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잠에 드는 순간 그 문단이 떠올랐다. 어렴풋한 느낌과 그 글귀를 읽는 순간의 전율과 아찔함, 그 날의 날씨와 입었던 옷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문단은 약간 흐릿했다. '그 문단'은 이것이었다.

 

그런 아내의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하기 어려웠다. 마치 그녀가 믿고 기도하는 대상인 전능한 하나님이 그녀의 몸에 암세포를 집어넣고 키우라기도 한 것처럼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는, 자기 몸 속에 암세포를 집어놓고 키운 것이 분명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독한 항암제를 맞아 머리가 빠지고 거죽만 남을 정도로 말라 가는데도 아내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한정효는 그런 하나님도 그런 아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에게 전적으로 헌신하고 온전히 의지하는 추종자의 안전조차 보호해 주니 않는 전능자의 능력이란 게 대체 뭐냐고. 전능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 힘을 어디에 쓰려고 아껴두는 거냐고, 자기에 대한 믿음 하나로 사는 사람의 생명조차 보호해 주지 못하는 신을 왜 믿어야 하느냐고 윽박질렀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생각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그는 힘이 어떻게 쓰이며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내는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능력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있는 것처럼 판단하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건 옳지 않다고 답했다. 한정효는 전능자의 권력 사용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아내는 전능자의 권력 사용에 대한 사람의 판단 능력에 이의를 제기했다. 한정효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듣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렇게 독실하고 헌신적인 사람을 이런 병에 걸리게 할 수 있는가, 거기에서 무슨 뜻을 찾으란 말인가, 하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만 질러 댔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내의 무반응과 침묵은 도에 지나치게 항변하는 그를 무안하게 했다. 그때는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신을 원망의 표적으로 삼음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징벌을 피하고 있었다.      - 이승우, 지상의 노래

 

오늘 낮, 뜨거운 볕 아래에서는 다짜고짜 나쓰메 소세키가 생각났다. 아마도 『문』의 한 부분일거다.

 

불륜의 발각이 정통으로 그들의 미간으로 꽂혔을 때, 그들은 이미 도의적인 경련의 고통을 극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창백한 이마를 솔직하게 앞으로 내밀고 불꽃과 비슷한 낙인을 받았다. 그리고 무형의 쇠사슬에 묶인 채 서로 손을 잡고 어디까지라도 함께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부모를 버렸다. 친척을 버렸다. 친구를 버렸다. 크게 보면 일반 사회를 버렸다. 어쩌면 그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쪽이 옳았다. 물론 학교로부터도 버림받았다. 다만 표면적으로는 스스로 퇴학한 것으로 하여 형식상 인간다운 흔적을 남겼다.            - 나쓰메 소세키, 문

          

그리고 지금, 갑자기 근거있는 불안과 이유없는 우울 속에서 필립 로스의 글을 떠올린다.

 

그는 형이 건강을 잃기를 바라는 원한 가득한 마음을 오래 품고 있지는 못했다. 질투를 한다지만 그 정도까지 가지는 못했다. 형이 건강을 잃는다고 해서 자신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그의 건강, 그의 젊음을 되찾아줄 수 없었고, 그의 재능에 힘을 불어넣어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격앙된 상태에서는 하위의 건강 때문에 자신이 건강을 망쳤다고 믿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교양 있는 사람답게 불평등과 불행의 수수께끼를 너그럽게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었지만. 옛날에 정신분석가가 급성 맹장염 증상을 질투의 증상이라고 그럴싸하게 진단했을 때, 그는 여전히 부모의 품 안에 있는 아들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할 때 찾아오는 느낌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노인이 되어서야 그는 질투하는 사람에게서 평온, 나아가서 심지어 현실적인 태도까지 빼앗아가는 감정 상태를 발견했다 - 하위가 생물로서 부여 받은 것이 자기 것이기도 했어야 한다는 이유로 하위을 미워했으니까.

갑자기 그는 원시적으로, 본능적으로 형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두 아들이 그를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 필립 로스, 에브리맨

 

글을 쓴다는 건 새삼 대단한 족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책을 읽는게 얼마나 멋진 일인가에 대한 감탄도. 자야하는데 잠이 오지 않아 들쑥날쑥 빈 책장 앞에 서성이며 여태까지 읽어온 책 중,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가장 중요한 책 20권은 뽑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정도를 셀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리 나쁜 삶은 아니라는 이상한 방식의 안도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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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날이 있다. 아슬아슬한 테트리스 조각들처럼 그럭저럭 쌓아가던 인생이 사실은 그 밑바닥에 모래는 커녕 진흙탕 위에 세워진 것이란 것을 깨닫는 날이. 사실 내 삶이 무너지고 있다는 자체는 괜찮았다. 그러나 내가 망가지고 있다는 것, 내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밖으로 보이는 나와 현실의 나. 외부와 내부. 나는 술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이 없고, 전화로 병결을 통보한 적도 없으며, 숙취로 조퇴한 적도 없다. 하지만 내부의 나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안팎의 부조화가 너무 컸다.

 

새벽녘에 잠에서 깨거나 혹은 3시가 넘도록 너무도 멀쩡한 불면의 밤을 헤매는게 지겨워졌을 때, 차라리 밖을 나가고 싶었으나 그 시간에 바깥을 걷는다는 건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고 그 겨울은 객관적으로도 몹시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걷는 대신 한 두 잔씩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아서, 깊은 잠을 위해, 가끔은 잠들고 싶지 않아서. 기껏해야 맥주 한 두 캔, 많은 날은 소주 한 병이나 와인 한 병이었다. 키가 큰 스탠드 하나만 켜두고 책상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책을 쌓아놓고 홀짝였다. 거의 매일을 그렇게 보냈다.

