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었다. 넓고 길게 뻗은 해안가. 낯설지만 이상하게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아 마음이 편안하다. 모래는 부드럽고 파도는 강인했다. 평범한, 평화로운. 밤바다 특유의 서늘함과 침착함이 안개처럼 끼어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분명, 꿈이었다. 수평선 아래와 해변은 어딜 보나 까만 밤바다였지만 수평선 위는 해가 지는 완벽한 오후였다. 해가 오메가처럼 수평선에 걸친 채 나른하게 인사를 하는 시간. 석양이라고 부르는 광경. 하늘은 다홍 주홍 노랑으로 물들었다. 두 개의 시간이 한 공간에 존재하는 기이한 광경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겁이 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초연한 아름다움, 고아한 우아함이 있었다.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결코 논리적이지 않을 '꿈'이었다. 자각해도 세계는 이지러지거나 변형되지 않아 다행스럽다. 꿈이지만, 꿈이었기에, 꿈이라도. 깨고 싶지 않은 꿈.

 

 

 

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 Le 16 Septembre, 1956

 

 

목소리는 암갈색이었다. 나무의 옹이 색과 유사하고 흡사 흙색과 닮았지만 엄밀히 말해 둘 중 어떤 것도 같지 않은 색. 약간 허스키한 편이지만 듣기에 따라서 외려 청아하다고도 표현할 수 있는 음색. 가만히 들어보면 명도가 다소 낮은, 그러나 무채색은 아닌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우 독특한 음색은 아니기에,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목소리보다는 신중하면서도 영민한 어투에 더 주목하게 된다. 발음이 뭉개지지 않고 특유의 강세가 있어 문득, 헤링본 재킷에 행커치프를 꽂은 신사를 떠올리게 한다. 때문에 그 안에 기질적인 신랄함이 날렵한 고양이처럼 웅크린, 그 자체로 이율배반적인 목소리라는 것을 감지하는 이는 매우 극소수 뿐이었다. 모든 인상은 단 한 구절, 한 마디라도 그가 뭔가를 읽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는다면 완벽히 뒤집힌다. 뭔가를 부르거나 읽을 때 그 목소리는 마음에 물감을 한 방울 떨어트려 점점 원을 키워져 당신에게 다가오듯 깊은 공명을 하기에 사람들은 대개 망연해했고 간극에 떨었다. 그 자체로 무망함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공허하다 : 허전함이 무언가를 잡았던 느낌을 기억하고 있는 손이라면, 공허함은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써보았던 손이다. 더 나아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후회' 같은 것이다. 휘둘렀던 무수한 손들이, 그 에너지들이, 공허함의 배후에 후광처럼 있다. 애쓴 흔적이 썰물처럼 쏴, 하고 빠져나가면서 무늬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애써 잡아보려고 마음을 크게 먹었던 모든 손아귀에는 공허함이 묻어 있다. 허탕이 되었든, 무언가 잡하긴 했으나 바라던 것은 아니었든, 원하던 걸 잡긴 잡았는데 꼭 쥔 손을 펴보았을 때에 그것이 초라해 보였든, 잡아챈 그것이 원하고 원하던 바로 그것이든, 그 모든 손 안에 공허함은 존재한다. 공허함은 휘둘러보았던 마음의 손, 그 손이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매복해 있다. 그런 점 때문에 공허함은 허전함보다는 훨씬 절대적이며, 훨씬 철학적으로 빈곤한 상태에 도달해 있다.  

 

목소리 안쪽에는 아이가 있다. 열심히 쌓은 모래성이 파도에 무너지는 것을 보는 표정, 제가 쌓은 것이 성인줄 알았는데 실은 모래였다는 것을 깨닫는 뒷통수, 고작 몇 번의 밀물과 썰물로 그렇게 사라져버리는 미망함을 목격하는 눈동자, 이제 아무것도 없어진 자리를 쓸어보려 꿇은 무릎, 한참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어내는 손. 그런 연약함과 강인함, 허무함과 확고함, 공허감과 두려움. 

 

목소리 바깥에는 어른이 있다. 아이였을 때 모래성을 쌓아봤던, 그것이 모두 무너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간단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몇 번을 반복해야 했던, 까무룩하게 오래 전 이미 바지에 붙은 모래를 털고 신발을 뒤집어서 흔들고 그곳에서 나왔던, 이제 해안가에 서서 또 다른 아이가 모래성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을 보는, 여기 서서 차라리 미소 짓는 어른.

 

적막하다 : '외로움'의 농도가 가장 짙은 상태. 적막함은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이다. '허전함'이 잡았던 것을 놓친 손이라면, '공허함'이 휘둘렀던 손의 무상함을 응시하는 마음이라면, '적막함'은 손을 잘라 뗴어낸 '몸'이다. 모든 순간, 모든 사물들이 감옥처럼 늘 에워싼다. 그것도 좁은 반경을 그리지 않고, 멀찌감치에서, 황량할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죽음처럼 싸늘한 온도를 지녔지만, '적막'은 온도를 순치하기 위하여 순간순간을 뜨개질한다. 걷는 걸음걸음으로써, 혹은 들이쉬고 내쉬는 한숨 같은 호흡으로써, 그럼으로써 영속된다. 찔레꽃 공주처럼 손을 찔리면서, 피를 낭자하게 흘리면서. 그렇지만 그 아픔과 고통은 인지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의 폐허를 뜨개질하는 숭고한 의식을 치르고 있기에.

 

소복한 먼지의 두께, 책의 배열, 낡은 정도, 비죽 빠져나온 가름끈의 팔락임, 겉을 감싼 벨벳과 같은 귀한 책의 감촉(벨벳 특유의 약간의 바람먼지), 거슬리지 않은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의자와 매스보다 날카로워 보이는 만년필, 패치워크의 쿠션과 늘 같은 자리에 앉는 바람에 살짝 더 가라앉은 소파의 왼쪽. 이 모든 것들을 이렇게까지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텐데. 무의식이란 재미있지. 꿈이 놀라운건가. 미처 잡아내지 못했던 모든 미시적인 것들이 얼얼하게 재현되어 있다. 그리움에 수반되는 강렬한 통증. 주인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동그마니 앉아 얼음같은 회한을 핥는다.  

  

 

 

, L'Empire des Lumieres, 1954

 

 

다른 차원의 사랑을 그리는, 신랄하게 표현하면 중2병의 감성을 예술로 승화시킨,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첫사랑의 신화에 갇힌 사람. 잃은 줄도 몰랐던, 잊었던 줄 기억도 못했던 텁텁하고 막막한 껍질 같은 향수를 느끼게 하는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은 서사가 아니라 한 조각의 이미지로 기록된다. 흩날리는 벚꽃, 정직하게 흔들리는 철도의 움직임, 꾸준히 달리는 소상한 소음, 난로가 피워진 대기실, 폭설에 갇힌 실내의 고요함, 입김, 와-하고 운동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별이 떨어질 것 같은 하늘, 역풍에 대한 찡그림, 머리칼이 얼굴을 휘감기는 감촉. 한 장의 스냅사진, 한 컷의 필름으로 남겨진 마음.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의 구름처럼, 호소다 마모루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하늘만큼 <언어의 정원>의 비는, 입술을 깨물고 싶을 정도로 멋졌다. 그 비는 봄비의 다정함이 아니라 가을비의 새침함이나 겨울비의 추적함이 아닌, 여름비 그것도 장맛비. 지루하고 끈적한 시간이 시작되는 알림. 창틀로 떨어지는 빗소리, 새벽녘 내리는 비가 주는 특유의 울음, 테루테루보즈도 소용없을 무심함, 우산 위로 제 몸을 던지는 과감함, 눅눅한 옷과 미끄러운 계단과 옆 사람이 접은 우산에서 떨어지는 물기로 인한 어쩔 수 없는 불쾌함. 모든 소리와 색깔과 부피가 낱낱이 표현된 비의 결정체.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널 붙잡을 수 있을텐데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지 않고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당신이 붙잡아 주신다면

나는 여기 머무를 겁니다         - 언어의 정원, 만엽집

 

 

아마도 그는 감정이 시작되는 이유는 거기 있었기 때문, 이라고 대답할 유형. 당신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라고 정의할. 분명히 그는 걷지 못했던 이를 걷게 하는 것, 세계 위를 딛을 구두를 만들어주는 것이 감정이라고 말할 사람.

 

영화의 끝, 시간을 건너 겨울의 입김을 보며 떠올린 것은 있었던 줄도 몰랐던 꿈과 생각날 줄조차 몰랐던 기억. 한 곡의 노래.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09-26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6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3-09-26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카이 마코토는 정말 영상을 잘 만드는 듯..

Shining 2013-09-29 21:49   좋아요 0 | URL
<초속 5센티미터>에선 벚꽃 장면보다, 폭설이 내린 그 공기나 대합실의 풍경이 참 좋았는데 <언어의 정원>의 비는, 정말정말 끝내주더라구요(웃음).

