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은 이렇다. 얼마 전 엘릭시르에서 출간된 다카기 아키미쓰의 『유괴』를 읽었다. 꽤 유명한 작가인데 나로선 처음 접하는 그의 책이었다. 어쨌건 그 책을 읽자 그에 대한 관심이 생겨 두어권을 내처 구했고 먹을거리를 충분히 비축해 기분이 좋은 다람쥐마냥 흡족했다. 그의 책 발문에서 읽은 '다카기 아키미쓰에게 에도가와 란포는 아버지와 같고 요코미조 세이시는 어머니 같다.' 는 말이 인상 깊어 새삼 일본은 추리소설의 계보가 잘 이어지고 있구나 하는 감상이 들었다. 거기서부터 다시, 오래된 궁금증이 솟았다.

 

어째서 한국은 장르소설의 명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나. 왜 우리나라에는 키친테이블노블작가가 드물까.

 

물론 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몇 가지 미리 몇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하나. 순문학/장르문학이라는 유치하고 고루한 이분법적인 잣대나 그 잣대로 가치나 우위 등을 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스터리, 추리, 호러, 서스펜스, 좀비물, 법정 등등의 구체적인 장르를 매번 일일이 나열하기엔 기준이 애매하거나 난감하고 번거로운 면이 있어 편의상 이 모든 것들을 통틀어 '이른바' 장르문학이라 불리는 큰 범주를 빌린다(개인적으로 굳이 이 분류를 사용해야 한다면 사건의 서사를 다루는 쪽이 장르문학, 사건의 여파를 다루는 쪽은 순문학이라 정의하고 싶다). 둘. 특정 분야의 책 수요를 말하기엔 책의 수요 총량이 빈약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새삼 독서의 필요성을 강조해 어째겠는가, 그것도 알라딘에서. 셋. 키친테이블노블작가가 없다는건 사실이 아니다. 상당수의 작가, 시인, 소설가들이 두 가지 이상의 직업을 겸하고 있는 것을 알지만 그 역시도 두번째의 독서 수요와 관련, 경제적인 이유가 많기에 이 경우는 제했다. 거기에 키친테이블노블 작가로 등단을 했다 해도 많은 작가들이 문예창작과나 국어국문학과 등을 졸업한 경우가 많고 궁극적으로 작가가 되기 위한 단계로 업을 갖는 경우도 제했다. 그렇다면 박민규, 백은영, 정유정 등 전혀 다른 직업군을 가졌던 이들도 있지 않냐 물을 것이다. 물론 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신의 전직이나 현직을 소설에 녹여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점에서 망설여진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한 키친테이블노블은 이런 경우였다. 아이작 아시모프, 레이 브래드버리, 스티븐 킹(다수의 직업, 소설가로 데뷔 직전엔 교사였지만 궁극적으로 소설가가 되기 위한, 단순한 생계의 수단으로 보였기에 어중간한 열외다), 어슐러 르귄, 더글라스 케네디처럼 소설가가 되기 위해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거나 처음부터 소설가가 되어버린 몇 경우를 제외하고 외국에는 특히 장르문학에 가닿은 소설가들은 꽤 이색적인 이력을 가진 경우가 많다. 지금 떠오르는 사람을 나열하면, 마이클 코넬리는 기자였고 제프리 디버, 존 그리샴은 변호사였고 존 스칼지는 영화비평가였으며 리 차일드는 방송국에서 20년을 근무했다. 댄 브라운과 딘 쿤츠는 교사였고 퍼트리샤 콘웰은 법의관, 존 르 카레는 MI6에서 일했다. 넬레 노이하우스는 광고회사에 다녔고 스티그 라르손은 잡지 편집장이었으며 요 네스뵈는 작가라는 직업 외에도 뮤지션, 저널리스트, 경제학자 등의 태그가 붙어있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공학관련 연구원으로 일한 전력이 있고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저널리스트이자 개미에 관한 논문을 쓴 적도 있으며 움베르트 에코 역시 잘 알려진 것처럼 소설가를 꿈꾸며 살아온 사람은 아니었다.

  

일본으로 오면, 요코미조 세이시는 전업 작가가 되기 전 약국에서 일했고 마쓰모토 세이초는 오랫동안 생계를 위해 다양한 일을 하다 마흔이 넘어 작가가 되었다. 모리무라 세이치와 기리노 나쓰오는 다른 분야의 글로 데뷔한 후 장르문학쪽에서 이름이 알려진 작가들이며 많은 이들이 알듯이 미야베 미유키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소설가가 되었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엔지니어였다. 다카노 가즈아키는 영화 쪽 일을 하던 사람이고 교고쿠 나츠히코는 디자이너, 요코야마 히데오는 기자, 이케이도 준은 은행원이었다. 하라 료는 재즈피아니스트였다.

   

 

질문의 핵심은 이렇다. 우리나라 소설가 중에 경찰, 변호사, 은행원, 피아니스트, 법의관 출신의 작가가 있던가?(기자, 편집자는 있구나). 과문한 탓에 내가 모르는 소설가 중에 이색적인 전직을 가진 이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중(아니 꼭 그러한 전적이 없다해도) 경찰, 변호사, 은행, 법의학에 대한 글을 쓰는 이가 많이 있던가? 아마 드문 것 같다.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어째서 한국에는 '이른바' 장르문학이 확고하지 못할까. 여기서 또 사과를 해야한다. 추리소설을 쓰거나 장르문학에 가닿은 김성종, 배명훈, 정유정, 구병모, 최제훈, 김이환 등등의 작가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존중하고 존경한다. 하지만 이들이 주류문학계에 속해있냐고 물으면 답은 머뭇거려진다. 이러한 한국 문학계의 상황에 비해 장르문학의 수요는 꽤 높은 편, 오히려 순문학에 비해선 압도적이다. 몇 년 전에 비하면 조금 주춤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영미장르문학이나 일본소설은 선전하고 있다(그러니까 그 작은 파이에서 한국문학은 더 적고, 한국 장르문학은 더더욱 적은 셈이다). 위에서 언급한 작가들은 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국내에서도 꽤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이들의 인기를 넘는 순문학 작가들이 몇이나 있던가. 그래서인가 얼마 전 한국 독서시장의 구원투수가 장르문학이라는 논지의 기사를 읽었고 실제로도 원소스 멀티유스의 개념에 입각, 가장 큰 파급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는 장르문학을 읽는 사람만 있고 쓰는 사람은 없는걸까. 

 

한국문학계는 꽤 보수적이다. 문단을 통해 등단을 해야하는 시스템도 그렇고 여전히 암암리에 누구의 문하생이니 하는 것들도 완벽히 무시할 순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게다가 독자들 역시 암묵적으로 장르문학을 길티플레져guilty-pleasure처럼 여기는 은근한 분위기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잘 모르겠다. 한국문학은 너무 답답해서, 질척거려서, 만날 거기서 거기라. 라고 이야기하는 선입견처럼 한국 장르문학은 아직 유치해서, 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장르문학상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렇다할 명맥을 이어가진 못하는 듯 싶다. 

