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는 죽음과 신에 관한 야바위나 천국이라는 낡은 공상이 통하지 않았다그저 우리 몸만 있을 뿐이었다태어나서 우리에 앞서 살다 죽어간 몸들이 결정한 조건에 따라 살고 죽는 몸그가 그 자신을 위한 철학적 틈새를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면그것이 바로 틈새였다그는 일찌감치 직관적으로 그 철학과 마주쳤으며그것이 아무리 초보적이라 해도 그에게는 그게 전부였다만에 하나 자서전을 쓰는 일이 생긴다면그 제목은 남성 육체의 삶과 죽음이라고 부를 터였다그러나 그는 퇴직 후에 작가가 아니라 화가가 되려고 노력했고그래서 일련의 추상화에 그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저지 턴파이크 바로 옆에 있는 황폐한 공동묘지의 어머니 곁에 묻히던 날에는 그가 무엇을 믿느냐 또는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다더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싶었다그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덮고아버지가 생명을 빨아들이는 통로를 차단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나는 태어날 때부터 저 얼굴을 보아왔어내 아버지의 얼굴을 흙 속에 묻지마 그러나 그들은그 튼튼한 청년들은 리듬을 타고 있었다그들은 멈출 수도 없고멈추려 하지도 않았다설사 그가 묘혈 안에 몸을 던져 매장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1센티미터씩 사라지는 것을 다 지켜보았다맨 끝까지 그 과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두 번째 죽음 같았다그렇다고 첫 번째 죽음보다 덜 끔찍하지도 않은 죽음그는 갑자기 밀려오는 감정에 실려 자신의 삶의 켜들을 뚫고 아래로저 아래로 내려갔다.                    - 필립 로스, 에브리맨



일 년의 나머지 절반이 머무는 6월이다. 그것도 벌써 유월의 사흘이 지나갔다. 지난 달은 행사도 많고 연휴도 있는 날이라 그런지 다른 때보다도 훨씬 더 쏜살같이 지나간 기분이다. 필립 로스의 타계 소식을 들은 지 열 흘도 훌쩍 지났지만 미처 인사를 하지 못했다. 그의 책은 대여섯 권 읽었고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 책이 나오길 기대하고 기다리곤 했는데. 더 이상은 '새 책'으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헛헛하다. 그 동안 고마웠어요, 필립 로스. 보내는 구절은 그의 소설 중 단연코 제일 좋아하는, 그리고 모든 소설을 통틀어 아마도 손꼽아 좋아하는 책인 『에브리맨』에서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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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글이 읽고 싶어졌다. 아니, 생각이 났다. 지금 머릿속을 부유하는 책은 뭘까. 절대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것은 『달의 궁전』이고 가장 자주 떠올리는 것은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였으니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뉴욕 삼부작』일 가능성도 있다. 발밑에 뽀득뽀득 밟히는 눈과 넘어지지 않으려 펭귄처럼 걸어야 하는 겨울날에 읽기에 폴 오스터는 적합하지 않을지 모른다. 적어도 현재의 기준에선 그렇다. 날씨 때문이라면 러시아의 대문호들의 것을 읽어야 할 것이고 이 우울하고 파괴적인 감정에 걸맞으려면 이언 맥큐언을 읽는게 좋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곳에 배를 깔고 누워 코지 미스터리를 읽어도 좋고 정반대의 날씨를 경험하고자 남미의 작가들을 읽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어찌됐건 읽고 싶은 글이 있고 생각나는 책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거기에 읽어 온 기억 때문에 머릿속에서 글귀를 헤집어야 한다는 것 또한. 어찌됐건 읽어온 책들이 머릿속 안에, 마음 어딘가에 숨어있든 감춰있든 하기에 떠올랐을테니. 시작은 폴 오스터였지만 끝은 그러니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퍽 새해에 어울리는 다짐이었다. 