아이리시스 2013-09-30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마그리트의 그림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두 작품은 흔한 생각과는 달리 참으로 서정적이네요. 달밤에 체조해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행복하겠죠. 막 이런 노래 부르고 싶어져요. 첫 번째 그림이 두 번째 그림보다 더 서정적이에요. :)

Shining 2013-09-30 23:17   좋아요 0 | URL
첫번째 그림은 제가 좋아하는 그림이에요, 저거랑 <대화의 기술>. 빛의 제국, 은 유명한 그림이기도 하고 제가 자주 꾸는 꿈과 비슷해서요. 한낮의 하늘 아래 밤바다, 밤하늘 아래 비취색 바다. 왜 그런 꿈만 꾸는지 모르겠어요(긁적). 달밤에 체조해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행복하겠지...만 달밤에 체조는 건강에 좋지 않다는 연구 기사를 읽은 적이..(쿨럭). 히히.

아이리시스 2013-10-01 01:35   좋아요 0 | URL
응, 그리고 저 그림 밑에는 이런 시를 써야 해요.


빛에게

-이성복


빛이 안 왔으면 좋았을 텐데
빛은 왔어
균열이 드러났고
균열 속에서 빛은 괴로워했어
저로 인해 드러난 상처가
싫었던 거지
빛은 썩고 농한 것들만
찾아 다녔어
아무도 빛을 묶어둘 수 없고
아무도 그 몸부림 잠재울 수 없었어
지쳐 허기진 빛은
울다 잠든것들의 눈에 침을 박고,
고여 있던 눈물을 빨아 먹었어
누구라도 대신해
울고 싶었던 거지,
아무도 그 목숨
거두어줄 수 없었으니까
언젠가 그 눈물 마르면
빛은 돌아가겠지,
아무도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곳
(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
아무도 태어나지 않고
다시는 죽지 않는 곳
(그런 곳에 빛이 있을까)


2013-10-03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순전히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쏟아버리고 나면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비참하고 두 배나 더 고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속을 보이면 보일수록 타인과 더욱 가까워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아마 5월 아니면 6월. 양산을 쓴 여자들과 손수건을 쓰는 남자들이 지나갔다. 가까운 근처 공원의 벤치. 자전거로 도착했고 바구니 안에는 늦은 점심을 겸할 샌드위치와 커피가 있었다. 갈색 크로스백에는 지갑, 휴대폰, mp3와 화장지와 자수가 새겨진 손수건이 제멋대로 섞여 있었다. 평평한 길을 가운데로 둔 양쪽 벤치는 각 3개씩, 총 6개가 있었고 그 중 하나에는 할머니 두 분이 앉아계셨고 그 건너, 대각선에 앉았다. 잠시 후 젊은 남자 하나가 옆 벤치에 앉아 담배 연기를 흘리고 사라졌고 건너편 할머니들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모차를 끈 주부가 잠시 앉았다 아이에게 간식을 먹이더니 갈 길을 갔다. 샌드위치 봉투를 버릴 때 본 쓰레기통에는 포카리스웨트와 담배꽁초, 커피 우유 따위가 뒹굴었다. 선이 가는 하얀색 헤드폰에서는 실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네이비 슬립온을 까닥이며 저린 다리를 가끔 바꾸어 꼬았다. 그야말로 '햇살이 부서진다'는 라벨을 붙여도 될, 가히 기막힌 날이었다. 날씨와는 그다지 조응하지 않는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읽은 책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였다.

 

기억에 관해서는 언제나 회의론자였으나 종이책에 대해선 대부분 낙관론자였다. 책들은 종종 이야기나 문장이 아니라 시간으로 기억된다. 책은 하나의 텍스트가 아니라 자신의 역사이며 기억 자체, 시간에 대한 정밀한 압축이 된다.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가장 먼저 밀치고 나오는 건 주인공의 세계나 문장이 아니라 자신의 시계다. 바로 그 초여름날. 파란색에 흰 로고의 음료수병, 남자가 흘리고 간 담배연기 같은 모든 감각적 요소가 팝업북처럼 툭 튀어나온다. 자, 몇 페이지를 펼치세요, 라고 누군가 말하기라도 하듯 찰칵, 하고 걸쇠가 열리며 시간이 밀고 나온다. 난데없고 경우없고 무람없는 기억들 사이에서 오로지 믿을 만한 건 책에 대한 시계 뿐이다.

 

 

 

 

     마지막 4중주, 야론 질버만, 2013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 모두 미래의 시간에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포함된다. 모든 시간이 영원히 현존한다면 모든 시간은 되찾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사색의 세계에서만 영원한 가능성으로서 남는 것이다. 있을 수 있었던 일과 있은 일은 한 점을 향하고, 그 점은 항상 현존한다.

  - T.S.엘리엇, 네 개의 사중주 1번

 

People expect old men to die,

they do not really mourn old men.

Old men are different. People look at them

with eyes that wonder when

People watch with unshocked eyes;

But old men know when an old man dies.

  -Old men, Ogden Nash

 

  피터(크리스토퍼 윌켄)는 T.S.엘리엇의 싯구를 읊은 뒤 묻는다. 오래 쉼 없이 연주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악기들의 음이 서로 맞지 않는 상황을 낳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연주를 그만 둬야 하는가. 아니면 불협화음이라도 서로에게 맞추도록 노력해야 하나.

 

나쁜 캐릭터와 성긴 갈등구조, 가벼운 해결. 내러티브로서의 단점을 가득 안은 영화는 이상하게도 마음을 울린다. 베토벤으로부터 출발했음이 분명한 영화는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 슈베르트의 죽음, 오그덴 내쉬의 시, 렘브란트로 닿는다.

 

다섯 명의 주요 인물 중 짜증스러웠던 건 두 명, 이기적으로 느껴졌던 건 한 명. 그럼에도 연민을 느낀 한 명과 아주 좋은 캐릭터 한 명이 있다. 먼저 로버트(필립 세이모어 호프먼). 어째서 그의 욕심과 분노는 무조건 비난 받아야하는가. 한 번의 외도 때문이라고 하기에 줄리엣(캐서린 키너)의 태도는 확실히 쌀쌀맞다. 둘의 딸은 이런 말을 한다. 엄마에게 있는 것. 파트너, 사랑하는 사랑, 욕망하는 사람. 재밌는 장면이다. 세 남자에게 어떤 화살표를 그어도, 그럭저럭 수긍이 가는 모호한 관계. 줄리엣이 로버트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게 아니라 그녀가 그를 사랑함이 파트너로서의 사랑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의구심이 든다. 그렇다면, 알랭 드 보통이 말했듯 다른 관계와는 다르게 사랑에서는 덜 줄 수 있는 사람, 더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므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외롭고 불안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거기에 당신의 실력은 그 사람만 못하다는 확인사살까지. 이성과 감정은 배제되어야 마땅하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최고가 아니라 여겨주는 일은 당연 서럽다. 그것도 묵혀온 세월의 더께와 더 많이 사랑한 자의 번뇌까지 합해진다면. 그렇다고 당신의 객관적 실력과 별개로 당신은 나에게 최고야, 라는 말로 호도할 수도 없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래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사랑하기가 무겁다. 어쨌든 로버트에게는 연민 한가득.

 

그리고 피터. 아주 좋은 캐릭터, 아주 좋은 인물형. 강하고 유연하고 곧다. 자부심을 갖고 있되 자만하지 않고 두려움을 가진만큼 수치를 품고 있다. 삶에는 의지와는 무관한 불행의 논리가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그러나 안다고 해서 회한이 적어지는 것도 아님을 이해하고 있다. 동료들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이제 여기서 멈추겠다는 말. 그러나 이어지는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

 

때때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지 말아야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번번이 생각하길, 후자가 훨씬 어렵다. 

 

 

 

   <87분서 시리즈>로 유명한 에드 맥베인의 소설을 두 권 읽다. 경찰 소설의 대가, 라 칭송받는 명성에 비해 국내 소개가 늦된 감은 있다. 우연인지 몰라도 2,3년 전부터 꾸준히 출간 중인 시리즈 중에 조르주 심농 시리즈는 영 재미를 모르겠고 대실 해밋은 편차가 있고 앨러리 퀸만 간간이 읽었는데. 에드 맥베인의 글은 더 나와주길 고대할만큼, 재밌다. 진짜 재밌다.

 

유별스럽게 자극적이거나 화려한 소재가 아닌 있을 수 있는, 있을 법한 일들이 중심 사건을 이루고 인물 유형은 전형적이지만 묘사력이 풍부하다. 대체로 따뜻하고 선한 사람들이라 범죄소설을 읽는데도 마음이 선량해지는 느낌에 유머 감각까지 발군.