 

몇 년 전엔가 GQ 아니면 ARENA였던 것 같은데 어째서 한국에선 일을 하면서도 글을 쓰고 싶어하는 이들이 드물까, 에서 시작한 칼럼을 읽은 기억이 있다. 지금은 어렴풋 기억만 나는데 군대 때문인가, 한국의 일문화 때문인가, 일을 시작하면 그 뒤에는 소설가나 시인이 되겠다는 이가 드물다는 에디터의 통계(?)가 기억난다. 물가와 집값과 꿈 따윈 꿈처럼 느껴지는 사회의 현실 때문일수도 있다고. 그렇게 등단한다 해도 결국 자신의 현실을 포기할 수 없기에, 책도 안 팔리고 작가도 먹고 살기 어렵기 때문에. 탄식과 분노와 의문이 버무려진 글이었다. 그래서였나 GQ의 모 에디터가 시인으로 등단했을 때 마치 친구가 된 것처럼 기뻤다. 물론 그도 여전히 시를 쓰지만 잡지사에서 일한다. 역시 문제는 돈인걸까.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해 돈이 없는것일지도 모른다는, 그러나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돈 때문이었다는, 나쓰메 소세키의 말은 나날이 절절해진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니저러니해도 독서량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파이가 커야 다람쥐도 나눠주고 토끼도 나눠먹고 하지. 그나저나 이 긴긴 사설이 다카기 아키미쓰와 당최 무슨 관련이 있는걸까. 지당한 물음이다. 사실은,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다만 아쉬웠고 안타까웠고 그러다 대답이나 의견이 아닌 질문 또는 의문이 생겼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세 권을 내처 읽었다. 읽은 순서는 『유괴』- 『파계재판』-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이하 『인형』)였다. 다카기 아키미쓰는 『인형』과 같은 '이른바' 정통파 추리소설에 정통하다는데 개인적으로는 앞선 두 권이 훨씬 흥미롭게 읽혔다. 아마도 요새는 내러티브나 트릭보다는 작가의 가치관이나 당시의 시대상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을 더 선호하기 때문인 것 같다. 두 소설 모두 추리소설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허술한 점들이 물론 있다. 『파계재판』의 경우엔 법정에서의 증언이나 사건의 전개방식이 다소 감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신과 성분이 한 개인을 어떤 식으로 짓밟는지, 편견은 인간을 어떻게 얽매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었다. 마찬가지로『유괴』는 21세기에 출간되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현대적이다. 유사한 사건을 통해 자신의 범죄를 미리 점검하는 범인이라니. 쭉 읽어가다보면 알리바이나 동기를 생각했을 땐 '그 사람' 밖엔 안 남은데다 의심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유사 범죄의 방청을 한다는 것도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인간군상의 다양함이나 악惡과 강强,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는 시대상 등을 노련하게 녹여내는 모습에 박수를 치는 바다. 거기에 이 소설이 1960년대에 쓴 소설이라니.   

 

바로 이전 페이퍼에서 나쓰메 소세키를 이야기할 때도 그랬지만 고전이란 시간을 오롯이 흡수하면서도 시간을 뛰어넘는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분명 답답하고 근대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이 부분은 마쓰모토 세이초를 읽을 때 매번 그랬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훌륭한 작품임을 알게 한다. 덜 발달된 기술, 더 복잡한 절차와 과정과 통신을 거치면서도 사건을 해결하려 뛰어다니는 모습은, 추리나 미스터리 증명의 가치는 테크닉이 아닌 관찰력과 균형감각, 끈기 등에 근본을 두고 있음을 더 절실히 알게 한다. 물론 존 딕슨 카나 앨러리 퀸 등이 선보이는 놀라운 트릭이나 꽉 짜인 알리바이 돌파 등이 재밌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새삼 감탄하게 되는 것은, 더 오래 남는 것은 인간에 대한 혁혁한 관찰력과 성찰 쪽이다. 고전이란 단지 오래된 것을 부르는 말이 아니다. 모든 오래된 것이 고전은 아니잖은가. 오랜 시간 시간을 타고 넘어오는데는 분명한 그 가치와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3.  

 

에도가와 란포는 1894년 출생, 1965년 타계했으며 1923년에 데뷔했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1902년~1981년, 데뷔는 1921년이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1909년 출생, 1995년에 세상을 떠났고 데뷔는 1951년이다.

다카기 아키미쓰는 1920년생이고 1995년에 세상을 떠났다. 데뷔는 1948년이었다.

 

정통파니 사회파니 그런 구분법을 배제하고, 추리소설 및 장르문학의 명맥이 시작되고 인정받고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데에 부러움을 느낀다. 우리도 지금부터 시작하면 어쩌면 50년 정도 후에는 한국의 장르문학 입지가 나아지고, 장르문학상이 노벨문학상이나 맨부커상, 나오키상 수상작만큼 주목받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질문과 의문과 자문 끝에, 바람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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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08: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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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7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작년, 현암사에서 출간을 시작한 나쓰메 소세키 전집은 소장의 가치가 충분하다. 흩어져 있는 소세키의 책들을 정갈하게 한 곳으로 모은 수고는 물론 공들인 티가 나는 책의 만듦새(단순히 예쁘기만 한게 아니라 질감과 양감, 촉감이 책의 내용, 배경, 저자와 잘 맞는 좋은 기획과 디자인의 예 같다)의 노고, 면면이 쟁쟁한 해설진들의 유혹까지. 게다가 -처음에는 무심코 봐서 몰랐는데- 이제보니 전집의 순서가 작품이 발표된 순이다. 작가의 작풍이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지 세계관이나 가치관은 어떻게 변화하며 가다듬게 되었는지 파악하기에도 좋고 이 순서만 외워도 어디가서 나쓰메 소세키 작품 연보를 줄줄 욀 수 있는, 심지어 잘난 척 하기에도 도움이 되는 전집이다. 

 

그 중 네 번째, 그러니까 나쓰메 소세키가 네 번째로 쓴 장편 소설 1907년 작 『태풍』을 읽었다. 잘난 척 하기 좋은 순서라고 농담 섞어 말했지만 그의 장편소설 14권 중 10권 정도를 읽은 독자로서 조심스레 권하자면 이 순서는 꽤 도움이 많이 된다. 나쓰메 소세키의 초기작이라 불리는『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련님』과 그 후 삼부작에는 작풍의 차이가 있다. 여태껏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작풍이라고 설핏 기억만 하고 있었는데 연보를 살피고 순서에 따라 읽어가니 좀 더 확연하게 확인이 가능하다. 앞선 두 작품이 상대적으로 유머러스하고 부드러운 봄날의 미풍같다면 뒤의 작품들은 낙엽을 몰고오는 가을의 쓸쓸한 바람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두 작품, 『풀베개』와 『태풍』은 마치 봄에서 가을로 가기위한 여름의 태풍과도 비슷하다. 일종의 변곡점이랄까 임계선이랄까 마치 능선을 넘는 것처럼 특징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양을 쫓는 모험』을 쓰기 전 전업작가로 살아가기러 마음먹고 새로운 작품을 써야만 했다고 말한 것처럼 나쓰메 소세키 역시 두 작품을 지나며 자신이 좇는 문학의 거점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2. 『태풍』의 이야기는 평면적이고 전형적이다. 골조 역시 성향과 계층이 다른 인물들이 이상과 현실을 대변하고 대비시켜 캐릭터의 변화나 내적 갈등에 대해 말하는 소세키의 여타 글들과도 유사하다. 다만 아직 덜 다듬어져 어설픈 부분이 보이는데 저자와 캐릭터는 지나치게 밀착되어있고 대화나 어조 역시 불편할만큼 교훈적이고 계몽적이다. 자신만의 이상을 추구하는 시리이 도야, 속세를 살아가는 나카노 슌타이, 둘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다카야나기 슈사쿠가 그 주인공이다. 이상과 속세를 대표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소세키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거나 비난을 하는 것은 아니다(물론 시리이 도야, 쪽에 약간 더 동정적인 어조가 보이긴 한다). 그동안 읽어온 소세키의 글을 떠올리면, 아마 그가 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다카야나기(본 책에서는 나카노와 다카야나기에게 '군'의 호칭을 붙이지만 영 어색해서 페이퍼에선 삭제한다)에게 있을 것이다. 때문에 솔직히, 두 세계가 갑작스럽고 이질적으로 화해 또는 화합되는 부분을 주목하거나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화합될 수 없는 평행선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기보단 보다 세밀한 것들, 일테면 다카야나기와 대화를 나누는 나카노에 대한 작가의 묘사나 두 친구의 서사에 대해 좀 더 개인적이면서도 주관적으로 마음에 남는 부분들이 있었다.