 

나같은 사람을 일컫어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라고 한다. 겉에서 볼 때는 아무 문제 없고, 유능하며 단정하다. 그 밑은 진흙탕처럼 혼탁하고 온갖 비밀로 들끓지만, 그런 모습은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중략) 이들은 대부분 대인관계가 좋고 친구도 많다. 고도 적응혈 알코올 중독자들은 아주 흔하다. 이들은 직장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식품점 계산대에 얌전히 줄을 서 있다. 의사, 변호사, 교사, 정치인, 화가, 심리치료사, 증권거래인, 건축가 등 전문 직업인도 많다. 이들을 지탱하는 힘, 다시 말해서 이들이 밤마다 술에 빠지고 다음날 아침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그게 문제라는 걸 외면하고 살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들이 ‘진짜’ 주정뱅이들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때의 내가 알코올 중독자였을까. 놀랍게도 이 책에 따르면 나는 ‘그랬었다’. 그 시절의 나는 이러했다. 나는 맹세코 취하도록 마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집안을 엉망으로 어지른 적도,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실수를 한 적이 없었으며, 스스로의 안전에 위협이 될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 늘 나의 주량을 살펴서 조심해서 마셨고 그 다음날 늦잠을 자거나 숙취에 시달리지 않아 생활의 패턴을 망가트린 적이 없다. 심지어는 술을 더 마시기 위해, 하루를 잘 버티기 위해 그전에는 안 하던 운동을 시작했고 삼 시 세끼 식사를 거르지 않아 특별히 살이 더 찌거나 심각하게 빠지지도 않았으며 눈에 띄게 피부가 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요즘 얼굴이 좋아보인다는 소리도 가끔 들었다. 평소보다 더 이를 더 꼼꼼히 신경 써서 닦았고 손이나 머리카락에서 혹시 모를 냄새가 나지 않을까 한층 더 청결에 집중했다. 가끔 친구들을 만났고 늘 그렇듯이 영화도 봤고 일도 -심지어- 아주 잘 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른 아침 혹은 아주 늦은 밤 몰래 버리는 술병과 내 머릿속을 제외한다면, 나는 너무나 멀쩡했다. 한 두 어번, 잊어버릴만 하면 한 번씩, 매일 밤마다 술을 마시는 행위가 결코 좋은 행동이 아님을 인지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단지 나 자신의 건강을 조금 해치고, 잔해의 처리가 어렵다는 것 외엔 문제가 될 거리가 전혀 없는 '취미생활'을 포기할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내가 술을 조금 많이 마시긴 해. 하지만 상황이 이런데 어쩌겠어? 나는 좀 마셔도 돼.’ 나는 자주 이렇게 중얼거렸고 이 말을 갈수록 진실하게 느껴졌다. (중략) 이것은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들의 전형적인 논리 전개 방식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에게는 술 자체가 중요한 보상 역할을 한다. 하루를 온전히 버틴 데 대한 크나큰 보상, 그것도 그렇게 훌륭하게 버텨낸 데 대한.

 

가난이나 불행, 불운과 같은 일이 가져오는 진짜 문제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겪는 인간의 변혁이다. 도무지 그 전과 같은 농도로 세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참혹함, 거세된 감정을 껴안고 흘릴 눈물도 남아있지 않은 냉혹함. 본래 연민이나 동정에 익숙한 편이 아니지만 고통의 시간이 권태롭고 허무해져 세상 만사에 예전보다도 적어도 2,3도는 낮은 온도를 갖게 되어버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인간같지 않아졌을까. 댐이 무너져 수장된, 이제는 흔적도 없이 수장된 마을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파충류의 눈깔로 나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미련없이 자리를 뜨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주 작은, 있는지도 모르는 어떤 생채기를 계기로 느닷없이 울음은 터졌다. 작은 짐승처럼 몸을 옹송그리고 입술을 깨문 채 나오는 울음 끝은 길고 깊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힘들었다는 것을, 힘들었다고 누군가에게라도 아니면 스스로에게라도 말했어야 했음을 알았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제멋대로 상처를 봉합해버렸다는 것을, 기실 스스로가 다쳤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한참 후에야. 그리고 그 시절의 나를 버티게 해준 것은 어쩌면 -스스로도 몰랐지만- 내 자신 그 자체가 아니라 술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 또한. 18개월 가까이 모진 일들을 겪는 동안에도 한 번도 울지 않았다는 것도. 내가 무너져선 안 된다는 다짐 하나 때문에 내 자신의 많은 부분을 이미 잃었다는 것까지도. 그 때 흘린 눈물은 이미 지나간 상실의 무덤에 바치는 뒤늦은 허무였다. 많은 것을 느끼게 한 해가 긴 어느 날의 오후의 일이었다.

 

그때의 허기, 그 ‘결핍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나한테는 이게 필요해.’ 어쩌면 그렇게 소리 내서 말했는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게 말했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느낌은 그만큼 강렬했다.

 

내가 아는 알코올 중독자들은 대부분 술을 입에 대기 훨씬 전부터 그런 허기를 경험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안도감과 위로와 평안을 전해줄 외부의 어떤 것에 대한 갈망이다.

 

상황이 나아지면 다 끝낼거야.