 

『살의의 쐐기』는 작가로서 특히 범죄소설 작가로서 가장 중요한 장기가 잘 드러난 작품. 스티브 카렐라에게 앙심을 품고 38구경과 니트로글리세린을 들고 87분서로 찾아온 한 여자가 있다. 다행히 스티브 카렐라는 사건을 맡아 외근 중. 그러나 다른 경찰들은 꼼짝없이 인질 신세가 되고 그들은 스티브 카렐라는 물론 시민들과 자기 자신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 그러러면 여자에게서 무기를 떨어트려야 하는데. 아니, 과연 저 병이 니트로글리세린은 맞을까? 어떻게 해야 티 나지않게 바깥으로 이 상황을 알리지. 스티브 카렐라가 너무 일찍 돌아와서도 안 되면서. 하는 이야기 속에서 긴장과 스릴이 자진모리 장단으로 이어지는데. 골몰해서 구조에 탐닉하는 편은 아니고 대강의 인물 러프와 설정만 축조한 뒤 쭉쭉 쌓아올린 인상인데도 이야기의 곡선이 매우 유려해 타고난 글솜씨가 좋은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킹의 몸값』은 테크닉보다는 메시지 면에서 빛나는 쪽. 단순한 유괴에서 딱 한 조각만 틀었을 뿐인데 거기서 뻗어가는 가지가 몇몇이다. 은행 강도는 찬성했으나 유괴는 반대라는 캐시. 이건 아이의 목숨 대 나의 목숨이라는 킹. 윤리적 선택을 하지 못하는 당신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다이앤. 모두가 그럴만한 주장이지 않은가. 중반부에 킹과 다이앤의 대화가 다소 관념적이긴 해도 그 열기가 여기까지 느껴지는 걸 보면 대화도 잘 쓰는 작가인 것 같다.

 

 

 

 

  '존 딕슨 카'는 밀실 살인의 대가(말이 이상하네, 밀실 살인 소설의 귀재?)지만 오컬트에 심취한 것으로도 유명한 작가다. 특히 후기작은 오컬트에 탐닉, 완성도 면에서 편차가 있다고 평가받는 편이라는데 『화형법정』은 그 분기점에 위치하는 소설이다.

 

기묘하고 오싹한 분위기와 미스테리한 사건도 그렇지만 관찰과 이성보다는 직관과 감수성에 의거해 문제를 해결해가는 진행을 갖고 있는데 후반부까지는 재밌게 읽었는데. 에필로그인지 뭔지 모를 이야기가 꼭 필요했을까 싶은 아쉬움. 마지막은 오컬트보다는 리얼리즘에 가닿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어두운 거울 속에』또한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색조나 톤을 잘 맞춘 느낌이 제법 흥미롭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비둘기 속의 고양이』생각도 나고. 범인은 예측 가능하지만 확실히 기상천외한 방법이다. 우아하면서도 음산한 정조가 한 몫 한다.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좋아한다. 처음 읽었을 때는 뭐야, 싶었는데 생각할수록 선명해지는 그 모호함이라니. 모든 것을 보여줬지만 아무것도 읽히지 않음이라니. 두 소설 모두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생각해보니 장점은 『나사의 회전』에 있는 것, 단점은 『나사의 회전』에는 있지만 두 권에는 없는 것, 이었네. 이런 소설 또 없나.

 

 

 

 

  라이트 노벨스러운 만듦새가 약간 의아했으나 여러 분들의 호평으로 든 책. 약속 장소에 나가면서 읽었다. 책과 추리와 로맨스의 결합이랄까. 여주인공 설정이 영락없이 라이트노벨, 할리퀸스럽긴 하지만 그것 외엔 그다지 걸리는 부분 없이 흥미롭게 넘어간다.

 

다이스케의 이름은 그리 어렵지 않게 맞힐 수 있고 그 사연 또한 짐작 가능한 범위에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를 읽은 사람이라면. 다자이 오사무와 『만년』을 아는 사람이라면 책의 문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요코미조 세이시를 읽은 사람만이『소년탐정 김전일』을 보며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것처럼. 

 

묘한 향수가 느껴지는 건 아마 책에 대한 갈증, 문학에 대한 풋사랑의 환기 같은 것 때문일까. 아, 이게 바로 책이었지. 이런 게 책에 빠진 기억이었지. 그런 몰입이라는 게 있지, 책에는. 새삼스러운 감명 같은 것. 보석이나 금은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이조차 중하게 여기지만, 책은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가치가 보이는 특수한 보물이므로.

 

덧) 나쓰메 소세키의 책이 첫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것이 무척 반가웠는데, 생각해보니 올 여름은 나쓰메 소세키의 글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책에 계절이 있다고 믿지야 않다만 나쓰메 소세키라면 역시 여름인데. 그를 읽지 않은 것이 마치 여름을 방기한 것처럼 느껴진다. 나를 비난하듯, 여름이 재빨리 사라진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3-09-09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Shining님 서재에서 새로운 책들에 대해 많이 알아갑니다. 에드 맥베인의 책들이 아무래도 땡기는군요. 또 "재밌다, 진짜 재밌다."라고 말씀해주셔서. 저는 요새 어쩌다 집어든 책이 제임스 엘로이의 <내 어둠의 근원>인데, 밤에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밤공기 때문인지, 책 때문인지 등줄기가 서늘해요.

아..저 포스터를 보니 제목이 A late Quartet이었군요. 저는 한국제목이 '마지막 4중주'여서 last인줄 알았습니다. 음..late와 last는 뉘앙스가 좀 다른데..아무튼 여자 한 명과 남자 세 명의 Quartet이군요.

글 서두에 인용하신 루이제 린저의 글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근데 저 말은 아마도 자기 속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드러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겠지요. 저는 아마도..^^

Shining 2013-09-11 01:04   좋아요 0 | URL
써놓고 보니 이거 너무 강추했나 싶은데(소심해서요, 하하) 근데 저는 진짜 재밌게 읽었어요. 클래시컬한 추리소설의 느낌이 강한데도 곳곳이 재밌기도 하고 무엇보다 호오, 오? 아, 아휴, 이러면서 읽었거든요ㅎㅎ 신기하네요, 저도 그 책 이 주 전쯤 잡았다가 잠시 접어뒀거든요. 제임스 엘로이 책은, 음, 음, 그렇죠...

양쪽 모두 영화에 어울리는 것 같아요. 다만 영어는 좀 더 우회적이고 한국어는 함축적인 쪽으로. 얼핏 읽은 바로는 캐서린 키너 외에는 악기를 조금도 다루지 못하는 배우들이라고 하더라구요. 꽤 타이트하게 레슨을 받았는데 그 덕에 네 명 모두 능숙하게 보여요, 여자 한 명과 남자 세 명의 Quartet이 말이죠 :)

저는 저 내용이 제가 조금 더 어렸을 때 했던 착각 혹은 허상이었던 것 같아요. 사강의 소설에도 그런 말이 나오죠,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것은 내가 열 일곱까지 자주 했던 스포츠이다. 저는 지금도 그 스포츠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끔 씁쓸해요.

아마도... 뒷말은 뭔가요? 궁금해요, 맥거핀님+_+

2013-09-10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이닝님이 '재밌다, 진짜 재밌다'고 하면 꼭 읽어야할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저의 지인이 <생의 한가운데> 읽었는데, 진짜 재밌게 읽었다 해서 마음 속에 도드라지게 담아둔 제목인데 여기서 또 만나는군요.(생의 한가운데는 아마 아직 안 읽은 것 같은데, 왜 고등학교 시절 정도에 읽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지?! ㅎㅎ) 진짜 서문 인상적! 마지막 문장이 마음을 때렸어요. 마음에 새겨야 할 말이네요. 나로선.ㅋ

책은 내용으로보다 시간으로 기억된다, 맞는 말씀이에요. 영화도 그렇고, 그러고 보면 모든 경험이 다 그러네요.

Shining 2013-09-11 01:09   좋아요 0 | URL
히히. 저는 소심하니까, 이건 개인적인 의견으로다가... 할래요ㅎㅎ 근데 재밌었어요, 진짜(쿡쿡).

아, 아마 저 발췌 문장이 서문은 아닐거에요. 저도 한 번 밖에 안 읽어서 확실하진 않은데 제 기억으론 슈타인이라는 인물이 쓴 편지 문장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주인공 니나에게 큰 매력을 못 느껴서(그보다는 슈타인에 더 마음이 쓰였었죠)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책은 아닌데(변명하기..ㅋ) 몇몇 문장은 꽤 인상깊게 남아있어요. 사실 제겐 저 책보다 저 책을 읽은 시공간 자체가 더 또렷하네요.

맞아요, 모든 경험이 다 그래요. 그래서 때때론 시간보다 책이, 영화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걸까요?

가연 2013-09-10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의 한가운데, 의 인용하신 문장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하네요, 자신을 동정하지 말라는.. 왜, 그 선배가 와타나베한테 마지막으로 할 말은 이것뿐이다, 라면서 악수하고는 하는 말있잖아요, 풋. 저 루이제 린제의 속편도 보려고 도서관에서 애썼던 기억이 나네요, 하하.

Shining 2013-09-11 01:16   좋아요 0 | URL
나가사와 선배였죠. 덕분에 <위대한 개츠비>책 좀 팔아주신 분이요ㅎㅎ 신사가 되는 것, 이 나름의 모토(원칙? 정확히 어떤 단어였는지는 생각이 안 나네요, 하하)라는. 어떤 면에선 참 아니꼬운 인간인데 이상하게 전 그 선배가 싫진 않았어요. 소시오패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요(웃음). 저는 루이제 린저의 책은, 이 책 밖에는 안 읽었는데. 또 어떤 책이 있었죠, 가연님?