지난 달에는 오랜 티켓을 정리했다. 인쇄된 글자가 날아가 몇 개는 아예 보이지 않았고 3년 전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실은 5년 전 일임을 알게 되었다. 이 경우엔 기억이 생생한건지 아니면 내가 매일을 그저 그런 날로 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추위 속에 찾아간 미술관도 비를 홀딱 맞고 들어간 서점도 땡볕을 걸어 보고야 만 영화도, 그 구질구질한 날씨들은 예상보다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남은 것은 미술관에서 본 그림의 파장과 그 날 서점에서 만난 책이 집에 있다는 사실과 땡볕 속에서 보고 나온 영화가 (이른바) 인생 영화가 되었다는 것 뿐이다. 많이 보고 열심히 읽고 꾸준히 쓰고 잊지 말고 기록해야 하는구나. 아, 그래서였나보다. 매일 찍는 사진의 파노라마, 그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었던걸까. 하긴 <패터슨>을 보며 늘 같은 루틴을 사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성실인가, 성실이란 얼마만큼 놀라운 재능인가에 대한 생각을 했었으니 그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가 분명하다. 


어찌됐건 폴 오스터가 읽고 싶은 오후다(그러나 발췌한 문단은 『달의 궁전』이다. 단언컨대 이 장면 때문에 이 책을 좋아하게 됐다). 




그 아파트에서 나는 1천 권이 넘는 책들과 함께 살았다.

 

내가 빅터 삼촌의 책들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장례식을 치른 지 두 주일 뒤나는 되는 대로 책 상자를 하나 들어내어 칼로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찢고 그 안에 있는 책들을 모두 다 읽었다그 책들은 어떤 순서나 목적이라고는 없이 마구잡이로 한데 섞여 든 것들이었다거기에는 소설과 희곡역사책과 여행기체스 입문서와 탐정 소설공상 과학 소설과 철학 서적이 뒤섞여 있어서 한마디로 출판물의 완벽한 혼돈이었다하지만 그렇더라도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나는 하나하나의 책을 끝까지 다 읽었을 뿐 거기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나에게 있어 하나하나의 책은 다른 모든 책들과 똑같았고하나하나의 단어는 정확히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그것이 내가 외삼촌을 애도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하나씩하나씩 나는 모든 상자를 열어 한권씩 한권씩 모든 책을 다 읽었다그것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설정한 과업이었고맨 마지막까지 나는 그 일에 매달렸다.


각각의 상자는 첫 번째 것과 비슷하게 뒤범벅이어서 격이 높은 것과 낮은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고클래식 작품들 사이에 한번 읽고 버릴 책들이 흩어져 있고양장본들 사이에 너덜너덜한 페이퍼백들이 끼여 있고던과 톨스토이 같은 작가들의 예술적인 작품들이 잔뜩 채워져 있었다빅터 삼촌은 자기의 서재를 체계적인 방법으로 정리한 적이 없었다그는 책을 새로 살 때마다 그 책을 전번에 샀던 책 옆에다 세워 놓았고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조금씩 장서가 늘어 점점 더 많은 공간을 채우게 되었다책들이 상자 속으로 들어간 순서도 정확히 그런 식이었다다른 것은 몰라도 연대순 배열은 깨어지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이상적인 배열 같았다하나하나의 상자를 열 때마다 나는 외삼촌이 살았던 삶의 또 다른 부분어떤 정해진 날이나 주일 또는 달이라는 기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한때 외삼촌이 차지했던 것과 똑같은 정신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같은 글을 읽고같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위안을 받았다.             폴 오스터달의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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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8-01-11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달의 궁전을 다시 읽어야겠어요!!!!

Shining 2018-01-12 22:25   좋아요 0 | URL
와.. 정말 설레는 말이네요. 이 글을 읽고 책을 읽고 싶어졌다는 마음이요(흐뭇) :)
 


 