 

맞아,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상담사를 찾아갈 수도 없고 한밤중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고 가족에게 털어놓기엔 가족 자체가 문제라면, 누군가에게 골칫덩이가 되거나 이해받지 못해 얼음벽에 쌓여있는 것보단, 술이 훨씬 나으니까. 이해받을 수 없는 스스로도 통제 불가능한 결핍과 허기와 두려움의 세계에서 술처럼 따뜻하고 아늑한 친구는 없다. 그러나 캐롤라인의 말처럼 술은 문제의 해결책이 되는게 아니라(어쩌면 처음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점점 더 문제 그 자체가 된다. 나는 일상생활을, 내 자신을, 주변을 망가트리지 않았지만 어쩌면 더 오랜 시간을 지속했다면 분명 누군가에겐 내 상태를 들키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술을 많이 마시는 모습, 혼자서만 술을 마시기 위해 부자연스럽게 자리를 파하는 모습, 남들과 함께 있는 중에도 술병을 응시하며 입술을 깨무는 모습, 아침의 전화 너머로 알 수 있는 약간 샌 발음 같은 것들을. 어떤 순간에 누군가는, 어쩌면 그런 것을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이제는 인정한다.

 

바닥을 치는 일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바깥에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술을 ‘그런 식으로’ 마시지 않는다. 그렇다고 딱히 그 때보다 상황이 나아진 것도 아니다. 심지어 나는 그 때보다 더 나이를 먹었고 그만큼 더 탁하고 늙고 낡아져가고 있다. 그러나 술은 마시지 않는다. 글쎄, 이유는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었던 자기 학대의 역치가 그 때였을수도 있고 이제는 상황 자체에 체념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모르겠다. 그 때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걸까. 모르겠다. 그저 술은 선하고 따뜻하고 온건한 친구였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래서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물론 다시 그 선을 넘게 될 수도 없다. 세상에 다시 없는 일,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은 없기에. 선을 넘을 때는 이게 그 선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읽고나니 울음끝이 터질듯 목 안쪽이 시큰거렸다. 비록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아, 그게 어떤건지 알 것 같아." 입밖으로 터져나온, 한숨같기도 하고 탄식같기도 한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사람들은 제각각의 이유, 제 멋대로의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망치기도 한다는 것을. 적어도 그것을 알 것은 같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이 책장 한 켠에 놓여있는 것을 볼 때마다 실감한다. 어쩌면 이 책이 내게는 일종의 AA의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나이 먹는 건 씁쓸하지만 그래도 다시 어려지고 싶진 않다고 의견을 모았다. 몇 가지를 빼곤 나이 먹는 쪽이 더 좋다고. 아니 몇 가지일 것도 없지. 노쇠한다는 것. 어쩔 수 없이 낡아지는 체력이나 건강문제에 대한 두려움을 빼곤 특별히 지금보다 어린 시절이 부럽지는 않다고 우리는 동의했다. 딴에는 어른인 척 했던 그 시절이 돌이켜보면 어리석거나 영글거나 서툴고 때문에 때로는 이기적이고 철이 없었음을 이야기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한층 더 상승된 (나 자신의) 초연함, 무던함, 어쩌면 무심함이 나이를 먹음으로써 갖게 된 것이라면 때문에 나이 드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긴, 무심함은 언제나 나의 특징적인 부분이었다. 셀 수 없는 단점 중 하나였고 거의 유일한 장점인 궁극의 무정함. 과거엔 서운함이나 질타의 대상이 될 때가 많았는데 요샌 조금 감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때론 (점차) 비주류에 속할 선택을 하는 탓에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이 고립되고 도태되는 느낌을 받아 초조해질 때가 있다. 정말 이렇게 괜찮을까. 이대로도 잘못 살고 있지 않는걸까. 그럴 때마다 낮아지는 자존감, 치솟는 불안감을 채우려고 나도 모르게 뭔가를 사려고 할 때가 있다. 결코 건강한 신호가 아님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결과적으로 나를 더 -여러 의미에서- 가난하게 할 뿐이고 그 가난은 나를 숨막히게 할 거라는 것을, 어떤 소설에서 말하듯이 “돈이 있을 땐 낙타의 가죽으로 만든 신발이었던 것이 돈이 없을 땐 낙타가 신발장에 들어찬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기 위해 그냥, 적게 쓰는 쪽을 택한다.

 

물론 때때론 다이어트하다 폭식하는 사람마냥 난폭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외로워진다. 잘 안 신을 것을 알면서도 예쁜 구두를 사고 싶고, 분명히 잘 안 어울릴 색깔의 섀도우를 사려고 한다. 허나 정작 그러고나면 크고 작게 후회하거나 자책하거나 자조할 것을 알기에. 그냥 커피나 마시자며 다독인다.

 

“중요한 건 소박함 자체가 아니야. 나는 나를 미니멀리스트라 여기지 않아. 중요한 건 선택을 신중히 하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부부는 언제나 빚지지 않는 걸 철칙으로 삼고 있어. 빚을 지지 않으면 우리 성향과 생활방식에 잘 맞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기거든.”

 

결국 ‘삶을 단순화한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자기 내면의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기를 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생활방식을 재정립한다는 의미이다.

 

짐이 늘어나는 걸 너무너무 싫어하는 사람이고 물건이 많아짐으로써 필연적으로 정리하기 어려워지는 점도 못 견딘다. 가끔 좀 깔끔병을 떨고 청결에 집착하는 면이 있어서 수납되지 않고 바깥으로 나온 물건이나 아무렇게나 꽂혀있는 책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겠지. 그래, 친구와 이런 말도 했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더 강해지거나 부드러워지거나 더 철이 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상황파악은 비교적 냉정하게 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의 장단점을 이제는 인정한다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것, 또는 어쩔 수 없이 견뎌야만 하는 상황 자체를 피하기 위해 심호흡한다. 이 책을 읽으면 이런 삶을 지향하는게 적어도 나 혼자는 아니라는 것, 내가 잘못하거나 잘 못 하고 있지 않음을 새삼스레 확인받는다. 그게 가끔은, 안도가 된다.