아이리시스 2013-09-11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읽은 책 저거 에드 맥베인이었어요? 저는 첫 시리즈 읽은 것 같은데 어느새 온데간데 기억은 없고. 여기서 고백할 게 있는데 예전에 존 르 카레가 아니라 존 딕슨 카였어요, 제가 좋다고 말하려고 했던 사람은. Shinning(n을 두개 썼어..)님이 기억할지 못할지 모르겠어요. 기억해봐요. 원스 어폰 어 타임에 그랬었어..

책도 드라마랑 똑같은 에피소드라는 거 들었는데 진짜였구나. 저 책이요, 소레까라.. 오늘 너무 더워서 진짜 한숨나와요. 주말에 너무 힘들어서 이틀이나 엎어져 있었는데 오늘은 너무 더워서 여름 다시 온 것 같아요. 근데 어쩌죠. 전 벌써 가을타령 실컷 했는데. 비가 오면 좋겠어요.


Shining 2013-09-11 23:39   좋아요 0 | URL
아뇨, 주말에는 다른 책ㅎㅎ 영화는 한국영화였어요, 오늘 미드 한니발을 모두 다 봤어요. 아후, 매즈 미켈슨 후덜덜해ㅠ_ㅠ 셜록도 한니발도 어떻게 내년까지 기다리냐구요!!(버럭) 전 완전 이기주의 기억력을 가진 사람인데(흑) 얼핏 기억나려구 해요, 음 댓글 쓰고 잘 찾아봐야지. 하긴, 존 딕슨 카를 좋아하는 사람은 몇몇 봤지만 존 르 카레가 좋다는 사람은 아직 못 만나봤어요 저는(웃음). 저를 포함해서, 큭큭.

가을이 오나 싶더니 막바지 기싸움 중인지, 일요일부터 꽤 덥더라구요. 어제는 비가 많이 왔고, 오늘도 덥네요. 하하. 가을은 올꺼에요, 걱정마세요 :) 하지만 겨울도 빨리 온다는거....

Shining 2013-09-12 00:02   좋아요 0 | URL
못 찾겠어요! 생각이 안 나나.....뭐야, 못 찾겠어요-_ㅠ
 

 

 

 

 

  무지는 자각하는 순간 무지가 아닐수도 있고 편견이 편견임을 아는 건 편견과 다른 말일지도 모르겠다, 만. 때때로 편견은 이름도 없이 내려앉는 먼지처럼 여겨진다. 예를 들어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금발 머리라는 인식이 디즈니의 영향이나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고 난 후 모차르트의 죽음과 살리에르의 개입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니체의 사인을 매독으로 기억하는 것. 얼마나 많은 것들을 사후 승인하거나 미화하거나 각색하며 믿었나 곰곰 생각해본다.

 

사례들을 믿기 위해선 또 다시 의심의 의심을 단계를 거쳐야겠지만, 이러한 사례들이 적지 않다는 것, 이만큼이나 수상한데도 용케 책임 소지를 피했구나. 황당한 웃음도 난다. 그나저나, 인간의 몸이란 때론 믿을 수 없게 약한만큼 강하기도 하구나. 수많은 약물, 치료, 고통 속에서도 명을 다한다는 것(약물 중독으로 사망한 유명인들의 일례들은 특히 더 그러하다, 최근에 본 영화 <마스터>에서 와킨 피닉스가 연기한 프레디 퀠도 그랬지). 죽음의 그림자는 고무줄처럼 제멋대로다.

 

 

  

  몇 십 년이 지난 책, 특히 추리소설을 읽는 것은 인내를 제법 필요로 하는 일이다. 현재라면 전화 한 번, 메일 한 통, 구글링, 지도앱으로 금세 가능할 일들이 몇 시간, 때로는 몇날 며칠에 걸쳐 이뤄진다. 전보를 부치고 기차를 타고 현장에 가서 관계자를 만나고 사건 현장을 답사하고, 하는 모든 동작에 -당연히- 페이지를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 조바심이 나기 쉽다.

 

범죄 상식 또한 과거보다 높아져 -루미놀 반응이니 하는 용어나 청산가리 독극물은 아몬드 냄새가 난다는 것 등은 <명탐정 코난>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 많이 수상해 보이는 사람은 범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점까지- 독자가 복선을 짚는 속도나 정확도가 빠르고 정확해졌기에 범인, 동기, 범행 수법을 화자보다 먼저 눈치 챌 가능성도 높다.

 

상황이 이럴지니 아무래도 레이먼드 챈들러, 대실 해밋, 존 딕슨 카, 심지어 제임스 엘로이조차 스티븐 킹, 마이클 코넬리, 리 차일드, 데니스 루헤인, 요 네스뵈 보다는 훨씬 구닥다리로 느껴진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이 '읽히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책 역시. 『푸른 묘점』은 명백한 20세기형 추리소설이다. 기묘한 곳에 위치한 -알리바이 트릭을 깨기엔 난공불락처럼 느껴질- 사건의 장소, 자살로 위장한 타살, 몇 가지 힌트와 인물의 실종, 탐정 역할을 하는 두 사람. 무엇보다 엄청나게 긴 과정과 수사기간, 걷고 뛰고 찾아가는 방식의 연속.

 

바보야, 거기 힌트가 있잖아, 라면서 답답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비췄더니, 역시 마쓰모토 세이초. 내가 인물들에게 귀띔한 힌트는 쓸데없는 것이거나 맥거핀이었다. 오호, 21세기 독자를 속이는 20세기 작가라니. 한 가지의 사건을 가진 뻔한 사건은 갈래로 나뉘고 복선과 맥거핀이 난립하고 추리를 해변의 모래성처럼 쌓고 허물고를 반복한다. 이 모든 과정이 그럴만하고 재미있다. 고자세를 취하듯 부감샷이었던 앵글이 어느새 핸드 헬드가 된 기분.

 

 

 

  아주 어릴 때는 문방구(정답고 촌스러운 단어, 문방구)집 아이가 부럽고 더 크면 슈퍼집 아이가 부럽기 마련이라지만. 다 커서야 새삼 서점 주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하는 일이라 해도 업이 되면 그리 비장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을거라 알게 된 순간부터 서점은 현실이 아닌 이상이 되었다. 거기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이상. 내가 걸어가지도 내게 걸어오지도 않을 이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과 현실을 마치 스콘에 바르는 버터처럼 아주 잘 조합해서 살고 있다면. 어릴 적 무척 동경했던 친구를 어른이 된 후 만났을 때 그 친구가 여전히 멋지다는 걸 알았을 때 느끼는, 그런 류의 패배감과 안도감이 느껴진다.

 

웬디와 잭은 멋진 사람들이고 그들이 하고 있는 일 또한 멋진 일이지만, 그들의 일은 내 일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세상에는, 그런게 있더라. 부럽긴 하지만 될 수 없는 것들. 능력의 한계나 현실과 이상의 부조화 등의 문제가 아니라 기질적이고 구조적인 사항.

 

책, 사람,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삶 모두를 좋아하지만 웬디와 잭처럼 살면 무거울 것 같다. 내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알려질 수 밖에 없는' 것,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들었고 누구 때문에 괜찮은지를 공동체의 구성원 개인개인이 알고 있다는 건. 주관적인 가게에 들어가고 싶은 날도 있지만 객관적인 가게에 앉아야만 참을 수 있는 날이 있다. 개인적인 공간에 들어가 남의 삶을 우연찮게 보게 된 만큼 내 삶도 털어놔야 한다는 사실이 어렵다. 너무 가까운 건, 때론 견딜 수가 없다.

 

웬디와 잭과 마을 사람들, 그들의 친구들, 그들이 만난 사람들은 그야말로 "아직 세상은 아름답구나."를 시전시키지만, 내겐 무겁다. 『프라이탁; 가방을 넘어서』역시 나는 될 수 없겠지만, 나와는 다른 사람이기에 흥미로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 글쓰기는 그 주체를 미화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심지어 자학적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학적 글의 저자는 그 자학으로서 자신을 미화한다. 자기혐오를 제 윤리석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다. 글을 보고 반한 사람은 많지만, 만나본 뒤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거의 예외 없이 실망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이제 고작 서른을 조금 넘겼을 뿐이지만, 사람이라는 종(種)에 대한 신뢰가 점점 옅어진다.

 

  예리하고 때론 자학적이고 현학적인 고종석의 글, 은 좋지만 방법론적인 면에서 이 소설을 지지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몇몇 부분은 굉장히 잘 읽히는데 1장 한민형의 이야기가 그러했다.