현재 헐리웃은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력 파문으로 매일매일이 시끄럽다. 그는 커리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여자들만을 상대로 이런 일을 자행했으며 자신의 주변인들,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그 중에서도 남자에게는 아주 좋은 사람으로 행동해왔다. 그의 폭력을 고발하려는 여자들은 꽃뱀 취급을 받았고 커리어가 끊겼으며 취재를 한 로난 패로우의 용기는 어머니의 지지를 등에 업은 금수저의 치기처럼 치부되었으며 로난 패로우가 소속된 NBC는 이 일을 덮으려고 했던 증거가 있다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헐리웃 내에 든든한 연줄이 있는 기네스 펠트로나 안젤리나 졸리, 로잔나 아퀘트, 케이트 베킨세일 등도 그 타깃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른바 쟁쟁한 금수저라고 불리는 카라 텔레빈과 레아 세이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많은 피해자들은 힘이 없고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고 돈이 적은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더 쉽게 타깃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 또한 얼마나 무력하고 수치스러운데 심지어, 하물며 그것조차 아니었다. 여자들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폭력의 대상이 된다. 하다못해 재력과 지위와 유명세조차 젠더폭력 아래의 있다는 것은 허망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이 만행은 와인스틴 집안의 경영권 싸움의 영향으로부터 번졌을 거라는 사실과 그의 공고한 카르텔을 유지했을 수많은 프로듀서들, 감독들은 몸을 사리고 있다는 점이다(레아 세이두의 지지문으로 짐작컨대 결코 적지 않은 남성들은 이 문제를 몰랐을리 없을 것이다. 명명백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지키겠다고 말한 올리버 스톤은 벌써 세 건의 성희롱으로 고발되었으며 지지발언을 한 벤 애플렉과 로버트 로드리게즈 역시 성폭력 가해자로 추가 고발이 들어오고 있다. 제인 폰다의 증언으로는 장 뤽 고다르를, 레아 세이두의 발언을 토대로 압델라티프 케시시 역시 영화를 이유로 희롱과 착취를 하는 행동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쯤 되면 헐리웃의 관행이라고 보일 정도로 줄줄이 이야기가 들려오는 중이다). 남배우들 역시 다수가 침묵하고 있음에도 화살은 여배우들에게 향한다. 당신은 정말 몰랐느냐, 당신 정도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몰랐을리가 있냐, 그 당시에 짐작하는 부분이 있다면 왜 말하지 않았나 등등. 침묵한 언론과 음험한 방관자들과 직접적인 가해자들을 두고 엉뚱한 사람들에게 사상검증을 행하고 있다. 심지어 남배우들을 간단한 지지발언에도 "멋있다"고 찬양하면서 여배우들은 비겁자라는 낙인을 찍어 연대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대체 왜 피해자의 행실을, 옷차림을, 연기력과 커리어를 따지는지 피해 젠더인 여성배우들에게만 촉각을 곤두세우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비상식과 불평등과 폭력적인 세상의 장관을 보고 있으니 점차 내가 비정상인건지 의심하게 될 정도다. 


 

대체 그들은 왜 그러는 걸까? 내가 최근 내린 답은 이렇다. 그래도 되니까. 그렇게 행동해도 되니까.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폭력을 저지르곤, 쉽게 잊고 산다. 가해자는 자신이 한 일을 몰라도 되는 입장이다. 그래서 항상 피해자가 폭력을 증언해야 한다.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온전히 들을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특히 남녀 구도의 폭력 사건이 있을 때면 대다수 사람은 개인적인 일을 일반화하지 말라고 한다. “여자가 그럴 만했겠지.”“그러게 왜 그런 놈을 만나서. 남자 보는 눈이 그러니...” “여자가 처신을 잘 했어야지.” 이러한 시선을 매일같이 반복되는 젠더 폭력을 여전히 사적인 일로만 치부하게끔 한다.

 