 

 

 

아무것도 읽지 않고도 삶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진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책을 읽자는 다짐 아닌 다짐도 힘을 잃은지 오래다. 그러나 문득 생각하길, 그렇다면 독서란 그야말로 자발적인 순도 백퍼센트 자의에 의한 행위라는 것과 그렇기에 마음 먹지 않고 몸이 습관을 뱉어낸다면 영영 할 수 없는 일일수도 있다는 오싹한 결론. 아아, 이건 좀 새롭게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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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인 책은 피하는 편이다. 기다리는 즐거움이나 잊을만하면 만나는 설렘을 운운하기엔 그보다 훨씬 몸집이 큰 호기심이나 부족한 끈기 덕분에 답답했기 때문에. 다행히도 차라리 안 보고 기다리지, 하는 이상한 오기가 좀 더 큰 덕에 완결이 나기까지 기다려 한달음에 읽는 때가 많았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아니 대부분은 예외가 더 중요한 법. 어떤 책들은 어쩌다 보니 -문자 그대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함께 발맞춰 걷고 있다. 이러려던게 아닌데, 어리둥절 하면서도 보폭을 맞춰서 착실하게 잘 따라가는 중이다. 이런 책들이 그렇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는 설정부터 대사까지 라이트 노벨다운 느낌이 제대로라 -시쳇말로- 오그라들 때가 많다. 느끼한 걸 못 견뎌해서 심지어 6권을 읽는 지금도 괜히 손을 긁을 때가 있다(거기에 책 속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된 탓에 지금은 처음보다 더 어색한 분위기가...). 게다가 작가의 서명이나 책의 초판 등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장서가가 아닌 사람에겐 '그렇게까지' 흥미로운 내용이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책 읽는 자체를 좋아할 뿐 책의 외부적인 사항(초판이라던가 작가의 친필본 등)에 큰 관심이 없는지라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드는 책 속 장서가들을 보면 여전히 신기한 감정이 들 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리즈를 꾸준히 따라가는 이유는 책이 쓰여진 배경이나 작가의 심적 상태를 반영한 다양하고 귀한 정보를 듣는 즐거움과 책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게 이 책 전반에 빼곡이 박여서인것 같다. 주인공 뿐 아니라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책이 좋아 견딜 수 없다는 듯 마치 사랑하는 이를 대하듯, 연애하듯 책 이야기를 해서 어딘가 모르게 외경심을 갖고 책을 읽게 된다. 맞아 그런 거였지. 읽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런 두근거리는 아득함 같은게 있지. 하는 식으로 책에 대한 첫사랑의 흔적을 타인과 나누는 기분이라고 해야하나. 이제는 반쯤 퇴색해버린 책에 대한 순수한 몰입과 태도를, 이 책을 읽어가며 다시 떠올리게 되고 그 순간 떠오르는 흐뭇함이 꽤 달콤하다.

 

거기에 소재가 된 책이나 작가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되는 것과 몰랐던 정보를 받게 되는 것도 가치가 크다. 특히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은 이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책인데다 이번 권은 다자이 오사무 본인이 주된 소재인데 책 속 인물들이 다자이 오사무를 두고 하는 이야기를 읽으면 속으로 많이 웃었다. 징징거리는, 이십대 초반에나 읽을 작가라는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렇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뭔가가 분명 있는, 그래서 세월을 초월한 작가라는 표현에도 일견 동의했다. 아, 하나 더. 이 시리즈의 소재로 쓰일만한 유수의 작가들이 일본에는 적지 않게 있다는 것, 거기에 그들의 작품이나 자료가 나름대로 잘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에는 매번 감탄하고 그만큼 씁쓸하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 책을 쓴다면, 어떤 작가들을 뽑아서 엮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나열할 수 있을만큼 많은 정보와 자료가 있을까 짐작하다 짐작 이상으로 장서가들은 역사 속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과거에 존재했던, 그리고 지금과 나중에도 있을 장서가들에게 존경을 보내게 된다.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에는 매력이 있다. 오래 진행 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데는 이유가 있구나 절로 납득할 정도로. 후기에서 작가는 특정 인물을 주인공 삼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인물들은 몇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스티브 카렐라와 그의 부인 테디인데 이 둘을 무척 좋아한다. 재밌는 건 카렐라도 테디도 그 자체로 선남선녀, 매력적이지만 희한하게도 둘이 함께 있으면 그 매력이 갑절이 된다는 건데, 이 점은 작가가 운이 좋은건지 아님 작가가 역량이 좋은건지 헷갈린다. 둘이 나란히 선 장면은 이상하게 흐뭇하고 예쁘면서도 기분 좋은 긴장감이 흘러서 잘 어울리는 젊은 부부를 바라보는 노부인에게 빙의한 마냥(!) 괜히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중이다.

 

테디가 말을 못 한다는 설정은 경찰소설의 등장인물로서는 엄청난 핸디캡인 동시에 대단한 장점이다. 극단적인 효과의 예를 들면, 작가가 밝힌 『마약밀매인』의 마지막 씬, 처음 설정과 실제 출간된 장면을 비교해보면 그녀가 말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오는 비통과 안도를 경계짓는 모호함과 뚜렷함을 동시에 선사할 수 있었다(애초 스티브 카렐라를 죽이려고 했다던 작가의 최초 설정은, 바꿔 말하면 자신의 다짐 -특정한 인물을 부각시키지 않겠다는- 을 무너트릴만큼 카렐라가 두각을 드러냈다는 증거이자 결국 그를 죽이지 못한 이유는 그를 소모적으로 다룰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라는 것을 편집부에서 호소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이번 편에서도 이러한 설정을 잘 활용한 장면이 나온다. 위기의 순간 그녀가 쉽게 남편에게 연락을 할 수 없는 것도 그녀가 말을 할 수 없어서였고, 그녀가 쪽지를 통해 연락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도, 그러나 그녀의 도움을 사람들이 가볍게 넘긴 것도 그녀가 말을 할 수 없어서였다. 덕분에 독자로 하여금 긴장과 불안을 느끼게 하지만 카렐라가 나타난 순간 이 모든 불편함과 스릴은 더 큰 카타르시스로 승화된다.