 

작가는 작품과 별개로 기억되어야 함이 마땅하고 작가는 작품으로 평가 받아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연기력이 믿을만한 배우가 가십에 휘말리면 배우를 평가하는 건 연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때론 별로라고 생각했던 연예인이 의외의 모습으로 호감을 갖게 하면 커리어와 관계없이 인간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버린다. 작가가 두 번 결혼하든 사실혼 관계에 있든 글이 좋으면 다 이해가 될 것 같지만 좋지 않은 작품을 평가할 때는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의 -알려진- 인간성을 평가하며 절하한다. 음악가의 예술과 정치색은 분명 다른 그릇에 담긴 음식인데. 작품과 인간은 다른 영역이고 작품성과 인간성,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는 분명 다르게 평가받아야 하거늘.

 

반면에 매우 냉정한 면도 있다. 사인회 낭독회 등에 관심이 없다는 것. 어쨌든 작가는 작품에 의해 평가 받아야 한다. 앞에서 연예인 누가 지나가도 오, 잘 생겼군 얼굴이 정말 작아, 할 뿐 지나치는 것. 레드카펫에도 내한에도 오, 누구누구가 왔군, 우주스타 톰은 매너가 참 좋다고 소문났다지, 정도로만 생각하고 마는 것. 그래서 낭독회를 GV를 특정 가수의 콘서트를 불편해하곤 한다. "당신이 좋아요."라는 분위기를 내뿜는 사람들 사이에 우글우글 끼어있는게 쑥스러워서,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라는 걸, 단지 거기 참가했다는 것만으로 증명되기에.

 

그 사람의 피조물이 -혹시라도- 미친듯이 좋다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경계할 것. 그 간명한 사실이 가끔 아슬아슬하다.

 

배우 누구 때문에 영화를 고르지만 그건 -대부분은- 그가 배우로서 갖는 이점 때문인데 반해 작가 누구의 글에 반해 작가의 에세이를 읽게 되는 것. 최근에는 영화감독들의 괴상한 일화들을 모은 책을 발견, 몇 챕터 읽다 조용히 덮었다. 이걸 다 읽다가는 좋아할 수 있는 -이상한 말이다- 감독이 한 명도 안 남을 것 같다(와 함께 역시 예술인들이란, 무심코 생각하는 편견이 무의식이라는 개찰구를 통과한다)며. 그런데도 그 와중에 타란티노의 발 페테시즘은 스탠리 큐브릭의 괴팍함은 각자 영화의 감수성과 조응한다고 느끼는 반면, 잉마르 베리만의 일화는 그의 영화와 간극 때문에 잠시 당황했다. 인간의 이중성은 끝도 없지. 그나저나 『해피 패밀리』이야기는 어디로 갔지. 무의식만큼 의식의 흐름이란 것도 믿을 게 못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hining 2013-08-09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달 서재 배경을 바꾸면서 그리고 얼마 전 몇개의 페이퍼를 삭제하거나 고쳤다. 이번 달 동안 몇몇을 더 삭제하거나 고칠지도 모르겠다, 까지 생각하다가. 댓글을 달아준 분들께 한마디 알림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을 남겨주신 분들은 아마 기억을 못하실 것 같고 기억 한다해도 상관 없다 하실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만 따로 손대는 일은 없지만, 페이퍼의 삭제 과정에서 혹 불쾌하거나 서운해하실지 모르니 지금이라도(생각이 짧아서 이제야;;) 말씀드립니다(꾸벅).

그나저나, 얼마가 됐든 -심지어 한 달 전 일이라 해도- 예전 글을 읽는 건 왜 이렇게 민망할까. 가끔은 감정이, 대부분 감정보단 감정의 발화정도나 표현 방식이.

맥거핀 2013-08-09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이중성 재밌어요. 작가는 작품으로(혹은 배우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고 하지만, 그게 사실 복잡하게 얽혀있죠. 작품이 좋아서 작가가 좋아지는 게 아니라, 그 작가를 (여타 다른 이유로) 좋아하기 때문에 작품을 읽게 되는 경우들이 있지요. 말씀하셨지만, 사생활의 측면에서 결코 찬성할 수 없는 감독들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의 영화를 볼 때에 무의식 중에 안좋은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설국열차> 보러 가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관람을 주저하게 되는 부분이 있어요. 그게 뭔지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게도 너무 인기가 좋은 영화는 관람을 미적거리게 되요. 나름 적극적 영화관람층인데, 돌이켜보면 1000만 관객 영화 중에 극장에서 본게 많지가 않아요. <친구>, <왕의 남자>, <태극기 휘날리며>, 최근 <7번방의 선물> 극장에서 본 게 없네요. 아..심지어는 <괴물>도요.

날씨가 덥네요. 에어컨은 인류 최고의 발명품입니다,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최근에 에어컨에 대해 다룬 책을 조금 봤더니 그런 말을 입에 담는게 뻔뻔스러워 보이는군요.

Shining 2013-08-13 14:37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근데 저는 작가들은 별로 안 그런데(작가 자신이 좋아서, 도 에세이든 인터뷰든 책이든 어떤 말이나 글로 호감을 느끼게 되니까요, 하긴 작가는 사적인 부분을 알기가 힘든 것도 있겠죠?) 배우들에겐 이중적 잣대를 적지않게 들이대곤 해요_- 특정 제스처, 표정, 어투, 말, 이런 것에서 호감을 갖는 배우들이 분명 있거든요(연기력과는 무관하게). 저 책, 보다 학을 뗐어요; 이건 뭐 기행 정도가 아니라 미친 사람들.... 로만 폴란스키, 가 저는 특히 그래요. 워낙 유명한(!) 일들이라 모를수가 없기도 하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에피소드들... 맞아요, 그래서 영화도 덩달아 동의할 수 없게 되는 부분이....

전 영화 취향이 완전 편협해서 십만이든 천만이든 안 볼 영화는 안 볼 영화, 볼 건 볼 영화,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엄청 강해요; 아, 그 영화 의외로 괜찮다던데? 해도 결국 안 보게 되더라는...(네, 퍼시픽 림도 안 봤어요ㅠ 더 테러 라이브도 관심은 있는데 이러다 안 갈 것 같은...) 언어의 정원이 극소수관에서만 개봉해서 엄청 슬퍼요.

하하. 에어컨을 틀어서 밖은 더 덥고 더 더워서 에어컨을 틀게 되는... 악순환의 가장 적절한 예_- 최고의 발명품이자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죠, 큭큭.

아이리시스 2013-08-09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그날 프라이탁 찾아봤었는데 그게 저거였구나, 저는 천만관객은 꼬박꼬박 보러가요. 히히히. 도둑들, 광해, 그리고 맥거핀님이 쓰신 영화 저는 다 극장에서... 그 이중성은 어쩔 수 없는 것도 같아요. Shining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이유로 한효주가 별로인거거든요. 찬란한유산, 동이때까지, 그 이전 초기영화들까진 좋았는데. 너무 주류로 가는 길을 또각또각 걷는 게, 예전에 몸값계약에 아버지가 따라간다는 소식에 실망했던 게, 그런게 오래도록 남아서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듯 해요. 사실은 문채원도 그렇고 박민영도 그래요. 그 또래 배우들이 다 그렇게 보여요.

더워요. 세이초 월드 몇 권 더 읽고싶다.............^^

Shining 2013-08-13 14:43   좋아요 0 | URL
전 라인업 나오면 대충 다음해 볼 영화들이 정해지는 편이에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선 그 외의 영화들을 보지도 않고(그러니까 막 흥행하거나 평이 좋아도) 정한 영화들을 엄청나게 혹평하진 않는한(음, 코스모폴리스가 그랬어요. 크로넨버그여서 궁금했는데 돈 드릴로 원작이라길래 흔들리고 북미평 보니까 맘 접었다는_-) 아이님은 전에 그랬잖아요? 약속 잘 지킨다고. 아마 이래서 그럴거에요(뭐래... 다 알아들었죠?ㅎㅎ) 지금은, 엘리시움을 기다려요+_+ 잡스, 는 평 보고 볼까 싶고(에쉬튼 커쳐를 안 좋아해요) 내 사랑 베니(뭐야ㅋㅋㅋ)가 연기한 줄리언 어산지 보러 가야죠! 이렇게 묻지도 않았는데 9월 볼 영화 말하기..

그렇구나, 근데 실은 전 드라마를 안 봐서 브라운관에서만 활동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은 잘 몰라요(뭐 영화도 다 보는 건 아니지만ㅋㅋ). 20대 여배우 기근이라고 하더니 아이님 말씀하시는 거 보니 그렇지도 않은가봐요(하지만 30대 여배우들이 더 후덜덜 하긴 하죠...쿡쿡).

아이리시스 2013-08-17 15:55   좋아요 0 | URL
응, 오케이, 알아들었음 ㅎㅎ

그..그런데 그때는(20대초중반) 극장에서 살다시피해서 저는 개봉첫주에만 봤는데도 웬만해선 다봐지고, 내가 따라본 게 아니라 천만명이 나를 따라본 건데(응?), 그러고보니 왜 맨날 나를 따라보는지 모르겠어 @.@ (휴...)