카라 텔레빈은 그의 추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노래를 불렀고 자신이 배역을 따낸 후에도 근거가 그 날의 시간 때문일까봐 수치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레아 세이두는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고 했고, 제인 폰다 정도 되는 유명세가 있는 사람조차 두려워서 지지 발언을 할 수 없었다는것에 죄책감을 느껴왔다고 인터뷰했다. 왜 항상 피해자는, 여성을 자기 검열을 해야 할까. 성적 추행은 물론 성폭력을 당한 후에도 여성은 자신의 처세를 돌이켜본다. 내가 여지를 주지는 않았는지, 오해를 하는 행동을 한 게 아닌지,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증인이나 증거가 있는지, 내 옷차림이 단정했는지, 술에 취하지 않았는지, 새벽에 가까운 늦은 시간이 아니었는지, 상대방의 차나 집 근처가 아니었는지, 어둡고 낯선 곳에서 일어난 일인지 등등. 그 모든 것을 고려하는 사람은 피해자다. 용기를 내 고발을 하거나 고소를 하면 '꽃뱀'으로 취급받고 반대로 고발이나 고소를 하지 않으면 그것이 추행이나 희롱이 아닌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심지어 강간이 아니라 화간이나 합의된 성관계를 한 '싼 년'이 된다. 상처를 치유하기는 커녕 그것을 내놓은 것조차 사회의 이해가 필요한데 당연히 사회는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고분고분한 대상을 찾는 심리는 ‘내 뜻을 거스를 때 혼낼 수 있다’는 당위를 전제한다. 상대가 여성일 경우 으레 가르치려고 드는 남성의 특성을 일컫는 ‘맨스플레인’은 그래서 중요하다. 단지 ‘가르침’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가르칠 수 있다는 불평등한 구도 자체가 폭력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맨스플레인이 대중적인 언어가 돼서 대화를 하다가 “아, 내가 또 맨스플레인했네”라고 말하는 남자가 많아졌다. 문제는 ‘말’만 그렇게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인식을 성찰하고 변화하려는 노력 없이 “내가 또 맨스플레인 했네. 이렇게 말하면 또 맨스플레인으로 보이나?”라는 손쉬운 반응은, 결국 자신의 상황을 희화시키며 권력관계는 그대로 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반영한다.

 

택시를 탈 때 남녀가 느끼는 온도 차에 관한 글이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됐다. 택시에서 카드로 요금을 지불할 때 택시기사에게 욕을 듣는 경우가 많아서 카드를 내밀 때마다 눈치 봐야 했다는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그런 불편함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에 남녀 모두가 놀랐다. 나도 항상 택시를 타고 카드를 내밀 때면 “죄송하지만 제가 카드밖에 없어서요...”라며 미안해했다. “아, 가뜩이나 손님도 없는데 카드야. 아휴. 현금 없어요?”라고 따지던 기사들을 많이 만나왔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고개를 조아렸던 거다. 어쩌다가 “아니, 그게 왜 죄송한 일이에요. 당연히 카드도 되죠.”라고 말하는 기사를 만나면 오늘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들은 ‘당연히 카드 결제가 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었다니?

여기에서 의심 없이 ‘우리’라고 믿어왔던 집단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이 사안에 대해 남자들은 카드로 지불하는 건 손님의 ‘권리’가 아니냐고 말했다. 누군가는 ‘권리’로 당연히 누려왔던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걸, 그전까지 서로 몰랐다.

 

뉴스에선 곧잘 여성상위시대라며 떠든다. 근거는 공무원 임용 비율이나 의,약학대 합격률이나 사관학교 수석 등이다. 인류의 성별sex는 현재까진 두 가지다. 여성 아니면 남성. 세계가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예수의 탄생부터만 따져도 2017년동안 남성이 늘 앞서왔다. 이제와 몇 해 여성이 앞서면, 그게 무슨 대단한 거라고 자꾸만 떠들어대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여성이 남성보다 성적이 우수한 사람이 많다면 그게 어떤가. 여성도 남성과 같은 대한민국 국민인데. 그게 무슨 국가적 위기라도 되는 것처럼, 요즘 여자애들은 기가 세서 아들들 기가 죽을까봐 걱정이라는지 참 예민들도 하시다. 적어도 상위시대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과반이 넘는 비율을 차지한다던가 한 시대decade 정도는 내리 독점한다거나 아니면 암묵적인 가산점을 받거나 해야 하는게 아닐까. 여전히 기업은 같은 성적임에도 남성을 여성보다 선호하고 여성들에게 결혼을 할 건지 말 건지와 아기는 안 낳아야 너의 커리어가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각인시킨다(남성의 경우엔 기혼이 될 것을 기본값으로 두거나 아이가 생기면 오히려 퇴직하거나 이직할 가능성이 적게 점쳐지므로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단다).