 

어떤 작가가 그런 말을 했었다. 캐릭터를 창조한 건 분명 자신이지만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캐릭터가 혼자서 숨을 쉬고 살아서 돌아다니게 된다고. 그렇게 되면 자신조차 그 캐릭터를 함부로 어찌할 수 없다고. 에드 맥베인은 87분서를 오롯이 통제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이미 87분서는 캐릭터들이 저 나름대로 복작복작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작가 자신조차 카렐라를 죽도록 선택할 수 없었던 걸지도. 어찌됐건 테디와 같은 캐릭터를 만나게 되어서('첸'이라는 사람도 일회적인 캐릭터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간다) 독자로선 기쁘다.

 

 

  엘릭시르의 미스테리 클럽 시리즈는 편차가 심하다. 몇 권은 -솔직히- "아, 이게 뭐야."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대신 가끔씩 대작이 한 편씩 나와서 놓을 수가 없다(페이퍼를 쓰면서 세어보니 출간 된 책에 2/3 정도 읽은 것 같다). 가장 최근 읽은 『상복의 랑데부』는 엄격히 말해 결코 잘 쓴 책이 아니다. 연작 마냥 에피소드로 이뤄져있긴 하지만 기승전결을 금방 알 수 있고 근래 영화에서도 종종 본 듯한 플롯이라서 싱거운 맛도 있다. 그런데도 시작과 끝 부분을 읽으면 수런수런 마음이 시큰해지는 느낌이 든다.

 

조디 포스터가 주연으로 나왔던 <브레이브 원>에서 그녀는 이런 말을 한다. "공포를 경험하고 나면 알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속에 공포가 잠복해 있었다는 것을. 옛날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떤 일을 겪으면 사람은 결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때론 본인의 탓이기도 하고 때로는 타의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일들은 사람을 완전히 바꾸고 잠식하고 결코 원래대로, 예전처럼 돌려주지 않은 법이다. 복수를 한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것을 그들도 알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들의 행복을 빌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일도 있는 법이다.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아픔, 당사자가 아니면 그 변화의 척도를 예측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는 일. 세상엔 그런 일도 있다. 

 

 

그 외로는 가장 좋아하는 걸 마지막에 먹는 기분으로, 커스터드 푸딩을 먹기 위해 운동을 하듯 내 자신에게 포상을 주듯 드문드문 애거서 크리스티 스페셜을 읽고 있고 밀란 쿤데라 완독의 고지가 퍽 가까워졌다. 예상보다 작품별 편차가 있어서 진도가 느린 나쓰메 소세키 전집은 고양이가 물을 핥듯이 아주 천천히, 천천히 따라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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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5 18: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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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6 14: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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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6 18: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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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7 1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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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고 페이퍼에 언급만 하고 또는 읽고선 기록하지 않은 책들이 떠올랐다. 짤막한 메모와 단상을 휘갈겨둔 꼬깃꼬깃한 종이를 기울여가며, 스스로도 잘 읽지 못하는 글자들을 어렴풋하게 더듬어가며 페이퍼로 옮겨본다. 책의 순서는 읽은 순서이나 앞에 두 권은 연달아 뒤에 두 권은 시간 차를 두고 읽었으나 어떤 의미에선 카테고리화 가능할 것 같아 묶어보았다. 이렇게 보니 주제(또는 소재)는 페미니즘이 될 것 같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의 저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아이의 엄마, 혹은 누군가의 부인의 역할만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우울감을 느껴 주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녀의 주변인, 심지어 남편 역시 '이제' 그녀에게 그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아 그녀는 대학으로 돌아간다. 과거의 여자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가, 나는 엄마이자 부인이자 여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찌 보면 과거의 여성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과 비슷하다. 각기 다른 학교, 교수, 교재와 학생들을 만나며 그녀가 하는 생각과 책에 대한 소개, 감상 등을 적어내려간 책이다. 그녀가 교재로 읽는 책과 그 외에도 읽어볼만한 페미니즘 관련 추천 도서 목록이 있어 만족스러운데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페미니즘 고전 도서들을 만날 수 있어 뿌듯하면서도 반갑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공감가는 상황들이 몇 있었는데 젠더적 측면에서 진보적인 부모의 영향 아래 자란 화자지만 현실은 여전히 (부정적 의미로) 보수적이라는데에서 그녀가 느낀 허무함과 좌절감이 특히 이해가 갔다. 지금도 적지 않은 여대생들이 좋은 부인이나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대학을 간다는 사실에 그녀는 조금 놀라고 대학에 만연한 성추행이나 성폭력의 현황에 대해서도 충격 받는다. 특히 아이의 이유식이나 발레학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보단 책 읽기를 좋아하는 그녀를 대하는 주변 아이엄마들의 태도 때문에 그녀가 느끼는 불편함도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자가 좀 더 개인적이되 학술적인 의미에서 페미니즘의 접근한다면 『페미니즘의 도전』은 페미니즘이란 이름을 붙이고는 있지만 그보다는 상대적 차별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하는 책이다. 내가 무심코 하는 선입견이나 편견, 배려없이 하는 말들이 상대적 약자에겐 불편하거나 불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수확이 있었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쉽게 내뱉는 말들과 생각을 들으며 답답하고 불쾌한 한편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보는 기회가 됐다. 말하자면 『빨래하는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으로 회귀하는 순간의 기록이라면 『페미니즘의 도전』은 이미 많이 도전하고 여러번 깎인 사람이 하는 다정하지만 따끔한 충고같다. 올바른 생각을 하기도 어렵지만, 무엇이 올바르고 혹은 옳지 않은지를 고민하는 건 더 어렵고 의미있는 과정이란 생각이 새삼 들었다. 어쩌면 중요한 건 올바른 잣대가 아니라 올바르게 살려는,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려는 의지라는 것 또한.

