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의 종말』이나 『죽음의 밥상』같은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본 후에도 나는 여전히, 육식을 먹는다. 그만큼 육식을 좋아하나? 아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유제품은 못 끊을 것 같고 생선도 어려울 것 같지만,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마음먹으면- 섭취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노력한다면 닭고기까지도. 단순한 살육의 윤리 뿐 아니라 과도한 항생제, 동물들의 권리문제도 꽤 동의한다. 그러니까 특별히 무감하거나 비위가 강한 것도 아닌 셈이다. 하지만 위의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본 후, 어쩔 수 없이 동물들의 눈을 본 후에는 망설이거나 피하지만 얼마 후면 곧 마음에서 사라진다. 동의를 하는 것과 실천을 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일까?
때문에, 궁금한 것이 많다. 육식이 혹은 채식이 좋다 나쁘다 혹은 윤리나 섭생의 논리를 가르자는 게 아니라, 어쩌면 내 자신에 대한 호기심에 가깝다. 종교적, 건강상의 이유가 아닌 이유에서라면. 선택적 채식주의자들, 나아가 비건vegan들은 어떻게 해서 그 마음이 생겼을까. 왜 또는 어떻게 그 마음을 지키기로 했을까.
이 책이 채식주의에 대한 모든 체계적이고 비체계적인 질문에 대답해주진 않지만(더욱이 내가 저자에게 반박할만한 충분한 지식과 학식이 없어서 사실 여부를 명확히 판단할 순 없지만) 채식주의자가 되기까지의 거의 모든 방향의 질문들을 저자 스스로가 이미 한 바 있고 거기에 따른 자신만의(저자의 의견이 진리는 아닐테니) 논리와 의견과 정보를 적어두었고, 그 모든 것을 납득한 후에야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정’을 내린 것 같아 우선은, 신뢰가 간다. 큰 줄기의 원론적인 의문은 물론, 곁가지로 뻗어갈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질문에 답한다(저자의 답이 옳다는게 아니라 거기까지 생각하고 고민하려 애쓴 노력을 믿을만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윤리적으로 생산된 고기’나 ‘새와 물고기만 먹기’, ‘동물도 서로를 잡아먹는데’, ‘식물은 말이 없다’와 같은 이야기들은 내가 가장 궁금했던 이야기 중 하나였고 채식주의에 대한 많은 책들이 사실 답해주지 않은 갈증의 부분이기도 했다.
이 책이 아주 좋은 책이라거나 완벽하게 쓰여졌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여태껏 읽은 책 중 가장 꼼꼼했고 체계적이었으며, 무엇보다 개운했다.
『책인시공』은 작년에 읽은 책. 훑어보다 ‘독서권리장전’에 끌려 읽기 시작했는데 여행과 공간에 대한 소재로 퍼져나가 재밌게 읽은 편이다. 『책에 대해 던지는 7가지 질문』은 올해 읽은 책. 『책인시공』이 에세이 같았다면 이번 책은 논문 같은 느낌(지금 보니 책의 표지와 책 자체의 인상이 비슷하네). 비유하자면, 전작이 데님과 맨발에 스니커즈, 풀밭이라면 후작은 타탄체크패턴 수트와 태슬로퍼, 오래된 도서관 같다고 할까.
전작에서도 기미(?)가 보였지만 이번 책은 엄청난 레퍼런스. (개인적으로는) 동어 반복을 느끼고, 당연한 이야기를 새삼 하는 것까지야 괜찮은데 그 분량이 너무 길어 후반부로 갈수록 몰입이 떨어진다. 몇몇 부분은 속독으로 가지치기 하듯 읽었다는 것은 비밀. 2차 레퍼런스북으로 최적일 것 같고(정말 인용 많다, 이 책 한권만 읽어도 인용된 책이나 저자에 대해 실제로 읽은 것 같은 착각일 들 정도로) 몇몇 부분은 동의의 웃음이 새어나오기도 했지만 영상매체에 대한 은근한 폄하의 시선은 의아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책만 중요하다고 말하진 않아도 책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확고히 말할 때도.
안다, 물론. 영상매체는 본인이 호흡이나 완급을 조절할 수 없고 상대적으로 획일화 된 사고가 전해지기 쉽다는 중평에 동의하기도 하고, 매도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 또한 이해한다. 다만 이런 식의 사고관을 만날 때마다, 좀, 불편하다. 내 경우엔, 책을 좋아하지만 책만 좋아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게도 책은 중요하지만 책만 중요하지도 않다. 좋아하는 책만큼 좋아하는 영화도 많고 세상에는 좋은 책만큼 좋은 영화도 많다고 생각한다. 책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믿는 때만큼 영화가 있어 안도했던 순간이 있었고, 영화여서 좋을 이야기와 책이어서 더 좋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한 장의 앨범이, 3분의 음악 한곡이, 열권의 책보다 더 큰 영향을 주기도 하고, 한 장의 사진이나 그림이 열편의 영화보다 더 깊게 다가오기도 한다. 책을 사랑하다 못해 거의 숭상하다시피하는 일부 애서가들이(이 책의 저자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매체를 은근히 낮춰보는 시선이 보일 때마다, 이해가 어렵다. 그래서 언제나 결론은 같은 맥락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텍스트나 콘텐츠의 가치, 그 다음에는 독자와 관객 등의 수용자다. 그리고 분명 더 나은 장르의, 더 좋은 그릇도 있다. 책만이 중요하다는 아집 역시 책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만큼 위험하게 들린다.