 

살림살이가 지저분한 남성은 결혼할 때가 된건데 요리도 잘 하고 깔끔한 여성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방송에서조차 이야기한다. 아이를 안 낳는 게 이기적이라고 표현하며 내가 낳은 아이가 무슨 세금 대신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말한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그렇게나 관심이 있는 사회는 아기를 낳은 후에 나의 처지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를 낙태한 여자는 악마보다 못한 년이 되는데 같이 아이를 만든 남자는 도망가고 없어도 처벌받지 않는다(그래놓고 자신의 여자친구가 낙태를 하면 신고를 하는 남자가 적지 않단다). 아이를 낳고 주부가 되면 남편 등골 휘게 하는 게으른 여자가 되고 맞벌이를 하면 아기를 남의 손에 키우는 모성애 없는 여자가 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남편이 된 남자와는 상관이 없다.

 

그룹 내 절반의 인원이 나머지 절반을 차별하고 폭행하고 착취한다고 말하면 대부분이 화를 내겠지만 그것이 남성이고 여성이라면 '아니'라고 한다. 난 내 여자친구를 사랑하고 그녀를 때린 적이 없으니까. 엄마가 있고 여동생도 있으니까. 딸을 낳고서야 여성 인권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은 그전까진, 자기가 본 모든 여자들의 인권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나 진배 없다.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염산을 붓고 때리고 죽였다고 해도 여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라고 '이유'룰 찾으려 든다. 여자를 강간하고 성희롱하는 건 '일부 남자들'인데 나를 '일부 남자들'에 포함시키는 건 내게 모멸감을 주는 행위라고 펄쩍 뛴다.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그래서 어쩌라는 걸까. 당신이 여자를 안 때리고 안 죽인 걸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는건가.

 

이 책의 이야기는 사적이고 또한 정치적이다. 저자는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이지만 그것을 진폭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당신의 경험의 차이다. 정말 운이 좋게도 성차별이나 희롱에서 꽤 벗어나서 살아왔던 나 자신조차 '아, 그런 분위기 알지.'라거나 '그런 순간들이 있지.' 라는 생각을 했으니 당신에게 아픔이 있다면 이 책은 어쩌면 상처위에 뿌려진 소금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어쩌면 눈물이 찔끔 날 수도 있다. 분노와 좌절과 무력감에 우울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을 덮은 것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아픔을 우리가 함께 공유하고 있으며 동시에 극복할 수 있음에 대한 먼지 같은 희망과 연대 같은 것 말이다. 읽으면서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고 슬퍼씅며 이것을 '여자들끼리는 다 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서 한밤중에 씩씩대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인류의 절반이다. 우리도 사회의 구성원이며 같은 국민이며 똑같이 세금을 내고 의무를 지고 권리마저 갖고 있다. 그런데 왜 늘 우리만 다치고 무서워하고 설명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하며 우리끼리만 웅크려서 연대해야 하는걸까.

 

“페미니즘이 대체 뭐예요?” 우리 카페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종종 묻는 말이다. 얼핏 페미니즘을 알고 싶어서 묻는건가 싶지만, 뒤에 붙는 말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페미니즘이 대체 뭐기에 남녀 간 대립을 조장해요? 나 보고 (여성)혐오한다고 할까 봐 요즘은 말 한 마디도 편하게 못 하겠어요. 혐오라는 말은 마치 벌레같이 느낀다는 건데, 저는 정말 여자친구 사랑하거든요. 성희롱이나 성차별도 남자,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문제잖아요. 약자의 문제, 권력의 문제. 근데 꼭 성별을 부각하는 건 남녀 갈등만 조장하는 거 아닌가요? 직장 상사 여자에게 성희롱당하는 남자도 있잖아요. 남자도 강간당해요. 그런데 왜 여자만 피해자라고 생각하지요? 여자는 약자가 아니에요.”