 

 

  현실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현실이 불쑥, 너무도 깊게 가깝게 파고들어 어질어질한 기분. 놀랐고 뭉클했고 수치스러웠다. 그러다 내가 그러한 현실에 처하지 않았음을, 내 주변의 누군가에게 강요받은 적 없음을 다행스러워하다 그러다 이 ‘당연함’을 다행스러워하고 감사한다는 사실에 얼떨떨했다. 그런 것들이 운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을 수 밖에 없는 이 수많은 사례와 높은 퍼센트를 황망하게 바라보면서. 이러한 사회에서 여자로서,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약자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현기증 나는 일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경차나 분홍색, 크림색, 빨간색 차는 범죄에 더 빈번하게 노출된다는 최근 사회면 기사들이나 범죄율을 상정한 지도들을 봤을 때도 그랬다. 이러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과,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어떤 ‘노력’을 하며 범죄의 피해자, 방임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하는지. 어째서 이 사회는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더 아프게 하는건지. 내 주변의 누군가가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게 가장 상대를 위하는 길인지, 생판 모르는 사람이 이러한 위기에 처한 걸 봤을 때 그 때도 당당하게 나설수 있을지를 스스로에게 묻다 눈물이 찔끔 났다. 부끄럽게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기를 내야 한다고, 도망치지 말자고 몇 번씩 다짐할 수 밖에 없었다.

 

 

 앞의 책이 실질적 범죄율에 근거한다면『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사회적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단어 맨스플레인을 말할 때 흥미로운 점은 남자들조차('조차'라는 표현은 이 책의 기본 시선이 여성의 입장에서 쓰여짐을 고려한 것이다) 맨스플레인을 많이 당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어쩌면 이러한 행위는 강자가 상대적 약자에게 행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한데 그렇다면 같은 이유로 적지 않은 남자들이 여자를 자신보다 약자로 여긴다고도 볼 수 있다.

 

특별히 맨스플레인을 겪으면서 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피식, 웃음이 나오는 동시에 발끈하며 문득 마음에 남은 일들이 생각났다. 아, 내가 겪은게 맨스플레인이었구나. 남자들 중에는 여자는 스포츠를 즐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밀리터리나 게임, 자동차에 관심이 있거나 밴드를 좋아하거나 하다못해 영화만 좋아해도 맨스플레인을 많이 당한다. 좋아하는 선수나 영화배우가 있어도 '그래봤자 얼굴 보고 좋아하겠지.' 딱 그렇게 쓰여있는 얼굴을 마주하기도 한다. 재밌는 건 여자들은 화장품, 가방이나 구두만 좋아한다고 책도 안 읽고 영화도 음악도 스포츠도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들일수록 막상 여자들이 후자의 것에 두각을 드러내거나 관심을 보이면 "여자는 그냥 화장품, 가방이나 좋아하면 되지." 라는 태도를 보인다. 왜 대체 어떤 남자들은, 여자들은 문화를 즐길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걸까. 왜 여자는 운전을 못 하고 모두 같은 음식만 좋아한다고 생각할까. 어째서 사회는 남자는 일반화 되어서 사람으로 표현되면서 왜 여자가 대상일 경우는 ㅇㅇ녀, 등으로 성별을 부각시키는 걸까. (남자는 그저 원래 그런 사람, 으로 판단할 때가 많으면서) 예민한 여자를 두고는 비혼자는 노처녀 히스테리로 기혼자는 육아 스트레스로 해석하는걸까. 때에 따라 여자들이 듣는 너무 까다로워, 넌 너무 부담스러워, 라는 말은 실은 넌 너무 똑똑해, 의 의미를 담되 좀 더 경멸어린 투로 사용되기도 한다. 성적 소수자와 인종 차별에 대해선 나날이 나아지는 부분이 발생하는데 희한하게 젠더 부분은 심지어 나날이 퇴보하는 느낌이다.

 

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 드넓은 대학 캠퍼스에서 여학생들이 강간을 당하자 대학 측은 모든 여학생에게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 아니면 아예 나돌아다니지 말라고 일렀다. 건물 안에 있어라. (감금은 호시탐탐 여성을 감싸려고 대기하고 있다) 그러자 웬 장난꾸러기들이 다른 처방법을 주장하는 포스터를 내붙였다. 해가 진 뒤에는 캠퍼스에서 남자들을 몽땅 몰아내자는 처방이었다. 그것은 똑같이 논리적인 해법이었지만 남자들은 겨우 한 남자의 폭력 때문에 모든 남자더러 사라지라는, 이동과 참여의 자유를 포기하라는 말을 들은데 대해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일부 남자들은 솔직히 “나는 안 그런데”라고 말하고 싶어서거나 아니면 현실의 시체나 피해자는 물론이거니와 현실의 범인을 논하는 문제로부터 방관자 남성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문제로 대화의 초점을 돌리기 위해서 그런 반응을 보인다. 한 여성은 격분해서 내게 말했다. “남자들은 대체 뭘 바라는 거예요, 여자를 때리거나 강간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고 상으로 과자라도 받고 싶은 거예요?”