음, 그렇구나. 그럼 Shining님은 영화 말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계획적인 편이에요? 아님 영화만? 영화는 극장이 더 가까우면 슬슬 걸어가서 혼자 보면 더 많이 볼 것 같은데 저는. Shining님은 어쩐지 책, 담번에 이거 읽어야지 찍어놓으면 꼭 사거나 빌려오고 그렇게 하는 의지가 있을 것 같아요 ^^

그나저나 저는 극장이 저 세상에--;;
 

 

   

  

 

 

“그런 시로를 앞에 두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게 솔직히 말해 나에게는 꽤 괴로운 일이었어. 옛날에는 거기 있었던 뜨거운 뭔가를,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그 비범한 것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 그것이 더는 내 마음을 떨리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마도 다시는 이 장소에 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 에리를 만날 일도 없을지 모른다. 두 사람은 제각기 정해진 장소에서 각자의 길을 앞으로 걸어 나갈 것이다. 아오가 말했듯이 이제 돌아갈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니 어딘가에서 물처럼 소리도 없이 슬픔이 밀려왔다. 그것은 형태가 없는 투명한 슬픔이었다. 자신의 슬픔이면서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슬픔이었다. 가슴이 헤집은 듯 아프고 숨이 막혔다.

 

 

언제까지고 그 세계에서 살았을 것이다. 찰나와 같은 광기와 백겁의 순수의 세계. 푸른 체온과 다홍빛 목소리의 세계. 완벽이라 부르지 않았지만 만약 완벽이란 말이 허용된다면 감히 이것 외에 무엇을 자명할까. 무엇을 더해야하거나 덜어야 하는지를 몰랐기에, 본질적으로 더하거나 뺀다는 표현 자체를 잃어버렸기에 마치 프렉탈과 같이 완결된 세계. 공기조차 정연하고 사고마저 정밀한 세계.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살며 크고 작은 깊고 얕은 경험과 학습을 했을테지만, 그 세계가 아니었다면 결코 배울 수 없었던 것들이 있겠지. 그 세계가 아니었다면 카오스와 코스모스 따위는 알 수 없었을테지. 그렇게 제 몸짓을 키워가며 엷은 막이 씌워진 채 완결된 세계에서 혼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셰임, 스티브 맥퀸, 2013

 

관계를 품지 않고서야 관계로 다가가는 남자와 관계를 품어야만 관계로 집적되는 여자. 라면 관객은 그들을 연인 관계로 오해할 것이다. 감독은 관객의 오해를 이해시키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실은 남매 지간이다. 마음을 배제하고서야 몸으로 다가가는 오빠와 몸으로 품고난 후에야 마음으로 닿는다고 믿는 동생. 감독인 스티브 맥퀸은 자잘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무심하게 배제하거나 배치시킨다. 짤막한 대화, 현재의 장면. 관객은 유추할 뿐이다. 어떤 유추가 혹은 누구의 유추가 맞은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고로 내 것이 옳다, 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주장은 없다.

 

짐작 가능한 사실 : 브랜든이 열 살 때 남매는 아일랜드에서 이민 왔다. 아마도 부모는 정착을 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아니면 본디 무심한 부모였을지도. 남매는 방치되었을 것이다. 브랜든은 제법 듬직한 오빠였을 것이고 씨씨는 철부지 여동생이였을 것 같다(씨씨가 어지른 거실을 치우는 브랜든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해보인다). 타지에서 이방인이 되어 방임 된 남매는 상처를 받았을 것이고 가족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 불안은 다른 방식으로 각자에게 똬리를 틀었을 것이다.

 

추측 1. 어쩌면 두 사람은 과거 일종의 관계를 가졌을지 모른다. 단 한 번, 단 하나의 몸짓이었다 한들 무엇이 중요한가. 잘못 된 자리에서 상처받은 그들은 '실수'를 했을 것이고 실수는 (브랜든의)혐오와 (씨씨의)경멸을 낳는다. 이 쪽에 무게를 싣는다면 발화점은 씨씨가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고 브랜든은 발화했을 것이다. 이 경우의 예측은 어쩌면 두 사람이 (실은) 사랑하는 사이일 추측을 낳게 한다. 이 경우, 현재의 손은 과거의 수치shame를 질질 끌려다니며 씨씨의 지리멸렬한 말과 전화가 브랜든의 질투와 한계에 복수하게 만든다.

 

추측 2. 벗은 몸에 대한 거리낌이 없는 태도, 아무렇지 않게 등으로 올라타는 몸짓으로 추측컨대 어린 시절 남매는 제법 사이가 좋았을 터였다. 타의든 브랜든은 동생을 돌봐줬을테고 아주 어릴 적엔 함께 목욕을 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최고로 최초로 아껴줘야 하는 가족이자 타자이자 여성이 최초의 욕망으로 최후까지 살아있다는 건 브랜든에겐 참을 수 없는 수치일 것이다. 씨씨에게 브랜든은 유일한 가족이자 동반자, 이해자이며 브랜든에게 씨씨는 유일한 파괴자이자 승리자다. 이 경우의, 과거의 수치shame는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함께한다.

 

추측2를 통한 결정. 영화의 장치나 균열은 추측1을 배제할 수 없게 만들지만 추측2를 택할 것이다. 두 사람이 억압되고 얽힌 마음으로 서로를 저주하며 사랑한다면 그들의 죄는 한 가지다. 승인 될 수 없는 사랑. 그러나 브랜든이 일방적으로 -심적으로 성적으로- 씨씨를 욕망한다면 그의 죄는 몇 배로 늘어난다(물론 죄가 늘어난다고 반드시 죄책감 역시 그에 상응해 지는 것은 아니다). 전자의 수치가 현재의 손에 붙들려 끌려다니는 과거라면, 후자의 수치는 자신의 발로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걸어다니는 떳떳한 얼굴을 가진 과거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라는 사실만큼 강한 파괴력을 본 적이 없다. 온갖 것을 품을 수 있는 전지전능한 마음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허무의 현실의 간극에서만큼 괴로운 인간을 본 적이 없다. 결국 브랜든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일의 수치를 느끼는 후자의 인물이다. 그로 인해 그의 모순은 강해지고 학대 또한 깊어진다.

 

죄의식이란 이상한 것이어서 열 가지 죄가 한 가지 죄보다 더 큰 죄의식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며 중대한 일이 사소한 일보다 더 깊게 느끼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쪽에 의식을 싣느냐, 라는 인간의 무의식이 개입될 뿐이다. 죄의식이란 이상한 것이어서 죄를 짓든 짓지 않든 느끼는 것이다. 죄를 진 후엔 사후승인으로서 착종하고 죄를 짓지 않을 땐 가상의 죄를 떠올리며 몸을 떤다. 실제의 죄와 죄의식 사이에 반드시 인과 관계가 존재하진 않는다. 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죄라고 믿느냐, 죄를 지은 후에야 죄라고 믿느냐, 라는 인간의 의식이 개입할 뿐이다.

 

라는 것이 "만약 내가 감독이라면"의 가정. 내가 스티브 맥퀸이었다면, 두 번째 추측에 힘을 싣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허무, 무엇도 잡을 수 없는 체념, 탐닉하는 죄가 부끄러워 탐닉하는 죄의 반복, 내부의 악마와 외부의 천사의 언쟁. 브랜든을 그 모든 공허와 싸우는 인물로 그려낼 것 같다.

 

 

 

 

 

Andrew Newell Wyeth, Airborne, 1996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그것이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그러나 그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고 잠들었다. 의식의 꼬리에 매달린 빛이 멀어져 가는 마지막 특급 열차처럼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작아지더니 밤 가운데로 빠져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자작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그때 그 일이 아니었다면 너는 세계의 바깥으로 걸어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한 말에 새삼 전율한다. 돌아갈 수 없는 명징함이 주는 지르르한 두려움과 그리움. 할 수만 있다면 지구의 바깥으로 도망쳐버리고 싶은 수치와 절망. 어떤 달변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막막함. 슬픔도 아픔도 그리움도 후회도 그럭저럭 올바른 감정. 그러나 완전하진 않다. 굳이 말하자면. 비감하다. 단어가 입천장에 닿아 까슬까슬하다.