위의 맥락과 유사하게, 이 책 역시 만화(그래픽노블)였기에 메시지를 더 강렬하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책으로도, 영화로도, 쉽게 상상할 수 있을만큼 내러티브가 '될 만한' 이야기지만, 역시 만화였기에 덜 부담스럽게(가볍다는 말은 아니다) 펼칠 수 있지 않을까. 단 한 컷으로도 유치하거나 과하거나 느끼하지 않게 표현할 수 있는 것. 가장 가볍게 '여겨지는' 만화라는 그릇과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역사의 융합.
개인의 삶을 통해 한 시대, 또는 나라의 역사를 말하는 방식은 흔하지만 그만큼 강력하다. 자, 스페인 내전에 대해 배워볼까요? 라고 물으면 얼마나 평면적이고 쉬운가(때론 가벼운가). 제목의 '아나키스트'란 사전적 의미의 무정부주의자라기보단 어쩔 수 없이 무정부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시간에 대한 회한과 환멸, 자조 같은 것을 함께 담은 더 깊은 뜻으로 들린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그래서 더 씁쓸하다. 기꺼이 한 인간을 패배시키려는 나라라는 건, 역사라는 건 또 얼마나 참혹한가. 이 책과는, 이 시대와는 또 다른 이유로 자칭 무정부주의자가 출연하는 현재는, 또 얼마나 아득한가.
마스다 미리에 대한 찬사와 추천을 많이 들었지만 ‘어쩌다보니’ 여태 만나질 못했고 ‘어쩌다보니’ 이 책을 집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재밌다. 그림도 단순하고 이야기도 단순한데. 진중하고 섬세하다. 귀엽기도 찡하기도, 제법 진지한데도 오글거리진 않는다(사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각 잡고 앉아서 허세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감동 주려는 건 아니었는데 실은 감동받았지? 하는 것도 아니고, 속 깊은 친구 얘기 듣는. 딱 그 만큼의 어조와 자세. 게다가 우주에 관련된 주관적 감성과 객관적 사실에 버무려져 이래저래 온도가 알맞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나는 친구 A가 다른 나라 아이들의 기아와 질병에 수런거리는 마음에 잠 못 이루고 그 뒤로 꾸준한 후원과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이라 더더욱 좋았다(나 역시 정기후원에 동참했다, 액수는 적지만 후원단체도 다르지만 그녀의 영향이 얼마쯤 작용한 것 같다, A는 이 사실을 모르지만). B가 길에서는 절대 담배를 피지 않고 항상 휴대용 재털이를 소지하는 흡연가라 예쁘고, C가 택시를 타거나 가게에서도 인사를 잊지 않는 사람이라 고마우며, D의 "죄송하지만"이라는 어두가 나올 때는 3퍼센트 정도 더 멋져보인다. 네가 좋아하니 내가 더 기쁘다, 라고 버릇처럼 말하는 E가 내게만 상냥한 것이 아니라 더더 좋았던 것 같다.
그들이 내게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거라는 것이, 사실은 더 좋다. 애정때문에 생기는 다정함은 애정이 사라지면 얼어붙기도 하지만 꼭 그 뿐이 아니라도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쪽이 훨씬 지내기가 좋을 것 같다(나는 너무 뜨거운 사람은 사실, 부담스럽다). 물론 사심없는 친절이 때론 더 괴롭다는 것을 알고, '좋은 사람'이란 평가가 얼마나 모호하고 일방적이고, 어쩔때는 상처가 되는 말인지 알지만 일반적인 범주에서 그들이 꽤 괜찮은 사람이고, 상식 이하의 사람은 아니라는게, 다행스럽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는게 아니라 그들 내부의 상냥함이, 그 사람 자체가 새삼 고맙다. 살면서 점점, 배려심있는 사람을 만나는게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면서, 세상에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몰상식한 사람들이 많은지 깨달으며. 좋은 사람을 만난 행운에 감사하고, 좋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실이 뿌듯해지고, 나 역시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면 좋겠다고, 무의식 중 생각하게 된다.
마스다 미리의 책도 이런 느낌이다. 생각지도 못한 곳, 예상치 못한 때에 만난 상대에게서 따뜻한 면을 발견한 기분. 얼떨떨한 포근함. 믿어도 될 만한 사람을 하나 더 사귄 것 같은, 그런 기분.
작년 이맘땐 Rachel Yamagata, Lana Del Rey를 돌려 듣고 4월에야 겨우 가을방학 신보를 듣는게 어울릴 날씨였다. 올해는 지나치게 따뜻하다. 요새는 -남들처럼- Pharell Williams를 듣는다. Chris Garneau, The Fray, The Wallflowers가 몇 곡, 진짜 오랜만에 나온 Diane Birch의 신보와 One Republic(One Republic은 물론 Ryan Tedder가 프로듀싱에 참여한 곡들은 이상하게 하나같이 좋아하게 된다)도. 유투브는 맑은 날도 비오는 날도 어울리는, One Republic의 대표곡이자 인기곡.
봄비에 벚꽃잎이 휘청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