     

 

 

3. 언젠가 친구 M이 자신의 절친한 친구 H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주말이면 4인 가족이 큼직한 SUV를 끌고 교외로 놀러나가는, 친구들과 함께 뭔가를 먹거나 살 때 "내가 살테니까 하나 더 시키자."라며 지갑을 꺼내는 H를 보며 실은 내심 화가 났었던 것 같다고. 성인이 되고 난 후 한참 동안에도 M은 돈을 어떻게 써야할지를 몰랐다고 했다. 내게 낼게, 라던가 이번엔 내가 살게, 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고. 옹졸하게 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돈을 써도 된다는 확신이 없었고 그런 말을 하도록 배운 적도 없었다는 M. H와도 친구 사이였던 나는 그제야 왜 그렇게 늘상 온화한 M이 H에게만 뾰족하게 굴었는지 그때야 알았다. 같은 준거집단에 속해있었지만 경제력에는 꽤 차이가 있었던 둘이었기에 아마도 H는 여전히 M이 자신에게 불퉁거리는 이유를 모를 터였다. 그날 M은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디저트도 시키자며 월급 받았으니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그 웃는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

 

나카노 군은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난 따뜻한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세상의 온갖 비바람은 그저 고타쓰에 앉아서 유리문 너머로 바라본 풍경에 불과하다. 유젠의 무늬도 알고 있다. 금병풍의 선명한 색깔도 알고 있다. 은촛대의 반짝거림도 마찬가지로 친근하다. 살아 있는 여인의 아름다움은 더욱 그의 눈에 잘 들어온다. 부모의 은혜, 형제 사이의 정, 벗에 대한 믿음, 이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은 물론 아니다. 다만 그가 살고 있는 반쪽 세상에는 지금까지 언제라도 밝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햇살이 비치는 반쪽 세상에 살던 사람이 한쪽 발로 땅을 밟으며 이 발아래에 나머지 어두운 반쪽 세상이 있다고 깨닫는 것은 지리학을 배울 때뿐이다. 걸어 다니면서 우연히 깨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어두울 거라고 느끼고 진정으로 오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난이 불편이라는 말은 대개는 그렇게까지 가난하지 않은 이들이 하는 말이다. 꿈이 있으면 이뤄진다던가 불굴의 의지를 성공을 위한 성공의 유일한 수단으로 치부하는 것도 노력만 할 수 있는 자들이 말할 때가 많다. 원하는게 있다면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도 인내의 시간조차 낼 수 없는 생활의 곤궁함 앞에서는 허울좋은 말일 뿐이다. 경제력은 스스로가 속한 가족 구성원이나 그들의 성격, 환경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개개인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나카노는 넉넉하고 따뜻한 물 같은 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다카야나기의 초조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도달할 지점에 이르는 시간동안 그는 스스로나 노모의 곤궁함을 염려할 필요가 없으니 느긋하거나 태평하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이라는 마음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고, 타인을 얕보거나 낮춰보는게 아니라 다만 친구라고 여기는 이에게 선뜻 적지 않은 돈을 내줄수도 있다. 친구가 입은 겉옷을 비난하기보단 안타까워할 수 있고 친구는 음악회에 처음 와봤으리라는 것을 잊을 수도 있다. 더 많이 가진 자는 덜 가진 자에게 더 순진하고 순수하고 관대하게 대할 수 있지만, 그 반대가 성립되긴 어려운 법이다. 때문에 연애에 시간을 보낼바에야 그 열정을 창작열로 바꿈하겠다는 다카야나기의 한탄은 제법 이해가 된다.

 

물론 스스로가 이 소설의 인물을 이해한다고, 다카야나기의 절실함을 알 것 같다고 해서, 자신이 세상을 개척하고 살아왔다며 종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나오는 유약한 지식인들과 닮았다. 냉소적이고 회의적이지만 불편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자존감이 강하지만 충분히 불행해지고 싶지는 않은. 아마도 그래서 그의 전기 삼부작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소설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때문에 다카야나기를 이해하면서도 그 '이해'를 다른 행동으로 바꾸지 않는 자신이 새삼 부끄럽다. 누군가가 자신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면 괜스레 반발하고 싶어지지만 자신의 이야기처럼 나와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고개가 숙여질수밖에. 나쓰메 소세키의 글을 읽다보면 유한계급인 그들의 태평함이 한심스럽다가도 내심 그들을 이해하는 자신이 더 한심스러워질 때도 있다. 바로 지금처럼.

 

 

 

4. 이렇게 나쓰메 소세키의 인물들이 늘 어떤 유형의 인간형을 대변하고 있고 그, 백년도 전의 인간의 유형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 다르지 않은 것처럼. 나쓰메 소세키의 글을 처음 읽었던 시절과 지금의 내가 그리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변명의 여지 없이 깨닫는다. 그러나 가끔, 희망을 말하기엔 절망이 너무 깊고 절망을 논하기엔 희망이 얕게 남아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체념을 말하기엔 단념이 너무 쓰고 단념을 논하기엔 체념이 너무 짙은. 복기하고 복기하고 복기해도 어떤 날개짓을 하더라도 결국 이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깨닫게 된 것은, 행일까 불행일까.

 

현실에서 피하기 위해 현실이 아닌 곳에 몰두했더니 거기서 찾은 것이라곤 내가 살아야 할 곳이 현실이라는 버림받은 결론 뿐이라니. 어느 날은 비겁이 자신의 소치인 것 같고 어떤 날은 비겁 또한 사회를 살아가며 얻은 처세처럼 여겨진다. 이제는 다자이 오사무를 흉내내 "부끄럼 많은 생애를 살았다."며 중얼거리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가끔 마른 세수를 하며 축축한 눈매로 부자가 되지 못해 힘든걸까 삶이 힘들어 부자가 되지 못한걸까 생각할 때는 있다. 그럴 때마다 나쓰메 소세키의 『길 위의 생』의 한 부분을 중얼거린다.

 

그는 부자가 될까 높은 사람이 될까, 두 가지 중 어느 한쪽도 잡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있는 듯 한 자기 자신을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부자가 된다는 것도 세상물정에 어두운 그에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높은 사람이 된다는 것 또한 힘겨운 세상살이에 부대껴 자신이 없었다. 그 힘겨운 세상살이의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역시 돈이 없다는 게 제일 큰 원인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는, 그저 끝없는 초조함에 시달렸다. 돈의 힘으로 지배하지 못한, 참으로 위대한 그 무엇이 그의 시야를 밝히기에는 아직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 나쓰메 소세키, 길 위의 생

 

 

 

5. 어떤 나비의 날개짓은 태풍도 일으킬 수도 있다고 하지만 대개의 나비는 태풍 속에서 사멸된다.

 

 

 

6. 말하고 싶은 것, 말하면 사람들이 수긍하는 것, 말하면 사람들이 존중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생활의 경쟁에 모든 시간을 바치느라 말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세상이 듣고 싶어 하지만 들려주지 못하는 이유는 하늘이 내 손을 속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도 대부분 이런 모순을 무릅쓴다. 그들은 대개 행복한 삶이 목적이다.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행복을 즐길 인생 그 자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단순한 생명은 그들의 목적이 아니라 해도 행복을 향유할 필수조건으로서 온갖 고통 속에서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이런 모순을 무릅쓰며 속세를 살아가면서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고 게다가 날마다 죽음에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부채를 갚으려고 하지만 다달이 새로운 부채가 쌓여가는 현상과 다를 바가 없다. 이를 비참한 번민이라고 한다.

 

11. 고전이란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으며 그의 작품과 맺는 관계 안에서 마침내는 그의 작품과 대결하는 관계 안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14. 고전이란 배경 소음처럼 존속해서 남는 작품이며 이는 고전과 가장 거리가 먼 현재에 관한 글들이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 이탈로 칼비노, 왜 고전을 읽는가

 

나쓰메 소세키를 읽으면 이것이 백년 전에 쓰여진 소설이고 일본 사람이 쓴 글이라는 것이 믿기 어렵다. Oldies but Goodies라는 아주 흔하지만 최고의 찬사를 보내려는게 아니라 어리둥절한 씁쓸함에 가까운 깨달음이다. 이것이 백년도 전에 쓰여진 글이라면 지금과는 다른 부분이 어디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일본 사람이 쓴 글이라면 한국인인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정서라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나. 그의 글을 읽으며 스스로의 위선과 초조함을 확인할 때 더없이 입이 쓰고, 나 역시 백년 전의 그들처럼 계속해서 비참한 번민 속에서 부채를 부채로 메워가며 살아갈 거라 생각하면 눈앞에 놓여있는 절망이 허탈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의 유명한 서문을 떠듬떠듬 떠올리며 지금 이 초조와 절망 덕에 나쓰메 소세키는, 고전으로 추앙받아도 충분하다는 결론 또한 내릴 수 있었다.

