육체가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 우리의 몸에서 태어난다고, "휴식"이 모든 고통을 보상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이탈리아 철학자 노르베르토 보이오는, "나는 나를 잃어버릴 때까지 달린다. 내가 달리기를 멈추는 그곳에서 나를 잃어버린다"라는 말을 남겼다.

 

왜 산을 오르는 걸까?

 

지은이는 명쾌하게 말한다. 산을 우리를 부르기 때문이라고, 어떤 산과 산맥은 그 안에서 길을 잃고 자신을 탐색하라고 우리를 초대한다고, 그렇다면 무엇으로 부르는 걸까, 하나의 답은 없다. 제각각의 이유가 있을 테니, 벌써 인생, 삶에서 은퇴 즉, 하산할 때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자기와의 싸움을 , 내 체력과 능력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싶은 욕망때문일까,

 

중요한 건 바로 내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나를 산으로 데려가는 것은 끈기 있게 밀고 나갈 수 있는 체력과 능력, 산을 오르려는 욕망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은 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관점은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지은이의 이 말은 꽤 설득력이 있다. 산을 오르면서 깨달은 것 중에, 이 대목이 가장 와 닿는다. 산의 정상에 오르지 않고 밑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평론하는 이른바 개소리하는 비평가(비평가도 아니지만)들, 9부 능선, 9.9 능선과 정상은 질이 달라진다.

 

오래전 후지산을 오르면서 내가 겪었던 고산증,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숨쉬기 곤란한데 이런 현상이 고산증이란 걸 모르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휴대용 산소통을 쓸 생각도 못 했으니. 9부 능선에 다다를 때 하산길의 노인이 나를 보고, 그렇게 괴로우면 산소를 한 번 들이마시면 될 걸, 산소가 다 떨어졌나 라고 묻는다. 바보처럼 허리춤에 찬 산소통의 존재를 잃어버렸다. 아무튼 노인의 말씀대로 산소를 힘껏 들이마시니, 두통이 사라졌다. 드디어 후지산 정상에서 일출을, 그 반대편에 생긴 산그림자가 더 감동적이었지만... 할 수 있어, 하면 돼...라는 자신감, 뭐 이게 오래가면 좋겠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으로 충만됐던 기억이...

 

왜 산을 오르는 걸까라는 물음에 답은, 인생사를 배우기에는 산처럼 좋은 교실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정상에 오르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어서다. 그 감동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자, 지은이의 말을 들어보자. 등반은 영적, 물질적, 신은 존재의 또 다른 영역

 

모든 등반은 영적이고, 물질적이라 한다. 산은 존재의 또 다른 영역이라고, 초월적 존재가 광물 형태로 실존한다고나 할까, 산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기쁨, 침묵, 야만의 시, 풍경과 교감하기 위해 새로운 풍만함을 발견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산은 모두를 위한 사치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아름다움의 오래되고 혁명적인 꿈을 선사한다고,

 

오늘날 사치란 모든 희귀한 것에 있다. 불가침의 공간, 다시 발견한 느림, 명상,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삶의 즐거움, 걸작과 영혼의 향유, 돈으로 살 수 없고 말 그대로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여러 특권…. 아마 산은 그래서 철학의 공간이고, 인생의 교실일까?

 

호기심과 열정 있는 사람이 되는 데 우월함이 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에 비탈에서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은 이렇게 끊임없는 도전과 극복 속에서 단련되는 모양이다.

 

 

<출판사에서 보내 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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