이쯤 되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여성혐오’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여자를 싫어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애초에 ‘갈등’을 절대 악으로 여기는 전제까지. 듣다 보면 상대방이 페미니즘은 물론, 요즘 핫하다는 여성혐오에 대한 개념도 공부하지 않고 나에게 모든 문제에 답하길 요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세 가지 정도다. 기초부터 하나하나 알려주거나, 좋은 책을 소개해주거나, 바쁜 척하거나. 에너지가 가장 많이 쓰이는 건 물론 첫 번째 방법. 하지만 막상 여성혐오가 뭐고 어떤 게 문제인지 이야기를 시작하면, 상대방은 으레 “여자도 남자 몸 쳐다보잖아요”“여자도 남자 혐오하잖아요”라며 몇몇 예시를 들면서 모든 것을 해명하길 요구한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본적인 책을 소개해주겠다고 하면, “페미니스트들이 공부하라면서 가르치려고만 드니까 나 같은 일반인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거예요”라며 역정을 낸다. “바빠서 책 읽을 시간 없어요”라는 대답도 자주 돌아오는 멘트다. 더 이상 말이 안 통할 것 같아 대화를 그만두려 하면 이러니까 페미니즘이 반감을 산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난 일주일 동안만 무려 네 번, 일방적인 해명을 요구하는 손님이 찾아왔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스스로 페미니즘이라는 공적 문제에 관심을 두고 질문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무척 당당하다는 점이다. 페미니즘을 모르는 건 ‘일반인’인 자신에게 당연한 일이고, 알기 위해 찾아온 것만으로도 자신은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배우려는 자세 없이 따지듯 묻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한정적이다. 그러면서도 내게 요구하는 태도는 한결같다. ‘외면하지 말고 하나하나 친절하게 알려달라.’            - 홍승은,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꽤 긴 발췌문이었지만 정말 너무너무 공감이 가는 문장들뿐이라 인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매너가 있다는 사람들조차 굉장히 시혜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로 어디 한 번 말해봐라, 라는 식으로 굴 때가 있다. 그게 '그나마' 나은 사람들이라는게 씁쓸하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는 우리의 대부분이 돈이 적어서, 집안이 평범해서, 그들보다 지위가 낮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할 더 큰 가능성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미국의 헐리웃의 그녀들조차 자신들만의 폭력에 갇혀 살아가고 있었다. 내 자신이 뭐라고, 나보다 훨씬 좋은 처지에 있을 그들을 동정하려는게 아니라 그저, 예상 외의 무력감과 환멸을 느끼게 했을 뿐이다. 능력과 재력과 지위와 위치와 무관하게 여성은 늘 젠더폭력에 약자라는 것을. 그저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사는 한은 늘 끝없이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수치와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막막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끝으로 문유석 판사의 칼럼 중 인상적인 꼭지를 하나 첨부한다(http://news.joins.com/article/20737388). 그의 이야기처럼 앞으로 더 불편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단지' 불편하다는 마음만을 느낀다는 것이, 그 어리석은 순진함이 솔직히 부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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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실감하는 근거는 여러가지가 있다. 내 경우엔 조카가 자라는 것을 보거나 아니면 그 영화를 본 게 몇 년 전이구나 할 때 가장 절실하게 실감한다. 전자는 뿌듯함과 아련함과 다행스러움이 섞여있다면 후자에는 전적으로 자괴감과 부끄러움이 스민다. 누군가가 어떤 배우의 필모그래피가 부진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하지만 적어도 그 사람은 쉼없이 움직였지. 내가 이렇게 제 자리에 주저않아 있을동안.' 하고 생각했다. 선거 역시 따지자면 후자와 비슷하다. 벌써 총선을 몇 번, 대선을 몇 번, 심지어 보궐 선거에 투표도 했었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 제법 많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5년 전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 날 아침에 입었던 옷과 신었던 신발과 눈이 채 녹지 않은 곳을 밟으며 걸어갔던 그 냉기와 혹독함까지도. 후보자에는 늘 되선 안 되는 사람이 있었고 우리는 늘 나쁜 선택지만 고른다. 내가 고른 것은 아니어도 우리 모두가 함께 견뎌야 할 투표의 결과가 혹독해 나는 늘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작년과 올해. 승리나 획득의 경험이란 얼마나 중요한 건지 실감한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여태껏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마 이번에도 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기는게 아니라 견디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우린 늘 나쁜 선택지만 뽑았으니까. 하지만 어렵사리 거둬낸 첫 걸음은 그 값만큼이나 무척이나 맛있었다. 과장하자면 황홀했던 것도 같다.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다고 생각할만큼. 