 

 

 

7.

작년에 4편이 선출간되었고 소식이 없다 했더니 추석 전, 2차분이 풀렸다. 이번에도 4권, 우미인초 - 갱부 - 산시로 - 그 후까지다. 예전에도 했던 말처럼, 나쓰메 소세키를 읽지 않은 여름은 뭔가 해야할 일을 안 한 것처럼 아쉽고 허탈한 마음이 든다. 언제 읽어도 좋지만 읽어서 더 좋을 계절도 분명 있다. 지금, 여름과 가을 어딘가, 나쓰메 소세키를 읽기에 늦지 않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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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봄은 이제 막 알아가기 시작한 연인처럼 조심스럽고 설렜고 가을은 주저없이 가장 좋았다. 겨울은 막역한 친구 같았다. 겨울이 지겨울 때쯤엔 차라리 여름이 낫겠다며 여름을 그리워하는 척 했지만 실은 진심이었던 적이 있긴 했던가. 여름은 다만 필요한 계절이었다. 곡식이 익어가기 위한 과정의 일조량, 세상이 단단해질 수 있도록 강수량을 채워가는 시기, 휴가라는 끈덕진 달콤함, 널어놓은 빨래에서 나는 청결한 냄새와 햇빛과 풀냄새가 섞인 눅눅하면서도 열정 섞인 낮, 맥주잔에 맺힌 물방울과 기름기와 견과류의 냄새를 품은 밤의 공기. 여름의 어떤 것들은 여름을 거의 사랑하게 만들만큼 강렬하다. 그러나 올해처럼 기이한 날씨를 가진 여름, 이런 책을 읽었다(제목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에서 슬쩍 빌려왔다).

   

  

 

  페이퍼나 책의 제목에 끼워 맞추려는게 아니라 진심으로,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내게 '여름의 것' 안에 포함된다. 작품의 배경이나 시대나 읽었던 시기와 무관하게(그러나 미미한 영향 아래) 떠오르는 건 여름의 이미지다. 어쩌면 처음 접했던 그의 책이 『더 리더』였고 그 책에서 가장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가 여름의 것 -책의 정조는 늦가을의 것과 닮았고 중요한 몇 장면은 눈이 내리는 겨울의 풍경이었건만- 예를 들어, 소년이 수영을 하던 호수, 서로를 힐끔거리던 피어나는 육체를 타고 내리는 은빛 물방울, 물에 젖은 발로 뜨겁게 익은 건조한 나무다리를 내달리는 발바닥의 날카로움, 함께 떠난 자전거 여행의 쇳소리, 한나의 원피스와 땋아올린 금발머리와 화를 내던, 눈물에 적신 얼굴이기 때문일까. 여름의 쨍한 어지러움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숨막히는 고양감이나 아슬아슬함 같은 이미지가 생각이 난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지금 눈이 내렸으면! 길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갈 정도는 되도록 처음엔 가볍게, 그러다가 나중에는 며칠씩 자동차가 못 다닐 만큼 펑펑 쏟아졌으면 좋겠다. 눈의 무게에 못 이겨 나뭇가지가 부서지고 새로 놓은 전화선이 끊겼으면. 아무도 케이트에게 수상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수상식장에도 초대하지 못했으면. 아무도 그녀를 도시로 끌어내 인터뷰나 토크쇼, 만찬 같은 걸로 괴롭히지 못했으면. 눈이 녹았을 때에야 상이 케이트에게 전해졌으면. 그러면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기뻐하겠지. 그러나 야단법석은 금세 지나가고, 그녀의 세계가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으면.  

 

그는 숲을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와 라일락들이 서 있는 초원을 바라보았고, 수양버들이 있는 연못을 바라보았다. 얼음이 언 연못에서 함께 스케이트를 타면 안 될 게 뭔가? 연못 반대편 언덕바지에서 함께 썰매를 타면 안 될 게 뭔가? 리타가 엄마 없이 정서적으로 찰 헤쳐 나가야 하고, 그는 경제적으로 케이트 없이 해나가야 한다 해도, 그는 지난 여름에 가끔씩 느꼈던 세계를 잃고 싶지 않았다. 이미 예전부터 그의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의 것이 될 그 세계를.         - 숲 속의 집

   

단편집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게 무게중심이나 호감도도 분산된다. 세 편 정도가 기억에 남는데 그 중 「숲 속의 집」이 가장 인상깊은 단편이었다. '사건'의 배경은 여름과는 거리가 있지만 여름에 어울리는 얼떨떨한 쨍함은 여기에 있다. 남자의 마지막 행동은 그렇게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일까. 남자와 부인(케이트)이 똑같이 아이를 사랑했다 해도 여지껏 아이를 보살핀 것은 남자였다. 남자는 아내가 차를 몰고 나가는 순간에도 아이에게 안전벨트를 채우라 소리친다. 남자의 행동이 여태까지의 그의 헌신을 외면할 만큼 나쁜 걸까. 결과적으로 그가 사고의 원인을 제공했다해도 그의 의도는 사고와는 정반대의 것이었을텐데. 다만 그는 가족을 사랑하고, 아내를 흔드는 외부조건에서 멀어지고 싶었을 뿐인데. 사랑이 기능적이라 배운 여자와 사랑을 폭풍우 속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집으로 갈망했던 남자가 만난 것이 내정된 비극인가. 아마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부인과 아이를 기다리며 눈을 치우는 남자를 보는 마음이 참, 깔깔하다.

 

 

 

  

명품이라는 훈장은 내가 성공했음을, 내가 돈이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다.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훈장 따위에 아예 관심도 없다. 하지만 한쪽 발은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다른 한쪽 발은 욕심을 충족시켜 줄 만한 돈을 갖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딛고 있는 중산층이 가장 가련하다. 중산층은 럭셔리 유행을 따라 하기에는 돈이 너무나 부족하고, 유행과 거리를 두기에는 자본주의의 훈장이 너무도 탐이 난다.   

 

유권자가 소비자가 되는 사회에서, 소비주의는 개인의 무거운 선택을 가벼운 선택으로, 정치투표장에서의 고민을 백화점에서의 고민으로, 정치적 권리인 자유를 경쟁하는 브랜드 중 무엇을 고를 것인지의 자유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부자들의 불법 상속에 무관심해지고, 쇼핑몰에 습관적으로 북적대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투표율은 낮아지고, 고객상담실에 전화를 걸어 소비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공적인 일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줄어드는 법이다.   

 

사춘기 시절의 염세적 고민은 현실적이지 않다. 하지만 성인의 고민은 매우 현실적이다. 사춘기 시절 우리는 '산다는 것에 의미'에 대해 묻기 시작했지만, 호구지책의 의무에서 잠시 면제되어 있는 사춘기 소년과 소녀들에게 '산다는 것'은 철학적 문제이지 현실적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어린 시절 추상적 단어로만 다가왔던 삶의 고뇌와 번민을 피부로 느끼게 되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건희의 자제들과 나의 삶 사이에 구축된 거대한 장벽을 삶의 법칙에서 느끼면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지 않고서도 삶의 계급 구속력이라는 개념을 어느새 몸으로 익힌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사회적 현상이나 풍조, 혹은 개인적 경험에서 시작한 소재를 다양한 책(주로 고전)과 연결시켜 쓴 책인데, 이런 기획이 아주 특이하다고야 할 순 없지만 시침질은 물론, 박음질 해가는 솜씨가 제법 좋다. 어떤 책들은 개념만 등장하고 어떤 책들은 약간 의아하기도 하지만 뜬구름 잡는 합의된 무지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생활 면면에 닿아있는 사회학 이야기들이라 더더욱. 지난 책에서도 느꼈지만 비유가 참 적절한데다 글이 쉽게 읽히면서도 깔끔하다는 인상을 준다. 글솜씨가 좋은 저자이기도 한듯. 개인적으로 성격이 참 꼼꼼하구나 싶었던건 (지난 책도 미주가 상당히 자세했지만) 미주 부분에 정의나 개념, 간단한 설명들을 일일이 덧붙인 점이다. 저자 자신이 직접 첨한 것 같은데, 이 부분만 읽어도 간단한 개념 세우기에는 좋을 것 같은데다 반가운 책들을 만날 수 있어 가산점 플러스.