 

 

우주 내 시간이 순응적이고 유연하긴 해도 오직 현재만이 존재함을 우리는 모두 본능적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우리는 미래로 가서 상황을 변화시킬 수도, 과거로 달아가 무언가를 바꿔놓을 수도 없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갇혀 있다. 비록 우리의 기억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현재의 관점에서 볼 떄는 과거 역시 환각일 수 있다. 우린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로 가는 문은 잠긴 채 저 먼 곳에 있다. 인류가 발명한 사진, 영화, 영상 기술은 과거를 좀 더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었지만, 우리가 벽에 걸린 사진이나 책상 위의 기념품 등의 물리적 증거들을 아무리 많이 모은다 해도 과거와 실제로 접할 수는 없다. 이것은 우리의 비극인 동시에 해방이다. 나는 올빼미를 보았던 그 밤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절대로 어린 나를 처음으로 두렵게 떨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을 설레게도 했던 최초의 폭풍우를 다시 겪지 않아도 된다. 실은 1초 전은 100년 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끝없이 재창조되는가! 또한 우리에게 미래는 불투명하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미래를 향해 뒷걸음질하면서 현재를 일종의 주변적 시각으로 보고 있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돌아갈 수 없다는 확신에의 절망과 돌이킬 수 없다는 절망의 확신. 영화도 소설도 시간조차. 무척이나 멀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hining 2013-07-09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Q84』가 목적을 가지고 한 걸음씩 다가가도록 정밀하게 축조된 세계라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문득 목격한, 접어둔 이야기를 내려놓기 위해 써내려간 세계같다. 전자가 감탄이 일 만큼 '잘 쓴' 소설이라는 감상이 든다면 후자는 감정에 탐닉해 적어낸 소설이라는 감상. 『1Q84』가 가장 멀리 넓은 깊은 곳으로 뻗어간 집적된 글의 완성이라면 『색채가 없는』은 여전하다 싶은 글. 여전하다는 건 좋은 뜻으로 한결같다는 것이고 나쁜 뜻이로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며 일반적으로 '이미 완성된 세계'에 사용한다. 소설 자체는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소설을 지나는 바람 같은 통증에는 마음이 동했다.

2013-07-17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9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3-07-17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 좋을 것 같아요, <세상의 혼>. 다른 책, 뭐지, 밤- 그것도 유명해서 기억하고 있는데 두 권 다 장바구니에 확 쓸어담고는 결제의 기약이 없;; 6,7월에 책을 진짜 많이 산 것 같아요. 이제 그 많던 적립금 다 없앴어 ㅠㅠ 알사탕도 다 바꿔썼어요. 으흙흙흙

<셰임>은 언젠가 보도록 할게요 :) 결국은 책도 보고 영화도 보겠다는 소리. (이런 약속은 한 번도 지킨 적이 없어 ㅠㅠ)

Shining 2013-07-19 22:49   좋아요 0 | URL
좋아요 이 책. 좋네요. 아직도 다 안 읽긴 했는데(페이퍼 쓸 때 읽고 있던 책이었거든요. 바로 저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는ㅎㅎ) 좋네요. 밤의로의 여행도 좋던데. 하긴, 밤과 시간. 맙소사 어떻게 안 끌릴수가 있겠어요?(씨익) 저는, 책의 논지도 핵심도 당연히 엄청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서정이 있는 책이 좋아요. 어떤 얘길해도 -심지어- 뇌과학에 대한 책이라해도. 나름의 정서가 담긴 책을 사랑해요(잘 쓴 글, 좋은 책과는 좀 다른 의미로?) 그런면에서 이 책 좋습니다*-_-*
 

 

 

 

-

올 여름 가장 기다리는 영화는 <설국열차>, 호기심이라면 <미스터 고>, 그러나 설렜던 것은 <스타트렉 ; 다크니스> 였다. 트레키는 커녕 J.J 에이브람스의 리메이크 첫 시리즈인 <스타트렉 ; 더 비기닝>만 본 관객으로서 뭔 소리냐 싶겠다만. 실은 베네딕트 컴버배치 때문이었다. 요즘 이 마성의 남자 때문에 베니라는 퐁듀에 빠진 빵조각이 된 심정이다. 누군가를 보면서 꺄아악, 소리나게 좋아한 적 반한 적이 없는데. 아무리 잘 봐줘도 잘생기지 않은 얼굴에 패션 감각이라곤 풉 소리 나올만한 이 분 때문에. 난생 처음 스크린 너머 누군가를 보고 호흡이 빨라지고 침이 고이고 숨을 쉬기 힘들수도 있다는 사실을 입증 중이다(또 한 명은 매즈 미켈슨. 그대가 덴마크에만 머무를 사람이 아닌 줄 내 알았지. 하아, 이런 섹시한 남자).

 

           

 

 

-

그런데 정작 <스타트렉 다크니스>를 못 봤다. 당황스럽고 화도 나는 일. 아이맥스 관이야 전국에 열 몇 관 있으니 가능성이 적을줄이야 알았고 안 되면 3D로 보자, 는 마음. 2주차에 교차상영, 아주 작은 상영관(수용인원 105명)에서만 남아있더라. 그나마도 2,3일 시간을 못 맞추고 겨우 보려고 하니 오전 시간에만 해주는 지경에 이른다. 맙소사. 에이브럼스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국내에 꽤 팬이 있다고 믿은데다 스타트렉이고 헐리웃 블록버스터, 나름 기대작이자 대작이니 2주 차에 가도 중간 이상 사이즈의 관에서 볼 거라고 나름 꼼꼼히 예측했더랬다. 변수는 의외로 골수팬만 있었다는 것과 철가면과 꽃미남 북파 공작원, 드디어 팬티를 벗은 하늘을 나는 외계인의 공세였다.

 

 

-

해묵은 논쟁이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스크린 쿼터제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다. 영화인들은 사수를 부르짖었지만 관객들은 냉담했다. 제 밥 그릇 챙기기라는 비난과 한국영화의 상업성과 위상에 대한 어느 정도의 오만. 21세기를 진입하며 용이해진 접근성과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인식 변화, 영화의 질적 향상, 통신사 할인 등의 다양한 점들이 맞물려 영화라는 괴물이 거의 공룡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공룡의 발톱 정도에는 스크린 쿼터제의 이점으로 이뤄지지 않았나 싶다. 한국영화의 자주성과 독립성, 상업성은 원인보단 결과에 가까웠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아이는 엄마의 양손 덕에 넘어지지 않고 걷는 것이다. 아이가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해서 엄마의 손을 밀어내는 순간 아이는 넘어지고 깨지고 구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아이가 혼자서 걸으려면 엄마는 손을 떼야 하지만 그건 적어도 아이가 혼자 걸음을 옮길 수 있을 때의 일이고, 혼자 일어나기도 힘든 아이에게 엄마가 손을 잡아주는 건 과도한 친절이 아니다. 이것이 당시의 (나의) 생각이었다(그러니 현재의 주장과는 다른 부분도 있다). 하지만 배우들의 고액 개런티와 그에 반해 개선되지 않은 영화 환경이나 복지, 급여 문제가 여전히 문제가 되는 가운데(심지어 지금도, 슬프게도 앞으로도) 그들의 주장은 확실히 제 밥그릇 사수,로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스크린 쿼터제의 논쟁은 영화관과 제작, 배급사 사이의 이윤 문제에서 현재 스크린 독점 상영의 문제까지 넘어왔다. 이상한 점은 쟁점이 바뀌어도 상황은 늘 똑같다는 것이다. 거대 기업의 독점(스크린 쿼터는 외국 특히 헐리웃 영화의 횡포, 멀티플렉스의 이윤 착취, 3대 배급사의 독과점), 영화인들의 비균등한 대우(주,조연과 스태프의 급여 비율은 확실히 과거보다 커졌을 것이다, 따지기가 무서울만큼), 제 밥그릇만 챙기기 급급한 영화인들에 대한 관객들의 비판과 비난.

 

 

-

스크린 독점 상영의 문제가 한국만의 것은 아니고 이제야 불붙은 논쟁도 아니다. <괴물>때도 CJ의 물량공세에 일부감독이 각성의 목소리를 높였고 최근에는 김기덕 감독과 <도둑들>의 이야기도 있었고 민병훈 감독의 <터치>일도 있었다. 사실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로 낙인찍는)를 보려면 개봉 전부터 미리 상영관, 상영 시간표를 살펴보는게 버릇이 되긴 했다. 그나마도 개봉하는게 감사할 때도 있었다. 치사하고 아니꼬워도 아쉬운 건 이쪽이니. 하지만 이 정도였던가. 대부분의 영화는 오전이나 새벽에 편성되고 하나, 두개의 영화가 황금시간대, 좋은 관을 모두 차지한다. 몇 분 차이로 영화를 놓친 '안타까운' 손님을 위해 15분에 한 번 상영을 계속 밀어넣는다. 이래놓고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관객 일 억 명 돌파, 천 이백만이 선택한 영화, 라니. 그때나 지금이나 원인과 결과를 착각하는 것은 여전하다.

 

 

-

그러면 잘 팔릴 영화를 만들던가, 라고 말한다. 맞다, 잘 팔릴 영화 만들면 된다. 그런데 잘 팔릴 영화는 누가 정해주는가. 시나리오가 배우가 배급사가 만든다. 글빨 좋은 시나리오 작가 붙이고 티켓 파워 있는 배우 모셔오고 한달 전부터 무시무시하게 광고 때린다. 아무래도 확률이 높아진다.