어제 아침은 그 날 아침과는 달랐다. 아마 5년 뒤에도 어쩌면 그 뒤에도 역시 어제를 기억하겠지. 어제 입은 옷과 신었던 신발과 취임사를 보던 사람들의 표정과 비온 후 오랜만에 깨끗했던 공기까지도. "2017년 5월 10일, 대한민국이 다시 시작합니다."라는 말을 들으며 울컥했을 때, 새삼 모두가 얼마나 지쳐있었는지를 깨닫는다. 산재해있는 문제는 너무나 많고 크고 무겁다. 반드시 돌아서는 사람이 있을테고 기다리지 못해 지쳐 떨어져가는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반발만 하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다시는 방관자로서 혹은 회의론자를 가장한 비겁자로 지내지만은 않겠다. 적어도 나만은 그래야 한다고 어젯밤 생각했다. 맹신이 아니며 지지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나쁜 선택지만 뽑아왔던, 말이 안 되는 말만 들어왔던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는게 그것이 대견할 뿐이다. 그리고 오늘은 새로운 시작, 하고도 첫 날이다. 



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it was the age of wisdom, 

it was the age of foolishness,

it was the epoch of belief, 

it was the epoch of incredulity, 

it was the season of Light, 

it was the season of Darkness

it was the spring of hope, 

it was the winter of despair, 

we had everything before us, we had nothing before us,

we were all going direct to Heaven, we were all going direct the other way.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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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 오규원,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밤에는 잠이 오지 않고 아침엔 늘 부족하다. 저녁형 인간이라 평생을 그러해왔지만 요샌 새삼스러울 정도로 그 간극이 심하다. 밤에 깨어있다고 특별히 무얼 더 하는 것도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늘 생각하는 건 졸려, 보다도 그냥 차라리 잘 걸, 에 가깝다. 멀뚱히 눈만 뜨고 괜히 책장을 뒤적거리거나 더는 정리할 것도 없는 서랍을 열고 닫는다. 커피를 많이 마셔서 그런걸까. 오늘은 진짜 진짜 안 마시겠다고 아침에 머리를 감을 때마다 생각하지만 지켜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아침의 다짐은 밤이 쓰러트리고 밤의 결심은 아침에게 매일 패배한다. 


잠과 커피, 손거스러미와 두통, 무기력증과 허무함, 비어버린 열정의 잔, 미지근한 냉소의 그릇, 진심이 아닌 상냥함과 친절하지 않은 진실. 지독하게 얽혀 끝과 끝을 모르는 실타래를 풀어내기보단 그냥 통째로 몽땅 다 어딘가에 버리고 싶어진다. 며칠 전 본 영화 <라이프>의 결말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겠지. 게다가 그 웅장하고 비장하고 불온한 음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오는 곡이 Norman Greenbaum의 <Sprit in the sky>라니. 비겁함에 느끼던 수치조차 사라진 밤, 잠이 오지 않는다.



When I die and they lay me to rest 
Gonna go to the place that's the best 
When I lay me down to die 
Goin' up to the spirit in the sky 
Goin' up to the spirit in the sky 
That's where I'm gonna go when I die 
When I die and they lay me to rest 
Gonna go to the place that's the best 


Prepare yourself you know it's a must 
Gotta have a friend in Jesus 
So you know that when you die 
He's gonna recommend you 
To the spirit in the sky 
Gonna recommend you 
To the spirit in the sky 
That's where you're gonna go when you die 
When you die and they lay you to rest 
You're gonna go to the place that's the best 


Never been a sinner I never sinned 
I got a friend in Jesus 
So you know that when I die 
He's gonna set me up with 
The spirit in the sky 
Oh set me up with the spirit in the sky 
That's where I'm gonna go when I die 
When I die and they lay me to rest 
I'm gonna go to the place that's the best      - Norman Greenbaum, Spirit in th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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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3 02: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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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4 0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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