여자들은 늘 강간과 살해를 두려워하면서 산다. 때로는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남자들의 안락함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제니 추 라는 여성은 트위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비방하거나 비아냥대려는게 아니라 정말, 남자들은 잘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에는 자기 자신이 아니면 절대 모르는 일도 있는 법이다. 헌데 문제는, 점점 더 세상이 '자기 자신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미처 이해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이 내게 준 의의는 사실 그 지점에 있었다. 나에겐 당연스러운 것들이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는다는 점, 내가 편하기 위해 누군가가 희생되어야 한다면 나는 그 수혜에 대해 결코 모른척 해선 안 된다는 점. 내가 너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네가 나의 관점을 배려하는, 어쩌면 당연한, 그 지점을 바라고 있다. 더 많은 여자들이, 더 많은 남자들이, 더 많은 사람들이 평등에 대해 고민하는 시점이 오길 바라고 있다. 우선은, 나부터 그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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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8 1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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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31 0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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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30 1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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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31 0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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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테이션 게임 The Imitation Game, 모튼 틸덤, 2015

 

『시간의 딸』의 리뷰를 쓰며 생각한 것은 결국 이런거였다. 1. 역사와 시대에 따라 인물에 대한 평가는 바뀔 수 있다. 2. 즉, 여러가지 이유, 갖가지 근거를 토대로 결론을 내리길 누군가를 완벽히 안다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기만이다. 3. 공적인 면과 사적인 면은 온전하게 분리될 수 있을까. 얼마만큼 나뉘어 평가해야 하는걸까. 답이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다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이 떠올랐다.

 

앨런 튜링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영화적 손길이 닿아 실제와 다르게 그려진 부분들이 꽤 있지만 흥미로운 지점이 있는 작품이었다. 우선,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를 의심한 적은 없지만 본 영화에선 상당히 안정적인 연기톤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뢰를 느끼게 하는 연기를 한다. 약간 아쉬운 점은 지나친 타입캐스팅. 뭔가가 결여 된 천재 혹은 덕후몰이 영화의 빌런 역으로 타입캐스팅 되는 점이 있었는데 이번에 닥터 스트레인지 역할로 발탁되었다는 소식에 꽤 놀랐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여전히 시나리오 보는 눈이 좋은 편이라 이 매의 눈을 부디 매튜 구드에게도 전파해주길 잠깐 바라기도 했다(훤칠하고 발성도 좋고 다정한 한편 섬짓한 구석도 있는 좋은 배우인데 작품 복이...). <이미테이션 게임>은 연출 상의 특이점이 도드라지지 않지만 대신 보기 드물게 에필로그를 잘 활용한 경우의 영화이기도 하다. 대개는 에필로그를 과하거나 불필요하게 넣어 대놓고 센티멘털한 성향으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영화는 굉장히 덤덤하게 '사실'만을 전달하면서도 꽤 큰 울림,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돌이켜보게 한다.

 

즉, <이미테이션 게임>은 어쩌면 윤리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던지는 의문을 담은 영화일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 다만 앨런 튜링이라는 사람의 일대기를 빌려왔을 뿐. 좋은 영화, 좋은 예술, 어쩌면 그 모든 것의 본분이 그렇듯 영화가 끝난 후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전시戰時에 히틀러 한 명과 시골 마을 주민의 한 명이 같은 가치를 가지는가. 더 중요한 일을 위해 내 앞의 한 사람의 목숨을 포기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 한 명과 내가 모르는 사람 한 명의 목숨을 같은 경도로 대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나 동성애가 범죄에 범주에 포함된다는 가정 하에)범죄자인 영웅을 이해할 수 있는가. 영웅이 된 범죄자를 용인할 수 있는가. Am I machine? Am I a person? Am I a war hero? Am I a criminal? 앨런은 스스로에게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크리스토퍼, 가 자신의 질문에 답해주길 바라며 도착하지 못하는 편지를 계속 보내며.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시대에 의해 박해받고 비밀 임무라는 이유로 죄책감과 윤리적 책무 사이에서 짓눌린채 오해받는 사람에 대해 내내(앨런 튜링의 실제와 다른 부분이 꽤 지적되는 걸 보면 아마 배우의 연기와 연출 때문인듯 하지만) 연민을 느꼈다. 리처드 3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사적 부분과 공적 부분은 어떻게 분리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다보니 앨런 튜링의 경우를 보며 느꼈던 감상이 떠올랐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재밌는 우연이 있다. 2012년에 BBC에서 제작된 <텅 빈 왕관The Hollow Crown>에 이어지는 시리즈로 내년 리처드 3세와 헨리 6세의 이야기가 제작된단다. 이 드라마에서 리처드 3세 역할을 맡은 사람이 베네딕트 컴버배치다. 최근 리처드 3세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굴된 바 있고 그의 유골을 다시 안장하는 과정에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참석하기도 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 배우가 리처드 3세의 먼 후손쯤 된다는데 그걸 알고 캐스팅했는지 어쨌는지를 몰라도 (내가 느끼는) 한 소설과 한 영화의 공통점이 이렇게 맞물리니 어째 좀 재밌다.  