 

3가지 다 갖춘 영화 별로 없다, 라고 말한다. 3가지 다 있어도 반드시 흥행하진 않는다. 맞다, 3가지는 커녕 그 중 한 가지도 없어도 흥행하는 영화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대개 개봉한 주 주말을 지나면 -특별한 슬리퍼 무비가 아닌 한- 최종 스코어가 대충 그려지니 첫 주에 살아남아야 하는데 홍보 없이는 첫 주는 커녕 개봉에서도 생존하기 어렵다. 좋은 영화를 많이 보는게 아니라 많이 본 영화를 많이 본다. 잘 팔리는 영화가 잘 팔린다. 많이 본 영화이기 때문에 다시 많이 보고, 일단 많이 보게 되면 다른 홍보나 평가는 중요치 않다. CJ, 롯데, 쇼박스의 흥행 영화가 많은건 그들이 심미안이 좋은 회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돈이 많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회사가 돈을 많이 벌고 또 그 돈으로 돈을 버는 건(비단 영화계 뿐 아니라)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

 

<똥파리>, <파수꾼>, <워낭소리>처럼 독립영화도 흥행할 수 있다, 라고 말한다. 있다, 그런 경우. 당신이 왜 이 영화들의 이름을 경우를 알고 있는지 아는가. 그런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된 영화들이 대서특필된다. 그러면 당신은 착각한다. 봐라, 독립영화도 클 수 있다, 라고. 잡초 속에서 꽃이 한 송이 폈다고 여기가 꽃밭이라고 감탄하면 안 된다.

 

아, 결국 관객이 판단하는 것이다, 라는 말도 있다. 잘 팔리니까 그 결과가 반영되어 상영관 늘리는게 무슨 잘못이냐고. 잘못 아니다. 다만 싸움이라면 같은 시작에서 하는 게 맞다. 거리의 파이터도 과학으로 만들어낸 근육질을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같은 링에 올라가서 싸우게는 해야하지 않을까. 링 위에서 지는 것까지 통제할 수는 없지만 첫 라운드 정도는 공평하게 싸우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착각하고 만다.

 

 

-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표지에 홀려 지하철에서 덩실덩실 춤을 춘 씨네21. 김혜리 씨의 글을 읽는데 그래 내가 말하려는게 이건데, 싶어서 발췌. 김혜리 씨는 언제 읽어도 참 글을 잘 쓰는 사람 중 하나다.

 

버즈 루어만이 스콧 피츠제럴드의 원작 소설을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 <위대한 개츠비>는 여러 장면과 대사를 고스란히 시나리오로 옮겨왔다. 보태면 모를까 줄이는 데에는 매우 조심스럽다. 그런데 얄궃게도, 몇 안되는 생략과 "이쯤이야" 싶은 가필이 거슬리는 결과를 낳는다. 예컨대 개츠비와 보낸 시간이 닉을 폐인으로 만들만큼 큰 충격을 남겼다는 추가 설정은 위대한 개츠비 전체의 이야기를 아주 예외적인 기담으로 보이게 한다. 진귀한 구경거리일 뿐 보편적인 삶과 연관지을 고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데이지의 남편이 개츠비를 죽은 여자의 불륜 상대였다고 모함하는, 원작에 없던 추가 누명도 개츠비라는 남자의 별나게 기구한 팔자를 강조한다. 이와 같은 각색은 위대한 개츠비라는 스토리의 핵심이 기념비적으로 위대한 사랑에 있다고 보는 관점의 산물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핵심이 기념비적 사랑이 아니라 범용한 사랑을 하면서도 그 범용함을 필사적으로 부인했던 남자의 실패에 있다고 보는 독자라면 이 각색은 사소한 변화가 아니다. 닉 캐러웨이 캐릭터의 쓰임도 마찬가지다. 액자 구조로 인해 닉의 러닝타임 비중은 커져쓰나 조던 베이커와 닉의 관계가 삭제됨으로써 닉의 역할은 철저히 목격자로 한정된다. 개츠비의 이야기는 닉을 포함한 '우리'의 세계 바깥에 머문다.

 

 

-

<위대한 개츠비> 이야기를 하니 -뻔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떠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을 읽는데 문득, 그가 왜 피츠제럴드를 좋아하는지 아는 척 하고 싶어졌다. (한 마디로 뭉퉁그려) 닮았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이목구비는 다른데 어쩐지 닮았다고 느껴지는 두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기분.

 

그들에게는 2,30대 언저리에 느껴지는 독특한 절망과 회한, 열망 같은 것들이 유사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그들의 화자는 언제나 젊고 매력적이다. 다른 점은 피츠제럴드는 여전히 젊다는 것이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꾸준히 나이를 먹고 있다는 점. 피츠제럴드가 빨리 나이든걸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여전히 젊은걸까.

 

 

-

날씨에 대해 집중하는 작가가 있고 감정의 밑바닥까지 긁어모으는 작가도 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생활 면을 무심하면서도 친절하게 묘사하는 작가는 드물다.  

 

다자키 쓰쿠루는 여전히 여기저기 역을 돌아다니며 구내를 스케이하고 대학 강의를 빠지지 않고 들었다. 아침에는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식사 후에는 반드시 이를 닦았다. 매일 아침 침대를 정돈하고 직접 셔츠를 다렸다. 가능한 한 남는 시간이 생기지 않게 애썼다. 밤에는 두 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대부분 역사서 아니면 전기였다. 그런 습관은 옛날과 변함이 없었다. 습관이 그의 생활을 앞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묘사들. 주인공이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순서로 다림질을 하고 어떤 음식을 요리하는지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낸다. 파스텔톤을 좋아하는 사람과 비비드 컬러를 좋아하는 사람, 쓰리피스 수트를 입는 사람과 체크무늬 린넨셔츠를 입는 사람이 같은 사람일리는 없다. 소나기 예보가 있는 날 접이우산을 들고 나가는 사람과 장우산을 쓰는 사람은 단연 다르다(우산이 하나밖에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전자는 즉홍적이나 실용적인 성격, 후자는 꼼꼼하게 옷을 소중히 여기는 성격, 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전자는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사람, 후자는 운전을 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당신이 입은 옷은 당신의 집은 당신이 먹은 요리를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다, 라는 건 현실에서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파스타를 만들 땐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이 떠오르고(아마도「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이었을 것이다. 스파게티 면을 삶다 전화를 받는 남자의 이야기가) 어느 모델 하우스의 주방을 보고 '이건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의 집이군' 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 때마다 그들은 인위적인 픽션의 영역이 아닌 현실의 세계에서 붕 솟아오른다. 단순히 작가의 성격일수도 있지만, 작가로선 평범하게 좋은 자질이란 생각이 든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hining 2013-07-08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독점 현상은 그리 새로울 것도 없던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을 샀다. 신드롬, 선인세, 에 대해선 이렇다할 주장이 없고 다만 읽고 싶어서 샀다. 신작이 나오면 무조건 읽고 싶은 작가가 있다는 건 독자로선 행복함 가까운 설렘을 준다. 그게 일본작가라고 스타작가라고 선인세 문제로 평가할 문제는 아니다 싶다. 그냥, 내가 읽고 싶어서 산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려는게 아니라. 사인본이나 사은품에 무감한 편이고 작가를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아 사인회나 낭독회도 무감하다(수도권 외 살기도 하고). 암튼 무슨 티켓 같은 걸 함께 받았는데 서점을 순례하라는데 (어쩌면 당연하지만) 모두 수도권이다. 순례 할 생각도 없지만 하려면 돈이 더 들겠수. 독자의 제안이 있으면 지방에 각 지점에서도 도장을 찍어주겠다는데. 거참 뭔가 기분이 좋진 않다. 차별당한 기분도, 그게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생각도. 좋은 책 잘 만들어서 차라리 무라카미 하루키 인터뷰 소책자 같은 걸 싣어줬음 더 좋았을텐데. 그건 사은품에 무감한 나같은 사람의 생각인가.

2013-07-08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9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9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2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3-07-10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에는 하도 이상한 말들이 많아서 왠만하면 그러려니 하지만, 아직도 화나는 말이 있어요. '이래서' 독립영화 안본다, 혹은 안된다,라고 말하는 그 '이래서'에 담겨진 수많은 것들. 아..뭐 암튼 영화계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면, 정부라도 나서야죠. 저는 기본적인 법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봐요. 그게 물론 여러 파생적인 문제를 낳기도 하겠지만요, 자본이 스스로 정화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을 찾아야죠.

참 이상하지요. 예를 들어 서점에 한 책만 80% 넘게 깔려있으면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잖아요. 근데 영화관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태반이죠. 아니..어쩌면 서점에서도 곧 그런 시대가 오려나요...

Shining 2013-07-12 11:5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전 아직 젊은지(?) 아직도 화나는 말이 많은데ㅎㅎ 영화 잘 안보고 불법다운로드 하는 사람들이 한국 영화는.. 으로 시작해서 비아냥대는 거 정말 짜증나요(웃음). 그러게요, 자의로 해주면 좋겠지만 그럴 의도가 전혀 없어보이니 이젠 나서줘야하죠. 진짜 요즘은 정말 도가 지나쳐요.

그렇네요.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책으로 비유하니 정말 이상하네요-_- 하루키 열풍을 보면 비슷한 광풍이 있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요. 퍼시픽 림을 별로 주목하지 않았는데 평이 좋아서 궁금해요. 영화 좀 본다 하는(?) 사람들이 가장 주목할 영화로 꼽는다는 것과 길예르모 델 토로라는 것도 약간.