 

    

 

 

8. 숭고한 대의에 대한 신념은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잃은 믿음을 대신하여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다.

 

9. 사람은 자신의 우월함을 뒷받침할 근거가 빈약할수록 자신의 국가나 종교, 인종 혹은 자기가 지지하는 대의가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쉽다. 

 

10. 사람은 자기 일이 신경 쓸 가치가 있을 때라야 신경 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무의미한 자기 일은 팽개쳐두고서 남의 일에 신경 쓰기 마련이다. 남의 일에 신경 쓰는 것은 험담하거나 꼬치꼬치 캐묻거나 참견하는 형태로 나타나며, 또한 공동체나 국가, 인종 문제에 대한 열띤 관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기 문제는 회피하면서 이웃의 어깨에 매달리든 목을 조르려고 덤벼들든 하는 것이다.        

 

에릭 호퍼의 책을 내처 세 권 정도 읽었다. 대부분 아포리즘식 글쓰기로 단문 또는 단문단으로 이뤄져 있는데 『인간의조건』에선가 가장 확실한 말은 여러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을 읽고 매번 길고 두서없는 페이퍼만 쓰는 자신을 반성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에 이어 읽었는데 책 사이에 큰 공통점은 없지만 연달아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독서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날씨와 시기 뿐 아니라 순서의 영향까지 받는것 같다).『세상물정의 사회학』은 공시적으로 에릭 호퍼의 글은 통시적으로 읽힌다. 전자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고단함의 공감과 스스로는 아닌 척 해왔던 내숭과 천박함을 돌이켜보게 한다면 후자는 사람이란 얼마나 놀랍도록 바뀌지 않는 성질을 가졌는지 새삼 깨닫게 한다.

         

 

 

 

   1. 남자들의 관계는 뭔가 낭만적이고 뜨거운 구석이 있다면 여자들의 관계는 좀 더 냉정하고 끈적거리는 느낌이 있다. 언제나 가장 핵심적으로 논해온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지만 엄마와 딸 사이의 애증도 못지않게 심지어 더 무시무시한데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편에 비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좀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이라 매끄럽지 않은 구석은 있지만 모두가 은근하게 느낀다해도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않는 일을 이토록 신랄하게 표현하는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감탄을. 심리소설이라는 표현이 좀, 일차원적이라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보다 적절하긴 어렵겠다. 당신이 하는 생각의 최소한의 몇 개는 이 속에 분명 있을테니까. 

 

2. 과거 사랑했던 두 사람이 조우했을 때 둘은 서로를 보며 내심 놀라고 실망한다.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고,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는지 낯선 한편 상대와 함께 했다면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짐작해본다. 그럴 수 있겠구나. 누군가와 만나고 사랑하고 인연을 이어가냐에 따라 내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구나. 지금부터 함께 하는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미래의 내 모습이 -생활이든 가치관이든 건강이든-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자. 

 

3. 언젠가, 나 역시 엄마의 희생을 당연히 생각해왔던 것을 느낀 일이 있었다. 여지껏 엄마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자식 다 소용없고 좀 더 엄마만 생각하며 살라며 십대때부터 꽤 무던하고 무심한 자식이었는데. 한 순간에 위선이 벗겨졌다. 다른 사람은 다 그래도 엄마는 나한테 그러면 안되지, 라던가 엄마면서 어떻게 자식들에게 이럴 수가 있어, 심지어 아빠는 우리한테 그럴 수 있다해도 엄마는 그러면 안된다며 속으로 씩씩대고 있었다. 그때의 수치심이란. 생각해보면 지금도 그렇다. 아버지는 외경심이 느껴지는 존재지만 엄마는 언제나 엄마다. 엄마를 생각하면 불쑥 치미는 깊이없는 연민과 주체할 수 없는 짜증 때문에 내가 아직도 사춘기 어린앤가 한심하다. 엄마에게 가장 연민을 느끼면서도 엄마에게 가장 잔인해지는 까닭은 여전히 알 듯 모를 듯하다.

     

      

 

   

이상한 여름이다. 안 더워야할 때 덥더니 비가 와야할 때 안오고 한참 뜨거워야 할 때 비가 오더니 날이 서늘해진다. 여름은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이렇게 요상하고 안 더운 여름을 보내니 -더위로 고생하지 않아 좋긴한데 한편으론- 이건 이대로 걱정이 된다. 비올 때 오고 더울 때 더워야 곡식도 익고 물도 차고 하는 건데. 라는 어르신들같은 말이 나온다. 어쨌거나 때이른 계절덕에 다른 때였으면 초가을에나 자주 들었을법한 John Grant 목소리로 넘어가는 8월을 꽉꽉 채우고 있다(The Czars의 Paint the Moon을 첨부하고 싶었으나 동영상이 너무 오래된 것들만 있어 GMF를 차선책으로 택한다). 또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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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6 19: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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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8 00: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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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엑스맨>시리즈를 잘 모른다. 1편은 확실히 본 것 같은데 2편부터는 가물가물한데다 그것도 꽤 오래전 일 같다. 그래서였나 이 시리즈에 큰 매력을 느껴본 적이 없다. 때문에 아마 팬들은 뮤턴트들의 힘이나 초능력이라는 특별함 혹은 특이함과 비현실성 같은 이유로  이 영화를 사랑하는 거라 미루어 짐작했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보며 문득 그게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를 버렸다고 외치는 찰스의 분노는 개인적이고 인간에 대한 희망은 너무나 광범위했으며 동료들이 죽어가는 동안 널 뭘 했냐는 에릭의 분노는 광범위했고 뮤턴트에 대한 희망은 개인적이었다. 찰스의 손을 들어주기엔 내 스스로가 인간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이었고 에릭을 지지하기엔 그가 걸어갈 분노의 파급이 두려웠다. 엄마 아빠의 다툼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처럼, 약간 황망한 기분으로 그들을 번갈아보다 이런, 생각지도 못하게 슬퍼졌다. 슬프다고? 왜? 울버린이 내정된 미래의 고통을 들여다보고 미스틱이 사람들 사이에서 벌거벗겨져 혐오와 경멸을 온 몸으로 받아낼 때, 키티 프라이드가 흘리는 피와 스톰과 바비, 비숍 등과 센티넬의 싸움을 보며 그래, 울적해졌다. 나 지금 엑스맨에 감정이입 하는 거야? 전혀 닮은 구석이 없어 보이는, 그래서 감정이입이 더 어렵게 느껴졌던 저들을 보며? 이거, 그냥 블록버스터 영화 아니었던가. 과거를 바꿔 아예 새 판을 짠(심지어 죽은 캐릭터조차 살려내고 이전 시리즈를 모두 부정해버린) 브라이언 싱어를 생각할 새도 없이 심각한 얼굴로 상영관을 나왔다.