 

   

  소소한 일상을 담은 에세이인줄 알고 골랐는데 글쓰기에 대한 에세이였다. 글쓰기의 동기, 소설가의 자세, 태도, 본인이 읽고 있는 책과 거기서 느꼈던 감상 등이 주를 이루되 테크니컬한 작법이나 문장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 실용적인 책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비록 일인칭으로 쓰기 시작했다 해도 이인칭, 삼인칭이 모두 등장하는게 낫다는 조언과(이건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전락의 이야기는 대체로 몇 가지로 정해져있지만 회복의 이야기는 천차만별이기에 전락보다는 회복의 이야기를 쓰는게 좋다(물론 그러기 위해 첫째로 전락해야 할테지만)는 것(당연하지만 잊기 쉬운 지적이다), 어려운 단어를 쓰려고 찾아 쓰는게 아니라 좀 더 명징하고 적확한 표현을 위해 작가도 사전을 보며 배우고 활용하고 있으니 독자도 함께 그렇게 하면 더 좋겠다는 의견과 그러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호기심과 오지랖을 발휘해야 하는게 작가란 직업의 특징인 것 같다는 푸념까지.

 

사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에는 아직까진 큰 매혹을 느끼지 못했고 에세이 쪽을 보고는 궁금증과 호감이 생겼는데 작가는 가끔씩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아요."라는 독자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핍진성이 부족하다는 자각을 한다는 부분에서 웃었다. 뭐랄까, 김연수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 이런 부분 때문인 것 같다. 시선의 온도, 서있는 자리, 어투, 단어를 조립하는 방식 같은데서 사람을 편하게 하는 참 희한한 재주가 있는 작가 같다. 어쨌건 모든 문장론, 작법, 글쓰기의 동기 등 여튼 글쓰기의 모든 책의 시작과 결론은 언제나 같다. 글을 써라. 초고는 원래 버려지기 위해 쓰는거다. 쓰고 수정하고 완성하는게 아니라 쓰고 고치고 고쳐서 쓰고 고쳐서 쓰고 아무튼 이렇게 반복하는게 글쓰기라는 것. 실패한 글쓰기도 성공한 글쓰기도 결국 쓰여져야 판단할 수 있는 것.

 

 

   위 책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캐릭터를 사랑하게 해야 한다는 문단을 읽으면서 매튜 스커더가 떠올랐다. 어쩐지 해명을 하자면 매튜 스커더는 내가 사랑한 유일한 캐릭터가 아니며 사실 사랑한다고 하기에도 좀 그렇다. 매력적이긴 하지만. 매튜 스커더를 떠올린건 전적으로 『800만가지 죽는 방법』의 마지막 다섯 문장 때문이다. (추리소설의 맥을 끊는 부분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스포일을 방지하고 싶다면 아래 두 문단은 건너뛰고 읽으시길 바란다)

 

이제 내 차례가 되었다.

“내 이름은 매트예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했다.

“내 이름은 매트고요,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그리고 빌어먹을 일이 벌어졌다. 내가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평범한 다섯 문장이 어째서 특별한지는 아마, 이 책을 다 읽은 사람만이 알 것 같다. 매튜는 소설 내내 AA에 슬쩍 자리하면서도 늘 제 차례가 되기 전에 빠져나온다. 이 행위는 책 속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몇 번 반복되지만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간다는 소설의 줄기에선 큰 문제가 되지 않기에 독자는 머릿속에서 밀쳐둔다. 범인을 잡고 난 후에도 책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끝은 바로 이 다섯 문장이다. 그제서야 어쩌면 이 소설은 이 마지막 문단을 쓰기 위해 쓰여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진실은, 그가 회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을, 스스로가 구제할 수 없는 상태임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그의 크고 작은 행동을 계속 지켜본다. 김연수 작가의 말이 맞다. 전락의 이야기는 매력적이지만 그보다 매력적이며 더 의미있는 것은, 더 높은 차원의, 어쩌면 소설의 의미는 회복에 있다. 마지막 문단.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임을 타인 앞에서 인정하게 된 매튜는 아마도 더 나아질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그 순간에 독자는 안심이 되면서 피로함과 감탄 등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게 된다. 범인에게 쏜 탄창이 튀어 한 소녀를 죽게 한 후로 경찰을 그만둔, 그 일은 불가해한 일임을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임을 아는, 그러나 끊임없이 소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끼는, 아내와 아들들에게 더 이상 자신의 역할을 알 수 없음을 알고 혼자된, 신을 믿지 않지만 그가 구원할 사람을 위해 십일조를 내는,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라고 밝히며 울음을 터트리는 매튜 스커더를, 독자는 필연적으로 애정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이 캐릭터에 이미 애정을 느끼고 있음을 저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깨닫는다.

 

 

어깨 아래까지 웃자란 머리를 싹뚝 잘랐다. 이제보니 나는 (더위를 많이 타서) 4월부터 9월까지는 머리를 길러 묶고 10월부터 3월까지는 단발을 유지하는 식이었다. 귀밑으로 2cm 정도밖에 오지 않게 짧게 자르고, 오랜만에 굵게 펌을 한 머리는 꼭... 푸들 같았다. 이, 이런 머리를 원한건 아니었는데. 거울 앞에서 한숨을 열 번쯤 쉬다 마음을 비웠다. 두어달이면 또 새로운 머리를 할 수 있을 거다. 아님 그때쯤엔 이 머리가 마음에 들지도 모를 일이고. 온갖 일들로 머리가 아프고 많은 일들을 이미 체념했는데 그깟 머리카락쯤이야. 이 상태로 일주일쯤 지나니 일주일에 삼일 정도는 이 머리가 마음에 드는 것도 같다. 요샌 Great Lake Swimmers의 앨범 세 장을 돌려 듣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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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1 1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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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2 13: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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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1 15: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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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2 13: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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