 

 

몇 번 이야기 한 적 있지만, 혼자를 힘들어하지 않는다. 힘들긴 커녕 가끔은 필요했다. 예를 들어 영화. 몇 번 약속이 미뤄지거나 펑크가 나서 영화를 놓치거나 영화 선택 때 제한을 받거나 선택의 결과에 대해 신경쓰는 일이 생기고. 일행이 영화관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던 몇 행동을 했을 때의 당혹감(특히 어느 정도는 성격을 안다고 믿었던 사람이라면 당혹스럽고 난감하고 다른 성격들도 유심히 보게된다). 그러다보니 언제부턴가 영화를 -거의 8,90% 정도- 혼자 보게 됐다. 전시나 콘서트는 더 많은 기호와 취향, 경제적 문제까지 더해지니 혼자인 쪽이 나아지고. 운동도 개인 종목에 더 관심이 많다보니 혼자서도 잘 걷고 잘 뛴다. 모든 일을 혼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것을 혼자 하고 사실 이 쪽이 더 편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내가 너무 까탈스런 사람인가 싶어 의기소침했던 적도 있었고 인내심 없고 배려심 없는 사람처럼 보여질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다만, 혼자 사는 사람을 두고 사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것은 밤에 봉디 숲에서 산책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산책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라는 프랑스 작가 샹포르의 말에 동의할 뿐이다. 함께 하는 시간이 필요한 만큼, 적어도 몇 부분이나 몇 시간 정도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위의 것들이 취미라면. 취미 정도는 조용하게 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단지 나의 성격적에만 의존한 결과는 아니라는 것도 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나를 용인해주었으니까. 과장해서 말하면 몇 년만 더 일찍 태어났어도 스스로도 약간 위축됐을 수 있고 주변에서 좀 특이한 애라던가 사회성이 부족한 애라고 얼마든지 낙인 찍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어떤 면에선 지금도 그렇다. 몇몇 사람들은 '혼자'라는 말에서 여전히 (부정적 의미의) 오타쿠나 히키코모리를 떠올린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더하자면, 결혼에 대해서 요원하게 느끼는데다 연애나 교우관계, 심지어 가족의 이야기도 주변에 거의 밝히지 않는 탓에 -대부분 연장자들에게- 이런저런 압력과 안타까움과 낙인을 종종 받는다. 거참, 잘 모르겠다. 어째서 사람들은 조금 더 살았다는 이유로 "내가 살아보니"라던지 "더 살아보면 알겠지만"등등으로 서두를 시작해 누군가의 삶에 쉽게 충고하고 간섭하는걸까. 그들보다 '덜' 살았지만 그 동안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라면 인생엔 결코 절대와 확신은 없다는 것 뿐이었는데. 그들도 그렇게 살아왔을진데 어째서 조금 더 살았거나 결혼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심지어 둘 다로- 누군가의 인생을 재단하거나 판단하려고 할까. 대응해봤자 저렇게 까칠하니 결혼을 못 하는거라고, 역시 결혼생활을 해봐야 배려도 인내도 배우고 어른이 되는거라며 편견만 더 확고히 심어줄 뿐인데. 의연하지 못하는 나는 아직도 너무 어린가 싶어 한숨이 나오고.

 

 

 

 결혼이 하나의 선택이듯이 결혼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어떤 선택이든 양면을 지닌다. 선택했기에 얻는 것이 있는 만큼 선택으로 잃어버리는 것도 있다. 결혼이라는 선택은 안정감을 선물하지만, 가중되는 역할의 압박감은 안정감의 그림자이다. 결혼하지 않음은 역할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선택이지만, 혼자라는 조건으로 인한 불안정성을 자유의 대가로 치러야 한다.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선택을 한다. 각자의 선택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각자는 존중받는 만큼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침묵을 강요당했던 낙인 집단이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들에게서 냉정함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정상인들'이 자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 유지하는 차분한 자세, 그리고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고 자신을 사실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냉정한 침착함을 낙인 집단은 유지할 수가 없다.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더라도 이내 그 목소리에서는 침묵의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그리고 힘들게 잡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조바심이 느껴진다. (중략) 하지만 정작 문제는 오랜 기간 동안 낙인 집단으로 전락했던 사람이 입을 열 기회를 얻게 되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과장이라는 덫에 빠진다는 것이다.

 

1인용 테이블을 지킨다는 것은 혼자서 제대로 식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는 의미이고, 혼자서 여행하면서도 궁상스럽지 않게 보일 수 있는 자기 관리 능력이 있다는 뜻이고, 혼자서 영화 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독립심이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4인용 테이블에서는 가중된 역할 때문에 한숨이 올라온다면, 1인용 테이블에서는 단독으로 구성된 행위자의 네트워크가 모든 역할을 농축해서 전담하기에 한숨이 나온다.

 

 

올 초엔가 읽었던 책인데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저렴한 표현이지만, 등이 가려워 온갖 요상한 포즈로 개운치 못하게 등을 긁다 효자손이라는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아니지, 나름의 의견이 있었지만 조리있게 정리하지 못해 어버버거리고 있을 때 말 잘하는 친구가 나타나 "그러니까 얘 말이 뭐냐면 말야."하며 요점을 콕콕 짚어줘 모두가 수긍하는 광경을 보는 기분에 가깝나.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를 읽고 흡족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확신할 수 없었던, 의아했던 점, 답답했던, 궁금했던 점에 대한 거의 모든 이야기가 있다. 이 책이 완벽하다고 말하고 싶은건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가 결혼을 택하거나 그리고 택하지 않았을 때 생각해볼만한 적지 않은 쟁점의 포인트를 짚어낸다. 특별히 과장하지도 엄살떨지도 연민하거나 과찬하지도 않고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어조에 적절한 비유와 이따금 나오는 유머까지. 페이지가 넘어가며 약간 동어반복 하나 싶은 느낌이 있지만, 주관적으로는 이런 동지(?)를 얻었다는 생각에 약간 신나기까지 했다. 맞다. 저자가 쓴 것처럼 낙인 집단에 가까워지면 억울함과 조바심을 감출 수가 없는 모양이다.

 

개인의 성향과 성격과 가치관에 따라 결혼을 지지할 사람도 있고, 싱글을 지향할 사람도 있겠지. 행복한 결혼생활도 있고 비참한 싱글도 있고 비참한 결혼생활도 있고 행복한 싱글도 있겠지. 지금 내가 결혼에 대해 요원해도 언젠가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거고,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그 역시 나의 선택일 뿐이거늘. 당연하다면 당연할 이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어떤 이에게는 까칠하고 고고한 잘난척쟁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물론 이 책은 저자의 경험과 더불어 비혼 또는 1인 가구에 대한 감상과 현상과 추이에 대해 다루지만 복잡한 감상은 결혼 여부에 대해서가 아니라 구별짓기에 관해서였다.

 

 

 

 

 

이제 다시 엑스맨으로 돌아오자. 어째서 나는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했던가. 퀵실버의 능력은 영화의 활기 뿐 아니라 관객들의 부러움을 사지만, 그의 엄마에게 그는 통제할 수 없는 사고를 치는 아들일 뿐이다. 레이븐은 누구보다 찰스를 사랑하지만 보다 완벽한 미스틱이 되기 위해 찰스를 등졌다. 행크는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떨어져나왔다. 에릭의 분노는 가장 이해할만한 것이다.

 

누구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주류와 비주류를 넘나들 수 있다. 거의 모든 위치나 지향점이 주류인 사람도 있고 반대로 거의 모든 위치나 지향점이 비주류인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는 상황이나 쟁점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얼마나 쉽게 비주류를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멸시하는지. 남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게 내 자식이면 안 되고, 다른 지역의 님비NIMBY는 이기주의지만 내 지역의 님비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고, 자신이 속하지 않은 비만과 가난과 설움과 처지를 네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 부족이라 여기지는 않는지. 그런 식으로 타인을 쉽게 내치거나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지는 않았던가.

 

LGBT등의 성적소수, 인종, 신체나 정신적 장애, 가난과 불행, 사고와 범죄 등등의 크나큰 일은 물론 아주 작은 사건이나 가치관의 차이만으로도 얼마든지 소수자가 될 수 있다. 거기엔 선택도 있고 그저 결과가 있을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예로써) 위의 책과 앞서 말한 소재에 대입해 보면 어쩌면 적지 않은 기혼자들이(모든 기혼자들이 '그렇다'고 나 역시 차별하고 싶은건 아니다. 다수의, 어쩌면 내가 만나온 기혼자의 다수가, 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를 주류라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겐 권력이 생기고 그 권력은 비혼자들에 대한 간섭과 충고와 연민할 자격으로 이어지고 그 간섭과 충고는 다시 주류의 권력을 공고히 한다. 저자가 말했듯 독신에 대한 환상도 비참함도 모두 독신이 아닌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인데. 혼자인 시간을 함께 하는 시간보다 소중히 한다는 이유로 어떤 이들에겐 (부정적 이미지의) 오타쿠나 히키코모리로 치부될 수 있다. 소외란 사실 그렇게 간단한 일이다.

 

우리가 차별받는 소수자가 된다면. 이해 받기 어려운 입장에 있다면. 찰스처럼 공존을 주장할 것인가, 에릭처럼 생존을 획득할 것인가. 사람들이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건 그들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얼마든지 상처받을 수 있는, 이미 상처받은 자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해할만한 분노와 이해할만한 희망 속에서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들. 지금와 생각해보니 이 시리즈의 주제는 -나의 오해처럼- 힘의 대결이나 저들끼리의 권력 다툼이 아니라. 공존과 생존 사이에서 질문하는, 관용과 연대였다.

 

 

 

 

 

 

 

덧) 이번 영화의 명대사라면 프로페서 X가 말한 Just because somone stumble their ways, doesn't mean they are lost forever.지만 자꾸만 생각나는 건 에릭 호퍼의 『인간의 조건』에서 읽은 문장, 믿음은 버릴수 있지만 믿었다는 사실은 버릴 수 없다Belief passes, but to have believed never passes.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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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4-07-07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다. 쓰는 걸 잊어버렸는데, 알라딘 이번 이벤트 정말 마음에 들어요. 이곳 덕분에 혼자이면서도 혼자이지 않은 시간에 대해 조금 더 배운 것 같아요. 나조차 몰랐던 내 기록을 알려줘서 고마워요.

맥거핀 2014-07-11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hining님의 영화글을 (제가) 오랜만에 읽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엑스맨 시리즈가 오랫동안 그런 것을 대변해왔다는 말을 어렴풋하게 들었었는데, Shining님의 글을 읽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하기는 돌연변이라는 것은 당연히 소수자일수밖에 없으니까요. 모든 슈퍼히어로들도 그렇고...브라이언 싱어가 엑스맨 시리즈를 다시 살려놨다고 하던데 (글을 보니) 그렇기는 한 모양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 영화를 볼 것 같지는 않지만요(슈퍼히어로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특히 한국 사회에서) 늘 다수자의 폭력, 혹은 타인과의 비교로 인해 이루어지는 공격들이 만연한 것 같습니다. 위에 든 결혼 문제만 해도, 정해진 루트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늘 공격에 시달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결혼, 결혼식, 예물, 집, 생활수준, 아이, 육아..자신들의 선택에 따라서 정해진 루트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사회가 가만 놔두지를 않아요. (그러니 '비혼'이라는 사실은 불필요한 말이 개발되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어떻게 보면 '결혼'이 더 특수한 상황일수도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가해지는 암묵적인 압력도 그렇지만, 본인 스스로가 그 압력을 당연시하고, 또 어느 틈엔가 그 압력에 동참한다는 거죠. 참..요즘의 한국사회는 (제가 보기에는) 수준의 차이가 있을 뿐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회 같습니다.


Shining 2014-07-14 19:48   좋아요 0 | URL
저도 히어로물에 영 문외한이에요 :^) 게다가 이 영화도 사실, 어쩌다; 보러 간 거였거든요. 그래, 뭐 전편 봤으니까, 엑스맨 설정 대충은 기억나잖아? 라면서 보러간... 네, 마이클 패스벤더 보러 갔습니다(자백...). 근데 생각지도 않게 응? 나 지금 좀 감동받은것 같은데? 이러고 나왔어요_- 브라이언 싱어, 무서운 양반이에요...

모든 기혼자가 자신을 다수로, 기득권자로 생각하거나 비혼자를 차별하는건 절대 아닐 거에요(혹시 그런 의도로 읽힐까봐 조심스럽네요). 다만 일부 사람들에겐(그리고 이 일부 사람들이 목소리 큰 사람들일 때가 종종 있고, 제 주변엔 이런 분들이 꽤 있네요) 자신의 결혼이 일종의 자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결혼은 제 입장에서의 주관적인 예일 뿐이고 사실 이런 권력구조가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아요. 맥거핀님 말씀처럼 가끔은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해요. 아, 내가 이기적이고 유아적인 사람인가 하는 생각요. 제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 남에게 도통 관심이 없다는건데;; 요샌 이 점이 다행스럽게 느껴져요. 제가 인식하는 요새의 한국사회는(과거라고, 다른 나라라고 다르지 않을수도 있지만) 남을 너무 의식해요. 막상 예의나 개념이나 배려는 증발해버렸으면서 말이죠.
 

 

 

 

『육식의 종말』이나 『죽음의 밥상』같은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본 후에도 나는 여전히, 육식을 먹는다. 그만큼 육식을 좋아하나? 아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유제품은 못 끊을 것 같고 생선도 어려울 것 같지만,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마음먹으면- 섭취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노력한다면 닭고기까지도. 단순한 살육의 윤리 뿐 아니라 과도한 항생제, 동물들의 권리문제도 꽤 동의한다. 그러니까 특별히 무감하거나 비위가 강한 것도 아닌 셈이다. 하지만 위의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본 후, 어쩔 수 없이 동물들의 눈을 본 후에는 망설이거나 피하지만 얼마 후면 곧 마음에서 사라진다. 동의를 하는 것과 실천을 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일까?

 

때문에, 궁금한 것이 많다. 육식이 혹은 채식이 좋다 나쁘다 혹은 윤리나 섭생의 논리를 가르자는 게 아니라, 어쩌면 내 자신에 대한 호기심에 가깝다. 종교적, 건강상의 이유가 아닌 이유에서라면. 선택적 채식주의자들, 나아가 비건vegan들은 어떻게 해서 그 마음이 생겼을까. 왜 또는 어떻게 그 마음을 지키기로 했을까.

 

이 책이 채식주의에 대한 모든 체계적이고 비체계적인 질문에 대답해주진 않지만(더욱이 내가 저자에게 반박할만한 충분한 지식과 학식이 없어서 사실 여부를 명확히 판단할 순 없지만) 채식주의자가 되기까지의 거의 모든 방향의 질문들을 저자 스스로가 이미 한 바 있고 거기에 따른 자신만의(저자의 의견이 진리는 아닐테니) 논리와 의견과 정보를 적어두었고, 그 모든 것을 납득한 후에야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정’을 내린 것 같아 우선은, 신뢰가 간다. 큰 줄기의 원론적인 의문은 물론, 곁가지로 뻗어갈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질문에 답한다(저자의 답이 옳다는게 아니라 거기까지 생각하고 고민하려 애쓴 노력을 믿을만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윤리적으로 생산된 고기’나 ‘새와 물고기만 먹기’, ‘동물도 서로를 잡아먹는데’, ‘식물은 말이 없다’와 같은 이야기들은 내가 가장 궁금했던 이야기 중 하나였고 채식주의에 대한 많은 책들이 사실 답해주지 않은 갈증의 부분이기도 했다.

 

이 책이 아주 좋은 책이라거나 완벽하게 쓰여졌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여태껏 읽은 책 중 가장 꼼꼼했고 체계적이었으며, 무엇보다 개운했다.

 

 

 

   『책인시공』은 작년에 읽은 책. 훑어보다 ‘독서권리장전’에 끌려 읽기 시작했는데 여행과 공간에 대한 소재로 퍼져나가 재밌게 읽은 편이다. 『책에 대해 던지는 7가지 질문』은 올해 읽은 책. 『책인시공』이 에세이 같았다면 이번 책은 논문 같은 느낌(지금 보니 책의 표지와 책 자체의 인상이 비슷하네). 비유하자면, 전작이 데님과 맨발에 스니커즈, 풀밭이라면 후작은 타탄체크패턴 수트와 태슬로퍼, 오래된 도서관 같다고 할까.

 

전작에서도 기미(?)가 보였지만 이번 책은 엄청난 레퍼런스. (개인적으로는) 동어 반복을 느끼고, 당연한 이야기를 새삼 하는 것까지야 괜찮은데 그 분량이 너무 길어 후반부로 갈수록 몰입이 떨어진다. 몇몇 부분은 속독으로 가지치기 하듯 읽었다는 것은 비밀. 2차 레퍼런스북으로 최적일 것 같고(정말 인용 많다, 이 책 한권만 읽어도 인용된 책이나 저자에 대해 실제로 읽은 것 같은 착각일 들 정도로) 몇몇 부분은 동의의 웃음이 새어나오기도 했지만 영상매체에 대한 은근한 폄하의 시선은 의아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책만 중요하다고 말하진 않아도 책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확고히 말할 때도.

 

안다, 물론. 영상매체는 본인이 호흡이나 완급을 조절할 수 없고 상대적으로 획일화 된 사고가 전해지기 쉽다는 중평에 동의하기도 하고, 매도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 또한 이해한다. 다만 이런 식의 사고관을 만날 때마다, 좀, 불편하다. 내 경우엔, 책을 좋아하지만 책만 좋아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게도 책은 중요하지만 책만 중요하지도 않다. 좋아하는 책만큼 좋아하는 영화도 많고 세상에는 좋은 책만큼 좋은 영화도 많다고 생각한다. 책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믿는 때만큼 영화가 있어 안도했던 순간이 있었고, 영화여서 좋을 이야기와 책이어서 더 좋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한 장의 앨범이, 3분의 음악 한곡이, 열권의 책보다 더 큰 영향을 주기도 하고, 한 장의 사진이나 그림이 열편의 영화보다 더 깊게 다가오기도 한다. 책을 사랑하다 못해 거의 숭상하다시피하는 일부 애서가들이(이 책의 저자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매체를 은근히 낮춰보는 시선이 보일 때마다, 이해가 어렵다. 그래서 언제나 결론은 같은 맥락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텍스트나 콘텐츠의 가치, 그 다음에는 독자와 관객 등의 수용자다. 그리고 분명 더 나은 장르의, 더 좋은 그릇도 있다. 책만이 중요하다는 아집 역시 책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만큼 위험하게 들린다.

 

 

 

   위의 맥락과 유사하게, 이 책 역시 만화(그래픽노블)였기에 메시지를 더 강렬하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책으로도, 영화로도, 쉽게 상상할 수 있을만큼 내러티브가 '될 만한' 이야기지만, 역시 만화였기에 덜 부담스럽게(가볍다는 말은 아니다) 펼칠 수 있지 않을까. 단 한 컷으로도 유치하거나 과하거나 느끼하지 않게 표현할 수 있는 것. 가장 가볍게 '여겨지는' 만화라는 그릇과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역사의 융합.

 

개인의 삶을 통해 한 시대, 또는 나라의 역사를 말하는 방식은 흔하지만 그만큼 강력하다. 자, 스페인 내전에 대해 배워볼까요? 라고 물으면 얼마나 평면적이고 쉬운가(때론 가벼운가). 제목의 '아나키스트'란 사전적 의미의 무정부주의자라기보단 어쩔 수 없이 무정부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시간에 대한 회한과 환멸, 자조 같은 것을 함께 담은 더 깊은 뜻으로 들린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그래서 더 씁쓸하다. 기꺼이 한 인간을 패배시키려는 나라라는 건, 역사라는 건 또 얼마나 참혹한가. 이 책과는, 이 시대와는 또 다른 이유로 자칭 무정부주의자가 출연하는 현재는, 또 얼마나 아득한가.

 

 

 

   마스다 미리에 대한 찬사와 추천을 많이 들었지만 ‘어쩌다보니’ 여태 만나질 못했고 ‘어쩌다보니’ 이 책을 집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재밌다. 그림도 단순하고 이야기도 단순한데. 진중하고 섬세하다. 귀엽기도 찡하기도, 제법 진지한데도 오글거리진 않는다(사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각 잡고 앉아서 허세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감동 주려는 건 아니었는데 실은 감동받았지? 하는 것도 아니고, 속 깊은 친구 얘기 듣는. 딱 그 만큼의 어조와 자세. 게다가 우주에 관련된 주관적 감성과 객관적 사실에 버무려져 이래저래 온도가 알맞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나는 친구 A가 다른 나라 아이들의 기아와 질병에 수런거리는 마음에 잠 못 이루고 그 뒤로 꾸준한 후원과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이라 더더욱 좋았다(나 역시 정기후원에 동참했다, 액수는 적지만 후원단체도 다르지만 그녀의 영향이 얼마쯤 작용한 것 같다, A는 이 사실을 모르지만). B가 길에서는 절대 담배를 피지 않고 항상 휴대용 재털이를 소지하는 흡연가라 예쁘고, C가 택시를 타거나 가게에서도 인사를 잊지 않는 사람이라 고마우며, D의 "죄송하지만"이라는 어두가 나올 때는 3퍼센트 정도 더 멋져보인다. 네가 좋아하니 내가 더 기쁘다, 라고 버릇처럼 말하는 E가 내게만 상냥한 것이 아니라 더더 좋았던 것 같다.

 

그들이 내게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거라는 것이, 사실은 더 좋다. 애정때문에 생기는 다정함은 애정이 사라지면 얼어붙기도 하지만 꼭 그 뿐이 아니라도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쪽이 훨씬 지내기가 좋을 것 같다(나는 너무 뜨거운 사람은 사실, 부담스럽다). 물론 사심없는 친절이 때론 더 괴롭다는 것을 알고, '좋은 사람'이란 평가가 얼마나 모호하고 일방적이고, 어쩔때는 상처가 되는 말인지 알지만 일반적인 범주에서 그들이 꽤 괜찮은 사람이고, 상식 이하의 사람은 아니라는게, 다행스럽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는게 아니라 그들 내부의 상냥함이, 그 사람 자체가 새삼 고맙다. 살면서 점점, 배려심있는 사람을 만나는게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면서, 세상에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몰상식한 사람들이 많은지 깨달으며. 좋은 사람을 만난 행운에 감사하고, 좋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실이 뿌듯해지고, 나 역시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면 좋겠다고, 무의식 중 생각하게 된다.

 

마스다 미리의 책도 이런 느낌이다. 생각지도 못한 곳, 예상치 못한 때에 만난 상대에게서 따뜻한 면을 발견한 기분. 얼떨떨한 포근함. 믿어도 될 만한 사람을 하나 더 사귄 것 같은, 그런 기분.

 

 

 

 

작년 이맘땐 Rachel Yamagata, Lana Del Rey를 돌려 듣고 4월에야 겨우 가을방학 신보를 듣는게 어울릴 날씨였다. 올해는 지나치게 따뜻하다. 요새는 -남들처럼- Pharell Williams를 듣는다. Chris Garneau, The Fray, The Wallflowers가 몇 곡, 진짜 오랜만에 나온 Diane Birch의 신보와 One Republic(One Republic은 물론 Ryan Tedder가 프로듀싱에 참여한 곡들은 이상하게 하나같이 좋아하게 된다)도. 유투브는 맑은 날도 비오는 날도 어울리는, One Republic의 대표곡이자 인기곡.

 

봄비에 벚꽃잎이 휘청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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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4-03-29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훗 모두들 너무나도 공감가고 좋은 글에 할말을 잃고 공감만 눌렀나 보군요. ^^

Shining 2014-04-01 13:47   좋아요 0 | URL
너무나도 공감가고 좋은 글로 읽어주셔서 할말을 남겨주시는 것도 저는 대환영인데 말이죠. 히히.
날씨가 좋아요, 꽃처럼 예쁜 하루 보내세요, 뽀님 :)

2014-03-30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01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